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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인 음악표현의 개화기
낭만주의 음악의 꽃은 사실상 후기낭만주의 음악시대에 이르러서야 활짝 피게 된다. 그것은 낭만주의 음악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기악분야가 새 악기의 개발 등으로 유연성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고전파의 거장 베토벤은 음악을 정신력으로 이용하려고 한 점에서 볼 때에는 그는 틀림없는 낭만주의적인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교향곡 제6번 "전원">이 말해 주듯 자신이 자주 찾았던 빈 교외 하일리겐슈타트의 전원풍경을 이 곡 하나만으로도 생생하게 볼 수 있도록 표현해놓 고 있다. 낭만주의시대 특히, 후기의 교향곡이나 소나타에는 표제가 붙어 있는 것이 많다. 이는 감정과의 융합을 강조하거나 또는 그 주제 자체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 또, 음악은 기호나 음부 이외의 것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는 "감춰진 의미"를 지녀야 한 다는 이 시대에 살았던 작곡가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특히, 이와 같은 경향은 로베르트 슈만의 작품에서 강렬하게 나타난다. 슈만은 "음악은 형태나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작곡가가 시인이냐, 아니냐에 대한 문제"라고 역설했다. 또, 프란츠 리스트는 음악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최초로 연극적인 소재를 융합 시킨 형식의 곡을 쓴 작곡가다. 그는 이와 같은 그의 혁신적인 음악 형식을 <교향시>라고 이름하였다.
[후기 낭만파의 거장들]
기악분야로는 슈만 Robert Schumann 1810∼1856, 쇼팽 Frederic Francois Chopin 1810∼1849, 리스트 Franz Liszt 1811∼1886, 요한 슈트라우스 2세 Johann Strauss(2) 1825∼1899, 브람스 Johannes Brahms 1833∼1897, 라흐마니노프 Sergey Vassilievich Rakhmaninov 1873∼1943, 그리고 오페라분야에서는 바그너 Rihard Wagner 1813∼1883 가 후기 낭만파를 대표하는 음악가이고, 이들이 이 시기에 만든 음악을 음악 사는 "후기 낭만파 음악"으로 정의하고 있다. 또, 이 무렵 프랑스에서는 후기 낭만주의 음악과 맥을 같이하는 드뷔시 Claude Debussy 1862∼1918 와 포레 Gabriel Faure 1845∼1924 가 인상주의 음악을 제창하고 나섰다.
이들은 자연과 정서, 인간성에 바탕을 둔 초기 낭만파 작곡가들과는 달리 현실에서 본 인상과 작곡가의 사상의 융합된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라벨 Maurice Ravel 1875∼1937, 스페인의 파야 Manuel de Falla 1876∼1946, 러시아의 스크랴빈 Aleksandr Nicolaievich Skriabin 1872∼1915, 이탈리아의 레스피기 Ottorino
Respighi 1879∼1936 등이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음악가다.
[자기표현의 음악으로]
프랑스혁명은 유럽사회에 커다란 새 물결을 흘려 보냈다. 혁명과 함께 파생한 낙천주의경향은 얼마 안 가서 환멸에 떨어지게 되고, 이어 혁명세력에 의한 공포정치의 시대가 다가온다. 그러나 공포정치 때문에 유럽사회가 잃어버린 것은 비단 대 학살에 의한 인명손실 뿐만은 아니었다. 공포정치는 인간의 이상을 짓밟았으며, 무르익는 낭만주의 사상의 이삭을 자르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당시 낭만주의 음악이 추구한 "이상"이란 인간의 오염된 손이 닿지 않은 야성 그대로의 자연과 그런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 본성에 기여하는 일이었다.
이 시기에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실제 호수나 숲 같은 자연이 좋아 그 속에서 살면서도 그 고마움을 모르고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는 인간들을 비판했다. 예술가들은 또, 자연을 기하학의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자연 그 자체가 지닌 낭만성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음악에서도 작곡가 자신의 개성과 이성으로 자기표현을 해야 한다는 풍조가 일기 시작했다. 후기 낭만파 음악가들은 이와 같은 이상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선 악기가 변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주장은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관철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후반에는 이른바 악기의 황금시대가 열려 새로운 금관악기, 목관악기, 현악기, 타악기 등 이 속속 개발되었다. 새로운 악기의 등장은 유연하고 참신한 관현악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관현악은 시민 대중의 마음 속을 파고들어 서양음악사상 로맨티즘의 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후기 낭만주의 음악은 거장 리하르트 바그너에 이르러 마침내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전, 후기 낭만파 음악가들이 교향곡과 소나타, 실내악 등을 통해 낭만주의를 마음껏 토로한 대신에 바그너는 음악을 연극(오페라)으로 보여줌으로써 인간사회가 지닌 원초적인 낭만성을 유감 없이 끌어냈다. 그러나, 정점을 치닫던 낭만주의 음악은 바그너를 정점으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전통주의, 민족주의, 지역주의의 편력으로 작곡가들은 예술이 국민들에게서 애국심을 발로시키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시각을 갖게된다. 이것이 국민주의 음악의 태동이다.
후기 낭만주의시대의 서양문화사 메모
*런던 세계박람회(1853) ..................................*브람스 유럽 연주여행(1853)
*크리미아 전쟁(1853∼56) ...............................*슈만 사거(1856)
*말러 출생(1860) ...........................................*드뷔시 출생(1862)
*<모차르트 전 작품목록>(1862) .......................*슈베르트<미완성>초연(1865)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1865) .................*베를리오즈 사거(1869)
*파리<제1회 인상주의전람회>(1874) ............... *파리 오페라극장 완성(1875)
*바이로이드 음악제 창설(1876) ....................... *피카소 출생(1881)
*베를린 필하모니 창설(1882) .......................... *스트라빈스키 출생(1882)
*차이코프스키 사거(1893) ...............................*브람스 사거(1897
글쓴이: 베토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