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요트
FaM CaFe. 에고이스트
연자루
蓮慈鏤
作. 담희
12
도은궁이 소란스러웠다. 아니, 그만큼 고요했다. 고요하기 그지 없는 도은궁 내부와 달리 궐내부는 소란스러웠고, 소문의 주인공은 말이없었지만 그 주위의 이들은 시끄러웠다.
"도은궁 마마, 폐하의 전갈이옵니다."
"…지금 가마"
따로 칭호도 내려지지 않은 첩이라 예영은 웃었다. 보스스, 예루를 닮은 웃음으로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이제는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아버지의 욕심을 위해 살아왔던 제 삶이 너무 보잘것 없어 보였다.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았던 걸까. 제 아비의 부를 위해서 였다고 하기에는 예영은 그 동안 너무 많이 제 것을 포기했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그대를 부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대의 정인을,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보라는 뜻.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휘의 부름에 궁으로 향한 예영이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조아리고 왕의 앞에 예를 표했다. 그리고 휘는 그런 예영을 보고는 그리 일렀다. 네 정인이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비추라고. 그리고, 그제서야 예영의 눈이 흔들렸다. 사내가 예루를 시해하려 했다고 했을 때에도 흔들림이 없던 눈이라 휘는 입안이 썼다.
조용히 안쪽 문으로 향한 왕은 직접 문을 열어 예루를 이끌었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예루의 발이 천천히 조금씩 움직였다.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완전히 안쪽 방으로 들어간 후에야 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혹시나 모를 소리에 휘는 밖으로 나왔다.
"…연자루에나 가야겠다. 오랜만에 아버님이 그리워."
"예, 폐하."
제 사람을 놓치는 일 따위는 죽어도 있을 수 없었다. 예루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어쩌면 제 탓일지도 몰랐지만 두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내와 예영처럼 은애하는 마음을 숨길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생각하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사랑하는 이들의 근처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 주지 못할 바에야 그저 자리를 피해주는 것도 그들을 위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아가씨"
강의 부름에도 예영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피투성이는 아니었지만 강의 몸은 충분히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한 것인지 뼈 마디가 고스란히 보일 정도였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눈물에 예영이 바닥에 주저 앉아 버렸다.
"멀리 도망가라 하지 않았니, 왜… 왜 다시 돌아온게야. 멀리, 도망가라 했지 않았어."
"…마음에 은애하는 이를 품고 멀리 돌아간다 한들 이 곳이었습니다."
"아버님이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게야. 도망가라. 제국을 떠나 멀리 가버려. 그리해. 그리하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예영은 강에게로 향했다. 성큼 성큼 향하지 않고 천천히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강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야위었다. 어린 시절의 너는 그리 잘난 사내였는데. 지금은 보잘것 없이 말라 있어. 누가 너를 서 강으로 알겠느냐.
"… 홀로 사는 목숨이 무에 중요하다 그러하십니까. 아가씨 없이는 고작 걸어봐야 도성입니다."
"나와 같이 가자, 폐하께 말씀드려 나를 폐해달라 청할게. 제국을 벗어나 살자, 강아"
"…아십니까, 대위는 이미 제나라 까지 손을 뻗히고 있습니다."
인생을 다 산듯, 희미하게 웃고 있는 강을 보며 예영은 조바심이 날 것만 같았다. 이리 강이 예루를 시해하려 했던 것도 제 탓일 터였다.
강과 예루는 어린 시절 부터 함께한 동무라. 대위의 딸이었던 예영은 그저 그들을 부러워 쳐다볼 뿐이었다. 대위의 여식은 아랫것들과 놀아서는 안되. 제 어머니의 목소리에 목을 움츠리고 힐끔힐끔 그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유일하게 저와 말을 섞어 주는 이는 강이 뿐이었다. 어린 마음에 욕심이 났다 제 사람을 예루에게 빼앗기는 것 같아. 그리고 머리가 커진 후에야 알았다. 제 어머니가 예루의 어미를 죽였다는 것을 그리고 예루의 어미가 어떤 사람인지도. 고운 사람이었다. 제 어미에게 이유도 없이 살해당할 만큼 그리 모진 사람이 못되었다. 순하고 순한 사람. 지금의 예루를 꼭 닮은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님 모르게 도망가 살자. 단 한번도 나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으신 분이니 일말의 죄책감은 가지고 있을 테야."
"…"
억지로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꾹 깨문 예영을 보고 강이 손을 뻗어 예영의 얼굴에 가져다 대고 제 품으로 끌어 당겼다. 그제서야 눈물을 뚝뚝 흘리는 예영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소리내어 울줄 모르는 사람. 대위의 여식이라는 이유로 작은 어깨위에 커다란 짐을 올려놓았어야 했을 사람.
"오셨습니까. 폐하."
"참으로 불쌍한 이들이다."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보지 못했을 비장한 표정으로 예루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휘가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고 나서야 연자정으로 향해 앉은 예루는 상궁에게 차를 내오라고 하고는 살포시 웃어 보였다. 꺼질듯 희미한 웃음이라 휘는 괜시리 불안해져 오는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저를 향해 웃어 보이는게 어찌 이리 고와보이는 것인지. 휘도 따라 보스스 웃어 보였다.
상궁이 차를 내오고 나서, 휘는 그들을 멀리 물렸다. 원래가 연자루에 상궁들의 출입이 거의 불가능 하지만 모습을 아에 감추라는 말에 허리를 숙이고 뒷걸음질 쳐 상궁들과 병사들은 아까보다 다섯 보 멀어졌다.
"…제가 연자루에 들어왔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래, 이곳에 너는 앉아 있었지…."
"예영이를 위해서 저는 연자루에 들어 왔습니다. 예영이는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 와 그 심술을 고스란히 저에게 내비쳤을 뿐 심성은 고운 아이입니다. 그런 아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내입니다. 강이는. 제 아버지 눈을 피한다고 해 봤자 대위의 손바닥 안이었지만… 그래도 예영이는 강이와 몰래 도망칠 생각 까지 했던 모양입니다."
예루가 무슨 말을 시작할지는 어림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예영을 감싸려는 의도라는 사실에 휘는 새삼 놀래 버렸다. 제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그제야 또 다시 알고서 예루 모르게 살며시 웃어 보였다.
"그걸 알고서 강이는 몰매를 맞았습니다. 그것도 예영이의 눈 앞에서. 예영이는 그때 부터 쥐죽은 듯이 살았습니다. 강이를 보지도 않고 방에서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서녀이기는 하지만 제가 폐하의 연이 된다면 대위도 포기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대위는 포기 하지 않았지."
"부탁드립니다. 예영이… 강이와 함께 행복할수 있게 폐하가 도와 주십시오. 제 청이옵니다."
소박한 이라 그 동안 뭘해줘도 웃기만 하던 이가 진심을 담아 청했다. 세상에 어느 지아비자 자신이 은애하는 이의 마음을 모르리라. 그리고, 그런 이의 진심을 어찌 모른척 할까. 휘는 가만히 예루의 머리를 쓰다듬고 제 품으로 끌어 안았다. 이리 마음이 고운 이가 바로 제 사람이라.
"예루야, 하루가 짧아. 하루가 지날 수록 너를 깊이 은애하는 것 같구나."
"…폐하."
차마 은애한다 말은 하지 못하고 예루는 붉어진 제 얼굴을 휘의 어깨에 묻어 버렸다. 분명 예영을 위해서, 대위에게 복수 아닌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불순한 마음으로 연자루에서 왕을 만났던 터였지만 왕은 너그러이 그런 저를 이해해 주고 보듬어 주었다. 그저 감읍해 예루는 손을 뻗어 휘를 마주 끌어 안았다.
연자루에서 만은 제국의 왕과 그의 애첩이 아닌 한 사내와 한 여인으로서, 서로를 사랑하는 정인으로서 남고 싶었다.
*
안녕하세요. 어제 하루 못올린거 같은데 정말 오랜만입니다!
항상 감기조심하시고, 오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