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명의 팬이 희망과 헌신으로 가득 찬 채 파리를 향했다. 그러나 낭만적인 기대는 단 18분 만에 산산이 부서졌다. 2006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레만이 바르셀로나전에서 퇴장당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아스날 팬들은 다시 한번 기대를 품고 이번에는 부다페스트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아스날 팬들의 마음은 그날 이후 줄곧 상처 입은 채였다고도 볼 수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2006년 5월 당시 상황은 매우 희망적이었다. 불과 2년 전, 비에이라, 앙리, 베르캄프, 피레스가 이끌던 ‘인빈서블’은 잉글랜드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웠다.
여기에 애슐리 콜과 파브레가스가 성장하고 있었고, 벵거 특유의 ‘숨은 보석 발굴’ 능력은 콜로 투레, 반 페르시, 클리시와 같은 선수들로 이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8월, 아스날은 하이버리를 떠나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으로 이전할 예정이었다. 이는 거대한 변화였지만, 이론적으로는 향후 20년 동안 맨유와 경쟁할 기반을 마련하는 결정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통해 세계적인 명문 클럽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를 기억하는 구단 관계자들에게 그날의 기억은 ‘깊은 좌절감’으로 남아 있다. 당시 전무였던 키스 에델만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도둑맞았다. 심판은 퇴장을 꺼내서는 안 됐다.”
주심이었던 하우게는 이후 아스날 측에 사과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상황에서 레만과 에투의 충돌 이후 흐른 공을 지울리가 마무리한 상황이라 어드밴티지를 적용할 수도 있다. 그랬다면 아스날은 0대1로 뒤지더라도 11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스날은 이후 놀라운 저력을 보였다. 캠벨의 골로 앞서 나갔고, 76분까지 리드를 지켰다. 그러나 결국 에투에게 동점골을 허용했고, 4분 뒤 벨레티에게 결승골을 내주며 무너졌다.
당시를 돌아보면, 일부 팬들은 이미 불길한 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벵거 시대가 정점을 찍고 하락세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비에이라는 이미 1년 전 유벤투스로 떠나며 큰 공백을 남겼고, 피레스는 그날이 마지막 경기였다. 그는 레만 퇴장 이후 알무니아 투입을 위해 교체되는 ‘희생양’이 되며 씁쓸한 작별을 맞았다.
베르캄프 역시 벤치에 앉아 마지막 경기를 지켜봤고, 앙리는 1년 뒤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부회장이었던 데이비드 데인의 말은 이후 10년을 예견하는 듯했다.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우리 경기장에 탱크를 세워놓고 50파운드 지폐를 쏘아대고 있다.”
실제로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2003년 첼시, 그리고 만수르가 2008년 맨시티에 투자하면서 축구계의 자금 규모는 급격히 팽창했다.
새로운 경기장은 미래를 위한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점은 자본 경쟁이 극단적으로 치열해지던 시기와 맞물렸다.
2006년 채권 발행으로 이자 부담을 줄였지만,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건설은 초기에는 오히려 아스날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아스날의 한 임원은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에겐 자금 지원이라는 사치가 없었다. 간신히 버티기 위해 빌리고 또 빌려야 했다.”
“우리는 400m 파운드의 부채라는 ‘스타디움의 족쇄’를 목에 걸고 있었다. 현금이 부족했고, 선수를 사기 위해서는 먼저 팔아야 했다. 게다가 ‘인빈서블’ 세대가 해체되는 과도기까지 겪고 있었다.”
2000년에 구단에 합류한 전 경영진 키스 에델만 역시 비슷한 상황을 설명한다. “제가 왔을 때 이사회는 경기장을 짓고 싶어 했다. 그래서 ‘얼마를 투자할 건가?’라고 물었더니, 모두가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초기 자금은 결국 당시 미디어 기업이던 그라나다와 계약을 통해 마련됐다. 47m 파운드를 투자받는 대신 구단 지분 10%와 ‘인터넷 권리’의 50%를 넘기는 조건이었다. 이는 닷컴 버블 전성기의 전형적인 거래였다. 결과적으로 그라나다는 ‘실체 없는 것의 절반’을 산 셈이었다.
에델만은 이를 두고 “놀라운 거래였다”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재정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당시 은행들은 축구 구단에 대출해 주는 것을 꺼렸다. “10개 은행과 협상했지만, 모든 신용위원회가 ‘거절’했다. 그건 충격적인 순간이었다. 우리는 경기장을 지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구단은 나이키와 10년 140m 파운드의 유니폼 계약을 체결하고, 에미레이트 항공과 10년 100m 파운드 규모의 경기장 명명권 및 스폰서 계약을 맺으며 돌파구를 찾았다. 또한 바클레이스로부터 120m 파운드를 대출받았다.
그러나 이는 미래 수익을 담보로 현재를 버티는 구조였다. 에델만은 이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위태로운 여정”이라고 표현했다.
결국, 아스날은 경쟁에서 뒤처지기 시작했다. 구단이 주급 5,000파운드 차이를 두고 재계약 협상에 난항을 겪는 사이, 애슐리 콜은 그해 여름 첼시로 떠났다. 이후 맨시티는 콜로 투레, 클리시를 데려갔고, 나중에는 나스리, 아데바요르까지 영입했다.
출혈을 막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벵거는 2005년부터 2014년까지 단 한 번도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했고, 결국 반 페르시를 맨유에, 파브레가스를 바르셀로나에 내줘야 했다. 특히 바르셀로나는 시대를 지배한 팀이었고, 아스날은 점점 격차를 따라잡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됐다.
바르셀로나의 부활 조짐은 이미 파리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당시 벤치에는 훗날 전설이 되는 챠비와 이니에스타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18세 소년은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축하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리오넬 메시였다. 당시만 해도 “어린 선수는 도대체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걸까?”라는 시선이 따랐다.
한편, 축구는 점점 더 스포팅 디렉터와 데이터 분석 중심의 시대로 이동하고 있었다. 에델만은 “아르센은 데이비드 없이 혼자서 모든 이적을 처리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에델만은 당시 데이비드 데인과 자주 대립하는 인물로 여겨졌지만, 2007년 데인의 불화로 인한 사임이 아스날의 침체기를 초래했다고 밝혔다.
물론 에델만은 2008년에 구단을 떠났지만, 아브라모비치 시대의 충격 이후 아스날이 더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고 믿고 있었고, 파리 결승 이후 또다시 7년 동안 무관이 이어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스타디움 문제는 이미 가장 힘든 고비를 넘긴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사회 내부의 극심한 갈등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첼시와 맨시티가 만든 자금 격차를 따라잡으려는 절박함은 결국 아스날 이사회의 분열로 이어졌다. 흥미롭게도 많은 이들이 잊고 있는 사실은 데인이 바로 미국 자본, 즉 스탠 크랑키의 투자를 유치하려 했다는 이유로 해임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데인이 떠난 이후, 이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데인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닫게 되었고, 오늘날 아스날의 구조는 스탠 크랑키와 그의 아들 조쉬 크랑키가 이끄는 체제로 이어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정상으로 돌아가는 길은 길고 험난했다. 아르테타는 2014년 주장으로서 FA컵 우승을 차지하며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하지만 2006년의 상처와 이후 이어진 추락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생생하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아르테타가 파리에서 시작된 상처를 치유할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