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에서 욥이 하나님과 논쟁이나 재판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탄식했다면, 이제는 자신의 사는 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탄식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더라도 불평을 호소합니다. 욥은 이제 하나님께 이렇게 희망도 없고 보잘 것 없는 자신의 마지막 삶은 좀 평안히 놓아 두시라고 호소합니다. 욥의 내면은 매우 복잡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괴롭게 하시고, 또 자신의 소리를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은 느낌에도 계속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호소하고 있습니다(1). 그리고 왜 이렇게 자신을 괴롭게 하시는 지 알려 달라고 합니다(2). 분명히 자신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인데 이렇게 고난을 주셔서 힘들게 하시는 것은 곧 악인을 선호하는 것과 같다고 불평합니다(3). 이것은 마치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그럴 수 없고 호소합니다(4).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시고 입히시고 돌보셔서 생명과 은혜를 주셨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하나님의 과녁으로 여기고 끝을 알 수 없는 고난을 주시는 지 불평하고 있습니다(5-13). 욥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벌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의로운데도 이렇게 하시는 것을 보고 절망과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하나님께 호소하려고 머리를 들면 하나님은 가차 없이 자신을 꺾으십니다(14-16).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들을 바꾼다는 것은 매일 매일 새로운 아픔과 고통이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17). 그러니 차라리 자신을 태어나지 않게 하시고, 죽게 버려두시면 좋을 것이라고 하나님께 탄식합니다.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고도 이 알 수 없는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평입니다. 욥이 느끼기에 이제 자신의 삶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은 날 동안이라도 평안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18-22).
오늘 말씀에서 욥의 절망은 무한한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의 대조에서 출발합니다. 유한한 인간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왜 악인과 의인을 같이 취급하시는 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의로운 자기에게 이렇게 고난을 내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호소하는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욥이 죽기 직전에 잠시라고 평안히 죽을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속에서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작은 은혜라도 베풀어 달라는 간구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인과응보의 원리를 뛰어 넘으시는 분이십니다. 욥은 그것을 인정하고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고난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욥은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하나님이 버린 것 같이 느끼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욥에게는 감추어져 있지만 우리는 압니다.
우리도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절망과 어려움에 대한 답을 쉽게 찾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답이 없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버린 것 같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실제로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때는 하나님께 우리가 가진 감정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털어놓고 따지고 호소하되 동시에 하나님의 일을 기대해야 할 때입니다. 다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을 붙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아멘...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