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에도 세상에 똑같은 것은 없으며 세계는 항상 변화하면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노년에 고빈다를 만난 싯달타는 세계가 매순간 완전함을 유지한다고 말한다.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외양과 달리 모든 사물은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세상에 알린다. 물론 그가 양자물리학을 알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돌 하나, 나뭇가지 하나에도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은 삼라만상이 각자가 지닌 고유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며 그 목표는 사슬로 정밀하게 연결되어서 거대하고 단일한 하나의 질서로 통합된다. 완전한 질서란 그런 것이며 그것이 윤회다. 그는 엔트로피를 알고 있지도 않았다. 그것이 신이 부여한 질서든, 자연의 섭리든, 그 거대한 질서 안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행동하고 인식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이다. 결국 인간은 통합된 우주의 안에서 우연하게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모든 생명과 비생명은 동일한 가치를 지니며 차별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 지혜는 자연의 질서를 경험하고 받아들이고 깨달음으로써 얻을 수 있으며 말로써 의미를 온전하게 전달할 수는 없다.
진리가 있다는 말은 동시에 반진리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엔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혜를 언어로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경험하는 개별성과 언어표현의 불완전성 때문에 진리도 정확하게 전달되지는 못한다. 특정한 관점과 특정한 시공에서 특정한 개인에게 관찰된 ‘진리’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주의 본질을 꿰뚫는 무엇인가를 진리라고 한들 그것도 우리가 사는 우주의 시공 안에 있다는 것으로 상대적인 것이다. 현대의 과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듯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다른 우주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관점에서 관찰된 것들은 언어 표현의 불완전성으로 현상 안에 개입된 복잡한 인과관계를 모두 설명하지 못한다. 언어로써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그 복잡함 가운데 단지 하나의 요소만을 드러내어 표현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로 드러나지 않은 나머지 부분, 곧 표현되지 않은 부분에서 이미 기술한 진리와 모순되는 또 다른 진리가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다. 싯달타는 그것을 ‘진리는 오직 일면(一 面)적일 때만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고 표현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언어로 표현되고 발화된 어떤 사상도 이 ‘일면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을 ‘전체성, 단일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표현한다. 여기서의 전체성과 단일성은 하나의 질서로 전체를 이룬 우주의 질서를 이른다. 예를 들면 신성한 것과 죄를 짓는 것을 대립하는 둘로 설명하지만, 사실 둘은 나눌 수 없는 하나의 몸체를 이루고 있다. 윤회와 열반, 미혹과 진리, 번뇌와 해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하나로 녹아있는 그것을 우리 인간이 인식의 편의를 위해서 이원론적으로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세계가 그러하듯, 우리 내면도 마찬가지로 일면적이지 않다. 인간을 놓고 볼 때 완전히 신성하다거나 완전히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은 없다. 또 해탈이 윤회의 질서를 벗어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실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흐르는 무엇인가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투입하고 시간으로 인식하는 것일 뿐이다. 선과 악, 현상과 영원, 번뇌와 행복이 나눌 수 없는 하나로 존재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시간으로만 인식하는 그것도 일면적인 것이 아니다. 3차원의 시간도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무엇이 개입되면 다른 어떤 세계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이 4차원인지, 5차원인지 알 수 없으며, 그곳은 시간과 공간이 뒤죽박죽이 된 그런 상태일 수도 있다. 어제가 오늘이 될 수 있고, 내일이 어제도 될 수 있는 곳이다.
싯달타가 스승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삶과 말씀에 깨달음이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추종하지 않고 스스로 깨우치려는 고난에 나선 것은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서 필연적인 일이었다. 스스로 깨우치지 않고 배움만으로 성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배움은 선대의 깨우침을 전달받는 것이 본질이므로, 그것으로 새로운 경지에 올라선다 해도 선대 깨우침의 지평을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이다. 스스로 깨우친 것이 아닌 누군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구원의 지평을 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싯달타는 이 엄청난 욕심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은 없었지만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구도는 내면을 탐구하고 존재의 본질을 밝히는 과정이다. 세계 안에 선 나를 바르게 인식함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그것이 해탈이며 완성된 깨달음이라고 본 것이다.
첫댓글 얼마전 회원 가입해서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글을 쓰다보면 과연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 선생님 말씀대로 반 본질적인것에도 눈을 돌리면 무언가 새로움에 도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