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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관운
당나라(唐, 618~907)
수나라(隋)에 이은 중국의 통일왕조로 618년에 수의 당국공 이연이 건국한 나라. 서기 907년 애제 때 후량의 주전충에게 멸망하기까지 280여년간 20대의 황제가 중국을 다스렸다. 한나라에 이어 전통중국문물을 발전시킨 왕조로 한국의 경우 신라 중심의 삼국통일에 일익을 담당하였고 일본은 백제 멸망 이후 견수사, 견당사를 비롯한 사신을 보내 선진문물을 수입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등, 한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중기 안록산의 난 이후 이민족의 흥기와 국내 지배체제의 모순이 드러나 중앙집권체제의 동요는 물론 사회 및 경제적으로도 불안이 가중되어 쇠퇴의 길을 밟았다. 대외적인 활동이 활발했고 국제적인 요소가 많았다고 평가받고 있다.
민족적인 계보상 최소한 지배층은 한화(漢化)된 선비족이거나, 한족화된 선비족과 한족의 혼혈이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수나라의 경우와 다르게 황족의 경우 본래는 한족으로 선비 계층의 여인과 결혼을 해서 혼혈이 된 것이지, 원래부터 선비족 출신이 아니다. 관롱집단(關隴集團)이라 불리는 고위층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북조시대 이후로, 중국사를 파악하면서 북조와 수, 당을 단절된 개별 시대가 아니라 지배층 내의 정권 교체로 인해 왕조 변천이 있었던 시대로 보는 편이 바람직하다. 여기서 재야사학 분들의 주장에 주의할 점은 당나라는 선비족 국가가 아니며 선비족의 한족 식민 국가도 아니다. 사서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오히려 순혈 한족주의가 심해서 씨족지수백 년 전 선조까지 따지는 막장 수준의 족보였다고 한다.
수도는 장안이었다가 안사의 난 때 임시로 성도로 천도하고 반란이 제압되자 장안으로 재천도 된다.
초당(初唐)
당의 건국자 이연은 건성, 세민, 원길의 삼형제를 아들로 두고 있었는데, 당시 차남이었던 이세민은 아버지에게 수에 반기를 들 것을 진언하고, 여러 곳에서 높은 전공을 세우며 건국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에 이연은 이세민을 천책상장(天策上將)에 봉하는 등 크게 신임하였다.
이에 불안해진 장남이자 황태자 건성과 삼남 원길이 세민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으로 세민은 위기를 맞고, 심지어 형제들간의 모임에서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이에 세민은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궁궐 안에서 건성과 원길을 살해하고, 황태자에 봉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연은 스스로 세민에게 제위를 물려주게 된다. 일각에선 당태종이 자신이 먼저 쿠데타를 일으키고는 이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변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마치 조선 태종 이방원이 정도전이 자신을 치려고 했다며 무인정사를 일으킨 것처럼
태종 이세민은 국가의 제도를 총체적으로 정비하여 정관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이루어냈다. 다만 고구려를 침공하지만(고구려∼당 전쟁) 안시성주 등의 활약으로 실패한 점이 오점으로 남았다. 뒤를 이은 고종은 황후 측천무후의 진언에 따라 신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침공하여 승리한다. 내친김에 신라까지 정복하려 하였으나(나당전쟁) 예상치 못한 신라의 완강한 저항과 토번 전선의 악화가 겹쳐 실패하고 만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토번 전선과 한반도 전선에 둘 다 발을 담그고 있었고, 토번 전선에서 무너지게 되자 신라까지 포기하게 된 것이다. 이후 무후의 궁궐에서의 힘이 점점 커지고, 고종이 늙어 힘이 약해지면서 무후는 사실상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후 무후는 몇 명의 황태자를 죽이거나 몇 명의 황제를 폐위시키거나 한 뒤 국호를 주나라(周)라 칭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른다.
중국 최초의 여황제 탄생으로 하마터면 당(唐)은 사라질 뻔 하였으나, 이에 반감을 가진 중신들이 그녀가 병든 말년에 정변을 일으켜 무후는 국권을 내놓고, 무후에 의해 폐위되었던 중종이 복위했다가 다시 제2의 여황제가 되고 싶었던 위황후와, 황태녀를 생각하고 있던 위후의 딸 안락공주에 의해 독살되었다.
성당(盛唐)
측천무후와 고종의 딸인 태평공주는 올케 위황후, 조카 안락공주와 대립했고, 예종(중종의 동생. 마찬가지로 무후에 의해 폐위되었음)의 아들인 이융기가 고모인 태평공주와 손을 잡고 아버지를 복위시켰다. 이후 정치적으로 큰 힘을 얻은 태평공주와 황태자가 된 이융기가 대립하기 시작했고, 이융기가 황제로 즉위한 후 태평공주가 숙청되면서 당나라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현종(이융기)의 시대는 국가의 재정비와 교류의 발달로 '개원의 치(712~740)'라는 태평성대를 열게 되었다. 서양 문화와의 교류가 가장 활발하게 이어진 시점으로, 실크로드 지역의 군사적 장악으로 멀리는 중세 로마 제국과 연결될 정도였다.
그러나 말년(741~755, 천보난치)에 하필이면 현종이 며느리 양귀비에 푹 빠지게 된다. 양귀비에 의해 현종은 아예 정사에 손을 놓고, 정국은 재상 이임보 (뒤이어 양국충) 등 몇몇 지도층과 양귀비의 일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게다가 당시 지방의 치안을 담당한 절도사들의 세력이 커지고, 그 중 가장 힘이 강했던 안록산이 안사의 난을 일으키면서 궁궐이 함락당하고 양귀비가 그녀에게 반감을 품은 군병(軍兵)들의 강요에 의해 자살하는 사태를 겪었다.
중당(中唐)
이후 당나라는 심하게 막장 틀을 타게 된다. 바로 절도사의 난립 토번의 흥성 때문이다. 당나라는 건국 당시 균전제와 연계한 군사제도인 부병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토지지급 량이 줄어들면서 과중한 군역에 못이겨 군역을 피해 도망치는 도호화가 진행되었고 이는 당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측천무후, 당현종 시기부터 심각한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은 번진을 설치 했다. 이 때까지의 번진은 어디까지나 변경지역에 국한되었는데 안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내지에도 번진을 설치하는 내지번진이 설치된 것이다. 이로서 당조는 수도 인근지방 일부와 당을 지지하는 강남지방의 번진(순지번진)을 제외하곤 잠재적인 적들에게 둘러 싸인 형국이 된다.
절도사들의 군사력은 급속히 강해지고, 절도사들끼리 서로 결탁하여 중앙 정부로 조세를 보내지 않았다. 게다가 심지어 중앙 정부의 군사력은 규모와 훈련, 사기 모두에서 최악의 막장 군대가 되는 등 당나라는 총체적인 쇠퇴를 겪게 된다. 특히나 번진은 물론 당황실에서도 부병제를 대신하여 용병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재정부담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한때는 절도사들을 진압해서 지방통치를 반짝 복구해 그럭저럭 120년을 버틴지만, 외부적으로는 토번(티베트)과 회흘(위구르 제국)의 강성으로 당은 장안까지 위협받는 시기였다. 또 요동과 만주지방은 거란과 발해의 세력권이었다. 또 이정기의 치청번진 등은 사실상 반독립 왕국이었다.
이 때 활약한 황제가 두 사람 있는데 바로 (숙종, 대종 다음인) 덕종과 (순종 다음인) 헌종이다. 덕종은 양세법을 실히하여 재정을 충실히 했고 당조에 적대적인 하북 3진을 치러 나섰지만 전선이 지지부진했던 사이에 장안에서 주차∼이회광의 난이 터지고, 그거 진압한 후에도 토번∼회흘과 중앙아시아를 두고 계속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화해했다. 덕종의 노력은 헌종에게 이어진다. 특히 헌종시기가 되면 친위부대인 신책군이 설치되고 이를 이용해 적대적인 번진을 모두 진압한다. 이에 번진의 재정과 군사력을 회수하고 감시를 강화하는 등 큰 소득을 거두었다("원화중흥"). 그렇지만 헌종은 말년에 마약금단에 빠지고 불교를 맹신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 환관에게 독살당하고 만다. 다시 당조는 막장으로 흘러간다.
만당(晩唐)
이후 당은 환관들이 좌지우지하는 나라로 서서히 몰락한다. 최후의 중흥군주이자 숨겨진 암군 히든카드 선종 때부터 시작된 연속된 반란들은 희종 때 터진 황소의 난을 통해 당나라에게 그야말로 충격을 먹이고 말았다.
사실 당조는 적대적인 번진에 맞서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당에 충성하던 순지였던 강회(강남∼회수)지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강남개발이 어느정도 진전되었고 상업이 발달하자 강회지역은 부유해졌다. 당조는 이 지역에 과중한 세금을 매기고 이를 이용해 신책군을 만들어 당조에 적대적인 번진에 맞섰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 지역은 당의 착취에 저항하게 되었다. 이미 구보의 난, 방훈의 난등이 있었고 끝내 소금 밀매상 출신인 황소가 나옴에 따라 당은 확실하게 골로 가게 된다. 농민 반란군에 불과했던 황소군은 막장이었던 중앙군을 마구 격파하면서 유유히 장안에 입성하였고, 주민들의 지지까지 얻으며 다음 왕조를 예고하였으나, 전열을 가다듬은 관군에 포위되고, 심복이었던 주온이 배신하여(여기서 주전충이란 이름을 하사받는다) 관군에 합류하면서 황소의 난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주전충이 황소군을 자기 세력으로 흡수하는 등 세력을 키워 당나라를 멸망시키니, 전충(全忠)이란 이름이 무색해져 버렸다. 하지만 이미 당나라는 막장크리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당의 애제를 끝으로 당은 289년 만에 멸망한다.
후계국가
오대십국시대에 오대 국가의 하나인 후당과 십국의 하나인 남당은 당나라의 후계 국가를 자칭했으나 실제로 왕조의 연결성은 없다.
중국사에서 당은 한나라(漢)을 잇는 정통 국가로, 한이 만들어 놓은 중국 문화의 토대 위에 주변국의 문화를 잘 흡수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완성, 동아시아 전체로 퍼뜨려서 고대 동아시아 세계를 완성한 국가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봐도 상당히 중요한 국가 중 하나다. 우선 한국사에서는 잘 알다시피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시대를 종식시킨 악연이 있다. 또한 당의 서역 진출로 인해 중앙아시아의 문화가 중국 문화로 적극 흡수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중국은 말 그대로 세계제국의 면모를 보이며 문화와 국력을 크게 발현해 세계의 정상으로 활약한 시대라고 할수있다. 이민족이라도 인재는 적극적으로 등용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 중국인들에게 중국 역사상 가장 좋아하는 왕조 시기를 꼽으라 하면 대부분 당나라 시기를 꼽을 정도로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영광스러운 과거로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당시 걷어진 세금으로 추산해본 열구결과 당시 지구 절반의 gdp을 차지하는 국가였다. 송나라와 함깨 중국의 경제력에선 최전성기 라고 할수있겠다.
이러한 당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통일신라와 발해,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전체 문화 역시 당의 영향을 받아 재구축되며, 특히 율령제와 불교, 유교에 기초한 통일적인 세계 형성은 세계사에서 특히 주목받는 주제이다. 균전제 ∼ 조용조 ∼ 부병제 ∼ 율령제 ∼ 3성 6부제로 상징되는 당 중기까지의 국가 체제는 특히 중국 고대 국가관의 완성으로 평가받으며, 반대로 당 후기 이후 격변하게 된 국체 또한 고대를 넘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제도적인 변화로 주목받는다.
그리고 당삼채로 대표되는 도자기 등은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때 화려하면서도 이국적이고, 자유로운 풍조를 띄게 되었으며, 이러한 선진적인 문물은 이슬람을 거쳐 유럽까지 전파되어 르네상스 등에도 일부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 종이가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문명으로 넘어가 전 세계로 퍼지게 된 중요한 사건은 빼놓을 수가 없다. 불교와 도교의 교단이 확립되어 다양한 종파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것도 당의 시대이며, 문학적으로도 이태백, 두보, 백거이, 한유, 이고 등의 문학적 업적이 후에 고문(古文)의 표본이 되었다.
반면 절도사나 환관 등의 문제에서 보이듯이 권력의 통제와 국가통치의 구조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다지 좋지 못한 상황이 계속 펼쳐졌으며, 결국 이러한 문제에서 온 내전과 국력의 소모는 당의 멸망에 크게 일조했다.
여담으로 사람들이 과거 중국의 미녀들은 다 뚱뚱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당나라식 미인이다. 과거에는 보통 동서양을 막론하고 풍만한 여성을 미인으로 여겼지만 중국은 옛날부터 마른 여성을 미인으로 쳤다. 예외적으로 당나라때는 중앙 아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아 풍만한 여자들이 인기였다.
덤으로 후한, 명과 함께 역대 최강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환관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이름이 높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당헌종(현종이 아니다. 11대 황제인 헌종이다) 이후 황제들은 환관이 옹립했고, 환관이 죽이거나 폐위시킨 황제들도 여럿 있을 정도.
관료제의 발달과 행정력의 정교함은 유명한대, 당시 일화중 하나로 일본 승려 엔닌이 당을 여행하며 집필한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당제국에선 당으로 들어오는 외국인들을 모두 체계적으로 관리했다고 한다. 각 도시마다 관료들이 엔닌일행이 오고 가는 가는것을 중앙에 보고 했고 엔닌일행이 도착 전에 이미 도착지에선 엔닌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중앙 정부에서 이 모든 것을 통제하에 놓고 있었다는 건대 이것이 12세기 전의 행정력이다. 어느 지역에선 출입이 불가능한 지역이라 뇌물을 써서 통과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당나라에선 관리가 뇌물을 받지 않는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기록했다. 더욱이 놀라운것은 당시는 당이 리즈시절이 아니라 행정력이 무너져 가던 당말기 시절이란 것이다. 그 무너진 행정력로도 아직까지 조직적 체계를 잃지 않고있단것에 한편으론 놀라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