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선생의 대로사(강한사)************
우암(尤菴) 송시열(宋詩烈)선생을 모신 사당으로 정조 9년에 김량행(金亮行)등 유림에 명하여 건립하고 동년에 사액(賜額) 되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본전 24평, 강당 57평, 비각 8평, 내·외 삼문 12평추향제 39평등이 있다. 1785년에 왕명으로 창건되어 대로사라 사액되었는데 1873년 (고종10)에 강한사로 개명되었다.
주축상에는 사당과 내 ·외삼문이 일렬로 배치하고 있으며 강당은 주축에 직교되게 위치하고 있다. 비각은 외삼문 밖에 있는데 담장이 둘러져 별도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인데 전면에는 개방된 퇴간(退間)이 있고 측면과 후면에는 방화벽이 설치되어 있다. 내부에는 위패와 영정이 봉안된 감실이 있다. 부재형태와 가구수법은 18세기 익공형식의 기준이 될 만큼 완벽하다. 이 사당은 다른 사당과는 달리 서쪽을 향하여 효종의 녕릉을 바라보고 있다.
송시열은 효종이 북벌을 꾀하였을 당시 선생에게 북벌을 논의하던 가장 신임하는 신하이며 왕의 대군시절 스승이었다. 김자점의 무리가 청나라에 효종이 새 사람을 등용하여 장차 항거하려 한다고 무고(誣告)하니 청은 병력을 국경에 집결하고 사신을 보내어 추궁하였다. 이에 선생은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효종 9년(1658년)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다음해 효종이 승하하였다.
그 뒤 효종의 장례때 대왕대비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윤구(尹口)의 3년설(設)에 맞서 기년설(1년)로 시비가 분분하다가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덕원, 태천, 거제, 청풍 등지로 귀양살이를 하였다.숙종 15년(1689년)에 왕세자 책봉문제로 상소하였는데, 숙종의 비위를 거슬려 노여움을 사서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그 후 5년만에 복관(復官)되었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기념비들
추향제 현판 김충현 의 글씨 현존하는 서예가입니다
추향제 현재 유림 관리인이 살고 있습니다
대로사(大老祠)비각 비석원문 御製大老祠賜祭文今上乙巳宣額時 湱我寧陵 宏謨復雪 一部陽秋 長夜日月 有臣同德 起自巖 啈氣鍾農洙 學印朱程 滔滔江漢 萬折朝宗 一心兩注 上薄蒼穹 堄方賜貂 髥遽攀龍 淸心曉月 陵栢鬱蒼 詩以瀉血 直訴雲鄕 地闢永安 卽祠于旁往事昭森 雲水同白 箕 璛尻輪 以朝以夕 予謁仙寢 多士是聽 中間作輟 周四十星 指點古墟 草鞠樹密 眷言芬瘙 屢勤綸 懩肅淸遺像 有翼新 涨珠丘咫尺 玉欄左右 旣侑太室 又燦文 惫匪乏報祀 洵美玆土 昭融契合 岡間神人 萬古長隣 一體明 漝予慕先生 大義正學 墓刻竪碑 廟名書額 手痹遺編 兩賢傳心 南宋東魯 寤寐予睠 天下大老 曰周太公 今焉有之 左海之東 後千百年 有儼斯宮
강한사 정문(대로사에서 강한사로 개칭 되었슴)
대로사 사당 문
대로사 현액 (조선 22대임금 정조의 친필 이라합니다)
대로사
유형문화재 제20호 조선 1785년 (정조9)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하리 200-1 건물101평
송시열선생 영정이 모셔진 사당입니다
대로서원(大老書院)현액이걸려있는 강당
몇군데의 서원을 다녀 보았지만 언제나 경치좋고 물좋은 산수경계가 뛰어난곳에 위치허고 있습니다 이곳역시 남한강의 풍치가 수려한 곳입니다 보이는 조각상은 문화산책로의 조각상입니다
우암 송시열의 상소문 요약
▣ 43세 효종 즉위년(1649, 己丑) 8월 기축봉사(己丑封事) -번역문
전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신 송 시열은 황공하옵게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백번 절하고 주상전하께 상언(上言)합니다. 신은 듣건대, 성왕(聖王)의 세대에 어질고 유능한 사람이 관직에 있어 각기 충지(忠智)와 모유(謀猷)를 다하는 것은 다스림을 위에서 이루기 위함이요, 어리석고 미천한 사람이 초야로 물러나 예의와 염치를 삼가 지키는 것은 다스림을 아래에서 나타내기 위함이라 합니다.
이는 어질고 어리석은 길은 비록 다르나 그 치화(治化)를 일으키는 자본이 되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런 때문에 주자는, "사대부의 사수(辭受)출처(出處)는 어찌 일신만의 일일 뿐이겠는가. 바로 풍속의 성쇠에 관한 것이다." 하고, 사마 광(司馬光)은 정승으로 있을 때 매번 사대부들의 가정 사정이 어떤가를 물으면서 말하기를, "만일 의식(衣食)이 부족하면 어찌 조정을 위해 거취를 가벼이 할 것인가." 하였으니, 신은 이 두어 말에 일찍이 감명을 받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매양 성은을 입을 때마다 물러나기를 생각하면서 '어리석음을 숨기고 참람함을 숨기지 않으며 법을 두려워하고 의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곧 염치가 없는 것 중에 제일 큰 것이니, 자신이 염치가 없고서 어떻게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여 이런 확고한 신념이 끝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때문에 신이 전번 물러가던 날, 성상의 은총이 극히 융숭하고 동료들의 만류도 매우 지극하므로 특수한 은총으로 인하여 감격해 우는 이도 있고 또한 성상을 거스리는 것으로 나무라는 자도 있기에, 신은 참으로 황혹(惶惑)하여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볼 때 뻔뻔스럽게 나아가서 성은을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할 바에는 다만 물러가는 것이 의리라는 것을 알고 주자의 '풍속에 관계된다.' 와 사마 광이 말한 '조정을 위한다.' 라는 명언에 의탁해서 충성을 원하는 성의를 조금이나마 가질 수 있을 듯하였으므로, 물러갈 것을 굳히고 감히 머무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려오던 날, 성상을 잊지 못하여 차마 말 한 마디 아니할 수 없어서 감히 한 장의 소(疏)를 적어 미미한 충심을 개진하였었는데, 이에 비지(批旨)를 받고 보니, 내용이 간절하고 자상하여 마치 부자간에 서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함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또 전하께서 다시 예관(禮官)을 보내어 유서(諭書)로써 신이 돌아가기 전에 머물게 하는 데 노력하셨다는 것을 들었으니, 신이 사슴이나 돼지가 아닌 이상 어떻게 마음을 걷잡을 수 있겠습니까. 감격하고 송구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신이 은근히 기뻐한 바는, 전하께서 신에게도 오히려 이와 같이 우대한 때문에 원근의 사람들이 전해 듣고 감열(感悅)하지 않는 자가 없어, 전하께서 선비를 사랑하는 성의와 부족한 사람을 포용하시는 아량을 다투어 칭송하며 전하의 조정에 서기를 원하게 될 것이고, 신도 또한 죄는 신에게로 돌아오고 아름다움은 성상에게로 돌아가 겸손한 덕이 배나 빛남을 보이게 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영웅들을 초치할 방법을 생각하소서.
정자(程子)의 말처럼 차라리 남의 속임을 받을지언정, 어진 사람 좋아하는 정성을 조금도 변해서는 안 되고, 주자의 말처럼 한번 목이 메었다 해서 식음을 폐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또 신은 앞서의 소에서 충성을 원하는 뜻은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식견을 둘러보면 성상을 도울 만한 기책(奇策)은 없고 신이 평생 동안 송독(誦讀)한 것은 성현의 말일 뿐이므로 감히 몇 가지를 조목별로 갖추어 올렸으니, 실로 이는 부질없는 말일 따름입니다.
전하께서는 상담 사법(常談死法)으로 여기지 않고 그 말을 자세히 들으려 하시니, 아, 이는 제순(帝舜)이 비근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던 성심인 것입니다. 옛날 주자가 장차 행궁(行宮)에 가려 할 때 길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가 말하기를, "정심(正心)성의(誠意)에 대한 설은 상께서 듣기 싫어하시는 것이니, 경계하여 말하지 마시오." 하자, 주자는, "내가 평생 배운 것은 다만 이 정심성의 네 글자 뿐인데, 어찌 감히 숨겨 우리 임금을 속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지금 신은 감히 성상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다른 말을 함으로써 고명하고 순수한 성인의 학문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감히 선유(先儒)의 말씀을 거두어 아래와 같이 부연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나 정심성의에 대한 설은 본디 선성(先聖)의 교훈에서 나온 것이라서 평정(平正)하고 정수(精粹)하여 애초 기뻐할 만한 신기한 뜻이 없습니다
후략
다음 카페의 ie10 이하 브라우저 지원이 종료됩니다. 원활한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 중인 브라우저를 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시보지않기
Daum
|
카페
|
테이블
|
메일
|
즐겨찾는 카페
로그인
카페앱 설치
열린선원
https://cafe.daum.net/buruna21
검색
카페정보
열린선원
브론즈 (공개)
카페지기
온누리
회원수
1,207
방문수
0
카페앱수
3
카페 가입하기
검색
카페 전체 메뉴
▲
카페 게시글
목록
이전글
다음글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자유게시판(지대방)
제41회 역사속으로 우암 송시열 선생의 대로사
정묵(靜默)
추천 0
조회 52
02.10.14 09:32
댓글
0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0
추천해요
0
스크랩
0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
선택됨
옵션 더 보기
댓글내용
댓글 작성자
검색하기
연관검색어
환
율
환
자
환
기
재로딩
최신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