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섬이 축복받는 날
김성우
어릴 적 내가 살던 섬에는 피아노가 한 대 있었습니다.
온 섬을 통틀어 꼭 한 대뿐이었습니다.
피아노가 흔한 때가 아니었으므로 섬에 한 대라도 있었다는 것은
섬의 과분한 호사였습니다.
그 집은 섬에서 가장 부잣집이었고
피아노의 임자는 육지에 나가 공부하는 소녀였습니다.
예쁜 소녀였습니다.
어느 여름 방학 때 그 집 앞을 지나가노라니
문득 생소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학교에서 풍금 소리만 듣던 귀로서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있는 줄도
몰랐으니 그것이 피아노 소리인 줄도 몰랐을 밖에요.
날마다날마다 소리라고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와 통통배 소리뿐인 섬에
이것은 어느 해풍이 실어 온 무슨 요괴한 음향입니까.
부잣집의 위세 소리 같기도 하고 얼굴을 좀처럼 보여 주지 않는
예쁜 소녀의 도도한 목소리 같기도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피아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쩐지 싫었습니다.
그냥 싫었습니다. 너무나 듣기가 싫었습니다.
육지의 중학교로 진학하여 음악 시간에 실물을 처음 보고 나서도
나는 내내 피아노와 친해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섬에서 자란 나와 도시에서 실려 온 피아노는
오랜 동안 화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섬 문화에 대한 도시 문화의 침략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랜 세월 뒤 백건우·윤정희 선생 내외분과 어린 딸 진희 양,
그리고 나는 한 가족이 되어 이탈리아의 리미니 해변에서
어느 여름의 휴일을 함께 지내고 있었습니다.
아드리아 해(海)의 장엄한 일출을 바라보며
나는 어릴 적 고향 섬에서의 첫 피아노 소리를 생각했습니다.
나는 외국에서도 국내에서도 내 거주지에서라면
백건우 선생의 피아노 연주회에 한 번도 결석한 적이 없는
개근생입니다.
내 좁디좁던 섬의 문화는 한 소녀의 피아노 소리 아닌
백건우 선생의 커다란 피아노 소리에 번쩍 틔어
도시화되고 세계화되어 갔고,
이제 나는 백건우 선생의 그 유난히 큰 손을 두 손으로 맞잡으면서
이 개화에 감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도 음악은 들어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문화의 광명이 아직도 외면하는 오지의 섬들에 음악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냥의 음악이 아니라 엄청난 음악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피아노의 거장 백건우 선생의 찬란한 음악이
땅 끝에서 먼 어두운 섬들에 햇빛처럼 들어가고 있습니다.
실명한 사람이 갑자기 눈을 뜨는 감격입니다.
수만 년 동안 귀먹었던 바다도
처음 듣는 이 뜻밖의 신묘한 피아노 소리에 춤출 것입니다.
고기들도 뛸 것입니다.
고마워서 고마워서 섬들도 덩실덩실 할 것입니다.
참으로 섬의 지복입니다.
오늘은 섬이 태어난 이래 가장 축복받는 날입니다.
* 김승웅 글방에서
카페 게시글
오두막 사랑방
김성우 와 백건우.
홍경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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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03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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