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2년 7월 24일 주일 오전 예배
안식일과 주일에 관한 주제설교 10
성경낭독 : 호 1:2-10; 눅 11:1-13
본문 : 신 5:13-15; 히 10:19-25
제목 :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로서의 안식일과 주일 10 : 이웃”
주일 오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133편 1,2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15편 1,2,3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21편 2,3,4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9편 3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145편 3,4,5
성찬식 찬송 – 시 65편 5,6 (고정)
폐회찬송 – 시 102편 9 (고정)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로서의 안식일과 주일 10
이웃
주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 받는 성도 여러분!
열 번째, 마지막 설교의 주제는 “이웃”입니다. 요지를 말씀드리자면 성경은 우리에게 이 안식의 날, 이 기쁨의 날을 ‘이웃을 기억하고, 이웃과 함께 기뻐하는 날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주제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의 날 속에서 우리의 안식의 참된 성격을 알려주셨는데,
그 안식의 참된 성격 속에는, 우리 안식은 타인과 더불어 완성된다는 개념도 들어 있다.”
십계명 본문에서
십계명 본문에서 우리는 이 주제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십계명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 20: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 말씀이 가르치는 요지는 분명합니다.
안식일 계명이 ‘나의 경건만을’ 위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말씀을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정말 안식일 계명이 ‘나의 경건’을 위한 말씀이기만 하다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다음에 “무엇 무엇을 하고 무엇 무엇을 하지 말며, 거룩하고 경건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어떤 규정들을 가지고 그날을 보내야 한다”고만 말하면 끝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안식일 규정에는
“너, 네 아들, 네 딸, 네 남종, 네 여종, 심지어는 네 육축, 그리고 객까지”
가 포함됩니다. 말하자면 이 계명은 우리에게 이렇게 웅변하고 있는 셈입니다.
“안식일 계명은 너 혼자 무얼 열심히 지킨다고완성되는 것이 아니야!”
그렇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따라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최선을 다해서 그 날을 준비하고, 예배를 성심성의껏 드리고, 온갖 종류의 선한 일들을 다 행하면서 보냈다고 합시다. 하지만 이 사람의 아들이나 딸, 남종이나 여종, 심지어는 육축이나 손님 중 어떤 사람이 그 날에 안식하지 않고 일을 해 버려면, 이 사람의 그 모든 노력은 전부 수포로 돌아갑니다. 계명이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결코 안식일 계명을 ‘너 혼자 애를 써서 지켜야 할 것’으로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안식일을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날’로 삼도록 계명을 주셨는데,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제가 앞에서 요약해드린 것과 같습니다. 계명의 이러한 특성이야말로,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것이
다른 이들과 함께 이루어지고 성취된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애초에 안식한다는 개념 자체에타인, 나 바깥의 다른 사람에 대한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아야만 합니다.
첫째, 긍휼과 사랑의 날
오늘 이것을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안식일에 ‘이웃’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이 날이야말로 ‘긍휼과 사랑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 본문을 칼빈 선생님의 기독교 강요의 주해에서
칼빈 선생님께서 기독교 강요에서 이 넷째 계명에서 우리가 앞에서 읽었던 “남종과 여종, 육축과 객까지도”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한 번 보겠습니다.
“우리는 정해진 날들마다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신비한 떡을 떼며 공적으로 기도해야 하며, 종들과 일군들을 노동에서 쉬게 해 주어야 한다......모세는 신명기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두 번째 이유를 지적하고 있다.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신 5:14-15). 또한 출애굽기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 23:12).”
이렇게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밑에 있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억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문장에서 칼빈 선생님이 넷째 계명에서 “남종과 여종이 일하지 못하도록 한 것”을 ‘제제’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배려’의 측면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종들과 일군들을 노동에서 쉬게 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을 준행할 때, 특별히 우리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안식일이 그런 날이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경건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것, 이것이 안식일에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리고 칼빈 선생님께서 여기에서 들고 있는 성경 본문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이 설명에서 신명기 5장 14절과 15절을 인용했는데, 이 말씀은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신 5:15)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인용한 의미는 이스라엘이 안식일에 남종과 여종을 쉬게 해 주는 이유가 이스라엘이 애굽 땅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된 것과 이유가 같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자주 만나보았던 주제입니다.
출 23:9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신 10: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이렇듯 칼빈 선생님은 십계명에서 하나님께서 “남종도 여종도 쉬게 하라”는 말씀을 그들의 노동으로부터 자비의 측면에서, 쉬게 해 주려는 측면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면서 동시에,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이웃에다 자신을 투영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너희도 고통 중에 있었던 적이 있으니, 지금 고통 중에 있는 자를 모른 척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안식일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의 구체적 실천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안식일은 거룩과 경건의 날이지만, 이 날은 동시에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 이웃들이 ‘또 다른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에서 타인이란, 두 번째 돌판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에게는 ‘또 다른 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으니, 너희도 나그네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그것이 특별히 안식일에 특히 종과 나그네들에게 베풀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야말로 안식일이야말로 바로 이 점, ‘타인이 곧 또 다른 나’라는 사실을 제대로 삶에 실천해야 하는 날인 것입니다. 신명기의 십계명 말씀을 따라, 정녕 안식일이 내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날이라면, 나는 그 ‘나의 종 됨’으로부터의 벗어남을 ‘타인들에게’, ‘이웃들에게’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나는 애굽으로부터 벗어났는데’, 이웃은 그러지 않고 있는 것을 가만 내버려 두는 것을 올바른 경건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곧 안식일은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날’, 혹은 ‘타인이 또 다른 나임을 인식하면서 나의 종됨으로부터의 벗어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날’입니다.
둘째, 하지만 안식의 독창적 성격
문제 제기 : “너희 형제도 안식하게 되며”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봅시다.
둘째로,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안식일을 준수하려 할 때 ‘이웃’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안식을 완전하게 한다’는 측면을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문제 제기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과거 설교에서 자주 배웠고, 안식을 말씀드릴 때에 제가 자주 언급하는 본문입니다. 여호수아 1장 12절부터 15절까지 말씀입니다.
수 1:12-15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너희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고 여호와께서 너희로 안식하게 하신 것같이 너희 형제도 안식하게 되며그들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얻게 되거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해 돋는 편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지니라.”
여호수아의 이 말씀은 민수기 32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이미 요단강 동편 땅을 정복하였고, 이 땅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 중에 절반에게 분배가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아직 요단강을 건너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두 지파 반은 자신들이 받아야 할 기업을 이미 획득했고, 그 말은 이 두 지파 반의 사람들은 굳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32장에 보면 이 지파들의 대표가 모세와 족장들에게 ‘자신들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민 32:5).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모세는 크게 화를 내며(화를 낸다는 것은 저의 상상입니다. 성경에는 없습니다)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6절)라고 하면서, 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정탐에서 실패하여 광야에서 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장황하게 이야기합니다.
이 말을 듣자 두 지파 반의 대표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유아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 거민의 연고로 우리 유아들로 그 견고한 성읍에 거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 행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얻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16-18절)
이 일을 언급한 것이 여호수아 1장의 말씀이며, 두 지파 반의 용사들은 실제로 이스라엘 가장 선두에 서서 전쟁을 이끌고, 지파별 땅 분배가 끝나고서야 다시 요단강을 건너 자신들의 기업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민수기와 여호수아가 다루고 있는 이 ‘안식’이라는 것, 곧 이스라엘이 지파별로 기업을 모두 분배받았을 때 그들에게 임하였던 그 안식, 사실은 히브리서 4장을 보면(우리가 얼마 전 설교에서 들었듯이) 그 안식이란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궁극적으로 성취하실 바로 그 안식이......당시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임하였을 때, 거기에는 ‘독특한 성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죠.
“이때의 안식은 공동체 모두가 참여하지 않을 때 임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제가 읽어드린 민수기의 말씀을 들으실 때, 모세의 화냄을 무엇이라고 인식하셨습니까? 모세는 단지 “이것들 진짜 이기적이네!” 이 정도를 말하는 것 같으셨나요? 아마 그 이상일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나’ 뿐 아니라 ‘너’에게 동시에 임하지 않으면 오지 않는 것을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우리가’ 함께 얻어야만 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호수아서 마지막에는 이스라엘의 지파별 땅 분배가 끝나고 안식이 임했다는 말씀이 공식적으로 나오는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조금 전에 살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희생적 태도’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약 이 두 지파 반의 용사들이 이기적이었다면, 그래서 “각자도생합시다!”라고 말했더라면, 아마 안식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상세하게 말씀할 수 없지만, 이 여호수아의 ‘임한 안식’ 반대편의 말씀이 사실은 사사기 말미의 ‘레위인 첩 사건’입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땅에서 어떻게 안식이 붕괴되는지를 보여주는데, 이때 이스라엘이 보여준 태도야말로, 악을 저지른 한 지파, 곧 베냐민 지파 때문에 나머지 열 한 지파가 함께 몰락할 수 없었다고 판단한 그 열 한 지파들이 합심하여 베냐민 한 지파를 죽여버린 사건입니다. 뒤이은 사건들도 보시면 나중에 이스라엘에 한 지파가 궐이 났다고 슬퍼할 때 이들이 이 문제조차 해결한 방식이 축제에 나온 처녀들을 인신매매해서 베냐민 남자들과 짝을 지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민수기와 여호수아가 보여주고 있는 ‘공동체적 안식’이 완전히 결단난 상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사기입니다.
(사사기의 ‘형제 사랑의 파괴’는 요셉 문맥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 윤목사 ‘나실인’ 참조)
그러므로 여러분! 이 본문의 문제 제기는 분명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안식의 독특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성경의 안식은 ‘나’ 혼자만의 이기적인 경건으로는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누리는 안식은 ‘모두가 함께 동참하여 얻는 안식’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늘 본문으로 삼은 히브리서 10장의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보여주는 이 안식의 성격
모이기를 힘쓰라?
아마 여러분 대부분이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0장에서 특히 25절 말씀에 익숙하실 것입니다.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교회당에 모이는 것을 중시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자주 비판하지만, 우리 교회들은 주로 ‘이 사람이 세상 속에서 신자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장로나 집사 중에 사회 생활에서는 악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한국교회는 교회 안에 모이는 것을 전 세계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하는 교회입니다. 사실상 거의 일주일에 네다섯 번 이상을 교회에 오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고 새벽기도 같은 것을 합치면 하루도 교회에 오지 않는 날이 없는 사람들도 꽤 있는, 전 세계적으로 보기 힘든 그런 교회입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우리는 교회에서 이 히브리서 10장 25절 말씀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습관처럼 말고!”
늘 모이라는 것이지요! 항상 교회에 와서 모임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 구절을 볼 때 그런 것을 물어보지는 않으셨습니까?
“이 말씀이 진짜 교회에 자주 오라는 뜻인가?”
그런데 그러면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성경을 조금이라도 체계적으로 읽는 것을 배우고 느낀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 분명합니다.
“보통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오는데, 특히 히브리서도 그럴 텐데, 도대체 이 앞 뒤의 문맥이 뭐이길래, 이렇게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뜬금없는 주장, 곧 어떤 기구의 유지를 위하여 사람을 많이 끌어모으는 것과 같은 이런 이야기가 여기에 나오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 본문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되는데, 그것은 이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말씀은 바로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즉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말씀은, 교회라고 하는 어떤 기구가 기구적 존속을 위하여 사람들을 계속해서 끌어모아야 하는 그런 당위를 말하는 문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확인해 봅시다.
이 말씀의 문맥과 내용
이 말씀의 시작은 19절부터입니다. 19절은 복음의 정수가 되는 중요한 요지를 한 문장으로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그렇지요? 이 큰 문맥 덩어리의 시작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그분의 속죄 제사 때문에 구약 성경 시절에는 들어갈 수 없었던 지성소, 곧 하나님이 친해 임재하시는 그 임재 속으로 이제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부가 설명이 바로 그 다음 절에 나옵니다. 20절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그렇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써,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다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의 문맥은 대단히 노골적인 복음입니다. 그야말로 복음의 정수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이 문맥은 ‘사람들의 공동체적 유익을 도모하기 위한’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은 이 일을 이루신 분에 대한 설명인데, 그분을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복음에서 교회로의 연결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여기가 바로 ‘복음’으로부터 ‘교회’로의 연결이 일어나는 지점입니다.
이 화목 제사를 이루신 분께서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집”이 우리들, 곧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휘장을 찢어 지성소로 가시는 일, 곧 복음을 성취하시고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 곧 우리들을 다스리는 제사장”으로 역할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죠? 곧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지금 설명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나오는 것입니다. 22절의 말씀은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제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씻겼으니, 이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때 “나아가는” 것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그저 심리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히브리서 주석에서 존 오웬은 이때 “나아가자”를 “공적이고 사적인 교회의 모든 거룩한 예배,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다가가는 모든 방법들을 포함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나아간다”는 것은 그저 심리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느낌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공적 예배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림이 어느 정도 분명해집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 이하의 말씀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말씀하고, ‘그 하신 일로 말미암아 그분의 집이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23절부터 25절, 특히 24절과 25절 말씀은 ‘바로 그것을 하기 위한 실천 사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도록 구속의 역사를 모두 이루시고 난 뒤에,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공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바로 24절과 25절 말씀인 것입니다.
그분의 구속을 입은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
이 두 절을 읽어봅시다.
24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24절이 말하는 것은 “사랑과 선행의 격려”이고, 25절이 말하는 것은 “모이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열심을 내어 모이는 것”이지요.
이 부분을 조금 면밀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24절을 보면 우리 말로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라고 되어 있어서 어순이 원문과는 좀 다르게 느껴집니다. 원문에서 주동사는 “돌아보다”입니다. 그래서 24절은 ‘무엇무엇하기 위하여’ 돌아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 서로 돌아보라”
이것이 24절의 보다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렇다면 24절 말씀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은 교회’가 해야 할 본질적인 일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무엇입니까? 서로서로 돌아보는 것인데요, 왜 서로 돌아봅니까?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죠.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이 교회로 적용될 때! 이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 놓고 25절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25절은 두 개의 동사로 이루어진 문장이지만, 동사가 모두 분사입니다. 즉 그 말은 25절의 내용은 모두 24절을 위한 수식어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요. 보십시오.
25절에는 두 개의 동사처럼 보이는 분사가 나오는데, “폐하다”, 곧 “모이기를 폐하다”와 또 “권하다”입니다. 그러니까 25절 말씀을 딱 요약하자면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서로 권하라” 이렇게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분사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25절의 의미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지 않으면서, 서로 권하면서”
혹은 “모이기를 폐하지 않음으로써”, “서로 권함으로써”
이렇게 25절을 읽으면 굉장히 분명해지지요.
25절의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말씀은 분명하게! 24절의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25절의 모임 역시 ‘예배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교회가 모일 때 그 목적이 무엇이라고 이 말씀은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왜 모이나요? 24절의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 10장 말씀은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이 쏟아졌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이제 휘장이 찢어지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습니다. 이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게 될 때, 우리의 집 맡은 큰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지어집니다.
바로 이때의 교회의 참된 모습이 “사랑과 선행의 격려”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모임’이라고 하는 25절의 독려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가 너무나 선명합니다. 모임은 결코 모임을 위한 모임일 수가 없습니다. 모임은 오직 이 목적을 위해 존재합니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하여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본질은 명확합니다. 우리는 ‘모이는 일을 통해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합니다.
모이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복음을 성취하시고 우리들에게 내려주신 선물이자 사명! 곧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일”을 위하여 모여야 하는 것인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모이는 것을 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코로나 때문에 교회가 모이지 않게 되자, 목사들 진영에서 제일 먼저 나왔던 이야기는 “모이지 않으니까 헌금이 줄어서 교회가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세속적이고 비참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교회가 모이는 것은 교회 조직의 유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이는 일을 통하여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합니다! 우리는 ‘모이는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회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명령은 오직 이런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웬이 ‘사람들이 모이지 않으려는 이유’를 지적한 것은 굉장히 날카롭게 폐부를 찌르는 것입니다. 오웬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것은 대개 다음과 같은 사실로부터 비롯된다(이하 첫째, 둘째, 셋째는 편의를 위해 내가 넣은 것). 첫째, ‘고난을 두려워하는 것’, 곧 자기들의 영토와 재산과 집과 친척과 자유와 생명을 그리스도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속한 의무들보다 더 좋아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법이 준비되어 있다......둘째, ‘영적인 태만에 빠지는 것’, 생활에 대한 핑계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태만에 빠져 있다......사람들은 그들의 이유와 필요성을 들어 여러 가지로 핑계를 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우리가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하는 확실한 규칙을 행하고 준수하는 주된 방법과 수단으로써 이 모임들에 부지런히 참석하라고 요구하신다......그러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곳에서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수 없다. 셋째, 점차 모든 신앙고백을 저버리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불신으로부터 대체로 이것이 첫 단계인데 그로 말미암아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 믿지 아니하는 악심이 나타나게 된다.”
: 셋째는 ‘모이지 않는 것’이 신앙고백의 붕괴와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 선배의 통찰은 대단합니다!
실례로 코로나 때문에 교회가 모이지 않게 되었을 때, 너나 없이 온라인 예배를 선호하게 되었을 때, 그때 사람들의 마음은 이 오웬의 진술에 집어 넣으면, 아무 99퍼센트 정확하게 들어맞을 것입니다.
정 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안식을 구현하는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일에 모여서 이 일을 행합시다.
바로 이 점을 위하여 오늘 우리는 ‘이웃’에 대하여 두 가지 점을 생각했습니다.
첫째, 성경의 안식일은 그 자체로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날’입니다. 이것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안식’이란 ‘함께가 아니면’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모임으로써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복음을 받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잘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매 주일마다 ‘안식’을 대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은혜를 많이 주시기도 하고 적게 주시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해 안식에 노출되고, 영원을 바라보며 사는 훈련을, 그리고 이웃과 함께! 날마다 매진해가는 우리들이 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