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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이름은 유(瑈). 자는 수지(粹之). 세종의 둘째 아들
참고로 적자라오. 문종의 동생으로 모후 또한 소헌왕후.
기유년5) 2월에 세종이 평강(平康)에서 강무(講武)6) 를 하였는데,
세조가 사슴을 쏜 7발(發)이 모두 그 목을 관통하였다.
실제 무예에도 능했소. 무예에 능했던 장군 출신 태조의 헌신 같다며 눈물 보인 신하도 있었다는걸 보니
세종 살아있을 적 여우도 잡고 사슴도 잡고 솜씨 뽐냄.
세종이 평강에서 강무할 때 세조가 화살 하나로 여러 마리 사슴을 잡다
심지어 화살 하나로 여러마리도 잡았소. 실록엔 하도 많이 잡아서 수를 못 세었다고...
실록에 또 나와있는 내용 중에ㅋㅋㅋ품이 넓은 옷을 입고 사냥에 나서자 다들 수양을 보고 웃었다 하오.
아버지 세종은 수양 성품이 효용하니(급하니) 넓은 품의 옷을 닮으라고 했솤ㅋㅋㅋ
최종적으로 수양대군이지만 몇번이나 바뀐다오. 진평-함평-진양...
형과 아버지 앞에서 말 잘타는 모습이나 뛰어난 활솜씨 등을 뽐내는 등 기질을 숨길 수 없었나 보오.
사육신으로 알려진 충신들 목도 뎅강 바로 쳐버리진 않았다오.
단종 복권을 꾀한 성삼문 박팽년에게 잘못했다 하라 앞으로 충성 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했소.
성삼문은 공신 이름으로 올라있었다오. 아마도 회유책으로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었겠지라.
이에 박팽년은 당시 왕이었던 수양에게...
상왕 즉 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를 왕으로 인정한 적 없다고 말하게 되고
수양은 이제껏 내가 내린 녹을 받지 않았느냐? 하니 나으리가 내린 것은 하나도 쓰지 않았다 했소.
이미 수양 본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으리라고 불러서 빡친 상태...
창고를 열어보니 수양 치하에 받은 녹은 그대로 창고에 쌓아놓기만 함...
그래도 신은 이제껏 장계나 상소도 올리지 않았느냐?
臣(신하 신) 으로 지칭한 적 없다는 대답을 듣고 이 또한 확인 하니
臣이 아니라 巨 라고 씀...하나도 빠짐 없이.
수양은 더 이상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형제들까지 다 몰살하였고 삼족을 멸하기 위해 박팽년의 부인은 정인지의 노비로 주고
임신 중인 며느리가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살려주겠다 하오.
당시 여노비도 임신 중이었던 터라 며느리는 아들을 낳았지만 노비의 딸과 바꾸어
딸을 낳았다고 속여 박팽년의 후손은 남게 된다오.
충신 3종세트
- 왕을 나으리, 나리라 부름.
- 녹 받은 것들 쓰지 않고 보란듯 그대로 둠.
- 臣 대신 巨 라고 씀...
덧붙여 보겠소!
세종의 형 양녕대군이 동생이 똑똑하니 스스로 물러나 세자 자리를 넘긴 것이 아니라
워낙 망나니라 도저히 왕이 될 인물이 아니었소. 주색 잡기 수준이 부녀자 강간 수준...
그런데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 할때도 이때까지 계속 살아있었소. 명이 길지라.
세조 9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10월 18일(무신) 1번째기사
양녕 대군·효령 대군 등이 노산군과 금성 대군의 처벌을 청하였으나 허락치 않다
?????
지가 뭔데 노산군=단종을 처벌하라 마라요. 첫날은 술이나 하시라고 세조가 거절한다오.
이후 삼일 연속으로 노산군의 처벌을 하라고 세조에게 찾아오오...
그간 단종을 그대로 두었지만 단종 복위를 꾀하는 사육신 등 직접적인 일들이 생겨나자 부담으로 작용하오.
이후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치게 되지라...
문종은 세종을 도와 집무를 오래간 보았고 오래 살았다면 훌륭한 왕으로 남았을 것이오.
짧은 재위 기간과 어린 단종을 남긴 것이 역사에 화가 되었지라.
원래 세자들은 혹독하리만큼 훈련 수준으로 왕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단종도 그러했으니
만약 수양대군이 아직 어리고 힘 없는 단종을 뒷받침 해 주었다면 결과는 또 달라졌겠지라.
하지만 역사엔 만약이 없초ㅑ!!!
김종서 등과 같은 신하에게 단종을 맡기고 죽게 되는데...
아직 대군 시절 종친들을 관리하는 부서를 맡고 있었소. 그리고 종친들 중에는 수양대군을 미는 파도 있었지라.
아마 신하들이 득세하는 것을 막고 왕권을 강화하는 것을 바라던 부류도 있었을테고
이후 수양이 왕위에 오르고 종친들을 많이 등용하게 되오.
하지만 알다시피 왕자의 난과 더불어 이때까진 권력을 많이 받았소. 수양대군 또한 많은 권력을 가진 왕자였지라.
훗날 대군과 왕자들 또한 전면으로 나서 권력을 잡지 못하게끔 제도가 생기오.
종친들 또한 전면으로 나서지 못하게 하지라. 피가 진할 수록 권력을 잡지 못하게 됐소.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신하들이 득세하게 만드는 발판을 만든것도 세조요ㅋㅋ
정변으로 왕위를 얻어냈고 그 과정에 공을 세운 공신들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공신이 대거 생겨나오.
확실히 수양대군 캐릭터 자체를 파볼수록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상당히 재미있는 인물 임에는 틀림 없소.
같은 시대의 신하들도 그렇고 사극에 주요 소재로 쓰이는 이유가 있소.
★ 수양대군 미화 주의
정실 정희왕후 윤씨와 후궁 박씨 한명 뿐.
수양대군 시절, 부인 훗날 정희왕후는 왕권을 탐하는 남편을 본디 말렸다고 하더오.
계유정난 즉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했지만 정보가 새어 나가고...
미적대는 수양에게 당시 갑옷도 부인이 직접 입혀주고 격려해줬다 하오.
수양 입장에서는 부인 잘얻었구랴...
정희왕후의 언니가 원래 수양대군과 혼담이 오가고 있었소.
집으로 궁에서 사람이 왔다기에 엄마 뒤에서 얘기 듣고 있던 막내딸의 모습을 감찰각시가 비범히 여겨
궁에서 말이 나왔다고 하오. 그래서 언니가 아니라 둘째가 수양대군에게 시집을 가게 되오.
진짜 궁궐 사람들이 관상 볼 줄 아는가 보구랴ㅎㅎ정희왕후가 한살 어리오.
그리고 세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궁궐 밖에서 기거해야 했는데 세종과 소헌왕후가 유독 이뻐했다 하오.
자주 궁으로 부르기도 했고 심지어 출산도 궁에서 했소. 당시 법도로는 이례적인 일이지라.
나중에 소헌왕후가 병이 들고 심신이 쇠약해지자 궁궐을 떠나 수양대군 집에서 윤씨의 봉양을 받는다오.
그만큼 며느리를 어여삐 여긴 것 같소.
훗날 계유정난 일으키고 패륜아 소리 듣는 세조를 욕해도 백성들이 정희왕후 욕은 안했다 하오.
절제 된 여성편력으로 보아 정희왕후와의 사이도 무척 돈독했을 것이오.
정희왕후 사이에 2남 1녀.
축첩이라고 해봤자 달랑 대군 시절 얻은 근빈 박씨 하나 뿐이고
정희왕후는 후궁과 대비와의 사이에서 암투나 하는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정사를 논할 때 정희왕후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받아들였다 하오.
정사를 함께 논하는 정치적 파트너였다는 것이오.
무슨 행사 있으면 정희왕후와 함께였지라.
야사에 따르면 사냥 갈 때도 같이 말을 타고 즐길 정도라 했으니ㅋㅋ
말 다한거지라. 아무리 초기 조선시대라 해도 부인과 함께 말을 타고 사냥길을 뙇!
활 쏘는 실력이야 워낙 출중하니 부인한테 사슴이니 담비니 여우 잡아서 당신한테 선물이라고 주고 그랬겠지라?
당시 조선 왕의 사명은 대통을 이어야 했소. 세자를 비롯해 아들과 자식을 여럿 낳아야 했다오.
근데 세조는 그런거 없솤ㅋㅋㅋ
아래도 썼지만 후궁 들이라는 주청도 단칼에 거절한다오
그리고 유독 교태전 기록이 세조 실록에 많소.
조선왕조 실록에 교태전으로 검색을 해봤더니...
혼자 저렇게 많이 나왔소ㅋㅋㅋㅋㅋㅋㅋㅋ
안보이는 왕들도 다 0회라오.
혼자 55회쟈나...나머지 왕님들 다 합쳐도 안되쟈나
가족 짱팬 소헌왕후 짱팬이었던 세종도 2건인데...
아예 교태전에서 일을 봤나.....???(이것도 일부요)
세조 20권, 6년(1460 경진 / 명 천순(天順) 4년) 5월 21일(병신) 3번째기사
교태전에서 이조 판서 구치관 등을 인견하고 용관의 도태에 대해 의논하다
세조 14권, 4년(1458 무인 / 명 천순(天順) 2년) 11월 5일(기축) 1번째기사
교태전에 나아가 도승지 조석문을 인견한 후 후원에 나아가 활 쏘는 것을 구경하다
세조 22권, 6년(1460 경진 / 명 천순(天順) 4년) 12월 19일(신묘) 1번째기사
교태전에 나아가 공차는 놀이인 봉희를 구경하다
(격구랑 비슷, 대신 말이 아니라 땅에서 했소.)
즉, 왕후가 기거하는 교태전에서 공차는 놀이도 구경하고 정무도 보고 의논도 하고
세조 12권, 4년(1458 무인 / 명 천순(天順) 2년) 5월 21일(정미) 1번째기사
왕비와 서교에 나가 농작물의 작황을 살피고 농민들에게 주육을 내리다
왕비와 서교에 나가 농작물의 작황을 살피고 농민들에게 주육을 내리다
왕비와 서교에 나가 농작물의 작황을 살피고 농민들에게 주육을 내리다
심지어 왕후랑 같이 농작물도 살펴보러 나갔소ㅋㅋㅋ
역시 중궁=중전과 함께한 왕도 세조가 월등히 많숴
이정도면 부인 짱짱팬 수준이 로설 남주급이구랴.
쇟이 생각한 수양대군이 아니얔ㅋㅋㅋ천하의 개갞끠인데...분명?????
기록 왜때문에 그런거죠???
여기 실록 내용을 또 몇개 옮겨보자면
세조 27권, 8년(1462 임오 / 명 천순(天順) 6년) 2월 11일(병자) 1번째기사
왕비와 함께 동궁의 터를 잡고, 후원에서 솔[侯] 쏘는 것을 구경하다
세조 33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7월 23일(갑술) 1번째기사
중궁과 더불어 경회루에 나가 삼갑창을 구경하다
세조 36권, 11년(1465 을유 / 명 성화(成化) 1년) 8월 17일(임진) 1번째기사
중궁과 함께 온양에 거둥하다
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2월 30일(정묘) 2번째기사
중궁과 함께 충순당에서 화포쏘는 것을 구경하고 신하들에게 주연을 베풀다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12월 4일(계미) 3번째기사
중궁과 더불어 세자궁에 거동하고 시위 군사에게 술을 먹이다
세조 22권, 6년(1460 경진 / 명 천순(天順) 4년) 10월 4일(병오) 2번째기사
중궁과 더불어 황해도·평안도를 순행하다
너무 많아서 다 못 옮기겠솤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마디로 무슨 행사가 있었다 하면 중전과 함께 다녔단 뜻이오.
잡희도 같이 구경하고, 후원에서 활 쏘는 것도 같이 보고 사냥도 같이 가고
연회 베풀 때도 중전과 함께★
훗날 피부병으로 고생 하였는데 온양으로 요양 갈 적에도 당연히 함께 하였소.
조선의 패륜아,
그래도 내 부인에게는 따뜻하겠지.
후궁을 들이라 하는 신하들의 청에 다시 말하지 말라 못박았숴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5월 11일(기묘) 4번째기사
후궁을 들이는 것과 공신을 만나 정을 나누는 일에 대해 불윤하다
후궁 들이라는 신하들 청을 또 단칼에 거절했초ㅑ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ga&tabid=k
그냥 떠도는 야사도 아니고 실록에 나와 있는 내용들인데 저 정도요ㅎㅎ
궁금하면 실록 한번 찾아보시구랴~ 재밌소!
관상의 수양대군 떄문에 찾아본 자료인데 꽤 흥미로운 인물임은 분명하오.
기록 찾아보면서 당황했숴...이게 아닌데? 천하의 개갞끠 조선의 패륜아인데?
형제고 조카고 다 피로 물들여 왕위에 오른 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물론 그것도 맞고 사실이오! 하지만 적어도 자기 부인한테만큼은 끔찍하게 잘했구랴.
역사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광포한 군주지만 지 여자한테만은 따순 남주보다 더 심하오.
연회고 뭐고 뭔 일만 했다하면 자기 부인 데리고 다니는 왕이라니 그것도 조선시대에..
도둑도 친구가 있다하지 않았초ㅑ? 이런 면도 있다 봐주시오. 너무 노여워 마시구랴.
그리고 왜 악역에 잘생기고 섹시한 배우를 쓰지 않는지 알 것 같소.
이정재가 다 했잖아요....
--끗--
첫댓글 관상 알바임?
그만 올리셈
미쳤냐 윤소정
이정도면 정성임
ㅋㅋㅋㅋㅋ읽어보니 흥미롭긴해요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