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 들녘으로 나가
이십여 년 전부터 나는 매일 생활 속의 글을 남긴다. 나에게 글쓰기는 스스로 마주 바라보며 위로받고 치유하는 과정이다. 남들은 헬스장에서 몸의 근육을 붙여간다면 나는 글쓰기로 마음의 근육을 붙여간다. 어느 때부터인가 내가 남겨 가는 글들이 나만의 방을 벗어나 타인에게까지 읽을거리로 전해지기도 한다. 처음엔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독자가 붙게 되었다.
내가 생활 속에 남겨 가는 글들은 산책이나 산행을 통해서 취한 글감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추위로 바깥나들이를 않고 사흘을 집에 머물렀더니 글감이 고갈되어 간다. 첫날은 위장을 다스리려고 복용하던 약의 부작용을 썼고, 이튿날은 지난날 산나물을 뜯었던 경험을 떠올려 산나물의 특징을 정리해 봤다. 어제는 읽어가던 ‘날씨가 바꾼 그 날의 세계사’라는 책에서 글감을 찾아냈다.
일월 넷째 목요일은 정월 초닷새였다. 어제 그제는 북극발 시베리아 한랭기단이 한반도로 엄습해 전국이 냉동고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추위 기세가 맹렬하다고 해서 집에 갇혀 도서관서 빌려다 둔 책을 펼쳐 읽었다. 미국 저술가가 쓴 글쓰기와 기후에 관한 번역서였는데 나에게 울림이 왔다. 사흘간 외출하지 않다가 이른 아침 현관을 나서니 추위 여파가 물러가지 않음을 실감했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창원대 삼거리로 나가 김해 불암동으로 가는 97번 버스를 탔다. 시내를 관통한 버스는 창원터널을 지나 장유 신도시를 거쳐 김해 시내로 들었다. 수로왕릉에서 동상동을 거쳐 활천고개를 넘어 인제대학 앞에서 신어산 기슭을 따라가 지내역을 지난 종점 가까운 선암다리 근처 불암 장어구이 거리에서 내렸다. 서낙동강과 인접해 민물장어가 잡히는 곳인 듯했다.
나는 올겨울에 서낙동강을 세 차례 찾았고 이번에 네 번째다. 지난 연말 낙동강 하류 모래섬 중사도를 트레킹했다. 이후 다음 달에 퇴직을 앞둔 지기와 남명 조식 선생이 젊은 날 처가살이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선비들과 교류한 산해정을 찾아갔다. 설 직전에 낙동강의 또 다른 삼각주인 둔치도를 찾았다. 이번에는 예안리 고분군을 둘러 대동 들녘을 걸어볼 요량으로 길을 나섰다.
불암에서 부산 시내버스로 수안마을에서 주중마을을 지나 시례마을 입구로 갔다. 예안리 고분군은 대동 들녘으로 나가는 마을 어귀였다. 창원 동읍 다호리 고분군처럼 초기 가야시대 평민의 움무덤과 덧널무덤으로 봉분은 남아 있지 않은 펑퍼짐한 평지였다. 안내판에는 유적 발굴 당시 가야인의 유골이 수습되고 부장품으로 굽다리접시를 비롯한 토기와 철기가 나왔다고 적혀 있었다.
예안리 고분군에서 들길을 지나니 비닐하우스단지에는 한겨울에도 꽃을 키웠다. 김해 대동은 낙동강 천 삼백 리 물길이 상류로부터 떠내려온 충적토가 켜켜이 쌓인 기름진 들녘이었다. 그곳에는 전국 꽃집으로 연중 생화를 공급하고 외국으로 수출하는 고소득 꽃 농사를 지었다. 물방울이 서린 비닐하우스 내부는 볼 수 없었으나 바깥에 국화과의 일종인 거베라를 수확해 놓았더랬다.
강변 중학교가 보이던 초정리에서 강둑으로 올라섰다. 물금을 거쳐온 낙동강 물길은 호포에서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을숙도로 향해 흘렀다. 강 건너편은 금정산 꼭뒤 북구 화명의 아파트단지였다. 강을 가로지른 대동화명대교에는 인도가 확보되어 보행에 어려움이 없었다. 화명으로 건너가니 생태공원 파크골프장에는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은 중년의 동호인들이 운집해 여가를 즐겼다.
생태 연못 탐방로에는 문화강좌 수강생들의 서양화를 걸개 작품으로 전시했다. 수상 레저 시설도 나왔는데 낙동강 생태 탐방선은 겨울에는 운항하지 않는 듯했다. 예전에 감동진으로도 불렸던 구포에 이르러 금빛 놀 전망대로 올라 지나온 대동 들녘과 낙동강 물길을 바라봤다. 전망대에서 구포시장으로 가서 국수로 늦은 점심을 때웠다. 열차는 시각이 맞지 않아 시내버스로 복귀했다. 23.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