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다양한 학문 간의 融合, 統攝의 문제가 이미 1940년대 헤세의 머릿속에 있었다는 데에 놀랐다. 요즘 융합과 다른 점이라면, 예술과 학문의 통합과 그것에 명상을 접목시킨다는 점이다. 요즘의 융합과 통섭이 4차 산업혁명의 필요에 의한 추동력으로 이루어진다면, 헤세의 유희가 정신의 순수함에 도달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통합과정에 명상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것을 유희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처음엔 이 ’유희‘의 방법이 어느 곳에서 구체적으로 기술되는지 매우 궁금하였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유희는 순수정신에 도달하기 위한 명상 정도로 이해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맥락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굳이 ’유희‘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의 분위기로서는 좀 엉뚱한 발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헤세가 순수정신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한 끝에 만들어낸 순수정신을 도출하기 위한 ’가상의 기제‘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가 유희를 ’개별적인 과학과의 대결‘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도 당시의 회의적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학문분야를 떠나서 카톨릭계의 유리알 유희에 대한 낮은 평가는, 마리아펠스 수도원 시절 초기에 야코브스 신부가 크네히트가 속해있던 ’카스탈리엔 종단이 그리스도교 신도조합의 모방이며, 종교도 신도, 교회도 그 기초로 삼고 있지 않으므로 근본에서는 신성 모독적인 모방‘이라고 비판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 크네히트는 종교나 신, 교회에 대해서는 베네딕트적인 생각이나 로마 카톨릭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며 실제로 존재하기도 한다는 것으로 그의 주장을 반박한다. 크네히트는 그런 방식으로 표현되는 종교적 의식이나 의지와 노력이 ’모든 지식의 원천을 맑게 해놓는 일을 하기 때문에‘ 부정해서는 안되며 그것이 정신생활에 미치는 깊은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서 카스탈리엔을 옹호한다.
결국 그는 ’나라와 세계의 정신적 토대를 유지해주는‘ 기능을 담당하는 카스탈리엔도 그들에게 빵을 주는 동포와 마찬가지로 ’바깥‘ 세상에 공동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통감한다. 그렇다면 카스탈리엔도 ’바깥‘의 역사에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현실에 동참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세상에 변화에 동참해야 하며, 그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자신부터 실천에 앞장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역사가 인간의 이기심과 본능적 생활이라는 죄의 세계를 재료로 하고 동력으로 삼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신적으로 숭고한 집단인 카스탈리엔 종단 역시 혼탁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결국 유희가 카스탈리엔의 ’안‘에 머무는 한, 현실과 유리된 공허한 시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에 회의하면서 세상 밖으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황야의 이리>가 윤리, 미학, 시민적 삶과 공동체의 삶과 같은 ’인간‘과 예술, 문화에의 참여를 거부하는 ’이리‘의 야성을 대립시켰다면, <유리알 유희>는 성스러울 만큼 순수한 인간정신과 세속의 삶을 대립시킨다. 큰 줄기로 보아서는 때묻지 않은 정신과 지저분한 俗을 대립시킨 것으로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으나, <유리알 유희>에서는 역사를 동원한 것으로 俗의 범위가 확대되어 있다. 크네히트는 순수정신이나 聖도 결국은 俗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생존의 근거가 俗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한계를 깨닫는다. 사실 이념이나 종교 지향적인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회적 관계를 넓히거나 부를 증진시키는 데에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다. 그들은 현실 감각이 뒤떨어진, 어떤 때에는 엉뚱하게도 책임감이 약한 사람들로 취급당하기도 한다. 물론 주인공의 친구 데시뇨리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속적 삶 속에서의 책임감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세상이 그들에게 어떤 위대한 행동이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俗을 떠난 사람들과 사회적 책임을 공유하는 것을 거부한다. 보통의 삶이 성서나, 철학, 사회학 서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빵 한조각에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은 성과 속을 떠나서 자체로 정당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크네히트는 카스탈리엔의 정신적 특권을 포기한다.
결국 유희의 이야기는 문화나 정신, 영혼도 그 자체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물질적 힘을 추구하는 세력과 대립하면서 별도의 역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반박하는 알렉산더를 뒤로 하고 크네히트가 카스탈리엔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의 제자가 될 티토가 기다리고 있던 벨푼트 별장에 이르면서 겪은 고산증세는 현실세계에 직면하면서 겪게 될 고난을 예고한다. 티토에게 일상이랄 수 있는 이른 아침의 수영이 그에겐 목숨을 걸어야할 모험임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과감하게 호수로 뛰어드는 크네히트의 모습에서, 거칠고 위험한 세상 속으로 뛰어들게한 그의 순수 정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모습은 <요제프 크네히트의 유고>에서 ’정신으로 죽음에 저항하는, 초인간적인 운명에 대한 헌신으로 자아를 희생시킬 만큼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곳에서의 죽음은 그의 삶이 그곳에서 마감되어야만 하는 플롯의 문제 이상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야한다만 한다는 것이 헤세의 생각인 것 같다.
정신이 역사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면, 물질을 대상으로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을 재료로 추동하는 역사와 정신을 대립시키는 것은 헤세가 유물론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데시뇨리와 크네히트의 평생을 관통하는 우정 속에서 빚어지는 갈등, 성과 속의 대결로 수렴되는 지향 지점은 헤겔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평범한 상식으로 접근해도 이해가 가능한 것을 굳이 유물론까지 들먹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지난 수개월에 걸쳐 간헐적이긴 하였지만, 헤세 정신 탐구의 긴 장정을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다. 특정한 작가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읽는 것이 좀 피곤하기도 했지만, 매우 흥미진진한 프로젝트였다고 생각한다. 다음 작품은 헤세의 정신을 따라잡는 긴 여정에서 쌓인 긴장과 여독을 풀어줄만한 작품을 읽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