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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가을 이래로 신규 건설과 투자의 속도는 가히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소련의 지역들이 이러한 대규모 확장을 단행했습니다. 우랄은 1천 4백 80만 루블에서 5천 3백 20만 루블로 거의 세 배 가까이 중공업 투자가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들은 노동력 수급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네프 기간 동안 실업과 싸워야했던 그들로서는 노동력 부족은 굉장히 생소한 일이었죠. 모스크바와 지방의 몇몇 관료들이 예측하기는 했으나 제대로 대비할 수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1930년 2월 노동인민위원회(NarKomTrud, Narodnyi Komissariat Truda, 나르콤트루트) 회의에서 한 관료가 1929년 여름에 산업, 특히 건설과 임업 분야에서 노동력 부족이 있었다고 인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업이 아직 극복되지 않았다, 실업을 없애는 문제는 우리 의제에서 없어질 수 없다"라고 말했다는 점도 주목해야겠죠. 실업자는 실제로 당시 130만명 이상이었습니다. 한쪽 지역에서는 실업이, 한쪽 지역에서는 노동력이 부족한 불균형 상태였던 것이죠. 사실 이는 기존의 노동력 수급 방식에서 기인한 바가 컸습니다. 20년대의 건설사업들에 필요한 노동력들은 농민들이 농한기에 와서 노동력을 공급하는 식으로 충원되었습니다. 우랄 지역에서는 임업, 광업, 철강업에 이르는 대부분의 산업들이 이런 식으로 굴러가고 있었죠. 관련 부서의 당국자들은 적절한 때에 기업체에 노동력을 적절한 숫자로 공급해야만 했습니다만, 당시의 만연한 실업은 농촌 노동력을 최대한 농촌에 묶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담당자들로서도 관리하기 아주 편한 것이었죠. 그러나 급작스럽게 늘어난 노동수요로 이 당 기구들의 업무량이 폭주하면서 감당 불가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우랄의 당국자들은 이를 당시 소련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집단화 캠페인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1929년 가을, 우랄 지역 지도자들은 노동력 수급에 집단화가 가장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라고 합의를 봅니다. 오블리스폴콤 10월 회기에서 카바코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산업 지역에서 집단화에 착수해야만 합니다. 특히 임업과 광업이 막대한 노동력 부족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농촌 공동체 내의 과잉 노동력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집단화를 이용해야만 합니다. 집단화를 통해, 노동력 수급 과정은 상당히 쉬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 의제는 곧 적절한 조직들에서 토의될 것입니다. 산업 지역에서 이러한 조치들이 확실히 취해져야 할 것입니다."
1930년 1월 15일, 주 공산당 회의에서 광업과 제철 구들에서 대규모 집단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게 공식적으로 발표됩니다. 중앙에서도 집단화를 추진하였지만 지역 지도자들이 추진한 목표치는 이보다 더 야심적이었습니다. 사실 중앙위에서 열흘 전에 발표한 집단화 계획은 전적으로 러시아 내의 곡창지대인 북캅카스, 볼가 중류, 볼가 저지대에만 해당되는 사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랄에서 이를 진행하는 속도는 굉장히 신속했습니다. 오블리스폴콤의 노동부는 그들의 집행 계획을 재빨리 군 단위의 집행부서로 전달했고, 촌락 소비에트들로, 그리고 집단농장들로 이어졌습니다. 이 조직들은 기존의 농민 개개인의 자발적 노동력 송출 정책을 중단하고 반강제적인 차출 정책으로 전환하는데, 대개 도시의 공장들로 보내진 사람들은 집단화에 아직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중앙에서 내려온 집단화 목표치를 해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또 농민들의 집단화 참여를 자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콜호스로 온다면 집에 머물 수 있다!
그리하여 1930년 4월까지 거의 우랄 산업계의 요구로 45만명의 농민들이 새로이 고용되게 되는데 이것은 전 해의 약 세 배 되는 규모였습니다. 중앙에서는 이러한 움직임들을 규제하려고 시도합니다. 지금 너희들이 노동력 끌고 오는 게 너무 남용되고 있다. 이런 식이었죠. 비판이 가해지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얘들이 너무 대책이 없이 끌고 왔기 때문이죠. 중앙에서는 가급적이면 신규 주택을 공급할 건축 자재 및 건설장비, 그리고 공업지역으로 새로이 온 농민들을 위한 적절한 위생 조건이 갖추어질 경우에만 노동력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1931년 초, 노동인민위원회에서는 관련하여 두 가지 명령을 내립니다. 첫째는 지역 노동 부서에게 노동력이 남아 도는 곳에 대해서 통계를 작성해서 오라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콜호스들을 관장하는 기관인 콜호스첸트르(KolkhozTsentr)와 함께 내린 명령인데, 지역 산업체들이 노동력을 공급해올 때 준수해야할 절차들을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른 중앙 조직의 개입으로 약화되었습니다. 31년, 새로이 노동력 수급을 이만큼 하라는 제한사항이 떨어지자 우랄과 다른 지역에서 이런 노동력으로는 계획을 못 굴린다고 투덜대며 추가적 노동력 공급이 절실하다고 징징댔고 여기에서 에스테오가 지역 기업체들이 자체적으로 노동력을 수급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과잉 충원을 피해야할 것이며 적절한 주택보급이 전제되어야한다는 절이 있었으나 지역에서는 간단히 무시하고 자기들 좋을 데로 해버립니다.
그럼에도 노동력은 계속 부족했습니다. 우랄의 문서고에서 노동부 쪽 자료들은 1931년에만 지역 기업들의 노동 수요에 대해 1,500쪽의 보고서를 담고 있었을 정도였죠. 일단 주된 이유는 노동규율이 개판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촌에서 해 뜨고 지는 자연적 사이클에 따라 일하던 농민들이 갑자기 공장에서의 산업사회적 노동에 적응하는 것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죠. 많은 수가 기업체와 맺은 "계약"을 위반하고 그냥 도망쳐버립니다. 1931년 우랄의 한 제철업체가 우랄 주의 노동부로 보낸 전보가 전형적입니다. 그 해에 2,700명의 농민을 노동력으로 받았는데 1천명이 이미 도망쳤으니 1,300명을 더 보내달라는 내용이었죠.
노동력들에게 식량과 주거를 공급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보급인민위원회(NarKomSnab, Narodnyi Komissariat Snabzheniia, 나르콤스납)의 자원은 이미 간당간당하고 있었고 사실상 각지의 식량 보급은 이미 미달 상태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저밀도의 철도 시스템이 문제였습니다. 수송부담은 종종 식량과 물자의 보급을 일 주일에서 한달 가까이 지연시키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각 지역의 현장 기업들로부터 들어오는 요청들이 있었습니다.
"겨울에 추가적 주택 건설을 지속할 필요 때문에, 노동 식민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네. 이쯤되면 다들 감이 오시겠죠. 바로 교정노동수용소 및 정착지 주관리국(GULAG, Glavnoe Upravlenie Ispravitel'no-Trudovykh Lagerei i Kolonii, 굴락)의 대대적 확대였습니다. 도망가던 농민들도 무장한 경비대가 지키고 있으면 도망갈 수 있을 리가 없겠죠.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소련 전역에 걸쳐 건설, 산업, 철강, 농업에 이르기까지 경제의 모든 영역에서 강제노동 시스템이 활용되고 있었습니다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임업이었습니다. 신경제정책을 실행하던 기간 동안 임업은 만성적인 노동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우랄의 임업 위기와 그 돌파구로서 집단화 및 탈쿨라크화(농촌의 부농 집단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던 농촌 캠페인)를 찾아내는 과정으로 한 번 들어가보도록 하죠.
우랄의 임업은 우랄 지역 지도자들에 있어서는 인정하기 싫은 혹과도 같았습니다. 우랄의 목재는 제철업을 굴리는 데 있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산이었으나, 그 목재 기반 고로는 후진성의 상징이었죠. 우랄 임업의 상당수는 제철소 운영에 소비되었는데 지역 경제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목재 같은 후진적 산업보다는 첼랴빈스크와 키젤의 탄전에 더 많은 집중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곤 했습니다. 전에도 계속 말했지만, 쿠즈네츠크 탄전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은 산업 분야에 있어서 독자적 경쟁력을 보여주어 마침내 중앙 투자를 받아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20년대 내내 우랄은 임업 투자 예산을 계속 삭감합니다.
그러나 이제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현재 대부분의 철 생산을 맡고 있다고는 하지만 제1차 5개년 계획은 엄청나게 막대한 원재료들을 필요로 했었고, 우랄의 철 생산량 하나하나도 아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10년에 걸쳐 줄여온 목재 생산은 우랄의 철 생산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직 석탄 기반 제철소들이 건설되려면 한참 남은 시점이었습니다. 일단은 목재 고로에서도 최대한 뽑아낼 수 있는 만큼 철을 뽑아내야했죠. 그런데 문제가 생겼던 것입니다. 당장 다른 지역들이 철 제품을 내놓으라고 안달이었는데 고로를 돌릴 목재가 개후달렸던 것이죠. 이러다 우랄은 트롤 취급 받으면서 블랙리스트로 낙인 찍힐 지경이었습니다.
1929년 1월 초, 오블레센하(주 인민경제회의)는 이 자초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임업 당국자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우랄의 임업 현황 지도를 보며 그들은 다들 적당한 주거 환경과 노동 환경이 갖추어진 곳의 숲들은 200년에 걸친 벌목으로 소진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제, 북쪽의 사람 손 길 하나 닿지 않는 광대한 타이가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철도도 없었고, 기후도 끔찍했고, 노동력들을 끌어올만한 유인을 제공하기에는 너무 혹독한 생활 조건들로 가득했습니다. 만약 적절한 인프라와 생활, 노동환경을 제공하고자 한다면 목재 생산에서 얻는 이윤보다 그 비용이 훨씬 많이 들 것이 자명했습니다. 그리고 우랄 경제 관료들은 임업에 자신들의 아까운 재원을 쓰는 것 자체가 짜증나는 일이었습니다.
우랄플란(우랄주계획위원회)은 3월 말, 우랄 북부의 숲들을 추가적으로 개발하는 것에 대해 조사를 진행해보겠다고 상부에 알립니다. 고스플란 RSFSR(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계획위원회)에서는 동의하였으나 디테일한 비용 편익 분석을 요구합니다. 8월 말, 오블리스폴콤은 "임업 조직들의 생산을 더 확대할 가능성"을 알아볼 대표 외원회를 구성합니다. 그리고 제출한 것은 역시 장대한 계획이었는데 이런 것이 적절히 투자해서 적절히 마진을 남기는 시시콜콜한 계산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만들기 쉬웠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갑자기 임업투자를 확대해야할 적당한 구실도 필요했습니다. 그냥 이실직고 해버리면
"목재 고로 돌릴 나무 캐야해서 투자 좀..."
"니네 석탄 찾으면 그거 굴린다메?"
"아하하 사실 아직 못 발견했어요"
이렇게 될텐데, 이런 식으로 말했다간 다들 집단처형 당할 게 틀림 없었으니(...) 1929년 여름과 가을을 거치며 우랄의 오블레센하는 임업-산업 콤비나트라는 또다시 대책없이 원대한 계획을 발표합니다. 이는 연료와 건설 자재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목재, 셀룰로오스, 목재 기반 화학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함이라고 포장하면서 말이죠. 모든 생산과정은 기계화될 것이었고 새로이 건설될 빛나는 산업단지로 이주해올 인구를 위한 "79개의 새로운 정착지"가 건설될 것이었습니다. 우랄 임업의 약체화로 부과된 우랄 중공업의 위협을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지역 지도자들의 계산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을 낳게 되었습니다. 목재 연료가 30% 부족할 것이라는 추정치가 나왔으나 북부 삼림지대에 대한 구체적 진행은 아직도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비장의 스킬을 쓰는데, 이번에도 중앙에 가서 징징대는 것(...)이었습니다.
우랄 임업 당국자들은 이에 별 반대를 하진 않았습니다만 이들도 주 공산당에 한 가지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뭐 해달라는 데로 일은 해드립니다만, 노동력은 어떻게 갖고 오시게요?" 기계화를 해서 목재를 만들겠다라고 호언장담은 해놨는데 일단 당장 몇달 뒤에 5개년 계획이 본격적으로 가동될 걸 생각하면 그 사이에 기계화된 목재 생산 기지를 만든다는 건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게다가 그런 막장 환경에는 상주 노동력은 커녕 계절성 농촌 노동력들도 오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주 노동부는 1929-30년의 임업을 위한 노동력 요구치가 지난 해의 8만 9천 명에서 16만 2천 명으로 늘 것이라고 말합니다. 임업체들의 당국자는 이건 말도 안 되는 증가치라고 말합니다. 기계화 및 생산 효율화의 효과를 너무 과장했다는 것이죠. "니들 생산량 맞추려면 노동력을 더 갖고 오라고!"가 요점이었습니다. 우랄플란의 임업 회의에서 11월에 진행한 회의 결과는, 지금 추세로 간다면 최종적으로 필요한 노동력의 숫자는 결국
50만명(...)이 될 것이라는 어마어마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랄 경제의 높으신 분들은 기계화에 대한 임업 당국자들의 비관적 전망을 그다지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가 마침 쿠이븨셰프가 베센하에서 우랄 5개년 계획을 위한 위원회 설치하고 이럴 때라, 우랄 지역 지도자들의 머리 속에는 장밋빛 미래만이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여기서 밀리고 저기서 밀리다보니 5개년 계획이 시작될 때 우랄 임업은 최악의 상황에 도달했습니다. 우랄 제철업에서 엄청난 양의 목재를 새로이 요구하고 있었지만 도저히 노동력 부족으로 이를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비한 인프라 설치도 거의 안 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우랄 제철업이 노동력 빨아먹는 블랙홀이 되다보니 임업 쪽으로 오는 노동자도 거의 없었습니다.
1930년 2월,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이제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첫댓글 숙청될 건수들을 차곡 차곡 적립중이군요.
다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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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반 정도 왔습니다
교정정동수용소 -> 교정노동수용소;;; 모바일로는 수정이 안 되네여..
구라에 구라를 덧붙이고 또 구라를 치는 개판;
구라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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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되겠소, 쏩시다!
혼란하다 혼란해!
혼란한 우랄산맥
노동력오링이 엄청나네요 ㄷㄷㄷ
뽑아쓸 건 다 뽑아썼죠
노동자들 불쌍하네요. 2700명 중에 1000명이 탈주하는 거 보면, 얼마나 작업 환경이 부실했을지 예상이 안갈 정도네요. 노동자를 위한 나라에서 노동자를 갈아넣는다니, 이 무슨 역설적인 현상...
마그니토고르스크 노동자들 사진을 보면 참 역사의 경이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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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위대하신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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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읏
GULAG 다섯글자가 가장 빛나는 화였네요. 가장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동지에 대한 전통주의나 그에 영향받은 대중의 그에 대한 인식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맥락없는 악당" 으로 그를 인식하는 것이었고, 그 맥락없음의 절정은 전부 시베리아로! 라는 것이며 굴라그는 그 상징이죠. 굴라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맥락에서 형성"발전" 되었는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번 편은 그 소임을 넘치게 했지 싶네요.
역시 이분 배우신 분!
스탈린이 한건 결국 administration이고 경영이죠. 그의 성과는 성공적 경영의 결과인거고. 그런 점에서 보자면 경영학(그런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치고)자들은 스탈린을 가장 성공적인 사례중 하나로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