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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좋은글과 좋은음악이 있는곳 원문보기 글쓴이: 유경
울산 동구 @대왕암 울산을 걸었다. 때론 빠르게, 때론 느리게, 때론 멈춰서, 때론 눈을 감고 울산을 보았다. 바다가 짠 것은 고래가 흘린 눈물 때문일까? 과개안을 지나 바다 위 산책로까지 정수리에 햇살을 품고 울산을 탐닉했다.
짙푸른 해송을 삼킬 듯 파도소리 요란하다. 그 너머 깊은 동해 바다에는 사람처럼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고래가 살았다. 하늘로 올라갈 날만 기다리던 이무기도 살았다. 어느 날 이무기는 자신을 잡아당기는 바다를 끝내 떨치고 하늘로 올라 용이 되었다. 그 흔적을 따라 많은 사람이 대왕암에 오른다
바다 위 산책로에 긴 낚싯대를 드리우고 선 이들은 이 순간, 세상에서 제일 인내심 많은 사람들이다. 푸른 숲이 아닌 바다 위에 세워진 낚시공원이라니, 시간을 낚는다 한들 서운함은 없으리.
보고도 믿지 못할 전설 같은 그림을 보려고 망원경 너머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천년 전에, 만년 전에도 우리 같은 사람이 살았고, 그가 본 놀라움을 절벽에 새겼으니 울산의 전설 같은 고래 아니겠는가.
김삿갓처럼 누빈 울산
조선시대 방랑시인 김삿갓이 현대를 산다면 그는 여행 작가나 여행 기자를 직업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 자신이 회사고 그 자신이 대표가 되어 매임 없이 떠나리. 김삿갓이 빙의한 듯 여행을 할 때가 있다. 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내가 보고 즐거운 것, 내가 해보고 신나는 것, 내가 먹어보고 맛있는 것을 알리는 일은 사명감 같다. 혼자만 알기엔 너무나 벅차다! 울산은 4개 구와 1개 군으로 나뉘는데, ‘고래’로 상징되는 대표적인 도시가 장생포고래문화특구가 있는 울산 남구다. 나는 그곳에서 조금은 슬프고 많이 신났다.
울산 동구에는 대왕암공원이 있다. 울산 시민도 대왕암공원에는 여행하는 마음으로 온다고 들었다. 관광지 중에서도 관광지인지라 울산을 여행하며 그 어떤 곳보다 가장 많은 사람을 보았다. 원래 정상 탈환에는 큰 관심이 없지만 사명감으로 엄청난 해풍을 맞으며 대왕교를 지나 대왕암 꼭대기에 올랐다. 팁을 드리자면 운동화와 바지를 챙기시길. 서로 사진 찍어주기 바쁜 연인과 가족 사이에서 기괴하고 거대한 바위를 바라보았다. 전설이 없으면 이상하다. 이 모습은 물에서 벗어나려는 용의 몸짓이라고 한다. 이무기는 하늘로 승천하여 용이 된다. 자신을 무시했던 모든 것 위에 서서 포효한다. 옛이야기에 사람 심장을 하나 더 먹으면 구미호에서 사람 되는 여우나, 1년만 더 기다리면 용이 되는 이무기 이야기는 나 역시 사람이면서 응원하는 마음이 생긴다. 동해 바다를 벗어나는 마지막 몸부림.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하늘로 승천한 용은 대왕암이라는 흔적을 남겼다.
슬도를 향하여 걷는 길에 복선처럼 고래와 관련된 푯말을 마주쳤다. 크고 완만한 해안가는 과개안, 순우리말로 너븐개로도 불리는데 1960년대까지 동해의 포경선들이 고래를 이곳으로 몰아 포획한 곳이다. 자갈에 부딪쳐 흩어지는 파도는 잔잔하고 그 앞에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느라 분주한 사람들 뒤에서 고래의 무덤을 생각한다. 둥글고 거대한 해안가에는 귀신고래도 왔었을까? 너에게 고래 이야기를 들려줄게‘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내게 크나큰 설렘과 만족을 주었다. 이야기의 끝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가 될 때까지 주인공이 겪는 고초는 매번 험난하다. 신기하게도 그 고난을 겪으며 주인공은 점점 다부져진다. 내가 만난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남을 쉽게 용서했다. 어려도 용감했고, 연약해도 진실했다. 내가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내 삶의 끝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쓸 수 있을까? 사람들은 모두 이야기의 끝을 모른 채 살아간다. 그래도 아무 상관이 없다. 살아가는 행위가 끝에 써질 이야기보다 먼저니까! 용기를 내고, 진실을 향하고, 용서를 한다면 나는 끝내 이루리. 그대 이야기를 설레며 들으리. 옛날 옛적에 울산에는 귀신고래가 살았다. 귀신은 모두가 잠들 때 느닷없이 나타나 사람을 놀래키는 존재다. 고래 앞에 ‘귀신’이 붙었으니 신출귀몰한 거대한 고래를 상상해본다. 최고 70년을 산다는 귀신고래,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 토종고래의 학명이 붙은 이 고래는 더 이상 울산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1912년 국제적 포경기지였던 울산 장생포에서 처음 발견된 귀신고래는 순식간에 멸종위기를 겪는 고초를 겪었다. 일제강점기 무분별한 포획으로 귀신고래는 물론 혹등고래와 대왕고래도 자취를 감춘 것이다. 지난해 12월 방영한 <MBC 스페셜>에서는 멸종위기를 맞은 우리나라의 귀신고래를 추적했으며, 1977년 울산 방어진 앞 5마일의 해역에서 남하회유하고 있는 귀신고래 2마리를 마지막으로 동해에서 귀신고래를 만날 수 없음을 전하고 있다.
울산 여행을 하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래들을 곳곳에서 만났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혹등고래, 범고래, 귀신고래, 고래를 포획하던 곳이던 울산대왕암의 과개안. 그리고 고래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던 그들의 뼛조각으로. 울산 남구에는 장생포고래문화특구가 조성되어 고래와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장생포고래박물관은 ‘고래 도시’로서 울산의 역사를 다채로운 조형물과 전시물로 조명하고 있다. 예전에 ‘돼지’와 관련한 취재를 하며 돼지가 버릴 것이 하나 없는 가축임을 알았는데 고래도 마찬가지란다. 고래 입장에서는 하나 좋을 일이 아니지만 인간의 삶에서 고래는 큰 축을 담당했다. 고래 착유장과 관련한 글귀를 옮겨본다.
신출귀몰한 귀신고래. 제대로 산다면 70년을 살고 충분히 성장하면 수컷은 체장 13m, 암컷은 14m까지도 자란다. 1년간 임신하여 4.6m 정도의 새끼를 낳는다. 우리나라 남녀성인의 평균 신장이 2m가 넘지 않으니 눈앞에서 고래를 본다면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리. 고래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대요고래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짓는다면 마지막 문구는 꼭 그렇게 쓰고 싶다. ‘고래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라고. 박물관의 ‘인간과 고래’ 편에는 “고래는 착한 심성을 갖고 있으며, 인간은 이를 이용해 고래를 사냥했다”는 아이러니한 내용이 쓰여 있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진실. 포경선이 새끼 고래를 먼저 잡고, 필사적으로 쫓아오는 어미 고래까지 잡는다는 것이다. 배 주위를 맴도는 아빠 고래와 동료 고래들도 포획되고 만다니 이 무슨 일인가. 전시된 거대한 뼛조각을 바라보며 감탄만 하기에는 무수하게 포획된 고래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어쩌다 해안으로 떠내려와 죽은 어미의 배 속에서 꺼내진 새끼 고래도 전시물로 보았다. 깊은 바다에서 헤엄 한 번 쳐보지도 못하고 오고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된 아기 고래는 어른의 허리만큼 닿을 정도로 많이 자라 있었다.
고래가 주인공인 옛이야기가 있다면, 고래는 사람을 용서했을까? 모진 고난을 이겨내고 끝내 행복하게 살았을까? 나는 그런 상상을 하며 밖을 나왔다. 울산은 1986년 포경이 금지되었고, 장생포고래박물관, 고래생태체험관 등을 통해 옛이야기들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들 고래처럼 큰 수난을 겪었다. 수난을 겪은 것이 고래의 잘못 때문인가. 약한 것이 죄인가.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당당히 마주하고 바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몫일 것이다. 언젠가 귀신고래가 동해에 나타나주길. 고향 바다에 찾아와 포경의 고통 없이 마음껏 어미와 새끼가 헤엄치는 모습을 꿈에서라도 보게 되길.
“고래빵 맛있어요. 드셔보세요.” 장생포고래문화마을에서 붕어빵처럼 고래가 들어 있지 않은 고래빵을 맛봤다. 초여름인데 한여름 같은 날씨에 ‘고래빵연구소’ 앞 벤치에 앉아 널브러진 듯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고래빵을 꿀떡꿀떡 삼킨다. 레트로, 뉴트로, 복고가 유행인 시대라 장생포고래문화마을을 돌아보는 시간은 특히나 흥미롭다. 어떤 것은 추억이고, 어떤 것은 새로워서 아이처럼 골목과 가게들을 누볐다. “엄마, 우리도 달고나 하자.” 달고나?! 달콤한 소리에 걸음을 멈춘 곳은 ‘동네점빵’. 연탄불 앞에 모여 든 가족들이 1000원을 내고 달고나를 만들고 있다. 뒷모습에도 진지함과 신남이 잔뜩 묻어 있다. 하얀 개가 1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있는 청수이용원에 들어가 드라이어로 머리 말리는 흉내를 내본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펌프질도 해본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재밌는 기분이 들까. 어쩌면 이곳에서 깊어진 생각이 식혀져서 즐거웠나 보다.
‘장생포국민학교’ 앞에 떡하니 붙어 있는 표어다. 기자는 첫 번째 문구가, 포토그래퍼 실장님은 두 번째 문구가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열려 있는 교실에 들어가니 책걸상이 참으로 앙증맞다. 나도 한때는 저기에 앉아 국어책을 소리 내어 읽던 때가 있었지.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여행을 온 대가족이 교실에 앉아 그때 그 추억 속에 빠져든다. “아빠 때는 이렇게 벌섰단다.” 작은 걸상을 들고 벌서는 흉내를 내는 남편을 아내는 사진으로 남긴다. 삼촌과 조카가 교실 뒤에서 그 모습을 재현하는 것을 우리도 카메라 렌즈에 담는다. 지금 이 글을 쓰는데도 그때 생각이 나 미소를 짓고 있다. 내 운명의 지축을 돌려놓은 ‘옹기’ 이야기
허진규 옹기장이 빚은 옹기는 대를 물려 쓰는 명품이 된다. 3대에 걸쳐 물려주고 물려주며 깊은 장맛을 내고, 술맛을 일으키는 숨 쉬는 항아리. 울주가 낳고 울주가 길러 이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옹기장인은 고작 14세 나이에 ‘평생 옹기를 하겠노라’ 부모를 설득했단다. “좋아하는 것을 잘하려면 후회는 해도 포기는 안돼.” 울산 울주군, 외고산옹기마을 옹기를 빚는 장인, 명인이라고 하여 하얀 수염을 가진 신령님 같은 분을 상상했는데 건장한 체격에 소탈한 웃음이 청년 같은 분이다. 허진규 옹기장인이 나고 자란 울주는 흙, 땔감, 시장, 한 가지 덧붙여 기온이 온화하여 옹기가 발달하는 데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어린 시절부터 옹기 스승이 되는 어르신들의 일과 삶을 가까이 지켜본 아이는 ‘나도 저분들처럼 살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명인으로 거듭나는 길에 후회가 왜 없었겠느냐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어른이 되었으나 여전히 갈 길을 헤매는,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으나 고민이 많은 이에게 허진규 명인과의 유익한 대화를 공유한다. 중2 때 진로를 정하고 지금까지 한길을 가고 계신데 계기나 비결은 무엇인가요? 제가 대학에서 도예를 가르치는데 모든 학생이 적성에 맞아하면서 도예를 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배움 전에 목표를 먼저 설정해야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봐요. 우리마을은 예로부터 ‘옹기’가 유명했고 제 주변 어르신들이 모두 옹기를 하셨어요. 왜 어릴 때 사물을 보면 참 커 보이잖아요. 저는 큰 항아리를 만드는 어른들이 위대해 보였어요.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나도 저 분들처럼 되어야지. 그런 목표가 있었어요. 흙을 만지는 어른들은 저마다의 고집이 있었지만 다들 순수하셨어요. 제게도 참 따뜻해서 어린 제가 감히 옹기를 하겠노라 꿈을 꿀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명인이 되었지만 만족할 만한 경지에 오르기까지 화도 나고, 좌절하는 때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때마다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옹기 만드는 일은 체력적으로 참 힘들어요.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맥이 끊길 정도로 힘든 일이에요. 종일 물레를 돌려야 해서 30대에 무릎에 퇴행성 관절염이 왔을 정도거든요. 너무 힘들어서 후회한 적도 많았죠. 그런데 그냥 하는 거예요.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냥 하다 보면 돼요. 옹기는 저처럼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하거나 10대 후반, 20대 초반부터 시작해야 늦지 않아요. 발레처럼 옹기를 하는 데도 특별한 근육이 쓰이거든요. 뼈가 굳기 전에 배우는 것이 좋죠.
벽에 붙여놓은 글귀가 인상적이에요. ‘익숙한 것에서 새것을 건져올려라’는 어떤 의미인가요? 앞으로의 목표는 또 무엇인가요? 무형문화재로서 저는 전통 작업을 계승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요. 후대에 우리가 물려줘야 할 부분이죠. 전통은 무엇인가요? 그 시대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게 전통이죠. 2020년에 만든 저의 옹기가 전통이 될 수 있는 이유예요. 한동안은 옹기를 벗어나 오직 새로움만 추구했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익숙한 것에서 새것을 건져올려라’, 이 글귀에 답이 있었어요. 내가 하고 있는, 익숙한 전통 옹기에 새로운 무언가가 많이 있더라고요. 제가 찾은 답을 하나씩하나씩 만들어 세상에 보이는 것이 오늘, 앞으로 제가 할 일이에요. 허진규 옹기장이 추천한 울주군 대표명소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외고산옹기마을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울주군 여행 코스 중 하나다. 절벽 암반에는 호랑이, 멧돼지, 사슴, 거북이부터 작살 맞은 고래,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의 모습을 묘사하여 총 200여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반구대 암각화는 신석기 말에서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울산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유산 등재의 이전 단계인 ‘우선 목록’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AROUND · 울산언제나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 취재를 하고 놓칠 수 없는 식도락 여정까지 탐한다. 잠시 쉬어가기 좋은 맛, 지친 몸에 에너지를 주는 맛, 유유자적 감성적인 맛까지. 지극히 주관적이나 까다로운 어라운드 울산을 소개한다. 복순도가 울산에서 마음에 둔 곳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울주군’은 울산의 빛나는 재발견이었다. 복순도가는 비옥한 토양에서 자란 언양의 쌀만을 사용해 술을 빚는다. 발효건축으로 상징되는 양조장은 추수한 후 남은 볏짚을 태워 먹색에 가까운 빛을 발한다. 쌀, 누룩, 물이라는 재료가 같아도 양조장마다 술맛이 차이 나는 데는 그 술을 빚는 건물도 한몫한다. 흙, 바람, 먼지, 균이 거기에 머물기 때문에. 복순도가손막걸리의 뚜껑을 따자 ‘푸슝’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탄산이 인다. 인위적으로 넣은 탄산이 아니다. 새콤한 향기와 달콤한 맛은 또 어떻고. 두 잔을 마시고 기자가 힘이 나서 일했다는 후문까지 전합니다.
유동커피 울산에도 참 수많은 카페가 있다. 나름 마음에 드는 카페를 잘 고르는 편이라고 자부하는데 유동커피가 특히 그러했다. 울산에서 처음 만났지만 전국에 지점을 둔 유명한 곳이었다. 각종 커피대회에서 큰 상을 받은 대표의 이름은 예상대로 ‘유동’. 장발의 곱슬머리(혹은 파마머리)를 가진 그 자신이 브랜드로 원두부터 음료 잔에서 자꾸 유동 대표를 마주친다. 직원이 추천해준 시그니처 메뉴인 송산동커피는 마냥 달기만 하지 않은 크림커피라 마음에 쏙 들었다. 이런 커피는 대부분 양도 짠데 유동커피는 참 ‘혜자’롭다.
모하아트센터 구불구불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찾아가는 여정은 앗, 뜨겁다. 뜨거워.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얼음 가득 넣은 커피다. 가도 가도 길밖에 없어 속상하던 터에 나타나준 모하아트센터. 정원에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공룡 조형물이 눈에 띈다. 뭔가 예사롭지 않다 생각했는데, 예술 작가들이 찾아와 작업을 하기도 하고 비정기적으로 전시 기간도 갖는단다. 현재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한산한 분위기였지만 모하아트센터만의 매력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와플, 핫도그, 피자까지 간단한 브런치를 하기에도 손색없는 공간이다.
울산언양불고기 외고산옹기마을의 허진규 옹기장인은 대표적인 울산의 맛으로 ‘언양불고기’를 추천했다. 울산 외에도 ‘언양불고기는 우리가 최고야’ 하는 도시들이 있는 터라 그 맛이 정말 특별할지 살짝 의아했다. 그런데 기자는 바보였다. 언양불고기가 탄생한 곳이 바로 울산 울주군 언양읍이었던 것이다! (저만 몰랐던 건 아니죠?) 울산언양불고기를 운영하는 우정오 대표가 그 히스토리를 들려준다. 1960년대 언양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함께 교통의 중심지로 건설노동자가 몰려들었는데 그들이 일과를 마친 후 먹은 것이 언양불고기의 시초라고. 당시 언양에는 커다란 도축장이 있어 삼박자가 딱 맞아떨어진 것. 한우 암소만을 사용한 언양불고기는 꽃등심, 갈빗살, 부챗살을 곱게 다져 석쇠에 굽는데 다른 반찬 없이 이 자체로도 부드럽고 달콤하다!
MORE · 울산울산을 여행하며 ‘중구’를 빼놓으면 진정한 울산 여행기라고 할 수 없다. 울산 원도심인 중구는 온고지신의 멋이 안과 밖에 차분히 흐르는 곳이다. 낡은 것은 새롭고, 익숙한 것은 낯설게. 울산을 빛낼 새로운 공간을 소개한다. 가치를 더하다 ‘이팔청춘 별별마당’ 새천년의 희망을 상징하는 울산 중구 새즈믄해거리에 이팔청춘 별별마당이 또 다른 소통 공간으로서 문을 열었다. NH농협 성남동 지점에서 오랜 기간 전표를 보관하는 장소로 쓰였던 낡은 건물은 지난해 3월 행정안전부의 ‘2019 마을공방 육성사업 공모’에 최종 선정되어 울산 중구청이 나서 유휴공간에 마을 공방 성격을 띤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했다. 이팔청춘 별별마당은 올해 7월 정식 운영을 시작해 지역 예술인과 주민이 함께 교류하며 지역문화를 공유·계승하는 지역문화형 마을공방으로 커나갈 예정이다.
나는 음악을 할 거야 ‘울산음악창작소 음악누리’ 고복수음악관 바로 옆에 음악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설렐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다. 울산음악창작소 음악누리는 40억 원 이상의 비용을 들여 지상 2층 규모에 스튜디오, 합주연주실, 개인연습실, 녹음실, 조정실, 교육실 등을 고루 갖추고 있다. 음악누리를 이용하는 데 특별한 자격은 필요 없다. 뮤지션들의 자생력을 키우기 위한 공간으로서 음악에 대한 재능과 열정을 키울 수 있도록 우수한 환경을 마음껏 써주면 된다. 단 예약은 필수! 음악학교, 전문가 초청강연, 음악인 공개선발, 기획·정기공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도 진행되니 참고하자.
글 정상미 사진 이효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