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창세기(34장~36장) 묵상
※ 에서의 족보(창세기 36장)
이삭의 두 아들 가운데 장남은 에서다.
원래 장자권은 그의 몫이다.
그러나 동생 야곱에게 장자권을 빼앗긴 후,
그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 밀려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오랫동안 잊혀졌던 에서,
즉 에돔의 근황을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 36장은 에서와 그의 자손에 대한 이야기다.
족보 이야기에는 특징이 있다.
특별한 내용은 거의 없이 ‘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의 자손이요’라는 것이 고작이다.
딱히 이야기를 이끌어 갈 만한 스토리 텔링이 없는 까닭이다.
지금까지는 야곱이 핵심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왜 에서의 족보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일까?
그 답을 찾는 것이 창세기 36장을 이해하는 열쇠요,
또한 창세기에서 말하려고 하는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내용 분석을 위해 창세기 36장을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은 창세기 36장 1-19절까지다.
에서의 자손에 대한 것이다.
족보 이야기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패턴을 따르고 있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라는 식이다.
두 번째는 창세기 36장 20-30절이다.
여기서는 세일의 자손을 기록하고 있다.
‘누구는 누구의 자손이며’라는 구절이다.
여기서 세일은 에서가 살던 곳으로
세일의 자손이란 곧 에서의 자손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이 창세기 36장 31-43절까지다.
이 단락은 앞 두 단락의 종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서의 다른 이름인 에돔의 왕들에 대한 기록이다.
창세기 36장을 이해하려면 본 장만을 읽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다음 장인창세시 창세기 37장을 읽어야
비로소 창세기 36장을 기록하는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청새가 37장부터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야곱이 아닌 요셉으로 넘어간다.
즉 하나님 언약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기 전,
원래 장자권의 주인이었던 에서를 반짝 등장시켜
내용의 극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사실 창세기 36장이 없어도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
게다가 이미 잊혀진 에서의 이야기를 굳이 꺼낼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기자는 청세기 36장 한 장 전체를
할애하면서까지 에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이유가 뭘까?
에서를 빼놓고 가기가 너무 미안해서 그런 걸까?
아니다. 장자권을 빼앗긴 자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즉 장자권을 만홀하게 여긴 자와
장자권을 귀하게 여긴 자의 운명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이다.
또한 장자권은 결코 혈통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포함하고 있다.
빼앗길 수도 있고, 빼앗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빼앗긴 자는 분명 에서다.
그를 상징하는 것은 누굴까? 바로 유대인이다.
또한 빼앗은 자는 누굴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은 이방인이다.
그것이 오늘 에서의 근황을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창세기 36장 1절에는
에서의 자손, 즉 에서의 족보를 언급하고 있다.
내용이 꽤나 길고 복잡하다. 등장하는 사람도 많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에서는 세 명의 여인과 결혼했다.
가나안 여인 가운데 헷 족속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의 딸 오홀리바마,
그리고 이스마엘의 딸인 바스맛을 아내로 맞았다.
그의 아내들은 자식을 낳았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아다는 엘리바스를, 바스맛은 르우엘을,
그리고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다는 것이다.
창세기 36장 5절에서는 에서의 이 아들들이
모두 가나안 땅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이 가나안 땅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이유가 뭘까?
가나안이 원래 그들의 것이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창세기 36장 6절에는
에서가 자신의 자식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
자기의 가축, 자기의 모든 짐승,
심지어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났다는 것이다.
에서가 야곱을 왜 떠났을까?
창세기 36장 7절엔
에서가 떠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했기 때문이요,
함께 거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연하다. 땅은 좁고, 사람과 가축이 너무 많아
같이 살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이런 때 누군가는 떠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누가 떠나야 하느냐는 것이다.
본문엔 에서가 떠났다고 한다.
그럼 왜 야곱이 아닌 에서가 떠나야 했을까?
서열상으로 따지면 동생이 양보하는 것이 순리다.
원칙적으로는 그게 맞다.
만약 에서가 장자권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그가 남고, 야곱이 떠났을 것이다.
이게 바로 장자권을 빼앗긴 자의 운명인 것이다.
에서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장자권 하나 때문에 운명이 꼬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가 비록 야곱을 피해 다른 곳으로 떠나기는 했지만
에서의 자식들 역시 번창하고 땅을 소유하고,
그들이 거주하는 세일 땅에서 나름 왕 노릇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바로 창세기 36장 전체의 이야기다.
이제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에서 역시 야곱처럼 복을 받았다면
굳이 장자권 운운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즉 장자권을 빼앗긴 에서가 받은 복과
형의 장자권을 거머 쥔 야곱이 받은 복의 차이가
별로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별 차이가 없다.
에서나 야곱이나 자손과 땅,
그리고 왕노릇 한 것은 똑같으니 말이다.
그러나 에서의 복과 야곱의 복은 다르다.
에서가 받은 복은 이 땅에서의 복, 즉 현세적인 것이다.
자손이 번창하고, 땅을 차지하고,
그 땅에서 왕 노릇 했다고 해서
그게 복이라고 하는 것은 꽤나 위험한 발상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 것인 셈이다.
우리 역시 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에서가 얻고 누린 것들이 고작이다.
자식 잘되고, 돈 많이 벌어 땅부자 되는 것,
그리고 왕노릇 하고 살면 복 받았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밀려난 에서의 근황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밀려난 사람치고는 잘 먹고 잘 살고 있더라는 것이다.
장자권을 빼앗겨서 잘못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오히려 자손 번창하고, 땅도 차지하고,
왕 노릇하면서 나름 멋있게 살고 있더라는 것이다.
에서와 그의 자손들이 얻은 복이란
오늘날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굳이 장자권 빼앗겨도
그다지 문제될 것 없다고 생각할 법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진짜 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영원한 땅인 천국을 차지하는 것,
그리고 그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것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일부분이 아닌 전부다.
그가 없이 얻는 것은 다 가짜다.
그가 없이 누리는 것은 헛된 꿈일 뿐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
예수님을 알되 믿지 못하는 자들이 얻는 것이라곤
고작해야 세상적인 것들뿐이다.
그게 인생의 목표일까? 아니다.
그것은 잠시 잠깐의 영광일 뿐이다.
그것을 축복이라고 알면 올바른 신앙이 아니다.
에서의 것은 이 땅에서만 유효한 것이지만
야곱이 얻은 장자권과 축복권은 영원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하늘과 새땅에서
왕노릇하며 영원히 사는 것이다. 아멘.
- 꿀송이 보약큐티 1년 1독 성경통독학교
남아공 노록수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