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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은 신라시대부터 사용해온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산 이름입니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산 이름인 '재악산(載嶽山=載岳山, 해발 1189m)'을 시대에 따라 일제(日帝) 등이 제멋대로 조작, 변경시켜, 그 자세한 내막을 이해하지 않으시면, 조작과 왜곡된 사유를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복잡합니다.
●'일제가 조작한 천황산(天皇山)의 본래의 산 이름이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이다' 라는, 글을 지난 번에 선생님께 올려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재악산(載嶽山=載岳山)에 대한 두 번째 글을 올려드립니다.
●이 글은 제 페이스북 친구 4,950명에게 하루에 20명 정도씩 차례로 전부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산명인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을 일제 등이 어떻게 천황산(天皇山) 등으로 어떻게 변경시켰는지?
●또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을 왜 재약산(載藥山)으로 변경시켰는지?
●또 울산의 향토사학자 이유수(李有壽)가 1998년에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을 어떻게 천황산(天皇山)으로 왜곡시켰는지?
●또 1961년에 국립지리원이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을 어떻게 천황산(天皇山)과 재약산(載藥山)으로 왜곡시켰는지?를 상세하게 알려드립니다.
●이 글을 여러 선생님들께서 주변에, 또 전 국민에게 자연스럽게 많이 알려, 일제(日帝)와 이유수(李有壽) 등이 조작, 왜곡한 천황산 등을 민족의 고유한 재악산(載嶽山=載岳山)으로 되찾는데 많은 지도와 홍보를 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184(1205). 재악산(載岳山)보다 재약산(載藥山)이 더 많이 알려진 이유(①~⑯)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229?svc=cafeapp
①②③④⑤⑥⑦⑧⑨⑩⑪⑫⑬⑭⑮⑯⑰⑱⑲⑳
●영남알프스의 중앙에 우뚝 솟은 재악산 위치도
●載岳山보다 載藥山이 더 많이 알려진 이유(①~⑯)
①우리들은 1839년 이래 《載藥山》이라는 '산 이름'에 너무 익숙하고, 또 그 '산 이름'이 《靈井寺 創建說話》에 기인한다 라는, 것에 너무나 익숙하여 《載藥山》이 당연하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40여 년 전에 손흥수와 도재국조차도 《載岳山》 산 이름을 처음 조사하기 전에는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②그러나 손흥수와 도재국이 무려 40여 년간 《載岳山》 '山 이름'의 증거를 조사 및 홍보를 해 오면서 《載藥山》이라는 '산 이름'이 허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③손흥수와 도재국이 무려 40여 년간 《載岳山》 '山 이름'의 증거를 조사하면서 《載藥山》이라는 '산 이름'이 왜 생겼는지를 조사한 결과, 《鄭東溪》라는 정체가 불명한 즉, 가공의 인물이 17세기에 《靈井寺》에 주석했던 유명한 《東溪 敬一 禪師, 以下 '禪師'라고도 적음》가 지은 《密陽 載岳山 靈井寺 前後 創建記》와 《載岳山記》 등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면서 그기에 적혀있는 《載岳山》을 《載藥山》으로 변경하여 僞作(허위로 지은)한 글이 소위 말하는 《載藥山 靈井寺 古蹟, 以下 '古蹟'이라고도 적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④그런데 사람들은 이 《古蹟》이 허위인줄도 모르고 그기에 적힌 《載藥山》을 믿었던 것입니다.
⑤《靈井寺》에 실재로 주석했던 실존 인물 《東溪 敬一 禪師》와 가공의 인물인 《鄭東溪》는 완전히 다른 인물입니다.
⑥《東溪 敬一 禪師》가 지은 《密陽 載岳山 靈井寺 前後 創建記》와 《載岳山記》는 《東溪集》에 실려있으며, 《東溪集》은 《東溪 敬一 禪師》가 입적한 후에 《禪師》의 도반(道伴)과 법제자(法弟子), 청신사(淸信士) 등 무려 60 명이 《靈井寺》에서 《禪師》가 남긴 法語(위 密陽 載岳山 靈井寺 前後 創建記와 載岳山記 등)를 集大成한 것이 《東溪集》입니다.
⑦《東溪集》은 우리나라 불교 역사에 중요한 聖寶遺物로서 《동국대학교 출판부》에서 現代에(최근에) 간행한 《韓國佛敎全書》 제17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⑧위 《禪師》가 지은 《密陽 載岳山 靈井寺 前後 創建記》와 《鄭東溪》가 僞作한 《載藥山 靈井寺 古蹟》은 내용은 비슷하나 '산 이름'이 《載岳山》과 《載藥山》으로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사람들을 헷갈리게 합니다.
⑨그런데 僞作한 《載藥山 靈井寺 古蹟》에 기인한 《載藥山》이 《靈井寺》에 주석한 실존 인물인 《禪師》가 지은 《密陽 載岳山 靈井寺 前後 창건기》에 기록된 《載岳山》보다 널리 알려진 이유가 무엇인가를 조사한 결과는 《古蹟》에 기록된 내용을 1839년 이래 《表忠寺》의 前身인 《靈井寺》의 창건설화로 널리 사용, 홍보하였기 때문입니다.
⑩반면에 《禪師》가 지은 《密陽 載岳山 靈井寺 前後 創建記》와 《載岳山記》 등은 《表忠寺》에 주석한 스님들뿐만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현대(최근)에 《東溪集》이 《韓國佛敎全書》에 수록되면서부터 일반 대중이 아닌 불교를 연구하는 소수의 스님과 소수의 불교학자 등에게만 알려졌고, 일반 대중에게는 최근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⑪또 위에 언급한 1839년은 《靈鷲山 表忠祠》를 《載岳山 靈井寺》로 移建한 년도이며, 상세한 내용은 이 게시판의 여러 글에 있으며, 내용이 너무 복잡하고 길기 때문에 여기에 자세하게 언급할 수 없습니다.
⑫본 《古蹟》이 허위로 지어졌다는 증거는 《無二堂巨芙 큰스님》이 생전에 구입한 《載藥山 靈井寺 古蹟》 원본을 《表忠寺》가 구입하지 않은 것도 큰 이유 중에 하나이며, 더 중요한 것은 그 《古蹟》의 내용을 상세히 분석한 결과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이 적혀 허구로 되어 있습니다.
⑬《無二堂巨芙 큰스님》이 《表忠寺》에 본 《古蹟》을 구입 요청한 내용도 너무 길어서 여기에 상세히 언급할 수 없고, 이 게시판 등에 따로 상세히 적어 놓았습니다.
⑭載岳山보다 載藥山이 더 많이 알려진 결정적인 중요한 이유는 손흥수와 도재국 등이 40년 동안 찾아낸 《載岳山의 증거 무려 80여 건》이 表忠寺의 스님들뿐만 아니라 불교학계와 밀양의 향토사학계, 밀양시민, 표충사 신도, 밀양문화원 회원, 밀양의 儒林사회, 表忠祠 三大師 享祀에 참여하는 유림들, 관공서, 밀양의 시민단체, 표충사를 관광하는 수많은 관광객들, 載岳山을 등산하는 수많은 등산가들, 우리나라의 地名을 변경하는 국가기관인 국토지리정보원, 국토지리정보원 소속 국가지명위원, 지방자치단체의 지명위원, 정치인들, 밀양시청, 산 이름을 직접 행정에 사용하는 밀양의 수많은 공무원 등이 거의 몰랐고, 또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⑮載嶽山은 신라시대부터 우리 민족과 우리 민족왕조, 우리나라 불교사, 우리나라 근ㆍ현대사에 끊임없이 공적, 사적으로 사용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당연히, 반드시 사용해야 할 우리 민족 고유의 산 이름입니다.
⑯嶽의 略字는 岳입니다. 옛날이나 지금도 간편한 한자어 사용이 빈번하여 載嶽山을 載岳山으로 많이 표기하기도 합니다. 특히 목판에 새기거나 금속활자를 주조할 때는 간편한 岳 字를 더 많이 사용했습니다.
●표충사 일주문 현판
●표충사 일주문 앞에 선 손흥수(왼쪽)와 도재국(오른쪽)
●승용차로는 《弘濟橋》를 건너 바로 우회전하여 표충사로 들어가므로, 차량으로 표충사로 진출입하는 사람들은 이 현판을 잘 볼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산문(山門)과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사찰까지는 긴 직선의 도로로 되어 있는데, 표충사는 산문과 일주문 사이에 《홍제교 弘濟橋》가 있고, 또 도로가 굴곡지고, 또 산문의 뒷쪽에 《載嶽山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또 산문의 바로 남쪽옆으로 난 길을 통해 외부인 차량이 주차장으로 진출입하고 있어, 《載嶽山門》의 현판을 잘 볼 수가 없을 뿐만아니라,
●2017.8.17 수많은 사부대중이 운집한 가운데 산문 준공식 및 현판 제막식을 할 때도 산문의 앞쪽에서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운집한 사부대중이 산문의 뒷쪽에 《載嶽山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날 도재국은 준공식을 취재하는 불교신문사와 일반 기자분들에게 일일이 산문 뒷쪽에도 《載嶽山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니까 같이 사진을 찍어 보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지금도 표충사가 소재한 대부분의 《단장면민》과 《밀양시민들》조차도 산문의 뒷쪽에 《載嶽山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줄을 잘 모릅니다.
●이래서 손흥수와 도재국은 산문의 앞쪽에 《護國聖地 載嶽山 表忠寺》라는 현판을 다시 편액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2017.8.17 산문 준공식과 《현판 휘호》를 결정하기 전에도 손흥수와 도재국은 여러 차례 표충사 《도원 법기 주지 스님》을 방문하여 산문 앞쪽의 현판을 《護國聖地 載嶽山 表忠寺》로 해야 한다고 건의드리기도 했으나, 결국은 지금과 같이 산문의 앞쪽과 뒷쪽에 각각의 현판이 편액되었습니다.
○일주문에 《載岳山 表忠寺》의 현판은 2017.3.12에 '載嶽山 表忠寺'의 《도원 법기 주지 스님》의 주도로 편액했으며, 휘호는 '靈鷲山 通度寺'의 방장이신 《원명 지종 큰스님》이 내리셨습니다.
○위 사진은 몇 년 전에 재악산(載嶽山=載岳山) 산명 복원을 하는데 표충사가 앞장서 달라고 표충사 주지스님을 만나러 가면서 일주문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처럼 지난 40여 년간 손흥수와 도재국은 표충사 주지 스님이 새로 부임해오실 때마다 표충사를 찾아가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載嶽山 산명 복원 운동 40여 년의 세월이 지나다 보니 손흥수는 83세 백발노인이 되었고, 도재국도 73세 노인이 되었습니다.
●표충사 산문 현판
●위 사진은 2017.8.17 표충사 산문 준공식 사진입니다.
○위의 표충사 산문의 《載嶽山문》 현판은 《도원 법기 주지 스님》의 주도로 편액했으며, 휘호는 대한불교 조계종 宗正 《진제 법원 대종사님》이 내리셨습니다.
●《載嶽山門》의 현판은 산문의 뒷쪽에 걸려 있어, 표충사의 산문을 승용차나 버스, 도보 등으로 통과할 때는 볼 수 없고, 산문을 빠져나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차량은 산문의 바로 남쪽 옆으로 지나다니므로 차를 탄 사람들은 산문 뒷쪽에 《載嶽山門》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지를 알 수가 없고, 또 걸어서 산문을 통과하는 사람들도 산문을 통과한 뒤에, 뒤를 잘 돌아보지 않으므로 산문 뒷쪽에 《載嶽山門》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또 승용차로 산문 중앙을 바로 통과하여 표충사로 들어갈 때도 《載嶽山門》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특히 오후에 표충사를 빠져나올 때도 승용차로 《弘濟橋》를 지나 바로 약간 우회전하여 100미터쯤 거리에 산문이 보이므로 서쪽의 강한 햇빛의 역광으로 산문 중앙의 《載嶽山門》 이라는 현판을 잘 볼 수 없고, 또 《弘濟橋》를 통과하여 바로 약간 우회전하여 산문까지의 거리가 짧으므로 현판 《載嶽山門》을 올려다보다가는 운전하기가 어려우므로 현판 《載嶽山門》을 잘 볼 수가 없습니다.
●표충사를 나올 때도 《홍제교》를 통과하여 바로 약간 우회전하여 산문까지의 직선거리가 일직선으로 몇백 미터 이상이 되면, 그것도 신경을 써서 보아야만 산문에 《載嶽山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것을 겨우 볼 수 있으나, 표충사의 진출입로는 이런 도로 구조가 아닙니다.
●산문 뒷쪽의 현판 《載嶽山門》이 걸린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문 뒷쪽에 《載嶽山門》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산문의 앞쪽에는 《護國聖地表忠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문에 《護國聖地表忠寺》 라는 현판 하나만 걸려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산문에 嶽 字가 있는 유명한 사찰의 현판 사진
●母岳山 金山寺
●黃岳山 直指寺
●雪嶽山 新興寺
●冠岳山 觀音寺
●雉岳山 上院寺
●天皇山과 載藥山, 香爐山이 허구와 거짓, 조작, 엉터리라는 경위와 증거 : (①~⑰)
①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에는 표충사(表忠寺)라는 큰 절이 있습니다
●위의 1번은 表忠寺 구역이고, 2번 구역은 表忠祠 구역입니다.
②이 절은 유불(儒佛)이 공존하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절입니다.
즉, 하나의 경역(境域)에 유교식(儒敎式) 사당 및 서원과 불교식(佛敎式) 절이 같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 절의 사당인 표충사(表忠祠)에는 임진왜란 때 승려로서 창의(倡義)하여 왜적과 싸워 크게 이겨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四溟大師). 기허대사(騎虛大師)를 추념하기 위해서 영정(影禎)과 신위(神位)를 모시고 수백 년째 나라(조정)에서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왔습니다.
③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전국의 서원과 사당 등이 600여 곳으로 늘어나 그 지방의 유명 인사에 대해 향사(享祀) 등을 지내오면서 서원과 사당의 향사 등으로 인해서 전국적인 폐해가 왕조(王朝:國家)의 유지에까지 심각한 해를 끼치게 되자 대원군(大院君)이 전국의 서원과 사당 600여 곳 중에서 47개만 남기고 모두 훼철하여 향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습니다.
④그후 13년 동안 향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다가 시대와 사정이 바뀌자 대원군이 훼철한 전국의 서원과 사당에서 하나 둘씩 향사를 다시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⑤이즈음 기허대사의 고향인 충청도 금산(金山)에서 기허대사의 향사를 다시 지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밀양의 유림(儒林)들이 당시의 밀양부사(密陽府使) 권인국(權仁國)에게 이 소식을 보고하여 밀양의 유림들이 주축이 되고 표충사(表忠寺)의 협조를 받아 삼대사(三大師)의 신위(神位)와 영정(影禎)을 표충사(表忠祠)에 다시 복설(復設)하여 임진왜란 이후 밀양 표충사(表忠祠)에서 수백 년 동안 향사를 지내왔던 삼대사인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기허대사의 향사를 다시 이어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⑥이렇게 유명한 밀양의 表忠寺와 表忠祠의 뒷산에는 해발 1189m의 사자봉(獅子峰)과 해발 1111m의 수미봉(須彌峰) 등의 큰 산봉우리가 있으며, 신라시대부터 사자봉을 載嶽山(일명 載岳山)이라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⑦그런데 1839년에 영정사(靈井寺, 1839년 이전의 表忠寺의 명칭)의 주지 월파천유(月坡天有)가 경상도 밀양도호부 무안 영취산(靈鷲山)의 백하난야(白霞蘭若)에 있던 당초의 삼대사의 신위를 모시던 表忠祠를 경상도 밀양도호부 중동면(단장면) 載嶽山 아래에 있는 靈井寺에 옮겨지어면서 배산(配山)인 載嶽山을 載藥山으로 변경하고 동시에 절의 이름을 表忠寺로 변경함과 동시에 영취산 백하난야 表忠祠에서 지내던 삼대사의 향사를 이건한 表忠祠에서 이어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조선후기까지 지금의 밀양시(密陽市)를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라 했으며, 줄여서 밀양부(密陽府)라 했으며, 그 수장(首長)인 지방관(地方官)을 도호부사(都護府使)라 했으며, 줄여서 부사(府使) 즉, 밀양부사(密陽府使)라 했음.
⑧그런데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여 식민지로 만들면서 해발 1189m 사자봉인 위 월파천유가 변경한 載藥山을 일제(日帝)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그들 천황(天皇)의 이름을 따서 天皇山으로 조작하고, 동시에 須彌峰을 載藥山으로 조작하고, 또 향로봉(香爐峰)을 향로산(香爐山)으로 조작하므로써 하나의 산 덩어리(산군 山群)를 3개로 나누어 3개의 산 이름을 개악, 조작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⑨그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잇따라 《6ㆍ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제가 일제식민지 강화를 위해 조선팔도의 여러 지명을 개악(改惡), 조작한 것을 바로잡음과 동시에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된 국토를 개발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인천(지금의 인하대학교 교정)에 일제가 설치한 우리나라 수준점에 맞추어 전국 주요 지명의 해발고를 측정하여 전국의 도로와 하천제방 등 중요 국가 기반시설과 중요 건축물과 전후방의 군사기지와 군 작전에 필수적인 산명과 산의 해발고를 측정하는 정책인 통칭 《지명고시작업》을 건설부 산하 국립지리원에서 시작했습니다.
⑩1961년에 전국의 지명고시작업을 진행하면서 국립지리원은 전국의 시도지사에게, 전국의 시도지사는 산하 전 시장군수구청장에게, 전국의 시장군수구청장은 산하 읍면동장에게 관할 구역의 모든 중요 지명[행정지명, 자연지명(산명.하천명 등), 역사지명, 특수시설물지명 등]을 조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1961년은 해방된지 얼마지 않았고, 《6ㆍ25 한국전쟁》의 포성이 멈춘지 얼마되지 않은 상태에서 《1960년대 심한 보릿고개》로 2,700만 국민이 배고픔으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먹고 살기도 힘든 시기에, 또 일제 잔재가 아직도 서슬이 퍼렇게 남아있는 상황에서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부족한 전국의 읍면동 공무원은 각 마을별로 담당하여 수많은 지명 조사를 하러 각 마을과 각 사찰 등에 나갔습니다.
⑪각 마을에 나간 공무원들은 마을의 이장과 유지들에게 마을의 여러 지명을 물어 조사했고, 각 사찰에 나간 공무원들은 사찰의 주지 등에게 사찰 뒤의 산 이름 등을 조사했는데, 일부 마을 이장과 유지들과 사찰의 주지들은 일제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어, 일제시대에 부르던 각종 지명과 특히 일제식 산명을 스스럼없이 사용했고, 조사하러 나온 읍면동사무소의 공무원들에게 일제식 산명을 그대로 알려주었습니다.
그리하여 표충사 뒷산 조사를 예를 든다면
표충사 주지와 마을이장과 마을 유지 등은 일제가 사용하던대로 사자봉을 천황산으로 불러주어 조사했고, 수미봉을 載藥山으로 불러주어 조사하여 면장에게 보고하였고, 면장은 군수에게, 군수는 도지사에게, 도지사는 국립지리원장에게 조사 결과를 보고 했습니다.
1961년도에 이렇게 전국적으로 조사한 지명이 무려 20만 건이었고, 1961.4.21에 그중에서 15만 건을 국립지리원은 최종적으로 지명고시를 해버렸습니다.
⑫일제잔재 지명을 없앤다는 우리 정부의 지명조사는 위와 같이 일부 지명은 조사 불실로 도로 일제식 지명을 우리나라가 법적으로 인정해주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그 대표적인 지명이 獅子峰을 天皇山으로 잘못 지명고시했고 동시에 須彌峰을 載藥山으로 잘못 지명고시하는 엄청난 잘못이 저질러졌습니다.
⑬위와 같이 잘못 지명고시한 천황산과 載藥山을 없애고, 천황산을 載嶽山으로 복원하고 동시에 載藥山을 수미봉으로 즉, 원래의 산명과 봉우리 명칭으로 복원(변경)하려니까, 그기에 직ㆍ간접적으로 관련된 당사자들(일제 잔재세력과 그 당시 위정자들과 그 위정자들의 후대에 영향을 받는 기관,단체장들과 관련 後學들과 관련 관변향토사학자 등등)의 엄청난 반대와 압력 등이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와 각 지방의 구석구석까지 독버섯처럼 피어나서 반대와 저항을 하고 있으며, 여기에 지역이기주의와 정치세력까지 이해타산을 하면서 가세하고 있는 가히 복마전이 뿌리깊게 전개되고 있으나 표면적으로는 그런 실체를 숨기고 애국주의자인냥 민족주의자인냥 위장하여 각종 일제 항거 기념식에 참석하는 히안한 상항이 目下 전개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통탄할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⑭위와 같은 상황에서 밀양 사람 83세의 손흥수와 73세의 도재국은 금년들어 무려 40년째 천황산을 載嶽山으로, 載藥山을 수미봉으로 민족의 산명으로 복원하기 위해서 私的으로 많은 사비를 들여 평생동안 홀홀단신으로 반대세력에 저항하면서 산명복원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載嶽山의 증거를 무려 80여 건을 찾아내었고, 우리 민족 王朝史에서 天皇山과 載藥山의 증거 또는 근거는 단 한 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⑮상황이 위와 같음이 명백함에도 1998년에 울산의 향토사학자 이유수가 느닷없이 나타나 객관적ㆍ학술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천황산일식명설고찰》이라는 A4용지 12페이지 분량의 글로써 載嶽山과 須彌峰을 부정하면서 載嶽山을 天皇山으로 조작함과 동시에 須彌峰을 載嶽山이라고 터무니없이 조작했습니다.
●《천황산일식명설고찰》이 명명백백하게 허구로 조작된 글이라는 것은 손흥수와 도재국이 공동조사 및 분석한 A4용지 320 페이지 분량의 글이 이 게시판 등에 증거로 등재되어 있으므로 전국민께서 살펴보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①②③④⑤⑥⑦⑧⑨⑩⑪⑫⑬⑭⑮⑯⑰⑱⑲⑳
⑯신라시대부터 우리 민족이 사용해 온 載嶽山이 일제가 조작한 천황산과 이유수가 허구로 작성한 《天皇山日式名說考察》이라는 허구의 글과 조선시대에 정체가 불명한 鄭東溪가 허구로 작성한 《載藥山靈井寺古蹟》에 의해 말살되고 있습니다.
즉, 명백한 載嶽山이 위 '2 개의 허구로 작성된 글'로 말살되고 있습니다.
⑰이래서 손흥수와 도재국은 이유수가 허구로 작성한 《天皇山日式名說考察》과 정체불명의 鄭東溪가 작성한 《載藥山 靈井寺 古蹟》을 낱낱이 분석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민족의 산명인 載嶽山 산명 보전에 전 국민과 전 민족이 함께 동참해 주시기를 엎드려 간절히 소망합니다.

첫댓글 지명 업무는 원래는 국방부에서 보다가 건설부 산하 국립지리원(국토지리정보원 前身)으로 이관되었습니다
국토지리정보원에 收藏 중인 일제가 작성한 1/50,000 지형도에는 표충사 남쪽의 香爐峰을 香爐山으로 조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관리하는 지명원부에는 국문 한문의 지명과 경위도 좌표, 지명 유래, 산의 경우 해발고 등 무려 27개?의 항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위도 좌표, 해발고, 島嶼의 명칭 등은 군사작전 및 전쟁 수행에 필수 항목으로 국방 업무에 매우 중요하여 처음에는 국방부에서 관리했으나, 국토개발 및 도시 관리 등의 업무가 늘어 나면서 국립지리원으로 이관되었습니다.
●이구재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