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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찻집(자유게시판) 스크랩 2011년 탐매여행 Ⅸ - 대명매(大明梅)는 만개(滿開) 중
눌인 양도영 추천 0 조회 67 11.04.08 20: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11년 탐매여행 Ⅸ - 대명매(大明梅)는 만개(滿開) 중

 

 

 

 

예향(藝鄕) 광주 전남대학교에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정매(庭梅) 가운데 가장 아름답게 가꾸어 놓은 홍매 한 그루가 있다. 1620년 당시43세였던 고부천(高傅川)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을때 황제로부터 희사 받아 지금껏 잘 자라고 있는 매화이다.

 

 

 

고부천(高傅川)은 누구인가?

 

 

먼저 매화를 한국으로 들여온 고부천(高傅川)에 대하여 알아보자.

 

 

고부천의 가계

 

 

고조(高祖) 고운(高雲) - 증조(曾祖) 고맹영(高孟英) - 조부(祖父) 고경명(高敬命) - 부(父) 고인후(高因厚)로 이어지는 선대(先代)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또 삼촌 고종후(高從厚)와 고용후(高用厚)도 문과에 급제하였을 정도로 명벌가(名閥家)였다.

 

 

『문과방목』을 찾아 이들의 급제 내역을 알아보자.

 

고운(高雲) (1519 中宗 14年 己卯別試 19/19), 고맹영(高孟英) (1540 中宗 35年 庚子別試 16/19), 고경명(高敬命) (1558 明宗 13年 戊午式年 1/35), 고종후(高從厚) (1577 宣祖 10年 丁丑別試 7/17), 고인후(高因厚) (1589 宣祖 22年 己丑增廣 16/34), 고용후(高用厚) (1606 宣祖 39年 丙午增廣 6/36), 고부천(高傅川) (1615 光海 07年 乙卯謁聖 8/8)

 

 

고조 고운(高雲)은 중종(中宗) 때에 문신이자 화가로 조광조(趙光組) 등과 친교를 맺었다가 을묘사화에 연루된 분이다. 형조좌랑을 지냈다. 증조 고맹영(高孟英)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조부 고경명(高敬命)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壯元) 급제하여 호당에 뽑히고 교리, 옥당(玉堂) 등 벼슬을 지낸 유학자였다. 선조 때 동래부사로 있다가 벼슬을 떠났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장흥에서 6천여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 부친(父親) 학봉(學峯)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금산(錦山) 전투(戰鬪)에서 순결(純潔)하였다. 백부(伯父) 준봉 고종후(高從厚)는 아버지와 동생의 복수(復讐)를 하기 위하여, 스스로 복수의병장으로 부르며 출전(出戰)하였고 다음해 진주성에서 순절(殉節)하였다. 한 집안에서 세 사람이 순절하니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세워 그 충절(忠節)을 표창하고 사우(祠宇)를 건립(建立)하여 추모했다.

 

 

고부천<高傅川;1578(선조11년)∼1636(인조14년>의 생애(生涯)

 

 

자가 군섭(君涉)이요, 호는 월봉(月峰), 본관이 장흥(長興)이고, 광주(光州) 출신이다. 『문과방목』을 보면 고부천은 선조(宣祖) 38년(160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5위로 합격하였고, 10년 후인 광해군(光海君) 7년(1615) 을묘(乙卯)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5위로 급제한다. 고처후(高處厚)의 자로 태어났으나 고인후(高因厚)에게 양자로 간 것으로 되어 있다. 어머니는 함풍이씨(咸豊李氏)로 관찰사(觀察使) 이경(李璥)의 딸이다. 형은 고부림(高傅霖)이며, 동생은 고부즙(高傅楫)과 고부량(高傅良)이다.

 

 

자세히 서술하면

 

 

1578년 선조(宣祖) 11년 (무인) 7월 13일 광주 압보촌 옛 집에서 태어났다. 용모와 자태가 온후(溫厚)하였고, 총명(聰明)하고 민첩함이 뛰어났다. 갓난아이 때에 부모(父母)와 함께 누워 있는 모습이 "천(川)자 모양이다"하여서 '천(川)'자로 이름을 지었다.

1579년 선조(宣祖) 12년 (기묘) 2세 부(父)가 7명 가운데 3등으로 진사(進士)에 입격하였다. 1585년 선조(宣祖) 18년 (을유) 8세 할아버지에게 학문(學問)을 배웠는데 손자들 중 가장 기특히 여겼다.

1588년 선조(宣祖) 21년 (무자) 11세 정월 9일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함평이씨가 별세(別世)하였다.

 

1589년 선조(宣祖) 22년 (을축) 12세 부(父)가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에 6등으로 급제(及第)하였다.

1591년 선조 24년 (신묘) 14세 본도(本道) 감사(監司)가 선비들을 시험하는 백일장(白日場)을 열었는데, 수석(首席)을 하여「논어(論語)」한 질을 상(常)으로 받았다. 작은 아버지가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하였다.

1592년 선조(宣祖) 25년 (임진) 15세 4월에 왜적(倭敵)이 침입(侵入)하였다. 7월 10일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금산에서 함께 순절하였다.

1593년 선조 26년 (계사) 16세 6월 29일 백부(伯父)도 진주(晋州) 남강 촉석루(矗石樓)에서 순절하였다. 2년 사이에 할아버지, 큰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거듭 순절하자 할머니 정경부인 울산김씨의 슬하(膝下)에 의지하게 되었다. 작은 아버지 정헌공과 막내 아버지 청사공이 함께 가르치니 학업(學業)이 크게 성취(成就)되었다.

1594년 선조 27년 (갑오) 17세 9월에 3년상(喪)을 마쳤다.

1598년 선조 31년 (무술) 21세 평강 채씨(平康蔡氏) 충익(忠益)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충익은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추층받았다.

1600년 선조 33년 (경자) 23세 할아버지의 사우(祠宇)를 광주 제봉산(霽峰山) 남쪽 기슭에 세우고 백부(伯父)와 부(父)를 배향(配享)하였다. 작은아버지를 따라 금강을 건너면서 '서리 내리는 형문의 밤, 하늘은 차가워도 금강은 흐르는구나(霜落荊門夜 天寒錦水流)'라는 오언 율시 한 수를 차운(次韻)하여 지었다.

1603년 선조 36년 (계묘) 26세 조부의 사우(祠宇)에 '포충(褒忠)'이라는 편액이 내려왔다.

1605년 선조 38년 (을사) 28세 진사(進士) 3등급(等級)에 제5등으로 입격(入格)하였는데, 이 때 작은아버지 청사공(晴沙公) 고용후(高用厚)가 수석(首席)을 차지하였다.

1606년 선조 39년 (병오) 29세 청사공이 증광(增廣)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다.

1608년 선조 41년 (무신) 31세 12월에 할머니 정경부인 울산김씨가 별세(別世)하였다.

1615년(광해군 7) 38세 알성문과시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지제교(知製敎)·사헌부장령 등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1617년 이이첨(李爾瞻)이 정인홍과 함께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여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켰는데,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진사 정택뢰(鄭澤雷)와 함께 폐모론의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1620년(광해군 12)과 1624년(인조 2)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 해 고향 창평(昌平)에 있을 때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여 태인(泰仁)까지 갔으나, 이괄이 이미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1625년(인조 3) 정사정훈진무공신(靖社正勳振武功臣)에 기록되었고,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공주 등지로 피난(避難)가는 동궁을 호가(扈駕)하였으며, 소무공신(昭武功臣)에도 기록되었다. 그 후 장령(掌令)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백부(栢府: 사헌부), 춘방(春坊: 세자시강원), 시정(寺正), 사예(司藝)를 역임하였다.

 

 

그는 학문이 고매하고 천품이 겸손하면서도 의리에 강직하였다. 그가 죽자 김상용(金尙容)·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 등 당시 명공석학들의 많은 만장이 답지하였다. 창평의 도장사(道莊祠)에 배향되었다.

 

성균관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자필 시

 

저서로는 『월봉집(月峰集)』 9권이 있다. 자필 시는 성균관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자료는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인조실록(仁祖實錄)』,『전라남도지(全羅南道志)』, 『사마방목(司馬榜目)』, 『기년편고(紀年便攷)』,『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부천(高傅川)의 형제들

 

 

한국학중앙연구원(韓國學中央硏究院)에서 나온『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에서 고부천(1578∼1636)의 형제들을 검색해 보았다.

 

 

고부림(高傅霖)은 진사시에도 입격하지 않은 것 같다. 일찍 졸(卒)한 것 같다.

 

 

자(字) 군평인 고부즙(高傅楫;1579∼?)은 35세 때인 광해군(光海君) 5년(1613) 계축(癸丑)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43위를 하였는데, 형으로 고부천(高傅川)과 고부림(高傅霖)이 있다고 되어 있다. 동생으로는 고부량(高傅良)이 있다.

 

 

4년 아래인 동생 고부량(高傅良;1582∼?)은 24세 때 선조(宣祖) 39년(160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67위를 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 전력은 유학(幼學)이요, 부모구존란에는 부모(父母)가 다 돌아가고 없는 처지(處地)인 영감하(永感下)로 나타나 있다. 고처후(高處厚)는 학생(學生)인데, 생부는 행성균관권지학유(行成均館權知學諭) 고인후(高因厚)이며, 형으로는 고부림(高傅霖), 고부천(高傅川), 고부즙(高傅楫)이 있다고 소개해 두었다. 이를 보면 고부량(高傅良)의 생부가 고인후(高因厚)이며, 고처후(高處厚)에게 양자(養子)간 것이 된다. 그러나 <국조 문과 방목> 고부천(高傅川) 난에는 ‘광해군(光海君)7년(1615년), 알성시(謁聖試) 병과5(丙科5)로 급제하였으며, 부(父)는 고인후(高因厚)인데, 생부(生父)는 고처후(高處厚)이다’라고 되어 있어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다.

 

 

박주대(朴周大) 편저『진신팔세보(縉紳八世譜)[文科編]』(경인문화사, 1983)을 보면 헌종(憲宗) 15년(184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3위를 하였고, 자가 익여(翼汝)인 고시홍(高時鴻;1803∼?)의 가계(家系)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8대조] 고경명(高敬命) 참의(參議) ? [7대조: 6대조1의 부] 고인후(高因厚) 학유(學諭) ? [6대조1] 고부림(高傅霖), [6대조2] 고부천(高傅川) 필선(弼善) ? [5대조1: 고조1의 부] 고두흥(高斗興)현령(縣令) ? [고조부] 고세태(高世泰) ? [증조부] 고응직(高應直) ? [조부] 고만언(高萬彦) ? [부] 고진겸(高進謙)

 

 

『호남인물지(湖南人物志) 광주편(光州編)』에서 고시홍을 찾아보면,‘본관은 장흥(長興), 의열공(毅烈公) 인후(因厚)의 후손이다. 헌종(憲宗) 15년에 문과(文科)하여 응교(應敎)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고 청백(淸白)으로 이름이 있었다. 유집(遺集)이 있다.’고 되어있다.

 

 

대명매(大明梅)는 언제 들여왔나?

 

 

 

먼저 고부천(高傅川)이 매화를 중국에서 들여온 시기가 언제인지 살펴보자. 『조선왕조실록』에는 고부천이 북경(北京)에 다녀왔다는 내용이 2곳 보인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고부천(高傅川)에 대한 기사가 인조 3년(1625) 2월11일부터 인조 10년 8월 24일까지 92건이 나타나나 북경(北京)에 다녀왔다는 내용은 없다.

 

 

『조선왕조실록』 광해 13년(1621) 4월 3일(갑술)기사를 보면

 

 

동지사 임석령(任碩齡)·최정운(崔挺雲), 서장관 고부천(高傅川)이 칙서를 받들고 들어왔다. 칙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는 조선 국왕에게【성은 모, 휘는 모.】칙유(?諭)한다. 예부(禮部)의 문서에 ‘왕의 주문에 의거하면 표류한 사람 정진명(丁陳明) 등 14명이 왕의 지경 안에 이르렀으므로 지금 배신(陪臣)인 이조 참판 임석령(任碩齡) 등을 파견하여 보내 왔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중국 조정을 높이 받들어 충직과 순종을 게을리하지 않는 점을 모두 알았으니, 짐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이에 특별히 칙서를 내려 장려하고, 동시에 백금(白金)·문금(文錦)·채단(綵段)을 하사하여 근면 성실함에 보답한다. 이에 임석령 등으로 하여금 가지고 돌아가도록 하였으니, 도착하면 받아 볼 것이다. 그리고 호송해 온 배신 임석령 등과 서장관이나 통사관(通事官)인 고부천 등과 종인(從人) 김중록(金中祿) 등에게 각각 그들의 노고에 보답하여 차등(差等) 있게 하사하였다. 이 점도 아울러 알려주는 바이니, 왕은 짐의 지극한 뜻을 잘 알도록 하라. 그러므로 칙유하는 바이다.”

 

 

辛酉四月初三日甲戌冬至使任碩齡?崔挺雲、書狀官高傅川, 奉勅入來, 勅曰: “皇帝勅諭朝鮮國王。 【姓, 諱。】該禮部題稱, 據王奏, 有漂海人丁陳明等十四名, 至王境內。 今差陪臣吏曹參判任碩齡等管送前來, 具見王尊奉天朝, 忠順不懈, 朕甚嘉之。 玆特降勅?勵, 仍賜白金文錦綵段, 以答勤誠。 就令任碩齡等齎回, 至可收領。 其押解陪臣任碩齡等、書狀通事等官高傅川等、從人金中祿等, 各效勤勞, 賜賚有差, 竝諭知之。 王其體朕至意, 故諭。”

 

 

 

또『조선왕조실록』 인조 5권, 2년(1624) 3월 25일(기묘)자 기사를 보면

 

이수광(李?光)을 좌참찬으로, 정온(鄭蘊)을 형조 참판으로, 김장생(金長生)을 집의로, 정종명(鄭宗溟)을 사간으로, 이윤우(李潤雨)를 장령으로, 김영조(金榮祖)를 정언으로, 강석기(姜碩期)를 이조 좌랑으로, 이경석(李景奭)을 주서로, 정립(鄭?)을 일본 회답사(回答使)로, 강홍중(姜弘重)을 부사(副使)로, 김남중(金南重)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이덕형(李德泂)을 주문사(奏聞使)로, 권반(權盼)을 부사로, 고부천(高傅川)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以李?光爲左參贊, 鄭蘊爲刑曹參判, 金長生爲執義, 鄭宗溟爲司諫, 李潤雨爲掌令, 金榮祖爲正言, 姜碩期爲吏曹佐郞, 李景奭爲注書, 鄭?爲日本回答使, 姜弘重爲副使, 金南重爲從事官, 李德泂爲奏聞使, 權盼爲副使, 高傅川爲書狀官。

 

 

 

이를 통하여 고부천은 1620년과 1624년 2번에 걸쳐 중국으로 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중 광해 13년(1621) 4월 3일 실록의 내용대로 甲戌(1620) 동지사(冬至使)로 임석령(任碩齡)과 함께 주문사(奏聞使)로 가서 황제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면 1620년에 은술잔, 화보 4권, 홍매화 1본을 하사받았을 것 같다. 1620년 9월 26일 명(明) 14대 황제 태창제(泰昌帝) 광종(光宗)이 재위 29일 만에 홍환안 사건으로 사망하자 뒤를 이어 황제위에 오른 천계제(天啓帝) 희종(熹宗;재위:1620년 ~ 1627년)에게서 받았을 것이다. 참고로 중국 사신의 행차는 보통 30명 - 정사(正使)·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각 1명, 대통관(代通官) 3명, 호공관(護貢官) 24명 -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조 때 대제학과 좌의정을 지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는 1620(광해군 12) 4월과 7월에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7월에는 광종(光宗)의 등극하례(登極賀禮)에 참석하기 위해서 였다. 이 때 고부천도 같이 갔다면 한번 더 간 것이 된다. 그의 문집인 『월사집(月沙集)』 권지8(卷之八) 경신조천록(庚申朝天錄)에는 서장관 고부천에게 바치는 - 증별서장관고부천(贈別書狀官高傅川)- 다음의 글이 보인다.

 

秋日離亭木葉飛。

子方西去我東歸。

平生節義君家事。

聞道蒲河已解圍。

 

 

대명매(大明梅)는 만개(滿開) 중

 

 

6대총장 유기춘박사 기념식수              청풍사지 석탑

 

지금 대명매는 전남대학교 대강당 남서쪽 화단 속에 있다. 그 옆에는 초대 총장 남강(南崗) 최상채(崔相彩)박사의 동상이 있다. 강당 앞에는 지석묘와 석탑 2기가 놓여있고, 역대총장들이 기념 식수한 나무들도 보인다.

 

 

 

 

 

 

 

 

 

 

 

 

 

 

 

 

 

초대 총장 남강(南崗) 최상채(崔相彩) 동상

 

이 매화는 고부천(高傅川)이 1620년 명 희종(熹宗)으로부터 하사받은 홍매(紅梅) 화분을 담양군(潭陽郡) 창평면(昌平面) 유촌리(柳村里)에서 350년 동안 재배하여 왔던 것이다. 1961년 10월 17일 농대학장이었던 고재천(高在千)박사가 농대 내로 옮겼다가 1976년 3월 10일 대강당 앞으로 다시 옮겨 심은 것이다.

 

1620년에 분재로 들여왔으니 수령은 약 400년 정도 된 것 같다. 수고(樹高) 약 5.3M, 수폭(樹幅) 6.5m, 근원 직경이 50.6cm 정도 된다. 처음 분재로서 가꾸어서인지 수형이 잘 다듬어 져 있다.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데, 그 뒤에는 1∼2백년 정도된 백매 3그루가 나란히 자라고 있다.

 

 

 

 

 

 

 

 

 

 

 

 근원 직경이 50.6cm 정도

  

 수고(樹高) 약 5.3M, 수폭(樹幅) 6.5m 정도되는 홍매

 1∼2백년 정도된 백매 3그루가 나란히 자라고 있다.

 1∼2백년 정도된 백매 3그루가 나란히 자라고 있다.

백매화도 소담스럽게 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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