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조선 오백세가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불교가 더욱 탄압을 받게됩니다. 영조ㆍ 정조 ㆍㆍㆍ시대에도 종이나 창호지는 전국의 스님들의 부역에 의해 진상이 되었습니다.
파계사 인근(군위군ㆍ부계면)에 한 양반촌이 있었는데 그 양반네들이 아랫 동내에서 장을 봐서 재를 넘다가 절에서 쉬어가면서도,물달라, 밥달라ㆍㆍㆍ 스님들을 종부리 듯 하였답니다. 발심출가한 스님들이 공부는 못하고, 늘 양반들 시중만 드는 것을 본 파계사의 현응조사가 원력을세웠답니다.
전도된 작태를 바로 세우기 위해 100일 양식만 들고 남해ㆍ거제의 무인도로 들어갑니다. 타고 왔던. 뗏목도. 말려서 땔감으로 사용하고 오직 기도에만 매달렸습니다.
무인도에서 죽기를 각오로 100일 기도정진 하시고 마침내, 득력을 하셨답니다. 그 득력으로 무인도에서 파도를 건너왔다고 해서 현응조사를 용파스님이라고 호칭했답니다.
용파스님은 왕에게 승단의 고충을 상소하러 한양에 입성합니다 그 당시 스님은 사대문 출입이 불가했음으로 백의에 솔잎상투를 틀어 변복을 하고 한양에 머물렀습니다. 생계가 곤란해 한강물을 길러와서 내다 팔며 근근히 연명하며 상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답니다.
시간은 흘러 흘러 상소의 뜻을 이룰 수 없어서, 낙향해서 지방관리에게 청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날 밤의 일입니다. 정조대왕의 꿈에 밝은 서기가 나타나 한양읍성 남대문 옆 세번째 객주로 청룡ㆍ황룡이 날아오르며 뻗쳐오르는 꿈을 꾸었답니다. 다음 날 정조는 어전ㆍ별감을 불러 그 객주를 일러주며 객인을 입궁시키라라코 명을 내립니다.
객주에 도착하니 짐꾸리는 객인을 보고 그간 상황을 물어보고는 왕에게 데리고 갑니다. 작금의 승단의 고충을 토로하자 정조대왕이 이르시길, 지금 나에겐 후손을 이을 왕자가 없다. 왕자만 생산해 준다면 용파스님의 원을 들어주겠노라 라고 약속했습니다.
용파스님은 혼자서는 힘이 들어서 금강산에 주석하시는 농산스님을 뵙기를 정조에게 청했습니다 . 아뭏튼. 좋다. 왕자만 생산해 준다면ㆍㆍ ㆍ
그 날 이후로 용파스님 수락산에서, 농산스님은 금강산에서 100일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100일이 댜 되어도 왕손의 기미도 없고ㆍㆍㆍ 또 다시 100일을 기약하며 기도했습니다. ㆍㆍㆍ
용파스님이 정념으로 관을 해보니 이씨조선. 당대엔 스님이나 속인이나 왕자로 태어날 복지은 자가 한명도 없는 상황을 알아차리고선 농산스님에게 서신으로 청을 합니다.
스님! 이 시대엔 왕자로 태어날 복있는 자가 없는 까닭에, 스님께서 미래의 승가를 위해 왕자의 몸으로 바꿀 수 없겠습니까? 부디ㆍㆍㆍ
그 편지를 읽은 농산스님은 용파스님에게 서신을 남기고, 몸을 바꿔. 정조ㆍ후궁의 몸에 듭니다. 이 사실을 모르던 정조대왕은 함께 기도하시던 농산스님께서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용파스님을 궁으로 들라하십니다.
용파스님은 농산스님의 서신을 들고 정조대왕을 뵈러 궁에 도착해보니, 마침 정조대왕과 후궁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들어보니 전날 밤 그 후궁의 꿈에 선농스님이 사연을 밝히고서는 후궁의 자궁으로 들어왔다는 것 입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였답니다. 태몽이 하도 생생하고도 의문이 생겨 대왕에게 고했다는 것 입니다.
10개월이지나. 왕자가 생산되던 날 ㆍㆍㆍ 전국의 사찰ㆍ승려에게 부과된 부역을 죄다 없애고, 스님도 사대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답니다. 이 모두가 파계사 용파스님의 원력에 의해서 ㆍㆍㆍ
소임을 다해 마친 용파스님은 파계사로 돌아와 정진하고 계셨습니다. 어느 날 정조대왕은 스님의 보답으로 스님들께서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암자를 조성했습니다. 그 암자 이름을 왕께서 지었다라고해서 성전암이라고 지었답니다. 그리고 파계사 인근의 땅도 접수해서 파계사명의로 보시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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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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