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이다. 1916년 서울 “송현(松峴) 마루턱”에서 나고 자랐다. 부친은 구한말 일본에 유학 가서 의학을 공부한 진보적 지식인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마땅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 첫 아내와 사별하고 변동림의 모친과 재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변동림은 모친이 마흔하나에 낳은 귀한 딸이었는데, 모친이 일찍 돌아가시면서 자녀들도 흩어졌다. 변동림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잠시 도쿄에서 고학으로 불어를 공부한 후, 1935년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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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두 주일 동안”
스무 살 문학 소녀 변동림은 이상의 문학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실려 대중적 지탄을 받았던 이상의 시 ‘오감도’에 대해, 변동림은 이상의 천재성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라 평가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불꽃이 일었다. 매우 지성적인 불꽃이었다. 이들은 영문학과 러시아 문학을 얘기했고, 베토벤과 모차르트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두 주일 동안 매일 만나 인적 없는 교외에서 나란히 걷기를 반복했던 모양이다. 이상의 유고 수필 ‘슬픈 이야기, 어떤 두 주일 동안’이 당시 정황을 가장 선명하게 그리고 있다.
나는 이 태엽을 감아도 소리 안 나는 여인을 가만히 가져다가 내 마음에다 놓아두는 중입니다… 여인, 내 그대 몸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으리다. 죽읍시다. “더블 플라토닉 슈사이드(double platonic suicide·정신적 동반자살)인가요?” 아니지요. 두 개의 싱글 슈사이드지요… 여인은 내 그윽한 공책에다 악보처럼 생긴 글자로 증서를 하나 쓰고 지장을 하나 찍어 주었습니다. “틀림없이 같이 죽어 드리기로.”
변동림의 회고 글에는 “우리 같이 죽을래?”라는 말을 고백처럼 들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상의 수필 내용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방풍림 우거진 속으로 철로가 놓여 있는 길”을 걸으며, “사람은 하나도 만날 수 없는 황량한 인외경(人外境)”에서 이들은 밀회를 나누었다. 그리고 약속한 날 변동림은 집을 나왔다. 가방에 몇 권의 문학책과 외국어 사전만 달랑 넣고. 그렇게 신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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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안과 김환기, 서로를 지탱하는 힘
김향안은 당돌해 보일 정도로 당찬 여성이었다. 자신감과 대담성은 그 시대 어느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경지였다. 김향안은 1944년 김환기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후, 1974년 환기가 뉴욕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30년간 김환기의 생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내 예술이 세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김환기를 위해, 1955년 김향안 혼자 먼저 프랑스 파리로 날아갔다. 김환기의 작품 슬라이드만 달랑 들고서 말이다. 그녀는 소르본 대학과 에콜 드 루브르에 다니면서, 불어와 미술사를 먼저 공부했다. 그리고 파리 화단의 주요 인사와 교제하여, 김환기의 아틀리에를 구하고 개인전 일정도 잡은 후, 김환기를 파리로 오게 했다.
첫댓글 와... 너무 멋진 분이시다 진보적이고 열정적이고 예술과 사람을 한 번에 사랑하고 사랑받으셨네....
뮤지컬로 알게되었는데 정말 너무 멋진분이시다ㅠㅠㅠ
전문 읽고 왔다! ㅠㅠ와중에 저...두 개의 싱글 수어사이드 부분 너무 좋다...같이 죽을래? 이거 뭐야 너무 멋진 고백이야...
절판이긴 한데 구할 수 있거나 도서관에서 대출된다면 월하의마음 추천해....향안 선생님 에세인데 재밌기도 하고 생각도 많아짐
좋은 기사다 너무 잘 봣어! 김환기.미술관 다녀왔는데 건축가가 지은거라니... 진짜 이상했는데 ㅋㅋㅋ 1층은 춥고 3층은 덥고 ㅋㅋㅋ
글 너무 좋다 얼마전에 엄마가 환기미술관 다녀오고 너무 좋았다고 하던데 공유해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