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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순국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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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붕준 [1888.8.22~1950.9]
훈격 : 건국훈장 대통령장 / 서훈년도 : 1989
공적개요
독립운동세력의 단결에 기여한 임시의정원 의장
3·1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
한국독립당 집행위원 및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약
4월의 독립운동가
당헌(棠軒) 김붕준의 생애와 독립운동
- 독립운동세력의 단결에 기여한 임시의정원 의장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명화
1. 성장과 구국운동에 나서다
김붕준선생(이하 당헌이라 함)은 1888년 9월 27일(음력 8월 22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오신면(吾新面) 구룡리(九龍里) 용동(龍洞) 245번지에서 태어났다. 2013년 올해로 탄신 125주년을 맞이하였다. 부친 김의현(金義鉉)과 모친 김씨 사이에 태어난 3남 2녀 중 셋째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군석(君錫), 호는 당헌(棠軒), 이명은 김기원(金起元)이다. 의성 김씨들의 집성촌이 형성된 구룡리 용동에 기독교가 전래된 때는 1904년이었다. 년에 한국에 기독교 예수 재림교회 제7안식교회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곳이 평남 용강이다. 당헌의 집안은 안식교 선교사 스미스(W. R. Smith)의 전도로 입교하였고 청소년기였던 당헌은 기독교의 영향 속에서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당헌은 흥사단 이력서에 자신의 종교를 ‘예수교 순복음파’라고 기록하였는데, 순복음파와 안식교의 관계는 분명치 않다. 당헌은 7세인 1895년부터 14세인 1902년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7세인 1907년까지는 고향에서 사냥을 하며 지냈다. 당헌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과 같이 서울로 상경, 1908년에 보성중학교 농임과에 입학하였다.
보성중학교에 재학할 당시 당헌은 서우학회에도 가입하였다. 서우학회는 후일 서북학회로 재편되면서 애국계몽운동기에 가장 유력한 학회로 발전하였다. 서북학회에서 활동하는 동안 당헌은 안창호, 전덕기, 이동녕, 박은식, 이갑, 유동열, 노백린 등과 같은 애국지사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또한 비밀결사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에 가담하면서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었다.
의병항쟁과 애국계몽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나 러일전쟁 이후 한국 침략의 시나리오를 착착 진행해 나간 일제의 병탄 야욕을 막지 못하고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합하여 버렸다. 그러나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한국민의 애국운동을 완전히 뿌리까지 뽑아버리고자 일제는 ‘안악사건’을 시작으로 ‘신민회사건’을 일으키고 애국지사 600여명을 체포하여 그 중 105인에게 실형을 내렸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애국지사들은 체포되고 감금당하였다. 1911년에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일시 진남포로 내려가 몸을 피하여 당헌은 일제의 검거 선풍을 피할 수 있었다. 105인사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당헌은 서울 승동교회에서 한석진 목사와 여운형 등과 협력하여 승동학교를 운영하였다.
1915년까지 황해도 금천군(金泉郡)에서 거주하고, 1916년에 대동강 지류인 인황천과 인왕천의 지류인 동창천 하류 대안에 갈밭 개간에 뛰어 내동과 외동 사이로 수로를 개설하고 여기에 밭을 조성하며 개척운동을 하였다고도 한다. 당헌은 흥사단 이력서에 자신의 학예(學藝)는 농림(農林)이며 최장기능은 관개(灌漑), 그리고 소능(所肯)은 산수(山水)라고 적고 있듯이 청년시절 당헌은 조국 강산을 개발하는데 큰 관심을 가지고 1918년까지 고향과 황해도 일대에서 농업, 수리, 관개, 간척, 임목상에 종사하였다. 당헌의 이같은 행적은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의 이상촌건설운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민회 회원들은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모범적인 농촌 개발에 착수하였으나 망국 상황이 도래하자 이상촌건설운동은 해외 독립운동기지개척운동으로 방향이 전환되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해외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망명해 나갔으나 당헌은 국내에 남아 자신의 전공을 살려 간척과 농지 개간 사업 등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당헌의 가족은 부친은 김의현(金義鉉, 1920년 12월 2일(음력)에 상하이에서 별세하였다.)이며 모친은 김씨로만 알려져 있다. 그의 맏형인 김혁준(金赫濬)과 둘째형인 김긍준(金兢濬), 그리고 누이동생은 김복낭(金福娘)과 김미낭(金未娘)이다. 1911년 동향 출신의 노영재(盧英哉, 본래의 이름은 영자이나 당헌은 부인의 이름을 영재라 개명하였다.)와 혼인하고 슬하에 아들 김덕목(金德穆)과 딸 김효숙(金孝淑), 김정숙(金貞淑)을 두었다.
2. 중국 망명과 상하이 시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서울에 있었던 당헌은 3.1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일경의 검거를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이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성 임시정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대한국민의회정부가 통합을 이루어 통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루었을 때, 군무부 서기에 임명되었고 1920년 2월 21일자로 군무부 참사에 임명되었다.
1919년 7월 13일에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대한적십자회가 발기되고 8월 29일에 대한적십자회가 정식으로 설립되었을 때, 선언문과 결의문을 내외에 선포한 78명 중의 1인으로 참가하였으며 적십자회원이 되었다. 대한적십자회는 일본적십자사에 대해 관계 단절을 선언하고 연금(捐金)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국제연맹을 향하여 일본적십자사의 무도무의(無道無義)한 죄악을 성토하였다. 대한적십자회는 본부를 상하이에 두고 1919년 11월 15일에 제1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국내는 물론 미국 로스엔젤레스와 러시아 니콜리스크(소왕령) 등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 지부를 설립했으며 중국인들과 서양인들까지 회원으로 모집하였다. 또한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1920년 2월 1일에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여 전쟁에 대비한 의료 인력 양성을 시작하였다. 당헌은 1921년 11월 25일에 개최된 대한적십자회 총회에서 상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노백린 군무부 총장 하에서 군무부 참사로 활약하면서 군무부가 운영하던 육군무관학교의 군사교육 과정을 이수하였다. 한편 1922년에 손정도가 교통부 총장에 임명되었을 때는 교통부 참사에 임명되었다. 독립자금이 부족했던 임시정부는 국내로 은밀히 선전원과 특파원을 국내로 파견하여 독립자금을 모금하였다. 고향에 남은 당헌의 가족은 독립자금을 모금하려 온 임시정부 특파원들의 은신처를 제공하곤 하였다. 그런데 애국금을 모금하러 온 특파원이 체포당해 조만간 발각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 무렵 3.1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자금을 상하이 임시정부로 송부하였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가 체포되어 고문으로 인해 거의 죽음에 이를 지경에 이르자 일제는 형집행 정지를 내리고 출감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임시정부는 김마리아를 상하이로 탈출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 임무를 띠고 파견된 특파원이 임시정부 교통부 참사를 역임한 윤응렴이다. 이 때 도인권 가족과 당헌의 가족이 탈출에 동반하게 되었다. 김마리아는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탈출의 기회를 노리었다. 당헌의 부인과 자녀들은 상복차림으로 변장해 용강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다시 경인선을 타고 인천에 도착하였다.
탈출대상자들이 인천에 모여들기를 기다리느라 당헌의 가족은 인천에서 10일간을 지냈다. 윤응렴의 안내를 받아 김마리아와 도인권의 가족, 그리고 당헌의 가족인 부인과 자녀 3명과 애국 청년 2명을 포함한 11명의 인원이 돛단배를 타고 인천을 출발하였다. 이들은 인천 근해의 석도(초치도)에 상륙해 큰 배로 갈아타고 출항한 지 20일만에 중국 위해위에 도착하였다. 병이 위중했던 김마리아는 상륙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하였고 당헌의 가족은 위해위에서 다시 화륜선으로 갈아타고 6월 24일에 황포강 부두에 상륙하였다.
이렇게 하여 당헌은 상하이에서 가족과 상봉하였다. 당헌의 가족은 상하이 프랑스조계 보강리(寶康里) 65호에서 살게 되었다. 이곳 65호는 1919년 대한교육회 본부 사무소로 쓰였던 장소이다. 당시에는 흥사단원인 박석홍이 동신공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인삼과 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상점 주택이었다. 박석홍은 원동 흥사단 16반에서 당헌과 함께 소속되어 활동하는 친밀한 관계였기에 당헌의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박석홍은 1925년에 당헌에게 가게를 넘기고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면서 이후로 당헌의 가족은 상하이를 떠나기까지 이곳 65호에서 살았다. 당헌의 부인 노영재는 바느질 솜씨가 좋아 손수 넥타이를 만들었다.
이 넥타이를 학생들이 황포탄 선착장에서 판매하여 생활비를 벌었고 일부 이윤이 남는 돈으로 부인은 국수를 좋아하시는 박은식선생에서 국수를 대접하고 그밖의 임시정부 요인들의 식사를 마련하는 비용에 썼다고 한다. 중국인 야채시장에 가서 버리는 배추 시래기를 주어와 반찬을 마련했다고도 한다.
보강리 일대는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50호에는 김승학과 신숙, 최동오가 거주하였고 54호는 이유필의 집이다. 이유필의 집은 1920년대 초에 신채호가 신대한을 발간했던 장소이며 무엇보다도 유명한 것은 도산 안창호가 윤봉길의거 당시 이 곳에서 프랑스 조계 경관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당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60호에는 신규식, 김대지, 남형우 등이 거주하였고 68호에서는 조성환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15호에는 최동오가, 23호에는 이동휘가, 그리고 맥새이체라로가 면해 있던 24호에는 조상섭 목사가 거주하였다.
1921년 상하이에서 조심스럽게 흥사단운동을 안창호를 도와 국권회복기에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에 참여했던 당헌도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흥사단에 가입하였다. 당헌의 흥사단 단원 번호는 204번이다. 그리고 당헌은 이 무렵 중국에서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중국 국적의 김기원(金起元)이라는 이름으로 귀화하였다. 대중국과의 관계로 활동할 때, 당헌은 김기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상하이가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때는 1916년 무렵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러일동맹 체제에서 탄압받은 한인들은 러시아지역과 만주지역에서 벗어나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정치적으로 비교적 자유롭고 통신과 교통이 발달했으며 금융, 교육 등등의 제반 조건이 뛰어난 상하이는 한인들에게 생명줄과 같았다. 상하이는 본구, 동구, 서구, 북구 등으로 지역을 나누어 한인들을 관장했는데 1921년 무렵 상하이 한인의 총수는 560여 명 정도였다. 당헌은 임시정부의 국민적 기반인 상하이 한인사회를 위해서도 큰 활약을 하였다. 교민단은 1918년 가을에 상해 고려교민친목회로 출범하여 상하이 한인들의 단결과 친목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결성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하면서 정부 산하의 교민단으로 개편되었다.
1923년 1월 4일에 여운형이 대한교민단장 직에서 사면하고 도인권이 교민단장에 피선되었을 때, 당헌은 양제헌에 뒤를 이어 총무로 피선되었다. 그리고 10월에 제4회 상해 교민단 의원 총선거에서 본구의원으로 당선된 바 있다. 1924, 1925년 교민단 의사원 총선에서 의사원에 선출되어 교민단 일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대한교민단은 교민을 생활을 보호하고 임시정부의 기반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상하이 교민의 교육, 위생, 소방, 교통, 빈민구제, 민적 사무, 교민보호, 치안 확보는 물론 병원(兵員) 모집과 밀정 제거 등 독립운동의 업무도 수행하였으며 그 외에 상해 교민과 중국인, 그리고 외국인 간에 발생하는 시비와 분규를 해결하는 일과 각종 집회, 강습회, 기념식, 추도회, 장례식 등의 행사를 주관하였다. 한편 1921년 5월 신규식이 중심이 되어 중국인 유력인사들과 함께 친선을 도모하며 한국 독립운동의 지원을 받고자 창설된 중한호조사에 사원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1924년 12월 박은식 대통령체제에서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되어 임시헌법 개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5년 4월 7일 개정 대한민국 임시헌법이 공포되었을 때, 당헌은 국무원 비서장으로서 개정 임시헌법을 낭독하였다. 또한 1926년 12월 24일에 헌법개정 기안 위원으로 임명되었지만 송병조와 함께 자진 사임하였다. 그리고 1925년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경영의 어려움으로 발행되지 못하자 언론을 살리고자 독립신문 주간 최창식, 편집 김이대와 함께 당헌은 경리에 임명되어 신문사 운영과 재정 마련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1호(1926년 1월 1일자)를 발행하고 1년간에 걸쳐 8호의 독립신문을 발행했지만 재정적 어려움을 이기지 못한 채 독립신문 간행은 정지되고 말았다.
1921년 상하이에서는 도산 안창호에 의해 흥사단 원동위원부가 결성되었다. 국권회복기에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에서 활동한 바 있는 당헌은 상하이에서 흥사단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적극 동참하였다. 당헌의 흥사단 단원 번호는 204번이다. 흥사단 원동위원부 상하이지방 단우회의 수석 반장으로 복무하였다. 임시정부와 흥사단 원동위원부에서 공무를 맡아 복무하는 중에도 학업에 열중하여 1924년 상하이 법정학교을 졸업하였다.
1928년 이후 세계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고 이 여파로 교민사회가 극도로 침체되고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받기가 더욱 어려워지게 되자, 흥사단 원동위원부는 전 교민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협동조합의 형식의 경제운동을 기획하였는데, 이는 1931년 4월에 공평사(公平社) 조직으로 현실화되었다. 공평사는 생산․ 소비․ 분배(생산조합, 소비조합, 구매조합, 판매조합, 신용조합, 출하조합) 등에 관하여 공동의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고용과 노동의 분리,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제적 대립을 극복하며 중간 이윤을 배제하여 자본가의 착취를 배제한다는 경제의 상호부조적 성격을 갖고 있는 협동조합체이다.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에서도 같은 취지의 조합조직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원동 흥사단에서는 동 부인회와 협의하여 1931년 3월 25일에 공평사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공평사의 목적은 “협동 호조의 정신으로 소비 합작을 실시하고 점차 신용 생산 등의 합작으로 나아가 생활의 역량을 증장(增長)시키고 합작운동을 역행(力行)하여 합작 사업을 보급 발전케 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이처럼 경제적 혁명기관을 자처하며 공평사의 사무소는 상하이 하비로(霞飛路) 1,014농(弄) 30호인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 단소에서 우선 개설되었다. 공평사 사원 68인이 매달 내는 고본금과 저축금이 공평사의 자본금이 되었다. 이후 71~73인으로 증가된 사원들은 7개조로 나누어 배속되었는데, 당헌은 조상섭, 김시문, 노태연, 김홍서, 문일민, 김동원, 이마리아, 송병조, 김현숙 등이 소속되어 있던 제1조 조장에 임명되었다.
공평사의 활동과 조직에 대하여 일제는 “재상해 한국인의 목하 생활 상태에서 추찰(推察)하여 그들의 계획한 것과 같은 경제적 혁명 단체가 발전을 수행할 수 있느냐는 매우 의문으로 하나 여사(如斯)한 단체가 창설되었음은 최근 드물게 보는 바로서 재상하이 한국인 독립운동에 대한 사상경향이 과거의 과격 수단에서 점차 근본 방침으로 천이(遷移)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공평사는 일제의 만주침략과 도산 안창호가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되면서 종국에 중지되고 말았다.
1931년 당헌은 제6반의 월례회를 주관하면서 국내로부터 전개된 이순신 유적 보존 운동에도 참여하여 ‘이충무공 묘지 해압 (李忠武公 墓地解押)’ 의연금 45원을 동아일보사로 보냈다.
3. 통일전선운동에 몸을 바치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안창호와 당헌을 비롯한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단원들은 유일당운동에 매진하여 1927년에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를 결성하고 이어 베이징․상하이․광둥(廣東)․우한(武漢)․난징의 5개 지역에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조직하였다. 당헌은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집행위원으로서 유일당 운동을 지도하면서 1927년 11월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 연합회를 결성하고 촉성회 다음 단계인 주비회(籌備會) 건립을 준비하였다.
이를 위해 좌우익의 독립운동가들이 합력했으나 코민테른 6차대회(1928년 7월 17일~9월 1일)가 끝난 뒤인 12월 10일에 이른바 ‘12월테제’가 발표되자 좌익세력들은 모처럼의 좌우합작의 통일전선운동에서 이탈하였다. 1929년 유일독립당 상해 조직의 해산을 시작으로 관내 유일독립당운동은 결렬되고 말았다. 그러나 안창호, 이동녕, 김구, 조소앙, 이시영, 조완구 등과 흥사단원 28명은 1930년 1월 25일 우익진영만의 한국독립당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의 통일전선 구축운동은 계속되었다.
한편 1930년 7월 30일에 임시의정원 내에 상임위원회 조직이 처음으로 출범했을 때, 당헌은 김홍서, 차리석 등과 함께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상임위원회는 임시정부의 세입과 세출의 결산서를 검토하는 회계 검사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흥사단 원동위원부에서도 회계 검사원의 직무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익숙한 일이었다. 이처럼 흥사단 단원들이 임시정부에서 재무와 회계를 담당한 것은 주목할 만 하다. 그런데 1930년 12월 26일, 당헌은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에게 임시의정원에 의원 사직서를 제출하고 광둥으로 떠났다. 한편 1931년 12월 14일에 개최된 임시의정원 상임위원회의 상임위원으로서 각도 선출 의원의 자격에 대해 심사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는 등 여전히 임시의정원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거가 일어난 날, 안창호는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다가 프랑스 경관에 체포되었고 그 다음날 새벽, 일제 영사관경찰은 임시정부 청사와 교민단사, 그리고 체포 1순위에 올라와 있던 당헌의 가택을 비롯해 엄항섭, 김철, 안공근, 박창세, 최석순, 조소앙, 윤기섭의 집을 급습하여 수색하였다. 당시 11명의 청년들이 체포되었을 때, 당헌의 아들 김덕목도 체포되어 일제 헌병대로 끌려가 취조받고 갖은 고초를 겪은 후 풀려나욌다. 이 때 당헌이 상하이에 없었다. 그는 화남지역의 한국독립당 조직 강화를 위해 광둥(廣東)에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광둥은 중국 국민혁명의 중심지이며 국민당 정부의 본거지로, 1920년대 중반 이후 한인청년들 800여 명이 이곳에 와서 유학 중이거나 유학을 준비하고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당헌은 1932년 11월 광저우에서 한국독립당 광동지부 결성하고 광동지부장을 맡고 있으면서 한인청년들에게 유학을 알선하였다. 특히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에 많은 한인청년들을 추천하여 학생들의 입학 주선과 학비면제, 생활비 보조 등 학업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광저우에는 김성숙, 장지략, 안병무, 이육사, 안우생, 이영준 등 혁명가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김창화, 김수, 구익균, 이정호 등과 그의 아들딸인 김덕목, 김효숙, 김정숙과 후일 큰 사위가 된 송면수 등 많은 젊은이들이 중산대학을 다니었다.
광둥에서 당헌은 동산 서우미 복음촌(東山 西牛尾 福音村)에서 청년들과 함께 거주하였다. 중산대학에 재학 중인 한국 학생들은 중국 학생들과 연대하여 항일시위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중산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이후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단체, 그리고 한국광복군 등에 복무하였다. 또한 당헌은 한국독립당 기관지『한성(韓聲)』을 발간하여 선전활동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당헌은 화남지역의 독립운동 거점을 강화하고 중국인들과 통일전선을 구축해 나가는 매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윤봉길의거 이후 흥사단원들은 만주, 화북, 난징과 항저우 등 각지로 흩어졌다. 흥사단 원동위원부는 국내로 압송된 안창호를 대신하여 송병조가 위원장 대리에 임명되었고 재무를 맡았던 조상섭이 사임하자 당헌이 재무의 직임을 맡게 되었다. 1933년 1월 2일부터 비밀리에 제19회 원동대회기 개최되었으나 운동회나 희락회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없었다. 당헌은 양명진, 안정근, 안원생, 조세훈, 박세빈, 박일경 등과 함께 6반에 소속되었으나 6반 소속 반원들 대부분이 상하이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흥사단 활동은 정지될 수 밖에 없었다. 1933년 당헌은 임시정부 주월(광동)대표단 단장에 임명되어 대중국 외교활동을 전담하게 되었다. 또한 국민당 정부의 국민혁명군 상교참의에 임명되어 항일전쟁 수행에서 한 ·중 양국이 협력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역할을 하였다.
임시정부가 이동 중에도 당헌은 임시의정원의 의정 활동을 충실히 하였다. 1933년 7월에는 임시의정원 상무위원으로서 ‘공포누락각성의 건’의 보고를 임시의정원 의장에게 올리고 1. 임시의정원 내부 조직의 의장사면과 선거의 건, 2. 비서선거의 건, 3. 의원자격 상실 공포 건, 4. 의결사항 국무위원 선거 무효 공포의 건, 5. 국무위원 11인 선거 결의 건 6. 기타 사건으로 감사 회의의 진행 의결 사항 등을 누락시키지 말 것을 상기시켰다. 또한 국무원과 임시의정원의 직권이 남용되는 사례가 있는지를 심사했으며 임시약헌에 위배되는 사례가 있는 지도 조사하였다.
1934년 1월, 진장(鎭江)에서 개최된 제 2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당헌은 윤기섭, 김철과 함께 상임위원으로 또 다시 임명되었다. 그러나 임시의정원들이 각지로 흩어져있어 사실 의정활동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당헌은 상임의원으로서의 임무를 다하고자 하였으나 자료를 모우는 것초차 불가능하였다. 이로 인해 시무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당헌은 의원사면서를 제출했지만 봉환되었다. 26회 의정원회의에서는 무기명 투표 결과 송병조가 의장에 선출되었다. 당헌은 상임위원으로서의 새로이 선출된 의원 자격을 심사하였다.
1934년 중국 한광사에서 윤봉길의사의 최초 전기인『윤봉길전』이 중국어로 출간되었을 때 당헌은 김기원이라는 이름으로 윤봉길전의 서문을 썼다. 필자인 김광(金光)은 고영희로, 그 역시 흥사단원이다. 당헌은 서문에서 “윤봉길의 의거는 한국이 나라를 되찾고 중국이 망국에서 구해지고 동양평화를 이루는 길”이었음을 공언하였다.
1935년 8월 난징에서는 해외 독립운동전선의 5당통합의 결과로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다. 당헌은 광저우(廣州)에서 의열단의 청년들과 혁명동지로서의 긴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며 흥사단 원동위원부 광둥지부와 한국독립당의 광둥지부 결성하였고 이 곳에서 한중 연합의 기반을 조성하고자 하는 임무를 띠고 활동하면서 민족 통일이 그 무엇의 가치보다도 우선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고 이를 실천하였다. 안창호의 대일전선통일동맹의 과업을 이어 좌우익의 독립운동계를 통합시키고자 한 통일의 길은 쉽지 않았다. 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 폐지론을 주장하자, 민족혁명당 세력은 임시정부를 둘러싸고 양분되었다. 1935년 10월 28일 항저우에서 개최된 제28회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당헌은 국무원 비서 선거에서 5표를 얻어 각각 1표씩을 얻은 조소앙과 양명진을 누르고 국무원 비서로 선출되었다.
이 때에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고 임시정부를 옹호할 수 있는 지지 정당으로서 1935년 11월, 항저우에서 한국국민당을 결성하였다. 한국국민당 이사장에 김구가 선임되었고 당헌은 이동녕, 송병조, 조완구, 차리석, 안공근, 엄항섭과 함께 이사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1936년 11월 제29회 임시의정원 정기회의 상임위원회에서 당헌은 상임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된 이래 1937년까지 양우조와 함께 상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상임위원회에서는 임시정부의 회계를 검사하고 정부의 세입과 세출을 검사하고 정무에 관해 심리(審理)하는 일을 맡았으며 의정원의원 자격 심사위원으로도 선임되어 임시약헌 제18조에 의거하여 의정원 의원들의 자격을 심사하였다.
한국국민당은 산하에 한국국민당청년단과 한국청년전위단을 두고 일제의 관공서 파괴 ․ 요인처단 ․ 후방교란 등의 특무공작을 수행하였다. 특히 한국청년전위단은 광둥지방에서의 한국국민당의 세력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당헌이 중심이 되어 1937년 2월에 결성한 결사이다. 1937년 일제가 상하이를 재침공하고 난징까지 공격하고 난징 대학살을 자행하자 중국측의 항일전쟁 수요를 배경으로 특무공작과 한중통일전선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헌은 광둥지역에서 외교 및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1938년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의 위원장에 선출되어 흥사단을 이끌어나가는 책임도 맡았다.
독립운동계는 전선통일이라는 대의보다는 당권경쟁의 알력이 발생하여 통일된 당조직을 구성하는데 실패하였다.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한 이청천계는 조선혁명당을 발족하였다. 1937년 7월에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인애국단고 미주지역의 5개단체는 김구의 주도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다. 그러자 이에 대응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과 조선혁명자연맹이 제휴하여 조선민족통일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1938년 10월 10일 조선민족혁명당 산하의 군대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다. 이리하여 독립운동계는 그간 통일전선운동의 결실을 맺지 못하고 또다시 좌익과 우익의 양립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은 한국독립운동 지원을 일원화하기 위해 한국독립운동계의 통합을 권유하였다. 통합운동은 당헌을 비롯한 송병조. 차리석 등 흥사단계와 조완구, 이시영 등이 주도하여 김원봉과 김구에게 관내지역 각 당파의 정치조직을 통합할 것을 제안하여 마침내 10개항의 정치강령을 담은 “동지, 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39년 제3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당헌은 임시의정원 15대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차리석, 유동열, 최동오, 신공제 등과 함께 평안도 소속 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 이 시기 중국에서의 대일 항전의 전황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상하이와 난징은 일본 통제 하에 들어갔고 각지에는 일본 신사가 세워졌으며 일본 영향력 아래 들어간 지역의 한인들은 일제 신민임을 강요받고 식민지 동화교육이 강제로 실시되었다. 일제는 상하이 교민들의 재산뿐만 아니라 난징에 흥사단이 근거지로 삼기위해 사들인 1500여평의 토지까지 강탈당하였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어가자 중국 국민당 정부는 충칭으로 수도를 옮기었고 임시정부도 1940년 충칭으로 청사를 이전하였다. 이 때 당헌도 광저우를 떠나 충칭에 안착하였다. 충칭에서 당헌은 1940년 6월 한교등기판법을 제정하여 중국 국방최고위원회로부터 비준을 받아 한인들이 충칭에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도록 거주증을 발급받을 수 있게 조치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최우선 과제가 민족 내부의 통일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독립운동계의 통일을 권장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민족통일의 중심과 함이 임시정부로 쏠리게 되면서 가능하게 되었다. 1941년 5월 조선민족혁명당은 제5기 중앙위원회 7차회의에서 ‘임정참여’를 결의하였고 11월의 제6차 전당대회에서는 중앙위원회의 5월 결의를 추인하여 ‘임시정부 지지’를 선언하고 임시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터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조선혁명은 ‘민족독립 ․ 민권자유 ․ 민생행복’의 신조선 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음에서 민족 ․ 민주혁명의 성질을 띠고 있다는 점을 재천명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들이 임시정부로 들어오게 될 경우 주도권을 장악해 나갈 우려가 있음을 배제하지 않아 불신하였으므로 통합의 계기는 마련되지 않았다. 그러자 1941년 10월 제 32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의장 당헌은 결단을 내렸다. 당헌은 독립운동계의 통일운동에 불을 짚이고자 임시의정원 의장의 권한으로 조선민족혁명당 세력의 임시의정원 등원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은 크게 반발하였고 이들의 등원을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당헌은 임시의정원 의장자리에서 탄핵당하고 말았다. 독립운동계의 통합 열망이 ‘야합’으로 비난당하였던 것이다. 당헌의 행동과 결단은 이 단계에서 자기 희생이 불가피했지만 새 의장에 송병조가 당선됨으로써 통일운동은 계속될 수 있었다.
1942년 2월 당헌은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당원들을 이끌고 한국독립당통일동지회를 결성하고 조선민족혁명당의 개편을 전제로 하여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합병하였다. 그리고 정치 통합에 앞서 군사적 통합을 시도하여 1942년 7월 충칭의 조선의용대 본부와 화중․강남지구 잔류 병력이 중국 군사위원회의 요구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면서 통합은 현실화되었다. 그리고 10월 25일 제3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민족혁명당의 9명이 의원(총원 46명)으로 등원하면서 좌우익 연합 의회를 구성하면서 당헌의 꿈은 실현되었다.
4. 좌우익 통합의 임시정부를 성사하다.
충칭에서 당헌은 상하이 원동위원부가 해소하고 단원들이 전향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은 앞서 국내에서 ‘동우회사건’을 일으킨 일제가 동우회원들의 전향선언을 공작한 것과 같은 효과를 노린 전향 공작 행위였다. 이 소식을 들은 당헌을 비롯한 흥사단 원동 단원들은 즉각 반박 성명서를 발표하고 원동위원부의 부활을 선언하였다. 당시 흥사단원들은 충칭시 무신상(務信相) 95호에 모여 살았으며 충칭에서 흥사단 특별반을 구성하였다. 당시 당헌은 임시의정원 의장과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 재무주임으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그밖의 단원들은 조선민족혁명당, 한국광복군 등등에 각각 참여했으며 서로 민족통일전선운동에 대해 토로하고 그 방안을 논의하였다. 흥사단원들은 각기 신념에 따라 정치활동은 각각의 정치 결사에서 활동했지만 흥사단의 기본 정신에 입각하여 민족통일전선 구축의 의지를 함께 모아갔다. 1942년 11월 당헌은 과거의 공평사를 운영하던 경험을 살려 한국광복군총사령부 내에 유한책임한국광복군사령부 군관소비합작사를 설립하고 일상생활용품을 취급하는 소비조합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 한국의 독립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국제 회의에서도 한국문제가 연합국 사이에 전후 처리 문제에 거론되었다. 그런데 1943년에 들어와 충칭에 전달된 소식은 한국문제가 국제공동관리로 들어간다는 소식이었다. 충칭의 각 정당과 단체의 한인 3백 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1943년 5월 10일 재중국자유한인대회가 개최되었다. 당헌은 이 대회를 주관할 주석단에 선출되어 국제공동관리를 반대하는데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1944년 4월 26일에 개최된 제3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약헌 개정안이 통과되어, 임시헌장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 의원의 선거제가 변경되고, 부주석직이 신설되었으며, 국무위원 숫자도 증원되었다. 총원 50명의 임시의정원 의원 중 민족혁명당 소속 의원이 12명으로 늘어났다. 김규식이 부주석으로 선임되었고 당헌은 김원봉 ․ 장건상 ․ 성주식과 함께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김원봉과 최석순은 각각 군무부장과 문화부장에 선임되었다. 민족혁명당,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4단체연합선언을 발표하였고 이로써 임시정부는 정치통일이 완성함으로써 ‘통일전선정부’가 되었다.
1945년 2월 7일 충칭에서 통일에 대한 이견 차이로 민족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을 탈당한 인사들과 결집하여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였다. 당헌은 홍진, 유동열과 함께 신한민주당 주석단으로서 신한민주당 조직을 지도해 나갔다. 당헌은 일본의 패망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확충하고, 국내외 민중 조직과의 연계, 해외독립운동 역량을 집중해야 하는 일이 절실함에도 별진전이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좀더 절실한 계획과 노력이 강구되어야 함에도 그렇치 못한 현실이 안타까왔다. 전체 민족운동의 영도 중심이 되어야 할 임시의정원이 전체 한국 민족을 대표하지 못하고 충칭에 있는 몇몇 인사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이어 3월 16일에는 홍진 등 50여명과 함께 충칭에서 한국구제총회를 창립하였다. 5월 6일에는 황학수, 차리석, 최석순, 이상만, 윤기섭 등 6명이 주축이 되어 임시정부 생계설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7. 통일 민족국가수립운동에 투신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으로 한국은 광복이 되었다. 일제와의 대일 항전을 코 앞에 둔 시점에서 일본의 항복은 그다지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 이하 임정 요인 15인은 제1진으로 11월 23일에 환국하였고 당헌은 제2진으로 11월 28일 귀국할 예정에 있었다. 그러나 기후가 불순하여 입국은 늦쳐저 12월 1일 당헌과 황학수, 조성환, 성주식, 장건상, 유림, 김성숙, 조경한 , 조완구, 조소앙, 최동오, 김약산, 안우생, 이계현, 김준엽, 노능서, 윤재현, 서상렬 등과 군산비행장에 착륙함으로써 고국에 환국하였다. 2진 일행은 군산에서 하루를 숙박하고 12월 2일에 서울로 입경하였다. 당헌은 12월 4일, 홍진, 최동오와 함께 망우리에 안장된 안창호와 손병희의 묘소를 찾아 성묘하였다. 그리고 미주에서 입국한 송종익, 김병환, 김성략, 한시대, 전경무 등 제씨와 중국에서 입국한 유진동 등과 협의하여 1946년 흥사단 국내위원부를 결성하였다.
1946년 2월 20일에 임시정부는 18개 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비상정치회의 준비회의를 개최하였다. 비상정치회의 대한민국의 과도적 최고입법기관으로서 임시의정원의 직권을 계속인정하고 정식 국회가 성립될 때까지 존속시키고자 하였다. 이 때 당헌은 신한민주당 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비상국민회의 발기에 참여해 민주의원에 피선되었다. 임시정부 계열의 민주의원들은 시, 구 및 도로 명칭개정위윈으로 활약하면서 일본식 이름의 도로 명칭을 우리말로 바꾸는 일을 하였다. 오늘날 세종로, 을지로, 충무로 등의 명칭 개칭은 그 때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모스크바 삼상회의의에서 한국을 신탁통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내에서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당헌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우리는 피로써 건립한 독립국과 정부가 이미 존재하였음을 다시 선언한다. 5천년의 주권과 3천만의 자유를 전취하기 위하여는 자기의 정권 활동을 옹호하고 외국의 탁치 세력을 배격함에 있다. 우리의 혁혁한 혁명을 완성하자면 민족의 일치로써 최후까지 분투할 뿐이다. 일어나자 동포야.‘ 라는 성명서와 결의안을 발표하고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좌우 합작회의가 열렸을 때 당헌은 우측 대표자로 참석하였다. 1946년 9월 15일 신한민주당, 신한민주당, 조선혁명당, 청우당, 재미한족연합회가 주축이 된 신진당의 창당을 주도하였다. 신진당은 자주독립국가 완성과 민주주의 정치 실현, 국민의 평등 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경제제도의 확립과 민족문화의 건전한 발양으로써 인류문화에 공헌함에 기한다는 3대 강령을 내세워 창당되었다.
당헌은 창당 대회사에서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건설에 전력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1947년 과도입법의원 의원에 피선되어 헌법 및 선거법 기초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민주 입법을 이루는데 공헌하였다. 1948년 민주자주연맹 발기에 참여하고 상무위원 겸 선전국장에 선출되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나 사회에서 완전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자 않는 경우에는 경제법칙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 같이 사실이 사실대로 인정되지 않고 도리어 유언비어로 민심의 불안을 조장할 뿐 아니라 본의아닌 건설적인 언론까지 봉쇄되는 염려가 있으니 책임당국은 언론자유에 유의하여 민심 불안을 제거하는 동시에 명랑한 사회 발전에 노력하기 바란다”라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협상회의에 김구, 김규식과 함께 참석하였으며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 각당 사회단체 대표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김규식박사와 함께 평양에 갔다. 평양에서 돌아온 후 1948년 6월 1일 경교장에서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고 김구와 김규식과 함께 통일 방략에 대해 토의하였다. 6월 8일에 80여 정당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통일독립촉성회 결성식은 당헌의 대회 취지를 말하는 개회사로 시작되었다. 임시정부 세력들은 또다시 민족 통일국가 건설의 역사적 과제를 앞에 두고 통합을 이루었었고 당헌은 통일독립촉성회 중앙집감위원 선출을 위촉하는 전형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23일 통일촉진회에 참여한 당헌은 김구, 김규식과 함께 3씨의 명의로 유엔조선위원단에 1. 남북 각 정권 아래 군대는 선고 완료 시까지 유엔 국제 관리 하에 두고 2. 남북을 통한 전국적인 총선거를 새로이 시행하여 전 인민의 의사를 물을 것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파리 유엔총회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7. 6.25의 발발과 못다 이룬 꿈
1950년 5월 10일과 5월 30일 선거에서 성동구 의원으로 출마하였다. 당헌은 정견발표에서 “무엇보다 최선을 다하여 평화적으로 통일을 완수하기로 함”과 “명실상부한 의회정치와 지방자치제를 조속히 실시하기로 함. 헌법에 규정한 언론, 출판, 결사, 신앙, 행동의 자유를 보장하여 인권옹호를 기함” 등의 정치 정견을 비롯해 그 밖의 경제사회, 재정과 문화, 국제방면에서의 정견을 주창하였으나 낙선하는 패배를 맛보았다.
당헌의 민족 절대 통일 염원의 의지는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남으로 진격해 들어옴으로써 깨지고 말았다. 북한 인민군의 갑작스런 기습에 한국군이 후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6월 28일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하였다.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6월 28일 새벽 3시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면서 서울은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인민군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인사들에 대한 소재 파악을 신속히 하였다. 당헌도 임정요인인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유동열, 최동오, 윤기섭, 오하영, 원세훈, 엄항섭 등과 국회의원과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강제 연행되었다. 연행된 이들을 성남 호텔과 청파동, 성북동의 비밀 장소로 나누어 집결시켰는데, 임정요인들은 주로 성북동 안가에 연금당하였다.
전쟁이 소강상태를 맞이한 채 두달을 보내고 9월로 접어들면서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지고 9월 18일 서울은 수복되었다. 강제 연행된 임정요인들은 9월 26일 심야에 성북동의 3층 주택으로 이전되었고 다음날인 27일 저녁에 지프와 일반 승용차, 그리고 군 트럭에 나누어 실려 성북동, 삼선교 고개, 종로, 수색을 거쳐 계속 북으로 달렸다. 일산과 문산을 지나 미군기의 사격을 피하며 임진강에서 뱃사공의 도움을 받아 강북으로 건너갔다. 9월 28일 새벽에 송악산 기슭의 낯선 집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개성시내를 벗어나 황해도 금천을 눈 앞에 두고 있을 때, 또 다시 미군기의 공습을 받았다. 평산을 지나 서흥까지 오는데에도 공습은 계속 되었다. 1950년 9월 28일 심야가 되어 서흥을 막 벗어나려할 때, 4대의 비행기가 조명탄을 터뜨리고 폭탄과 기총을 마구 퍼부어대었다. 급히 멈춘 차에서 사람들은 포격을 피하고자 마구 뛰어내렸지만 앞차는 직격탄을 맞았다. 이 차에는 당헌과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가 타고 있었다. 차는 소이탄에 명중되어 불 길 속에 휩싸였다. 일생을 나라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고 독립된 고국에서 새나라 건설에 전력을 쏟고 남북이 하나가 되어 복된 민주주의 국가를 이루게 하고자 했던 염원을 뒤로 하고 당헌은 민족상잔의 전란 속에서 별세하였다.
독립운동계에 재정운영과 통일전선운동을 주도하고 조국광복과 독립국가 건설에 주체적으로 임하였던 당헌의 공로를 기리며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3.1절 기념식전에서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당헌의 일가 중에는 부인(노영재 여사, 애국장)과 장남(김덕목, 애국장), 큰딸(김효숙, 애국장)과 사위(송면수, 애국장), 둘째 딸(김정숙, 애국장)과 사위(고시복, 애국장) 등 7명이 항일독립투쟁에 헌신한 공로로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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