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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자 김참 시인
■수상작 거미와 나 외 4편
[출처] 제15회 지리산문학상 수상/김참 시인|작성자 시산맥
거미와 나
우리 집엔 귀가 넷 달린 거미가 산다. 내가 소파에 누워 책을 읽는 동안 배고픈 거미는 내 발톱을 갉아먹고 조금씩 살이 오른다. 내가 낮잠을 자면 거미도 내 귓속에서 낮잠을 자고 내가 노란 꽃 활짝 핀 해변을 거닐면 거미도 내 귓속에 누워 꿈을 꾼다. 어두운 부엌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 동안 거미는 줄을 타고 내려와 내 발가락을 갉아먹는다. 봄이 와서 마당 가득 분홍빛 모란이 피면 거미는 집 곳곳에 투명한 집을 짓는다. 벌레들의 무덤을 만든다. 우리 집엔 귀가 넷 달린 거미가 산다. 초승달 뜬 하늘에 하얀 별 총총 박힌 어둡고 깊은 밤 거미는 네 귀를 쫑긋 세우고 내 귓속에 하얀 알을 낳는다. 여름이면 새로 태어난 거미들이 집 곳곳을 기어 다닌다. 귀가 넷 달린 수백 마리 회색 거미들. 내 살을 파먹고 통통하게 살이 오를 작은 거미들. 장마가 지나가면 거미들은 투명한 줄을 타고 논다. 습하고 무더운 날이 계속된다. 거미는 내 살을 갉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나는 빨랫줄에 걸린 생선처럼 조금씩 야위어간다.
기린
밀밭에서 놀던 기린이 우리 집으로 온다 마늘밭 지나고 도랑 건너 돌무더기와 대밭 사이 좁은 길 따라 우리 집으로 온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긴 목 위에 있는 기린의 얼굴을 본다 참 슬픈 얼굴이다 보리밭에서 놀던 기린이 돌담 사이 좁은 길 따라 우리 집으로 온다 대문 앞 텃밭에 외할머니가 심어놓은 고구마를 넝쿨째 뽑아 먹으며 기린이 온다 밭에서 잡초 뽑던 이모가 고개를 들어 슬픈 얼굴의 기린을 올려다본다 나는 대문을 연다 열린 문틈으로 당근과 가지가 자라는 비닐하우스가 보인다 비닐하우스 위로 새털구름 흘러간다 정오가 되면 배고픈 기린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온다 굴뚝에서 모락모락 올라와 구름을 향해 새처럼 가볍게 날아가는 연기를 꿀꺽꿀꺽 삼킨다
구름
구름, 내가 꽃향기 맡으며 계단 내려갈 때 뒷산을 넘어가던, 구름, 내가 달리는 기차 타고 검은 터널 빠져 나올 때 포도밭 위에 떠 있던, 구름, 내가 수초 사이 작은 물고기 구경할 때 저수지 잔물결 위에 출렁이던, 구름, 내가 참외밭 지날 때 강 건너 산자락에 걸려 있던, 구름, 미끄럼틀 타던 아이가 엄마 손 잡고 집으로 돌아갈 때 아파트 피뢰침 꼭대기에 걸려 있던, 구름, 내가 구멍 뻥뻥 뚫린 커다란 달을 보며 음악 들을 때 밤하늘을 횡단하던, 구름
은행나무숲으로 가는 기린
창밖에 기린이 나타나 귀 쫑긋 세우고 내가 틀어놓은 음악을 듣는다. 저녁마다 커다란 기린이 나타나 안테나처럼 귀를 세우고 내가 틀어놓은 옛날 음악을 듣는다. 나는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기린에게 건네준다. 기린은 사과를 꿀꺽 삼키며 크고 순한 눈을 깜빡거린다. 나는 사과 하나를 더 건네주며 사과 씹는 기린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기린 머리에 달린 딱딱한 뿔을 올려다본다. 그때마다 내 심장은 쿵쾅쿵쾅 뛴다. 바람이 분다. 기린은 몸을 돌려 은행나무숲으로 돌아간다. 숲으로 가는 길엔 작고 낮은 집들이 늘어서 있다. 기린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집들의 심장에 주황색 등불이 켜지고 커다란 발자국이 숲으로 이어진 길 위에 뚜렷이 새겨진다. 숲과 집들과 나무들과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들 점점 작아지고 기린의 몸집은 점점 커진다. 회색 구름이 기린의 목에 걸린다. 남자와 여자가 잠든 작은 방 창문 밖으로 기린이 지나간다. 은행나무 잎 녹색 빛깔 점점 짙어지는 여름밤, 은행나무숲에 앉아 있는 연인의 등 뒤로 기린이 지나간다. 아니, 기린 지나가는 소리 들린다. 조용히 비가 내린다. 은행잎들이 가만히 떨어져내린다.
열대의 밤
검은 항아리 머리에 이고 검은 얼굴 여인들 걸어가는 열대의 밤 노란 새들 나무에 앉아 커다랗게 지저귀고 어두운 하늘에 뚱뚱한 구름 흘러가는 밤 하얀 도마뱀들 벽 타고 내려와 바구니의 망고를 갉아먹는 밤 검은 얼굴 여인들 강가 모래밭에 항아리 내려놓고 어두운 강에 들어가 파란 물고기 건져 올리는 밤 검은 얼굴 여인들 바오바브나무 아래 항아리 내려놓고 어두운 숲에서 초록 뱀을 잡는 밤 검은 얼굴 여인들 검은 항아리에 파란 물고기와 초록 뱀을 담아 어두운 오솔길 따라 돌아오는 밤 노란 달 공중에 떠올라 뜨겁게 타오르고 검은 바람이 뚱뚱한 구름을 밀고 언덕을 넘어가는 밤 잠 못 드는 내가 도마뱀처럼 벽을 타고 지붕에 올라 뜨거운 달빛 받으며 무화과 열매처럼 검은빛으로 익어가는 밤
■ 수상 소감
더 뜨겁고 아름답게
시를 써오면서 과분하게도 몇 차례 상을 받았지만 수상소감을 쓰는 건 참 어렵습니다. 7월 초, 어느 토요일 저녁, 오래 미루어두었던 분갈이를 하는 중에 문정영 선생님으로부터 지리산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당일 심사를 해주신 세 분 선생님과 통화를 하면서 축하인사를 받았지만 생각해보니 감사의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심사를 맡아주신 세 분의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시산맥>과 <지리산문학회>의 여러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올해는 코로나 사태로 전 세계가 어수선합니다. 저 역시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전례가 없던 수상한 시절들을 보내며 심신이 피로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글을 쓰는 것 역시 쉽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보다 산문을 더 많이 써왔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글을 쓰는 것도 해가 갈수록 어렵습니다. 내가 쓴 글을 읽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하는 생각도 종종 합니다. 산문을 쓰는 동안은 나는 시인이 아니라 산문가인 건 아닐까가? 하는 고민도 곧잘 합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시를 쓰고 발표했지만 시를 잘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너무 오래 되어 언제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산문을 잘 읽었다는 이야기는 종종 듣습니다. 저는 시인인데 산문을 잘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이상합니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되는 건가? 내가 시를 잘 쓰고 있기는 한 건가? 내 시를 잘 읽은 독자는 없는가? 하는 고민을 합니다. 지리산 문학상은 이런 고민을 하는 제게 그간 쓴 시를 잘 읽었다는 덕담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너무 기쁘고 또 고맙습니다.
제가 등단해서 활동한지 25년이 되는 해입니다. 25년간 써온 시들이 제가 살아온 발자취라고 생각하지만, 발자취를 남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등단 후 잡지를 통해 비교적 꾸준하게 시를 발표했고 시집도 다섯 권을 묶어 냈습니다. 잡지에 신작 원고를 보낼 때나 출판사에 시집 원고를 넘길 때 나름대로 힘닿는 데까지 했다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늘 아쉬움은 남습니다. 그 아쉬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게으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지만 시 쓰기에는 게으르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습작할 때처럼 뜨겁고 치열하게 쓰지 못하는 저에게 지리산문학상은 사실 과분합니다. 하지만 주마가편의 뜻으로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더 좋은 시를 쓰고 싶습니다, 그간 썼던 시보다 더 뜨겁고, 더 아름답게 쓰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약력
. 1995년 《문학사상》 등단
. 시집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미로여행』, 『그림자들』, 『빵집을 비추는 볼록거울』, 『그녀는 내 그림 속에서 그녀의 그림을 그려요』
. 저서 : 『현대시와 이상향』
. 수상 : 현대시동인상, 김달진 젊은시인상
■ 심사평
무엇을 얘기하기보다는 어떻게 얘기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다
지리산문학상은 그간의 관례대로 시산맥 시회 회원이 추천하여 다득표 순으로 본선에 오른 아래 5명의 시인이 엄선한 작품을 후보작으로 했다. 이번에는 온라인으로 먼저 작품을 심사를 하였고, 최종 본심 작품을 가지고 오프라인에서 최종 수상작을 선정하였다.
기린 외 6편 김 참 시인
편식주의자 외 6편 마경덕 시인
블랙코드 외 6편 박완호 시인
경복궁 외 6편 안차애 시인
8월 외 6편 조은길 시인
‘1964년 장 폴 사르트르의 노벨문학상 거부’ 사건이 떠오른다. 그는 글로써만 평가 받기를 원했다. 수상으로 인해 정치적 사회적 압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염려로 과감히 수상을 거부했다.
‘문학상’이란 훌륭한 문학작품에 대해 주는 상이다. 역량 있는 문인을 찾아 기리고 지원한다는 뜻에서 문학상 수상은 문학인에게 기쁨이고 비로소 작가가 된 듯한 의미를 주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 문학상에 대한 논란이 잦은 것을 보면 안타깝다.
문학상 취지에 어긋나는 수상자를 선정한 것에 대한 불만과 이로 인해 수상자가 수상을 거부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수상자의 작품 선정 과정이 미흡하다는 등의 수상작품 문학적 수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문학상의 위상에 흠집이 생기고 집행기관, 수상자, 심사위원에 대한 불신과 비난이 언급되는 것은 문학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반성할 일이다. 심사를 할 때 어떤 것도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일이다.
2020년도 지리산문학상은 홍일표 시인과 전년도 수상자인 조정인 시인과 심사를 했다. 함양군과 지리산문학회 그리고 계간 시산맥이 주관하여 엄정하고 투명한 예심심사 과정을 거쳐 안차애, 박완호, 김참, 마경덕, 조은길 시인의 작품 35편이 본심에 올라왔다. 장시간 작품에 대한 논의와 토론을 거쳐「경복궁」과「기린」이 최종심사 대상이 됐다.
「경복궁」은 시를 대하는 태도가 좋다. 시적 사물이 이끌리는 대로 쉽게 접근하는 방식을 버리고 무거운 주제를 취한 것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또한 사건의 시간이 정교한 서사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예리한 시선으로 사물을 조망하려는 것이 수상작품으로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를 얹어놓는 방식에서 한자어 등의 어색하게 표현된 문체가 시적 가독성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아쉽게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기린」은 기린이 집으로 오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움직임을 미세하게 포착한 수작이다. 움직이는 단순한 행위들을 통해 사소하고 파편화된 일상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 눈길이 갔다. 지상의 모든 행위는 결국 인간의 일상과 맞물려 있다. 매일 일하고 속삭이는 말처럼 평범한 일상임에도 이 잔잔한 일이 공중을 향해 폭죽을 쏘는 느낌이다. 기린이 매개가 된 일상이 손을 대면 전기가 통할 듯한 전파로 가슴을 뜨겁게 한다.
무엇보다「기린」을 포함한 7편이 일관되게 시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다. 시에서든 삶에서든 무엇을 얘기하기보다는 어떻게 얘기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다. 그런 점을 감안하여 심사위원 합의로 김참 시인을 수상자로 선정한다.
심사위원 최문자(글), 홍일표, 조정인
[출처] 제15회 지리산문학상 수상/김참 시인|작성자 시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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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추상학적 글인듯해도
가만히 다가가면 예리하게 그려낸.문장앞에 어려움을
이겨낸 탈피 가 울림니다
순간 을 잘 균형있게
마추며 짜임새로 꾸민
무게가 돋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