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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작소설비평회♣ 원문보기 글쓴이: cafe
워낭소리 부원 금이 간 사료 바가지를 얼추 꿰맸을 때쯤 당숙모가 쪽문을 열고 들어섰다. 빈 외양간 바닥에 게처럼 납작 몸을 붙이고 있던 덕구란 놈이 제게 찾아온 손님처럼 반갑게 꼬리를 흔들며 나보다 먼저 일어섰다. “뭐하고 있능 겨?” 마루 앞으로 다가온 당숙모가 노끈이 꿰여 있는 쇠바늘을 집어들고 물었다. “하기는 뭘 해유. 심심하니께 고연히 장난이지.” 덕구가 다가와 길쭉한 혀로 당숙모 치마폭을 핥아댔다. 놈의 치사한 표정을 보니 뭐 좀 얻어먹을 게 없나 하는 눈치였다. 당숙모는 비닐봉지로 덕구의 대가리를 가볍게 툭 치고는 마루로 올라섰다. 기척을 알아차린 아버지가 안방에서 컥컥, 마른 헛기침으로 신호를 보내왔다. 나는 노끈 뭉치와 쇠바늘을 사료 바가지에 담아 마루 밑으로 집어넣었다. 토광에는 성한 사료 바가지가 두 개나 더 있었다. 우리로 돌아간 덕구는 하얗게 탈색된 뼈다귀를 핥고 있었다. 간대 막대 너머로 소들이 모가지를 빼고 대가리를 흔드는 것으로 보아 때가 되긴 된 모양이었다. 비가 내릴 듯 아침부터 내내 날이 누져 있어서 시간을 어림하기가 애매했다. 어떻게 보면 아직도 오전 같았고 또 어떻게 보면 벌써 저녁이 된 것도 같았다. 살림에 무슨 큰 이문이 난다고 사료 바가지를 들고 괜한 해찰을 부린 까닭인지도 몰랐다. 어느새 한 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소들의 점심은 짚 한 뭇씩이면 그만이었다. 풍으로 누운 아버지만큼이나 덕구놈 데리고 살기가 번거로웠다. 때만 되면 놈에게 무얼 줄지가 고민이었다. 비린 것 한 가지라도 섞어 주지 않으면 밥그릇에 주둥이도 처박지 않는 놈이어서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몇 번이나 없애 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정작 놈을 뺀 집안을 상상하면 절로 어깨가 시려왔다. 생선가시 같은 아버지의 성화를 내가 다 삭이지 못할 때는 그 화가 고스란히 놈에게 떠넘겨졌다. 하다못해 놈의 주둥이라도 한 번 걷어차고 나면 멍진 속이 달래질 때가 있었다. 놈이 유독 당숙모를 반기는 까닭은 다 제 잇속이 따로 있어서였다. 당숙모는 자주 비린 음식찌꺼기를 가져다 놈에게 주곤 했었다. 냄비를 들고 주방을 다 뒤져도 놈에게 줄 마땅한 점심거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아버지 몫을 덜어내야 했다. 들통에 고아놓은 소 사골 국물을 떠서 놈에게 밥을 말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아버지 차례였다. 당숙모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는 벌써 머리맡의 차임벨을 눌렀을 터였다. 누워 있는 햇수가 늘어감에 따라 몸은 점점 여위어들었지만 아버지의 식성만큼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밥 한 사발과 뚝배기 가득한 국 한 그릇을 끼니마다 너끈하게 비워냈다. 아버지는 돼지나 소 사골을 곤 뜨거운 국물을 좋아했다. 밥상에 깍두기 그릇을 놓을 때 방에 있던 당숙모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당숙모는 밥상을 대신 받아보며 나도 아버지와 함께 밥 한 술 뜨라는 것을 아직 생각이 없다, 하고서 주방을 빠져나왔다. 소 한 마리가 짚 토매 반은 마당에 던져놓고 도로 그것을 주워 먹으려고 간대 막대 밑에 잔등머리를 걸친 채 지랄을 하고 있었다. 짚을 줄 때마다 항상 매끼를 느슨하게 풀어 주는데도 놈들은 어째서 얌전하게 빼 처먹지 못하고 매번 두 번씩이나 손을 가게 하는지 몰랐다. 흐트러진 짚단을 갈무리해서 다시 축사 안으로 넣어 준 뒤 나는 대문 밖으로 눈을 돌렸다. 생각해 보면 대문 밖으로 발자국 한 번 떼지 못한 게 벌써 그저께부터였다. 어쩐지 바람 사나운 뒤란처럼 마음이 수선하다고 느꼈는데 다 그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새삼 외출을 생각하니 입 속에 똥물처럼 쓴 침이 고였다. 누워 있는 아버지가 괴인처럼 손만 길게 뻗어서 내 목덜미를 움켜잡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막 대문을 미는데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차임벨소리가 들렸다. “따안, 따, 따아, 딴.” 그순간 나는 쓴 침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아버지는 꼭 그런 순간에만 일부러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마루 양끝 기둥에 내걸린 스피커를 보면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침을 먹은 이래 한 번도 방안을 들여다보지 않은 일에 화가 났는지 표정이 삽상해 보이질 않았다. 어지간한 말은 할 수 있으면서도 아래웃입술을 꾹 찍어 붙이고는 아버지는 시늉으로만 우유통을 잘라 만든 오줌통을 가리켰다. 나는 아버지의 허리를 받쳐주려 했지만 아버지는 몸사래를 쳤다. 아버지는 싫으면 그랬다. 생떼 쓰듯 몸사래를 치는 동작 속에 악을 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 힘으로 볼일을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고집스런 오기가 엿보였다. 네 깐 놈 아녀도 내 몸 내가 얼마든지 간수할 수 있다, 그런 투였다. 아버지는 기어이 혼자 힘으로 베개 무덤에 올라앉았다. 아버지는 끈으로 된 바지 허리춤도 한 손을 이용해 스스로 끌렀다. 체머리를 흔들면서도 고집을 피우는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다. 나는 아버지 사타구니 밑에 오줌통을 받치고는 지그시 눈을 내리깔았다. 국을 많이 먹는 아버지는 그만큼 오줌의 양도 많았다. 1.5리터짜리 우유통으로 만든 오줌통의 손잡이까지 소변이 차 올라왔다. 나는 아버지가 뭉개고 있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밥상을 다 차린 당숙모가 주방 미닫이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휴대용 가스레인지 불부터 켜놓고 당숙모로부터 밥상을 받아왔다. 아버지의 방식이 그랬다. 아버지는 불부터 켜고 뚝배기를 얹어야지 그러잖으면 여간 성질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별 쓸데없는 타박을 다한다 싶어 들은 체 만 체 무시해 버리고 내 멋대로 그냥 뚝배기부터 얹고 불을 켰는데 아버지는 대번 숟가락을 방문에 내동댕이치고 밥을 먹지 않았다. 방전이 다된 아이들 장난감처럼 동작이 느린 한쪽 팔을 내저어가며 어둔한 혀로 되지 않는 욕지거리를 만드느라 사서 고생을 했다. 처음에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손발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처지에 무슨 호강을 더 바라고 저러나 싶었다. 밥 때만 되면 타박이 늘어갔고 숟가락 내던지는 걸 무슨 취미로라도 삼는가 싶어 보였다. 나도 지지 않고 아버지한테 대들었다. 그렇게 못마땅하면 얼른 일어나서 아버지 식성대로 끓이든 얼리든 마음대로 해 잡수라고 소리를 쳤다. 나이가 들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그 새 아버지가 망령이 드나 해서 지레 겁을 먹기도 했었다. 성미가 괴팍하고 괄괄하기는 했으나 자리를 보전하기 전에는 적어도 그런 하찮은 일로 성화를 부린 적은 없었다. 늘 일에 치여 살던 아버지였으므로 바쁘면 찬물 한 그릇에 밥을 말아 가지고 아무 데고 걸터앉아 고추장 한 가지하고도 잘만 끼니를 때우던 이였다. 병 수발이 길어지면서 나는 고작 줄 하나에 매달려 겨우 허리나 한 번씩 일으켜 볼 뿐인 아버지에게는 그 어떤 행동도 결코 사소하거나 하찮은 것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조금 뒤로 물러앉은 뒤 등허리를 벽에 기댔다. 아버지 대신 젓가락을 들고 아버지가 밥술을 뜰 때마다 깍두기 하나씩을 집어 숟가락에 얹어 주는 당숙모의 수굿한 모습이 생전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험한 꼴 보기 싫어서 그랬는지 어머니는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 해에 뚜렷한 증세도 없이 한 일주일을 앓는가 싶더니 영 눈을 뜨지 못했다. 아버지 수발을 들면서 무엇보다도 간절했던 것이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었다. 막상 아버지 수발을 들게 되고 나서야 생전의 어머니가 했던 말 한마디가 실감이 났다. 여자 앞세우고 무슨 욕을 볼라구 마누라한티 함부로 대햐. 이 담에 똥오줌이나 싸고 들어앉아 있어봐. 성질이나 하구 어느 누가 좋다고 하나. 마누라나 하니께 이꼴저꼴 감싸는 거지. 뚝배기에서 연신 담배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머리에 수건을 쓰고 밭에서 마늘종(種)을 놓던 생전의 어머니 환영이 비쳤다. 텔레비전 위, 벽에 걸렸던 어머니의 초상화는 아버지의 지청구로 웃방으로 옮겨 달아야 했다. 아버지는 반쯤 식사를 끝내고 있었다. 대장간 화덕처럼 그침 없는 가스불이 쉬쉭, 약탕기 끓이듯 내내 뚝배기를 달구다 보면 방안은 안개 피는 새벽 분지처럼 눅눅하고 어둑했다. 문창호지에 빛 한 점이라도 남아 있는 한 아버지는 형광등 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스위치를 올려놓은 앰프의 전원 표시등만 빨간 점 하나로 도드라지고 있었다. 나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천장으로 고개를 들었다. 길게 끈을 내린, 말코지에 매단 워낭이 사로잡히듯 눈으로 빨려들어 왔다. 본능처럼 옆구리로 손이 갔고 혁대에 찬 호출기가 만져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전화기와 합판에 부착해 벽에 못을 쳐둔 호출기용 누름 스위치가 의식됐다. 몹쓸 꿈을 꾼 것처럼 나는 다시 마음이 심란해졌다. “조칼랑 구판장이라도 갔다 오지 그랴. 답답할 텐디.” 그러잖아도 밖으로 나가려던 참에 마침 당숙모의 말이 내게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앰프에 켜진 빨간 전원 표시등을 혹처럼 등에 달고 대문을 나섰다. 왜 한 번 그 생각에 빠지면 마음의 소용돌이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지 몰랐다. 대학을 나온 형은 대전에서 교사를 하고 있었고 두 여동생은 마산과 청주로 시집을 갔기에 아버지와 함께 살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밖에 없었다. 아니,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살 사람이 아니라 이미 한 집에서 생활해 오고 있었다. 오년 전, 경운기에 고추포대를 싣다가 아버지가 풍을 맞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도 나였고 아버지를 병원으로 옮긴 사람도 다름 아닌 나였다. 형처럼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긴 했지만 아버지는 당초부터 나 하나는 농사꾼으로 남아 주기를 희망했었는지 몰랐다. 아버지는 고등학교에 가라는 소리를 한 적도 없었고 나 또한 달리 아버지를 보챈 적도 없었다. 지게질 같은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했으니까 새삼 농사를 배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일 때가 되면 아버지와 함께 논밭으로 가서 힘닿는 대로 거들면 그만이었다. 생긴 것도 배운 것도 아버지를 빼닮은 나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며 살아가는 일에 별로 회의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도시에서 공장 생활을 전혀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는 익숙한 농사가 더 잘 맞았다. 어머니가 떠나고 아버지와 둘이 사는 집안이 적막하긴 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무 조짐도 없이 덜컥 풍으로 쓰러졌을 때, 그 후의 앞날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형수도 처음엔 아버지를 어떻게 모셔야 하나, 당분간이라도 시골로 내려와야 하나 하는 고민을 내비쳤었다. 쐐기를 박은 건 오히려 아버지였다. “걱정들 말어. 나는 어디루 가지도 않고 가서 살 수도 웁다. 종문이하고 둘이서 살믄 된다”라고 잘라 말했었다. 종일 누워 지내는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가장 어려운 점은 서로의 연락 체계였다. 24시간 아버지 옆에만 붙어 있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아버지를 놓아두고 마음대로 바깥일을 볼 수도 없었다. 설령 대소변을 가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 어떤 사태를 맞을지 모르는 중환자를 아무 대비 없이 방안에 혼자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아직 농사채도 줄이지를 않아서 바깥일을 안 볼래야 안 볼 수도 없었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밖으로 돌아야 하는 농촌 사정이고 보면, 더구나 군식구 하나 없이 몸져누운 환자와 단 둘이 사는 처지이고 보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가 일을 당한 그 해에는 형네나 누이동생들이 짬짬이 다녀가긴 했지만 모두 그 때뿐이었고 상시적인 대책은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시골에서 간병인을 둘 형편도 아니었다. 달리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찾은 묘안이라고는 고작 안 쓰는 소 목사리에서 워낭을 떼 내 끈을 길게 묶은 뒤 벽 말코지에 매달아 두는 일이었다. 막대기 하나도 아버지 머리맡에 준비해 주었다. 일이 있으면 아버지는 끈을 흔들어 워낭소리를 내거나 막대기로 방문을 두드렸다. 그것도 내가 집 안팎 근처에 있을 때나 소용되는 수법이었다. 논이나 들로 나가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 때는 도리 없이 남의 일을 갔다가도 틈틈이 집안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발상의 진원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의 생일이 낀 작년 사월이었다. 형이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온 짐이 필요 이상 많다고 느껴졌는데 웬 앰프며 스피커, 최신형 전화기에다 핸드폰이 일반화된 후에는 아예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알았던 호출기까지 있었다. 형은 전공(電工)처럼 싣고 물건들을 설치하고 있었고 그에 관한 설명은 형수가 맡았다. “아버님도 자꾸 안 좋아지시고 도련님이 너무 힘드신 것 같아서 고민 끝에 찾아낸 방법이에요.” 그러니까 형이 가지고 온 물건들을 설치한 것과 형수가 덧붙인 설명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KT-2020PA’라는 모델 넘버가 붙은 앰프에는 세 개의 버튼이 달려 있었다. 하나는 ‘따안, 따아, 따, 딴’하고 울리던 차임벨을 위한 것이었고 다른 두 개는 ‘공습’과 ‘경계’라고 표기된 사이렌을 울리는 버튼이었다. 앰프의 용도와 사용법을 설명하고 난 뒤 형수는 아버지에게 듣기에 좋으니 주로 차임벨을 이용하라며 농담을 덧붙이기도 했다. “아버님, 도련님이 말을 잘 듣지 않으면요, 볼륨을 높이고 사이렌을 울리세요. 아마 온 동네가 떠나갈 걸요.” 형수는 익살스런 동작으로 시범까지 보였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앰프가 근거리용 교신기였다면 전화기와 호출기는 원거리용 교신기에 해당했다. 전화기는 앰프 바로 옆에 놓았고 두 개의 누름 스위치를 부착한 합판 조각은 아버지가 손을 쓰기 편리한 위치의 벽에다 못을 쳐서 고정해 두었다. 이미 광역 통신망으로 개통해 온 호출기는 내게 지니도록 했다. 누름 스위치 가운데 색깔이 흰 것은 전화번호 단축 메모리 버튼에 내 호출 번호를 입력해서 버튼만 따로 누를 수 있도록 특수 장치를 한 것이었고 자주색 누름 스위치는 형네 전화번호가 메모리 된 버튼이었다. 형수의 설명을 듣고 난 큰 여동생네의 마산 매제가 “형님 인제는 마, 한시름 팍 놔뿌고 연애도 쫌 하러 댕기시이소” 하고 너스레를 떨어서 오랜만에 가족들이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었다. 형수가 시범으로 수화기를 내려놓고 흰색 누름 스위치를 누르자 내가 들고 있던 호출기에서 “삐삐삐삐, 삐삐삐삐” 소리가 울렸다. 형수가 설명을 보탰다. “도련님, 이 호출기는 아버님하고만 이용해야 돼요. 괜히 친구들한테 번호를 가르쳐 주면 혼돈이 일어나니까요. 삐삐 소리가 나면 볼 것도 없이 집으로 오시면 돼요.” 나는 그것 참 십상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좀 먼 데를 나가더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비록 그 방면에 재주는 없었지만 하다못해 중매라도 들어오면 시내로 커피 한잔이라도 마시러 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정작 편리를 볼 것이라 기대되는 아버지의 표정이 썩 밝지가 않았다. 큰 내색은 감추고 있었지만 우리들끼리 부산을 떠는 걸 못마땅해하는 표정만은 역력했다. 모든 설치를 끝내고 형이 칙칙하다며 말코지에 매단 워낭을 떼려 하자 아버지가 놔둬라, 해서 형네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언젠가 한 번 크게 체해서 토했을 때와 대변이 마려운 때라든지 긴급한 경우가 아니고는 거의 호출을 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호출기만 믿고 시내로 나가서 친구들과 늦도록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아버지가 의도적으로 호출하기를 꺼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깊은 속내를 짚어볼 수야 없었지만 나 또한 차차 느껴지는 바가 없지 않았다. 형네야 순수한 마음으로 내 불편을 생각해서 앰프며 호출기를 비싼 돈 들여 장만해 준 것이었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딘가 속았지 싶은 기분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인지 몰랐다. 호출기가 언제부터인가 내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멍에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형네는 작년 아버지 생일 이후로는 아버지를 찾는 횟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근래만 하더라도 지난 여름방학 때와 추석 때 다녀간 게 전부였다. 은연중 앰프나 호출기는 나와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형네의 편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앰프나 호출기가 아버지와 나 사이에 필요한 교신용 기기가 아니라 형네가 나를 원격조종하기 위한 무슨 흉계라도 품고 있는 물건처럼 느껴지고 난 다음부터는 방안에 들어갈 때마다 마주쳐야 하는, 앰프에 켜진 그 놈의 빨간 전원 표시등이 그렇게도 이물스레 느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아버지와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기 시작한 것도 다 호출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아버지가 풍으로 쓰러지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었다. 아버지가 건강했을 때야 각방을 썼지만 아버지가 눕게 된 뒤로는 안방에서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농한기가 되는 겨울이면 아버지는 마치 갓 혼인한 색시처럼 내가 방으로 들기를 수줍게 기다렸다가 긴 밤 동안 불편한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전에 듣지 못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내게 서운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던 감추었던 속내라든지, 할머니와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라든지 또는 내 장래에 대한 것이라든지 아버지가 가슴 속에 깊이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이었다. 아버지는 천진한 아이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그렇게 내게 이야기를 오래 할 때 아버지는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곁에 누운 아버지가 새색시처럼 느껴져 얼굴이 붉어졌던 기억은 나만 알고 있는 은근한 부끄러움일 터였다. 그 때-형이 방안의 말코지에 매단 워낭을 떼어내려 했을 때 “놔 둬라”라는 의사를 분명히 한 걸 보면 어쩌면 아버지는 그 후의 모든 상황에 대해 정확한 예측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결코 그런 기계적 장치들이 당신에게 유익한 것들은 못될 것임을. 그랬다. 호출기가 생기고 난 지난 겨울에 나는 전해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었던 마을 다니기에 열을 올렸다. 영농 후계자인 민식의 집에서 고스톱을 치거나 젊은 패끼리 소주잔을 기울이다 보면 머리 속 한켠에 웅크리고 있는 아버지는 애써 외면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였다. 발길이 뜸해진 형수가 이따금 전화를 걸어 와 “도련님, 호출기가 있으니까 편하지요?”라고 물었을 때 그만 그놈의 앰프며 호출기를 다 없애 버릴까, 하는 부아가 치밀어 오른 적도 없지는 않았지만 어느 부분 나는 알게 모르게 기계장치의 편리에 물들어 있었다. 오십 가구도 안되는 시골이라는 환경 탓이 크겠지만 헤프게 빼앗기는 마음이나 잘 갈무리하는 도리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어찌됐든 올 겨울은 마을 다니는 일을 미루고 아버지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다잡아 보지만 두려움부터 앞서는 까닭은 왜인지 몰랐다. 덕구는 저만큼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은행나무 옆에서 놈은 겨우 낯짝만 보일 만큼 몸을 숨기고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흡사 내가 아버지를 두고 어디로 멀리 도망가기라도 할까 싶어 놈은 망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짜증이 날 때마다 아무 이유 없이 구박을 해서 썩 살갑게 달라붙지는 않았어도 놈은 늘 내 언저리를 맴돌았다. 대문을 나설 때도 보이지 않았는데 놈은 언제 뒤를 밟았는지 몰랐다. 종이컵에 따른 맥주잔을 들고 나는 공중전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멀리 떨어져 앉아 있는 놈이 오늘따라 유독 측은하게 느껴져서 나는 놈에게 오징어다리 하나라도 떼줄 생각으로 손을 까불러 보았지만 놈은 두더지처럼 땅에 코를 박을 뿐 다가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공중전화기에 동전을 집어넣고 청주의 막내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가진 환경에 맞춰 고만고만한 데로 시집간 막내 경순은 요즘 들어 통 연락이 없었다. 직업이 일정하지 않은 매제 때문에 생활이 들쭉날쭉했는데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어 보였다. “네?” 전화를 받아놓고도 경순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뻔한 경순의 행동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울음을 삭이고 났는지 곧 축축한 목소리가 내 살을 휘감았다. “오빠, 힘들지? 아버지는? 주형이 아빠 집에 없어? 한번 갈게?” 종종 울음을 섞으며 경순이 전하는 얘기는 귀로만 듣고 내 눈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행나무 가지에 높이 얹힌 까치집이 너무 썰렁해 보였다. 눅눅하게 내려앉은 하늘이 은행나무 위로 상가처럼 우울한 지붕을 만들고 있었다. “쌀 한 가마니 보낼 껴. 아무 소리 말고 받어.” 나는 전화를 끊고 술값을 치른 뒤 집으로 향했다. 시간을 의식한 탓인지 저녁 어스름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떼를 짓는 것 같았다. ‘별일이야 있을라고?’ 쌍거리까지 오자 당숙모가 돌아가고 혼자 남아 있을 아버지가 생각났다. 항상 그 때쯤이 무서웠다. 어둠이 의뭉스럽게 표도 없이 내리는 저녁 무렵이면 혼자 남은 아버지에게 꼭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만 같은 불길함을 떨치기 어려웠다. 괜한 방정이다 싶으면서도 여느 때나 다름없이 누워 있는 아버지를 확인하기 전에는 좀체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형광등 스위치 끈을 길게 늘여 아버지 곁에 두었어도 아버지는 손수 불을 켜는 법이 없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그놈의 빨간 전원 표시등 한 점만 더욱 야멸스럽게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기척 없이 누워있는 아버지는 불을 켜기 전에는 아직 살아있는지 어떤지조차 분간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때로 깊은 굴 속에 숨어 사는 동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아버지와 사이가 벌어진 요즘 들어서는 부러 더 그러는 것 같았다. 불을 켜고 말 한마디라도 내가 먼저 건네기 전에는 아버지는 큰 바위처럼 꼼짝할 줄을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방안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때를 놓친 소들만 발광을 놓으며 사뭇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소들에게 사료부터 퍼준 뒤 방안으로 들어갔다. 스위치를 올려 무력한 주인 대신 저희들 멋대로 유희를 즐기고 있던 어둠을 내쫓자 숨죽은 채소처럼 힘없이 잠들어 있는 아버지의 초췌한 모습이 드러났다. 아버지의 숨소리는 가늘고 허약했다. 물끄러미 아버지의 파리한 얼굴을 바라보자니 저대로 영 못 일어나지나 않나, 싶은 쓸쓸한 생각이 엄습했다. 웬일로 아버지의 머리맡에 두루말이 휴지가 길게 풀려 있는 것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방에 들어올 때부터 무슨 냄새가 나지 않았나 싶었다. 스무 개의 손가락과 발가락 끝으로 몸 안의 기운이란 기운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어쩌자고 아버지는 똥을 싸도록 호출을 하지 않는지 몰랐다. 또 겨울이 시작됐나 싶어서 서둘러 엄포라도 놓을 셈으로 이러나 싶기도 했지만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마을을 자주 나가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보일러 온도조절기를 급탕으로 눌러놓고 밖으로 나왔다. 포물선을 그리고 있는 하늘 아랫녘에 흐린 그믐달이 가까스로 허리를 세우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도 한 번은 부려보고 싶었던 유혹 같은 오기였다. 똥을 싸서 깔아뭉개든지 어쨌든지 아버지가 호출을 하지 않는 한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결국엔 내게 모든 책임을 미룰 수밖에 없으면서도 괜한 고집을 피운다 싶은 아버지가 야속했다. 한 번쯤은 아버지로부터 멀리 달아나 보라고 세모진 쥐 주둥이 하나가 가슴팍을 갉아대고 있었다. 내 걸음은 느렸지만 서서히 땅 속에 발목을 묻으며 어둠 속을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속이 벌어진 채 고사목이 되어 버린 느티나무 앞 서낭당을 넘어서면 전봇대 하나 서 있지 않은 너른 벌판이었다. 대봇둑을 가로질러 금강(錦江) 둔치까지 걸어갔다 오려면 한 시간은 더 걸릴 터였다. 어쨌든 그 사이 한 번은 눈을 뜰 것이라는 아버지의 습관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서낭당 앞에 가뭇거리는 불빛 한 점이 보였다. 옅은 징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웬 굿인가 싶어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낭당을 눈여겨 바라보았다. 차츰 사라져가고 있긴 했지만 그곳에서 간간이 굿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여 보니 공수를 위해 강신(降神)을 기원하는 무당의 목소리가 귀에 익은 것이었다. 하긴 ‘당산집’의 그녀를 빼고는 마을에 달리 무당이 살고 있지도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에 이어 아버지마저 풍으로 쓰러지자 동네사람들로부터 굿이라도 한 번 하라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왔었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이나 아버지의 중풍, 마흔 줄에 이르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는 나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원인이 조상의 원귀가 허공장천을 떠도는 까닭이라고 제법 그럴 법한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굿은 아니라도 한 번쯤 점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이 겨울이나 제대로 나려는지. 점점 커지는 징소리가 바람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강의 하구로부터 몰려오는 찬바람이 더딘 내 걸음을 종종 묶어놓곤 했다. 나는 행여 징소리나 바람소리로 하여 호출기음을 듣지 못하게 되지나 않을까 싶어 혁대에 찬 호출기를 끌러 손에 쥐었다. 대봇둑을 넘자 징소리는 다시 아득하게 멀어졌다. 강바람만 한결 거셌고 덕분에 비닐하우스들만 요란한 비명과 함께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낮부터 흐리기만 계속하더니 비라도 올 성싶었다. 하긴 가을의 끝물이었고 얼핏 겨울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환절기에는 늘 그렇게 뚜렷한 징후가 엿보였다. 찬비가 시작되면 사나흘은 두고 계속 내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발에 익은 길이어서 그렇지 어둠대로라면 금강 둔치를 찾아가는 일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바람에 떠는 비닐하우스의 비닐들이 이따금 눈발처럼 희끗희끗 내비치곤 했었다. 춥기도 했거니와 음산한 일기가 영 마음을 편치 못하게 굴었다. 서낭당의 굿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와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나이가 들어 장년이 되었어도 나는 무슨 까닭으로 무당의 굿하는 모습을 볼 때면 뜨악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하는 것이었다. 아니, 실은 고의적으로 아버지를 버려두고 왔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때문일지도 몰랐다. 지금쯤 아버지는 바짓가랑에 똥오줌을 깔아뭉개고 앉아 한기에 몸을 떨고 있을 것이 뻔하지 싶었다. ‘하필 날씨가 이렇게 사나워질 게 뭐여’ 싶은 속내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편으로는 누가 이기나 보자는 오기로 걸음을 더해 나갔다. 어두운 방안에서 뇌성마비 자폐아처럼 똥칠을 하고 있을 아버지와 흡사 성난 아버지의 눈빛으로 착각되는 앰프의 빨간 전원 표시등이 떠오르자 오기는 한층 더 수위를 높여갔다. 그리고 불안과 야물어 가는 오기 뒤로 형네의 모습이 보였다. 사방이 완전히 깜깜해지고 비가 트기 시작하자 나는 강 둔치로 가던 걸음을 돌려 비닐하우스로 들어갔다. 비닐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끊이지 않으면서 곳곳에서 냉기가 피어 올라왔다. 나는 박스 위에 쪼그리고 앉아 호출기를 귀에 대고 비가 긋기를 기다렸다. 내리는 비는 한편 아버지와의 잔인한 게임을 잘 버티도록 도와준다 싶기도 했다. 두어 시간은 그런 대로 버틴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불안 쪽으로 기울어 갔다. 시끄러운 빗소리에 호출기 소리만 들으려고 골몰한 탓에 이렇게 밤비가 치는 날이면 정전되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자 아차 싶었다. 정전이 되면 보일러가 돌아갈 턱이 없었다. 느닷없이 내려간 기온주도 문제려니와 똥을 싸서 척척한 바지며 이부자리, 게다가 정전까지 되었다면 아버지의 난감함이란 상상할 필요조차 없었다. ‘아버지, 호출을 하세요. 호출을!’ 그러나 손끝 하나면 충분할 흰색 누름 스위치를 아버지는 결코 누를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비닐하우스 문을 열고 여전히 빗발이 긋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을 내다보았다. 그만 억지를 부리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어 길목이다 싶은 곳을 주시하는데 웬 빨간 불빛 한 점이었다. 그 순간 왜 앰프의 전원 표시등이 떠오른 걸까. 그 표독스러움, 그 이물스러움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는 빗속으로 뛰어든 것은 그 뒤로도 한 시간여나 더 지나서였다. 한밤중이기도 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정전이 된 마을은 전체가 하나의 검은 실루엣이 된 채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내 발자국 소리를 따라 간헐적으로 짖어대는 개 울음소리만 음험함을 퍼뜨리며 어둠에 묻힌 마을을 두 동강으로 자르고 있었다. 나는 자빠질 듯 대문을 밀고 집으로 들어갔다. 황급히 손전등을 찾아 방안을 비춰보니 혼자 힘으로 바지를 벗으려고 무진 애를 쓴 것으로 보이는 아버지가 똥자맥질의 흔적을 곳곳에 남긴 채 고단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아버지의 손이며 이부자리는 말할 것도 없었고 벽과 가스레인지까지 똥칠 투성이였다. 아버지가 벗으려던 바지는 겨우 엉덩이에 걸쳐진 채 아버지는 진버짐이 피는 추레한 허벅지만 앙상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아버지를 향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참기 어려웠다. 격한 울분인지 처연한 슬픔인지 모를 내 복잡한 심사는 비단 아버지를 향한 것만은 아닐 성싶었다. 빨간 불빛 한 점, 앰프의 전원 표시등이 떠올랐고 아버지와 나 사이를 이간질하기라도 하는 듯한 세상 누군가를 향한 잔인한 살기마저 뻗쳤다. 대야에 물을 받아온 나는 차근차근 아버지를 씻기기 시작했다. 잠이 깬 아버지는 얼핏 실눈을 뜨는가 싶더니만 이내 도로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빨랫거리들을 마루로 내놓은 다음 똥물이 든 대야를 들고 일어섰다. 문지방을 넘으려는 순간 웬 끈 하나가 발끝에 걸리는가 싶으며 돌연 ‘따랑’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손전등의 여린 불빛에 흐리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형네가 호출기며 앰프를 설치하기 전까지 아버지와 내가 의사소통의 방편으로 벽 말코지에 매달아둔 해맑은 워낭소리였다. 차임벨이나 호출기로 대체하기까지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로 즐겨 삼았던, 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것처럼 불현듯 다시 듣게 된 놋워낭의 소리였다. 그 워낭소리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삽시간 들끓어 오르는 아버지를 향한 연민을 견딜 수 없었고 똥물 대야를 든 채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아버지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농한기의 긴 겨울밤을 새울라치면 나란히 누운 내게 불편한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갖은 이야기하기를 즐겨하던, 때로 아버지가 새색시처럼 느껴져 내 스스로가 몹시 부끄럽기도 했던 아버지의 그 얼굴을. |
심사평 “등장인물 성격 손에 잡힐듯 … 구성도 탄탄”
유재용 총 응모작 55편 중에서 예심을 거쳐 올라온 12편을 꼼꼼하게 읽고 논의한 결과 이숙희의 〈고래〉 한규성의 〈졸병수첩〉 임수정의 〈관음사 가는 길〉 부원의 〈워낭소리〉 등이 남았다. 이 중 〈고래〉 〈졸병수첩〉은 입담은 좋으나 구성이 산만하고 주제가 약한 결함이 지적되었다. 또 〈고래〉는 사건의 내용이 격이 낮고 상투적이며 고래의 상징성이 약하다는 점이, 〈관음사 가는 길〉은 주인공 끝님의 토지(농토)에 대한 강한 집념과 애착이 끝 부분에 가서 심리 변화의 과정 없이 포기하는 것이 크게 거슬렸다. 이들에 비해 〈워낭소리〉는 문장력과 구성력이 돋보였다. 주인공은 물론 그를 둘러싼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도 선명했다. 또 밑바닥에 농촌의 현실문제까지 은유적으로 깔아놓고 결말도 무난해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손색이 없다고 판단되었다. 좀더 노력하면 고 이문구씨 못지 않게 발전할 가능성도 물론 보였다. 당선자인 부원씨의 건필을 빌며 낙선자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
당선소감
부원(본명 양승석) 나는 매우 작고 사소한 것들에 충실하고자 애쓴다. 생의, 세계의 비밀을 알았다고나 할까. 당선의 기쁨에 달뜨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고 또 내가 걸어가야 할 문학 장정을 자못 절감하고 있기에 되려 누군가에게 이런 소식을 전하는 것조차가 무안하기만 하다. 작가에게는 오직 쓸 일만이 무한한 성찬처럼 남아있겠으므로, 나는 어서 그 아름다운 고행 속으로 파묻힐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은 내 생의 더 나중에 있을 것임을 확신하며 나는 오늘 여기, 이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농촌·농민이라는 말만 들어도 거기 내 영혼의 본향이 있는 듯 마음 푸근하여 각별한 노력으로 응모한 것인데 수상까지 하게 되었다. 문학인으로서 냉정하고 엄정할 것을 일깨워주신 윤후명 선생님, 졸고를 거두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세상을 향한 나의 이 사소한 출발과는 상관없이 이미 내 가슴에는 문학으로 퍼 담을 인간과 세계를 위한 무모할 만큼의 거대한 성채들이 준비되어 있기에 오직 성실하고 겸손하게 정진할 것임도 굳게 다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