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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納土城이 漢城百濟 王城이 될 수 없는 이유
1. 서론
백제 한성기 도읍지 한성은 어디일까? 삼국사기를 쓴 고려시대 김부식이나 삼국유사를 쓴 일연부터 시작된 이 논쟁이 아직 끝나지 않고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김부식은 모르겠다고 했고, 일연은 古傳記(옛 부터 전해오는 기록)를 보고 온조왕 14년 옮긴 도읍지 한산을 분명히 그 당시의 광주(今廣州)라고 했다. 古傳記가 어떤 기록을 지칭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연은 분명히 어떤 옛 부터 전해오는 역사적 기록을 보고 인용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삼국유사가 쓰여 질 당시의 고려시대 광주의 치소는 현재의 하남시 춘궁동 일대이다. 그 후 다산 정약용도 그의 저서 아방강역고에서 백제왕도 한성을 역시 지금의 춘궁동 일대로 비정했으며, 이병도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도 이전 선학들의 주장에 동조해 하남시 춘궁동 일대로 비정해 왔다. 그런데 88올림픽을 계기로 몽촌토성이 발굴되면서 그동안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 머물러 있던 백제왕도 한성의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풍납토성이 발굴되자 이번에는 백제왕도 한성이 풍납토성이란다. 지금은 풍납토성으로 거의 굳어진 상황이고, 풍납토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바보취급 받기 십상이 될 정도로 확고한 위치를 굳히고 있다. 그러나 풍납토성의 발굴이 진행되면서 필자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에 의해 풍납토성이 백제왕도 한성이라는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렀고,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한 일환으로 이 학술대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학술대회도 그 논쟁의 끝이 아니고 시작이 될 것이다. 풍납토성이 백제왕도 한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나 언론들은 풍납토성이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은 백제 개로왕의 남성인 한성이라는 논리인데, 그렇다면 풍납토성은 과연 백제 개로왕의 왕도 한성일까? 필자는 한마디로 “아니다” 이다. 우선 風納土城이 漢城百濟의 왕성이라고 이미 결론이 나버린 이 시점에서 “아니다”라고 말해야하는 필자의 심경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1997년 풍납토성이 처음 발굴될 때부터 계속 지켜봐온 건축가로서, 도시공학자로서 고고학자나 역사학자와는 또 다른 시각으로 그동안 발굴을 지켜보아온 것이 사실이다.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 아니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발굴이 거듭될수록 그 생각이 점점 더 굳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국, 중국, 일본의 고대도시, 왕성, 왕궁, 기타건축물들을 조사하고 직접 방문하여 풍납토성과 비교 검토하는 과정에서 풍납토성은 한성백제 왕성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무슨 이유로 풍납토성이 한성백제 왕성이 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2. 본론
첫 번째, 엄청난 양의 礎石이 발견되어야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면 풍납토성 내에서 엄청난 양의 초석이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10년이 넘게 발굴을 계속하고 있지만 확실한 건물의 초석은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의 풍납토성이 고구려의 장수왕의 마지막 공격을 받은 백제 개로왕의 남성인 漢城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아차산 아래로 끌려가서 죽고, 그 아들 문주가 공주로 이도한 후 건설한 공주의 거의 모든 건물은 초석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산성이 왕궁인지, 별궁인지, 전시 피난성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공산성 내에 있는 많은 건물은 거의 대부분이 초석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라는 것을 볼 때 풍납토성도 개로왕의 왕도 한성이라면 당연히 수많은 초석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구성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수많은 초석이 발견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혹자는 “백제가 공주로 이도한 후 문화가 급격히 변한 것 같다”라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궁궐건축은 건축문화의 정수이자 또한 건축기술의 정수이다. 문화와 기술은 갑자기 변하지도 않고, 변할 수도 없는 속성 가지고 있다. 풍납토성에서 움집에 살던 사람이 공주에 가서 갑자기 초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架構式 구조의 건물을 짓고 살았다면 과연 누가 믿겠는가? 굳이 공주와 비교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평양 대성산성 아래 고구려 長壽王의 安鶴宮이 있다. 김일성대학에서 작성한 발굴보고서를 보면, 안학궁을 구성하고 있는 기둥이 2590개라고 되어있다. 물론 2590개의 기둥은 2590개의 거대한 초석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고구려의 왕들은 2590개의 기둥과 2590개의 초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궁궐에서 살았는데, 동시대 백제의 개로왕은 기둥도 초석도 없는 움집에서 살았다면 과연 누가 믿겠는가?
두 번째, 엄청난 규모의 架構式 구조의 건축물(보와 기둥과 초석으로 이루어진 건물)이 발견되어야.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면 엄청난 규모의 가구식 건축물이 발견되어야 한다. 중국은 殷나라 때 이미 가구식 건축물로 왕궁을 지었으며 周나라 때는 기와를 사용하여 건물을 지었다는 증거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풍납토성의 그 간의 발굴성과를 보면 가구식 건축물이라고는 경당지구에서 발굴된 제사터라고 하는 건물과 197번지에서 발굴된 적심건물 만이 가구식이고, 그 외에 가구식으로 지어진 건물은 없다.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면 굳이 안학궁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규모 있는 가구식 건축물이 여러동 발견되어야 왕성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세 번째, 목탄의 탄소연대측정치가 기원전후가 아닌 5세기 전후가 나와야.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면 풍납토성에서 채취된 목탄의 탄소연대측정치가 기원전후가 아닌 5세기 전후가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발굴자를 비롯하여 일부학자들은 풍납토성을 백제왕성이라고 했고, 백제왕성이라면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한성백제 마지막왕인 개로왕이 최후항전을 했던 남성인 왕도한성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장수왕이 왕도한성을 공격한 해가 475년이므로 당연히 탄소연대측정치가 5세기 후반대가 나와야 한다. 그런데 필자가 가지고 있는 ‘풍납토성 출토 시료 방사성탄소(C14) 연대측정 결과’를 보면 아래와 같다.
출토지 시료 방법 방사능탄소연대 중심연대 보정연대
(BP) (BC/AD) (BC/AD)
풍납 신우 집자리 2호 목탄 C-14 2190+-50 BC199 BC380-90BC
풍납 신우 집자리 3호 목탄 C-14 1980+-50 AD40 BC70-140BC
풍납 신우 집자리 4호 목탄 C-14 1850+-50 AD160 AD70-220AD
풍납 1지구 집자리 1호 목탄 C-14 2030+-50 BC14 BC180-90AD
풍납 1지구 집자리 3호 목탄 C-14 2150+-50 BC148 BC360-40BC
풍납 1지구 집자리 8호 목탄 C-14 2080+-60 BC60 BC200-70AD
풍납토성 B지구 내벽 탐색 Tr.1 목탄 C-14 1820+-50 AD231 AD90-340AD
풍납토성 A지구 내벽 V토루 목탄 C-14 2110+-50 BC109 BC10-20AD
풍납토성 B지점 내벽 4단 석축 하부 목탄 C-14 2080+-50 BC58 BC200-50AD
풍납토성 B지점 내벽 토기 TL 1997+-70 AD3 BC70-70AD
이 결과를 보면 10개의 시료 중 중심연대가 5세기 전후는 하나도 없고, 3세기가 하나, 2세기가 하나,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가 기원전후이고, 심지어 어떤 것은 기원전 2세기, 기원전 3세기까지 올라가는 측정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 발굴자들은 이 결과치를 놓고 ‘탄소연대측정치는 편차가 심해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열심히들 탄소연대측정을 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다. 탄소연대측정은 소설이 아니고 과학이다. 자기들 입맛에 맞게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믿을 수 없다면 아예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지. 탄소연대측정 결과치만 놓고 볼 때 풍납토성의 육각형 수혈 주거지는 기원전후에 이미 다 불타버렸고, 불탄 후에 한성백제 거민들이 일부 살다가, 한강의 홍수로 토사에 뒤덮혀 지하에 묻혀 버린 채로 오늘에 이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백제사람 들이 풍납토성 내에 전혀 살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이 지역도 당연히 한성백제의 영역이니 그 후 당연히 백제사람 들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풍납토성을 初築하고 성내에 살았던 주체세력이 누구냐는 것과 과연 한성백제 왕성이냐는 것이다.
네 번째, 條坊制에 의해 계획된 격자형 도시구조가 나와야.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면 조방제에 의해 계획된 격자형 도시구조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풍납토성에서는 이러한 도시구조가 아직은 보이지 않고 있다. 아니 추후 발굴에서도 경주왕경이나 평양의 장안성에서 나타나는 조방제에 의해 계획된 격자형 도시구조를 발견하기에는 요원해 보인다. 미래마을 발굴현장에서 일부 직선도로가 발견되기도 했지만 條坊制에 의한 계획된 도로로 보기 어렵고, 풍납토성에서 주류를 이루는 육각형 수혈 주거지 들도 도시계획에 의해 어떤 축을 이루기보다는 제각각 축도 없이 아무렇게나 배치된 것으로 보아 풍납토성은 아직까지는 무계획한 도시로 보아야 한다. 한 국가의 도성의 도시계획 교본을 처음 제시한 나라는 중국의 주나라(동주)이다. 동주시대에 제나라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周禮考工記’는 夏, 殷, 周 삼대의 제도를 기록하여 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동주의 도성의 주요 건축물은 도성 중앙에서 약간 남쪽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考工記’에 왕궁이 중앙에 위치한다는 기록과도 부합되며, 도성의 형태가 정연한 기하학적인 형태를 하고 있는 계획적인 의도에 따라 만들어 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공기’에는 도성을 계획하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方9里의 도성을 만들고 그 중앙에는 方3里의 궁성을 배치한다. 성벽의 각 면에는 2개씩 성문을 배치하고 도성 안에는 세로방향과 가로방향에 9개의 간선도로를 교차시킨다. 궁성 좌측에 종묘를 만들어 조종을 봉기하고 궁성 우측에 사직단을 두어 토지오곡지신에 제사를 지낸다. 궁성 전면에는 조정(행정관청)을 배치하고 궁성 후면에는 시장을 설치하며, 조정과 시장은 각각 100매로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중국은 이미 周나라(東周)때 도시계획의 규범을 만들어 도성을 계획할 때 그 규범에 맞게 건설하도록 하고 있고, 백제도 예외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한성시대 백제에는 조방제에 의한 도시계획 없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그 당시 주변국가의 예를 볼 때 한성시대 백제도 당연히 조방제에 의한 도성계획이 시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섯 번째, 풍납토성에서 출토되는 다양한 종류의 수막새가 풍납토성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다수 출토되어야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면 풍납토성에서 출토되는 다양한 종류의 수막새가 풍납토성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출토되어야 한다. 그런데 풍납토성에서 출토되는 다양한 형태의 기하학적인 수막새는 석촌동 4호분을 제외한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석촌동 4호분에서 출토된 기와도 열십자 모양을 띤 단 한 종류의 기와만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단 한 종류의 기와가 석촌동 4호분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더라도 풍납토성에서 사람이 인위적으로 가져가 석촌동 4호분에 묻지 않는 한, 풍납토성의 주인은 석촌동 4호분의 피장자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한다.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면 한성시대 거의 500년의 도읍지라는 말인데, 어떻게 그 긴 세월 동안 풍납토성의 기와가 인근으로 전파되지 않고 풍납토성에만 머물러 있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풍납토성은 기원전후 어느 시대에 한시적으로 경영되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공격을 받아 불에 타서 주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백제영역의 일부가 되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증거가 아닐까? 혹자는 석촌동 4호분이 한성백제의 무덤이고, 거기에서 풍납토성에서 나온 기와와 같은 기와가 나왔으니 풍납토성도 백제왕성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석촌동 4호분이 당시 백제의 왕성으로 추정되던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의 인근에 위치한다는 이유만으로 백제무덤이라고 단정하기에는 고고학적인 뒷받침이 전혀 안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풍납토성을 본격적으로 발굴하면서 풍납토성의 初築 주인이 백제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발견되면서 석촌동 4호분을 포함한 계단식 적석총도 다시 정체성의 재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 된다
여섯 번째, 한강의 홍수로부터 자유로운 곳이어야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면 한강의 홍수로부터 자유스러운 곳이어야 한다. 기루왕 조에 「40년 여름 6월에 큰 비가 10일 동안 내려 한수가 넘치니 민가가 무너지거나 떠내려갔다’ 거나 개로왕조에 ‘백성의 집도 자주 강물에 무너지니…」라고 하여 한수와 가까운 곳에 거민들이 거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홍수로 인해 제방이 무너지거나 강물이 넘쳐서 강변에 위치한 민가의 피해가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성백제 500년 동안 왕궁이 장마나 한강의 홍수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단 한 차례도 없는 것으로 보아 왕궁은 漢水로 부터 일정거리 떨어져 있거나, 왕궁은 홍수의 피해를 입지 않을 정도로 일정한 높이에 위치해 있거나, 또는 한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풍납토성이 왕도 한성이라면 한수가 넘쳐서 민가가 무너지거나 떠내려갔다고 기록할 것이 아니라 민가와 함께 왕궁과 종묘도 떠내려갔다라고 기록해야 옳았을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잘 살펴보면 왕궁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사건은 비록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기록으로 남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물며 왕궁이 홍수의 피해를 보았는데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비류왕 「30년 여름 5월에 별이 떨어지고 왕궁에 화재가 있어 민가를 연소하였다... 」라고 하여 도성 내 왕궁에서 일어난 화재가 거민성에까지 번져 민가를 불태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왕성과 거민성은 도성 내 병존하고 있었으며 일부 민가는 왕궁과 상당히 인접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풍납토성은 한강변에 인접하여 한강의 홍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도 한강에 홍수가 나면 강남에서 제일먼저 침수되는 지역이 풍납동이어서 삼국사기 기록과도 문헌적, 지리적으로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풍납토성의 유구들은 지하 4M내지 5M아래에 한강으로부터 범람된 토사를 머리에 잔뜩 뒤집어쓰고 있다.
일곱 번째, 풍납토성의 면적이 웅진도성(200여 만평)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어야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면 풍납토성의 면적이 웅진도성(일제강점기 때 經部慈恩이 복원한 웅진도성 복원도를 기준으로 한 것임)의 면적(200여 만 평)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풍납토성의 면적은 22만 6000평(성벽을 제외한 내부면적은 18만평)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풍납토성의 면적은 웅진도성의 십분의 일 정도밖에 되지 않다고 생각하면 무난할 것이다. 한 나라의 도성의 면적은 그 나라가 국가대 국가 간의 사생결단을 건 총력전에 동원된 군사력과 비례한다. 백제의 한성기에 군사동원기록을 삼국사기 기록에서 살펴보면, 근초고왕 26년에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할 때 동원된 백제 정병이 3만 명이고, 근구수왕 3년에 다시 3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비록 웅진시기이기는 하나, 성왕 7년 代 고구려 전에도 3만 명의 보, 기병을 동원한 기록이 있어, 백제가 최대로 동원한 병력은 3만 명 정도였다. 그러면 고구려는 어떤가? 고구려는 개로왕 21년 장수왕이 한성백제를 치기 위해 동원한 군사가 역시 3만 명이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백제와 고구려는 쌍방 간의 전쟁에서 비슷한 수의 군사력을 동원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도성의 면적은 어떤가? 시대가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나 고구려의 도성인 평양의 장안성은 자그마치 358만평(필자가 직접 산출한 자료임.) 규모이며, 신라왕경은 무려 484만평(1994년 김한배의 신라 왕경 복원도 기준으로)-700만평(일부 학자들의 주장) 규모이고, 백제의 마지막 왕도인 사비도성도 400만 평에 달하는 규모인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필자는 당혹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중국의 장안성은 2500만평 이고, 낙양성은 1589만평, 일본의 나라지역에 있는 후지와라경이 240여만 평, 헤이죠오경(平城京)이 880여만 평, 헤이안경(平安京)이 700여만 평인데 비해 풍납토성을 백제왕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덟 번째, 한강의 홍수로부터 도성을 보호하기 위해 崇山(검단산으로 추정)의 북에서 蛇城의 동까지 쌓았다는 제방 중 하남시 쪽은 쌓지 말았어야
삼국사기 개로왕 조에「이에 나라사람을 다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곧 그 안에 궁실, 누각, 대사를 지었는데 장려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큰 돌을 욱리하에서 가져와 곽을 만들어 아비의 뼈를 장사지내고 河水를 따라 방죽을 쌓되 蛇城의 동에서 崇山의 북까지 이르렀다」라고 하여 개로왕 때 고구려 첩자 도림의 간교에 빠져 국력을 총동원하여 토성을 다시 쌓고 그 안에 왕궁과 부속 건물들을 화려하게 지었으며, 강변을 따라 사성의 동쪽에서 숭산의 북쪽까지 제방을 쌓는 대규모 토목, 건축공사를 단행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지리적, 경관적 기사 중「崇山」에 가장 주목하고 싶다. 여기에서도 숭산이 2개의 검단산중 하남시측 검단산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검단산(崇山)의 북쪽이라 함은 지금의 하남시 창우리 부근을 말하며 蛇城-필자는 자유당 시절 출간된 南漢秘史에서 말하는 船洞으로 추정-이 어디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검단산 북쪽 하남시 창우리까지 한강변을 따라 제방을 쌓고 북쪽의 고구려의 공격을 차단하고 한강 홍수로 인한 민가의 피해를 막기 위해 국력을 소진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 개로왕이 왜 지금의 하남시 쪽에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시행했는지가 의문이다. 이는 두말 할 것 없이 홍수나 고구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대상이 검단산(崇山) 아래 어디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흙을 구워 토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 등 왕궁과 관련된 건물을 지은 것으로 봐서 그 당시 개로왕이 수축한 토성은 왕성임이 틀림없다.
아홉 번째, 풍납토성의 서쪽에 넓은 開活地가 있어야 하며, 지금과 같이 서벽이 한강에 접해있지 말아야
기루왕「8년 가을 8월 한수의 서쪽에서 크게 열병하였다」아신왕「6년 한수의 남쪽에서 크게 열병하였다」라고 하여 왕도 한성에서 볼 때 한수의 서쪽과 한수의 남쪽에서 군사열병을 할 정도로 큰 개활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풍납토성의 서쪽은 바로 한수와 인접하고 있어서 군사열병을 할 정도의 개활지를 확보할 수가 없음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구수왕「7년 겨울 10월에 왕성의 서문에 화재가 있었다」라고 하여 왕성의 서쪽에 성문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고, 고이왕 9년「7월에 서문에 나가서 활 쏘는 것을 관람하였다.」비류왕「17년 가을 8월에 궁 서쪽에 사대를 쌓고…」아신왕 9년「9월에 도성사람을 모아 서대에서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다」라고 하여 왕성의 서쪽에 성문이 존재했었고 왕성의 서쪽지역이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성백제기 전 시대에서 단 한 차례도 동문이나 남문, 북문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도성과 관련된 행사나 행위가 도성의 서쪽에서 주로 벌어지는 것으로 보아 서쪽 지역에 넓은 개활지가 펼쳐져 있던지, 아니면 서쪽지역이 중요한 교통로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풍납토성의 서쪽은 사대를 설치할 공간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바로 한수와 인접하고 있어서 성문이나 사대를 쌓고 활쏘기를 할 장소도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열 번째, 풍납토성이 고구려 장수왕이 공격한 남북 2개의 성중 남성이라야 하고, 풍납토성의 북쪽에는 북성이 있어야
蓋鹵王條「21년 가을 9월에 고구려왕 거련이 군사3만을 거느리고 왕도 한성을 포위해오니 왕은 성문을 닫고…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여 또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연소시키니…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문을 나와 서쪽으로 달아났으나…」라고 하였으며, 개로왕조에「고구려의 대로, 제우, 재증절루, 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성을 공격해와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성으로 옮겨 공격하므로 성안이 위태하여 두려워하였다. 왕이 도망쳐 나왔는데… 묶어서 아차성 아래로 압송하여 죽였다」라 하여 왕도 한성은 분명 남성, 북 성 2개의 성이 하나의 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수왕이 왕도 한성을 포위하여 압박한 한성은 분명히 남성에 해당된다. 장수왕은 남북 두 개와 성 중 우선 북 성을 먼저 공격한 후 남성을 공격했는데 왜 남성을 먼저 공격하지 않고 북 성을 먼저 공격했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개로왕조의 위의 두 전쟁기사에 나오는 성도 북 성이 아닌 모두 남성인 왕도 한성이다. 북 성은 단지 7일 만에 함락시켰다는 기록뿐이지 어떻게 함락시켰고, 남성의 전쟁기록과 같이 그 당시 북 성의 분위기라든가 전쟁방법 등이 상세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남성과 북 성은 일정부분 상당히 이격된 거리를 가지고 있었던지, 아니면 한수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배치된 2개의 성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3만 명이나 되는 장수왕의 고구려 군사가 쳐들어와서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서 개로왕이 남성에서 싸운 기록만 나오는 것으로 봐서 남성과 북 성은 분명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만약 지척거리에 두 성이 존재했었다면 3만 대군이 쳐들어왔을 때 당연히 동시에 전장 터로 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성을 먼저 공격하지 않고 북 성을 먼저 공격한 것으로 볼 때 북 성을 먼저 점령하지 않고는 남성을 공격할 수 없는 군사 전략적인 차원의 어떤 특수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 전 기록에 왕도가 남북 두 개의 성으로 구성되었다는 기록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런데 비류왕 24년「9월에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에 웅거하여 배반하니 왕이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였다」라는 묘한 기사가 나온다. 왕이 군사를 일으켜 토벌할 정도로 북한성에 웅거한 우복의 반란세력이 군사적으로 만만찮았을 뿐만 아니라 이 역시 한성과 북한성은 일정거리 이격되어 있었거나 한수를 경계로 하나의 셋트 구조로 구성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일부 학자들 중에는 남성을 몽촌토성으로 북 성을 풍납토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은 성내천을 해자로 인접한 성으로 북 성을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성을 공격했다는 기록과 맞지 않고 장수왕이 남성을 공격했을 때 성내에「인심이 위구하여 혹은 나아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남성은 분명 居民城과 宮城을 포함한 왕도 한성이 틀림없고 居民城과 宮城이 별도로 이격되어 있지 않고 왕도 한성이라는 큰 범주 내에 같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다시 말해 북 성은 거민성이고 남성은 왕성이라는 논리보다, 북성은 北漢城이고 남성은 漢城이라는 논리가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삼국사기에 남성을 南漢城이라고 표현한 기록이 한 번도 없는 것으로 보아 남성은 왕도 한성이고 왕이 기거하고 있는 도성이기 때문에 예의상 남한성이라 하지 않고 그냥 한성이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기 개로왕조의 남성, 북성의 표현은 다분히 백제의 입장에서 기술 되었다기보다 제3자의 기록을 옮겨다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최근, 서울대학교의 아차산성 발굴 조사에서 「北漢」「北漢山○「漢山○」명문기와가 발견되었다. 물론 그 명문기와가 백제 때 것인지 신라 때 것인지 아직 까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차산성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가 “북한”, “북한산”지역임이 밝혀지게 됨으로써 남성, 북성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시작되어야 하겠다.
열한 번째, 삼국사기에 왕도한성의 초기 축성기록이 나와야
온조왕 13년 여름 5월에「왕은 신하에게 말하기를 국가가 동으로는 낙랑이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서 강토를 침략하므로 편한 날이 없는데 하물며 요상한 일이 자주 나타나고 국모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편안치 않아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 할 것이다. 내가 어제 나가 한수의 남쪽을 순시해 보니 토지가 매우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 곳에 도읍하여 길이 안전할 계책을 도모할 것이다 하였다. 가을 7월에 한산 아래에 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다」하여 왕도 한성의 축성기록은 없고 단지 한산 아래에 木柵을 세운 기록만 있어 도성이 별도의 성벽이 없이 목책만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웅진성의 경우도 현재 도성의 축성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을 보면 당시 국모가 죽고 말갈과 낙랑의 침공으로 다급히 도읍을 옮기다 보니 성벽을 쌓을 경황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개로왕 때 고구려 첩자 승려 도림의 간교에 넘어가 한수를 따라 방죽을 쌓고 그 안에 궁실과 누각을 지었는데 어느 하나 장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개로왕이 쌓은 제방이 한강의 홍수를 방비해 쌓았지만 또한 한강 쪽 도성의 성벽 역할도 겸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도성 이외의 성의 수축기록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도성의 축성기록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웅진시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한성기나 웅진기의 백제는 도성에 별도의 축성을 하지 않고 자연의 구릉을 이용하여 목책으로 성벽을 대신하지 않았나 추정된다.
열두 번째, 풍납동식(中島식) 무문토기나 타날문토기가 아닌 5세기 후반 대 토기류가 풍납토성 토기의 주류를 이루어야
풍납토성이 백제왕도 한성이라면 풍납동식(중도식) 무문토기나 타날문 토기가 아닌 5세기 후반 대 토기류가 풍납토성 토기의 주류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타날문 토기와 공반되는 경질무문토기는 춘천 중도 주거지를 중심으로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출토되는 중도식 무문토기와 동질의 토기로 분류된다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춘천 중도의 주거지도 풍납토성에서 발견되는 주거지와 같이 凸자 형 혹은 呂자 형 주거지이다. 그러니까 풍납동식 무문토기나 중도식 무문토기의 사용주체가 凸자 형 혹은 呂자 형 움집을 짓고 살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중도식 무문토기의 사용주체는 현재 철기시대 그러니까 삼한시대 또는 원삼국시대로 보고 있는 것이 통설이다. 삼한시대 또는 원삼국시대라면 백제의 태동기까지는 볼 수 있으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함락된 백제 개로왕의 왕도 한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국립춘천박물관의 자료에 의하면 화분 형 타날문 토기나 중도식 무문토기를 동예나 마한의 토기로 보고 있다. 풍납토성이 백제왕도 한성이라면 장수왕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쑥대밭이 되고 그 후 한강의 범람으로 땅속에 묻혀 1500여년이 지난 후, 이 시대에 우리들에 의해 발견되었다면 당연히 백제 개로왕대(5세기후반)의 토기가 주류를 이루어야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후에 해당하는 철기시대의 토기가 주류를 이루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후대의 토기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풍납토성도 한성백제 지역이었으니 후대의 토기가 출토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 풍납토성에서 출토되는 풍납동식 無紋토기가 지금의 양상으로 출토되어서는 풍납토성을 한성백제 마지막왕인 개로왕의 왕도 한성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열세 번째, 풍납토성의 남쪽에 한산(漢山)이 있어야 하고, 동쪽에는 고악(高岳)이 있어야
하남 위례성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도시 경관적 요소가「漢山」이다. 한강 남쪽에서 한산으로 가장 유력한 산이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과 2개의 검단산중 남한산성 쪽 검단산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남한산성이 백제시대 한산이라고 주장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또 있다. 남한산성 서문에서 이성산성이 있는 이성산으로 흘러내리는 능선의 중간에 金岩山이라는 산이 있고, 그 금암산 중턱에 고려시대 사찰로 추정되는「藥井寺」라는 폐사지가 있다. 사찰 이름을「藥井寺」라고 하는 이유는 그 곳 폐사지에서 「藥井」이라고 새겨진 명문 기와가 여러 점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신증동국여지승람」廣州 佛宇條에「藥井寺 在 漢山」(약정사는 한산에 있다)이라 하여 조선시대까지 청량산(남한산성) 일대를 일명「한산」이라 한 것을 알 수 있어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漢山이 현재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과 남한산성 쪽 검단산일대를 지칭한다는 것이 문헌적,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셈이다. 그리하여 하남 위례성은 남한산성(漢山) 아래(下), 북쪽으로 한강을 두르고, 동쪽으로 큰 산(동쪽 검단산)에 의지하고 있는 하늘이 마련한 험한 지형에서 찾아야 함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풍납토성의 남쪽에는 한산이라는 산이 없고, 동쪽 역시 넓은 벌판이지 高岳은 없다.
열네 번째, 풍납토성 주위가 온통 山岳과 河海이며, 하늘이 내린 험한 지형 즉 천설지험(天設之險) 또는 천험지리(天險地利)한 땅이어야
삼국사기 온조 왕조에「드디어 漢山에 이르러서 負兒岳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해변에서 살려고 하였으나 열 사람의 신하가 간하기를 이 河南의 땅은 북으로 漢水를 띠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거하고 남으로는 옥택을 바라보고, 서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天險地利가 얻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여기에 도읍은 정함이 역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하여 온조의 하남 위례성에 대한 지리적인 조건이 분명히 나온다. 여기에서 특히 이 하남의 땅을「天險地利」라 하여 주변지형이 험하고 적군을 방어하기에 좋은 땅이라는 것을 추리해 볼 수 있다. 또 온조왕 13년 여름 5월에「왕은 신하에게 말하기를 국가가 동으로는 낙랑이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서 강토를 침략하므로 편한 날이 없는데 하물며 요상한 일이 자주 나타나고 국모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편안치 않아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 할 것이다. 내가 어제 나가 한수의 남쪽을 순시해 보니 토지가 매우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 곳에 도읍하여 길이 안전할 계책을 도모할 것이다 하였다. 가을 7월에 한산 아래에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다」하여 말갈의 침략에 시달리던 온조가 한강남쪽을 직접 순시한 후 한산 아래에 도읍을 옮긴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곳을「天險地利」라 하여서 하남 위례성은 한산 아래 천험지리임을 알 수 있다. 북쪽에 한강이 있고, 동쪽에 높은 산이 있어 그 기슭에 의거하고, 남쪽에 농사짓기 좋은 기름진 땅이 있고 서쪽에 큰 바다가 있는 한산 아래에 하늘이 내려준 험한 지형이 과연 어디일까? 개로왕조에 고구려 첩자 승려 도림이 개로왕에게 말하기를「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山岳과 河海이니 이는 하늘이 마련한 險地(天設之險)이요 인위의 형세가 아닙니다」하여「天險地利」와 비슷한「天設之險」인 험한 지형임을 알 수 있고, 사방이 산악으로 둘러싸여 있고 강과 호수로 둘러싸인 지형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으며「사방의 이웃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두지 않고…」하여 적이 감히 쳐들어오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 지형조건이 험함을 알 수 있다.
열다섯 번째, 풍납토성이 지금과 같이 한수변(漢水邊)이 아니라 한산하(漢山下)에 있어야
온조왕 13년 여름 5월에「왕은 신하에게 말하기를 국가가 동으로는 낙랑이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서 강토를 침략하므로 편한 날이 없는데 하물며 요상한 일이 자주 나타나고 국모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편안치 않아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 할 것이다. 내가 어제 나가 한수의 남쪽을 순시해 보니 토지가 매우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 곳에 도읍하여 길이 안전할 계책을 도모할 것이다 하였다. 가을 7월에 한산 아래(漢山下)에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다」하여 말갈의 침략에 시달리던 온조가 한강남쪽을 직접 순시한 후 한산 아래에 도읍을 옮긴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풍납토성은 한산하(漢山下) 보다는 한수변(漢水邊)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열여섯 번째, 공주지역에서 출토되는 형태의 연화문 수막새가 풍납토성에서도 출토되어야
풍납토성에서 출토되는 수막새들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양을 띠고 있다. 특히 개로왕의 國業을 이은 문주왕이 천도한 공주지역에서도 당연히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독특한 형태의 기와가 발견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문화와 기술은 급진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풍납토성이 백제 개로왕의 왕도 한성이라면 공주지역에서 발굴되는 양감이 뚜렷하고 우아한 연화문 막새가 풍납토성에서 발견되지 않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설명을 할 수가 없다. 혹자는 백제가 공주로 이도한 후 문화가 급격히 변했다고도 하고, 혹자는 한성시대의 와공들이 공주로 가지 않고 신라로 갔을 가능성 운운하는 것도 필자에게는 억지 논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풍납토성에서도 연화문 막새가 출토되었지만 공주지역에서 출토된 연화문 막새와는 그 개념이 전혀 다른 중국 北魏식 연화문 막새와 거의 흡사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왜 北魏식 연화문막새가 풍납토성에서 발견되었는지를 밝히는 것도 풍납토성의 축성주체를 밝히는 과정에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열일곱 번째, 대부(大夫)가 아닌 한(漢) 또는 백제관직과 관련된 명문이 나왔어야
풍납토성에서 대부(大夫)명 그릇이 출토되었을 때 풍납토성이 한성백제 왕성인양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한 적이 있다. 대부(大夫)는 백제의 관직도 아닐 뿐만 아니라 백제와 관련된 그 어떤 기록도 찾을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풍납토성이 한성백제 왕도 한성이라면 한(漢) 또는 백제관직과 관련된 명문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한과 관련된 유물이 풍납토성이 아닌 아차산성과 이성산성에서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성산성에서는 무진년 목간에 南漢城이라고 새겨진 목간이 출토되었으며, 아차산성에서는 北漢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
열여덟 번째, 금강 이남지역에서도 육각형 주거지가 나왔어야
풍납토성이 백제왕도 한성이라면 당시 금강 이남지역까지 백제의 세력 하에 놓인 것을 감안할 때 당연히 풍납동을 비롯하여 경기, 강원 일대에서 무문토기, 타날문토기와 공반 되는 凸자 형, 呂자 형 육각형주거지가 금강 이남지역에서도 발견되어야 함에도 아직까지 그런 보고는 없다. 이는 초기 풍납토성에 육각형 수혈 주거지를 짓고 살았던 세력은 한성백제와 상관없는 세력임을 반증하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아닐까?
열아홉 번째, 3만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국가에 걸 맞는 도성과 인구규모이어야
삼국유사에「고구려는 전성기에 21만 508호였다.「백제는 전성기에 15만 2300호였다.「신라의 전성기에는 서울(京)이 17만 8936호요 1360방 55리 35금 입택…」이라고 하여 삼국 중 고구려 신라 백제의 순으로 서울의 인구가 기록되어 있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차이는 5만여 호밖에 차이나지 않는다는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편에 「백제에는 옛날에 5부가 있어 37군 200여성, 76만호를 나누어 다스렸는데…」라 하여 전국적으로 76만호의 가옥에 1가구당 인구를 6명으로 가정할 때 760,000×6=4,560,000이 되어 당시 백제 전국 인구가 450여 만 명으로 추산되고 76만호 중 서울에 15만 2300호호가 있어서 수도권 집중률이 20%정도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라는 수치는 물론 100% 신뢰할 수 있는 수치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좋은 참고자료로는 유효함이 틀림없다. 위의 두 기사는 물론 시대적으로 같은 것인지 아니면 얼마나 시대적인 갭이 벌어져 있는지는 명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 당시 도시공학적인 하나의 샘플로서 유용할 수는 있겠다고 생각한다. 백제 서울의 호수가 152,300호라는 이야기는 152,300호×6=913,800명의 인구가 서울에 살았다는 것으로서 당시 왕도의 인구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으며, 그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와 도시 구조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백제 서울의 호수가 도읍지 권역에 살았던 호수로 보고 실제로 도성 내에 살았던 인구를 그 절반이라 가정했을 때 풍납토성 인구밀도 샘플을 대입하면 그래도 1000만평이 넘는 수치가 산출된다. 평양에 있는 고구려의 長安城의 면적이 358만 평이고, 경주에 있는 新羅王京이 484만 평(최대 700만평)이고, 5,6세기에 지어진 장수왕의 왕궁인 安鶴宮은 宮城면적이 117,000평, 전체 건축면적 9,516평, 궁궐건물의 동수 52동, 건물전체의 기둥 수 2,590개이며, 시대적으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장수왕에게 한성을 잃고 천도한 공주도 200여 만 평 이상의 도성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그 후 다시 천도한 부여도 400만평의 규모를 가지는 거대한 도성이라고 봤을 때 비록 5세기말이긴 하지만 한성기 백제 왕도의 도성의 규모를 그렇게 만만하게만 생각할 일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근 북한에서 발굴한 황해남도 신원군 아양리에 4세기 고구려 남평양(?)-북한학자들의 주장-으로 비정되는 도시 유적(1984년 발견)은 그것이 고구려왕도의 도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크기가 동서 4km 남북 4,5km로서 도시 면적이 544만평인 것을 볼 때, 당시 4세기경 고대도시 규모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기사에 나오는 백제의 서울이 한성을 지칭하는 것인지 웅진을 지칭하는 것인지 사비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역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당시 한성의 인구가 웅진이나, 사비보다 적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戰時 군사 동원능력에서 웅진기나 사비기에 한성기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할 때 동원한 군사인 3만 명 보다 더 많은 군사력을 동원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의 전쟁의 양상으로 봤을 때 국가 대 국가 간의 전면전은 국가의 존망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인력이 총동원 된 총력전이었으며, 동원된 병력의 숫자가 전체 국민의 수와 비례하고, 전체 국민의 수에 의해 수도권인구의 산출이 가능하며, 다시 수도권인구에 의해 도성의 규모를 역으로 산출해 낼 수 있다. 국립문화재 연구소에서 발굴 조사한 “가”지구(3200여 평)에서 백제 주거지로 밝혀진 17동의 육각형 수혈주거지의 배치를 볼 때 조방제에 의거한 도시가 아니며, 당시 풍납토성 내 모든 주거지가 기원전후 일시에 화재에 휩싸여 소실된 후 홍수 범람에 의한 토사의 퇴적으로 지하 4-5m 아래에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3200여 평의 대지에 17세대의 주거지가 형성된 것으로 볼 때 1세대 당 6명의 가족구성원으로 가정해서 당시 풍납토성 내 전체인구를 산출해 보면 7200명의 인구가 풍납토성 내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인구밀도가 약 100명/ha가 된다 “가”지구의 주거지가 표준샘플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풍납토성 발굴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주거지이기 때문에 샘플로 선정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밀도를 1.5배로 봐 준다고 가정을 하더라도 풍납토성 내에서 그 당시에 살았던 전체인구는 최대 11000명을 넘지 못한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세대수도 최대 2000(1883세대)세대를 넘지 못하는 것으로 계산되고 있다.
스무 번째, 삼국유사에 한산(漢山)을 금광주(今廣州)라는 표현은 하지 말았어야
삼국유사 기이 제2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편에 「고전기를 살펴보면 전한 홍가3년 계유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에 漢山(지금의 廣州)으로 도읍을 옮겨 389년을 지나 제13대 근초고왕 함안 원년에 이르러 고구려 남평양을 취하고 北漢城(지금의 楊洲)으로 도읍을 옮겼다」라고 하여 일연은 온조 14년에 도읍을 옮긴 곳을 고려시대 廣州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니까 삼국유사를 쓸 당시 일연은 위례성을 고려시대 당시의 廣州, 즉 지금의 河南市 春宮洞 일대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스물한 번째, 미래마을 부지(풍납동 197번지일대)에서 발견된 積心建物 보다 훨씬 발전되고 더 큰 규모의 건축물이 발견되어야
최근 풍납토성 내 미래마을부지에서 적심건물로 추정되는 장방형 건물지가 발견되어 발굴을 담당했던 문화재연구소의 보도 자료에 의하면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했다. 적심이란 대체로 건물의 하중을 받아 땅으로 전달하는 초석의 하부를 잡석으로 다진 架構式 건물의 건축기술의 일종이다. 적심이 사용된 건물은 架構式 건물로 보아도 대체로 무방하다. 그리고 이번에 발견된 적심건물이 지금까지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어떤 건물보다 가장 발전된 건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정도의 적심건물 몇 동이 나왔다고 해서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개로왕과 동시대에 지어진 고구려 장수왕의 안학궁과 비교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안학궁은 현재 발굴된 것만 2590개의 거대한 기둥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며 그 하부에는 2590개의 거대한 초석과 적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마디로 풍납토성에서 이번에 발견된 적심건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이번에 발견된 적심건물의 적심은 필자가 처음 본 구조이다. 일반적으로 적심은 굵은 잡석으로 다지는 것이 보통인데 풍납토성 적심건물의 적심은 작은 콩자갈로 구성된 것이 특이하다. 그리고 적심위에 초석이 하나도 없고 상당히 이격된 장소에 가로 세로 60센티 가량의 납작한 덤벙돌(치석이나 가공을 하지 않은 자연석 형태의 돌)이 출토되어 있었는데 모 언론사에서 적심건물의 礎石이라는 기사가 나왔지만 필자로서는 적심건물의 초석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이상한 것은 적심의 단면을 잘 살펴보니 적심 상단에 진흙을 평평하게 발라 놓은 것도 발견하였는데 이 또한 필자가 처음 보는 적심 구조로, 혹시 풍납토성에서 이번에 발견된 적심건물은 적심위에 초석을 얹지 않고 진흙으로 평평하게 다진 다음 그 위에 기둥을 바로 세운 초기 형태의 적심건물이 아닌가 추정한다. 상대적으로 공주 공산성이나 기타 다른 곳에서 발견된 당시 건물지는 모두가 積心礎石建物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번에 미래마을부지에서 발견된 적심건물은 지금까지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다른 어떤 건물보다 발전된 형태의 건물임에는 틀림없으나, 적심의 형태나 건물의 규모면에서 동시대의 고구려 安鶴宮을 비롯하여 기타 다른 동시대의 건축물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옹색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통상적으로 적심의 상부에는 초석이 놓이게 마련이지만, 금번 풍납동 197번지 일대에서 발견된 풍납토성의 적심은 적심 상부가 진흙으로 평평하게 다져놓았고, 상부에 초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초석이 없는 적심 건물로 밖에 볼 수가 없고 이 또한 5세기말 경의 백제 왕궁 건물로 보기가 어렵다.
3. 결론
위에서 본바와 같이 풍납토성은 장수왕의 공격으로 최후를 맞은 개로왕의 왕도 한성이 될 수 없다. 풍납토성을 비롯하여 경기, 강원일대에서 無紋土器, 打捺文土器와 공반 출현하는 육각형 수혈주거지에 살았던 세력을 풍납토성 발굴 이전의 발굴자들은 하나같이 철기시대 혹은 삼한시대 마한 혹은 동예의 세력으로 보고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풍납토성 발굴자만이 무문토기, 凸자형, 呂자형 육각형 수혈주거지의 세력을 한성백제 세력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풍납토성을 한성백제의 왕성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건축적으로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육각형 수혈건물지가 고구려 장수왕과 맞서 싸운 한성백제의 5세기말 개로왕의 왕궁은 물론이고 일반건축물과도 거리가 있음을 밝혔고, 도시공학적으로도 그 당시 한중일의 고대 타 왕성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턱없이 좁은 면적과 도시구조상 5세기말 고대왕성과 거리가 있음을 밝혔다. 또 지리학적으로도 삼국사기에 기록된 王都 漢城의 기록과도 전혀 일치하지 않음도 밝혔다. 풍납토성에서 육각형 수혈주거지 등에서 채취된 목탄의 탄소연대측정치도 대다수가 기원전후로 나타나 과학적으로도 풍납토성의 육각형 수혈주거지의 주인은 5세기말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은 백제 蓋鹵王 代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밝혔다. 문화적으로도 풍납토성이 백제왕도 한성이라면 한성에서 이도한 공주와 문화적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는 점을 들어 백제 개로왕의 왕성일 수 없다는 것도 밝혔다. 문헌적으로도 삼국유사를 쓴 일연부터 근세 이병도 까지 일관되게 하남시 춘궁동 일대를 한성백제의 도읍지라고 비정해 왔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풍납토성이 당시 백제 한성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한성기 백제와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성백제 왕성으로 보기에는 모든 면에서 무리가 따르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풍납토성이 우리나라 발굴사에 큰 족적을 남겼음은 분명하지만 유물이 많이 나오는 것만으로 한성백제 왕성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세계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된 로마도시는 아프리카 북단의 리비아에 있는 LEPTIS MAGNA(AL KHOMES, 일명 SIENA)이다. 이 도시는 로마가 멸망한 후 사하라사막의 모래폭풍(HALLAS)으로 인해 지하 10여M아래에 묻혀 있다가 근세에 발견되어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유네스코등재 세계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보존이 가장 잘된 유적이고 유물이 많이 출토 된다고 LEPTIS MAGNA를 로마라고 할 수 없듯이 풍납토성도 LEPTIS MAGNA와 같이 기원 전후 대부분의 건물이 일시에 불타 없어진 후 한강의 범람으로 토사가 그 상부에 쌓여 하부의 유구나 유물이 잘 보호되어 있다. 엄청난 양의 유물과 유구가 나온다고 한성백제의 왕성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유물이나 유구의 양이 아니고 어떤 유물이나 유구가 나오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미 너무 멀리 가버린 감이 없지 않으나 풍납토성 발굴을 시작한지 10여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그동안 왜곡된 사실을 늦게나마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이 글을 통해 그 간의 소신을 밝힌다. 지금 이 논쟁이 또 다른 논쟁의 시작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향후 풍납토성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어떠한 논쟁에 본인도 적극 동참할 것임을 밝혀 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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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글은 모학술대회에서 발표할 발제문입니다만 불행히도 학술대회가 열리지 못했습니다. 이점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여섯번째는 똥깡님의 주장과는 반대로 풍납토성이 대체로 홍수로부터 자유로운 곳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할 수도 있는 주장으로 보입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하여 성벽 일부가 붕괴되어 청동초두가 발견된 것을 보면, 그 성벽은 1500년 이상 홍수의 영향에도 무너지지 않고 잘 보존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구가 지하 4m에서 발견된다고 해서 그 지역이 홍수에 취약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층위 조사와 절대 연대 측정 등을 해 보기 전에는 그곳을 덮은 흙이 한번에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수십번에 걸쳐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만 을축년 대홍수때 와서야 성벽이 무너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 이전의 지형도에 이미 서벽이 없어진 사실이 드러나고 있고, 유구가 지하 4m에 묻혀있는 것으로 봐서 그 이전에 이미 한강 홍수에 의해 토사가 많이 퇴적되지 않았나 추정됩니다.
네번째 주장도 성급해 보입니다.
신라의 왕성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고, 도로 유구도 극히 일부 밖에는 발굴이 되지 못한 상태이며, 조방제를 본떠 왕성의 구획을 언제 정리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백제가 한성 백제 시대에 조방제를 따라 왕성의 구획을 정했다는 기록이 있나요?
스스로 전문가라고 하시니, 그 격에 맞도록 혹평을 해 드리자면...
학부생의 레포트를 보는 것 같습니다. ^^
기록은 없습니다만 신라, 고구려, 중국, 일본이 그 당시 모두 조방제에 의한 도시계획을 시행했는데 백제만 안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조방제는 적으로 부터 도성을 보호하는 측면도 있습니다만 내부단속의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방제는 주나라 때 부터 이용해온 도시계획의 교본입니다. 주례고공기에 의하면 ........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의 고대도시도 하나같이 조방제에 의해 도시를 구성하였습니다. 신라왕경은 바둑판이고 고구려 장안성을 조사한 조선시대 학자 한백겸이 그린 고구려의 도성도 바둑판입니다.
도시계획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어떤 기능과 목적을 위해 세웠는지를 연구하기 위해 여러 논문을 읽어 보는 과정에서, 첨성대가 월성 이전의 신라 왕궁인 금성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는 주장을 접하고, 좀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신라 왕경의 도시계획이나 조경계획을 다룬 논문을 두어편 읽어본 것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것은 신라 왕성의 도시 계획이 본격화고 완성된 시점 그리고 그 영역에 관련해서 여러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첨성대와 관련된 이야기는 김한배교수의 글을 보시면 도움이 될듯 싶습니다.
첨성대가 신라왕경에서 차지하고 있는 도시공학적 위상에 대해서 쓴 책이 있습니다.
책 이름을 알 수 있을지요?
손쉽게 논문 위주로 찾다 보니까 단행본 서적에 나오는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습니다.
학부생의 레포트를 보는 것 같습니다. ^^ 라는 말은 좀 심하시네요.
죄송합니다. 너무 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을 사과 드립니다.
저의 글에 대한 반론만 제기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인신공격형 언사는 삼가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