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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시>, 2020년 3월호
광산 노동시의 의의
맹문재
1
일제 강점기에 발표된 송영의 「교대시간」은 조선인 광산 노동자들과 일본인 광산 노동자들 사이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민족적 갈등보다도 양국 노동자들의 계급적 동맹과 통합으로 사용자 계급에 대항하는 결론을 취하고 있어 동의할 수 없지만, 광산 노동자들의 실정을 처음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송영은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유리공장의 노동자 생활을 했는데, 귀국 후 초기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 단체인 ‘염군사’를 조직한 것은 물론 노동 체험을 살린 창작을 통해 노동소설의 효시를 이루었다. 제철공장의 노동자인 ‘김상덕’이 소시민성을 극복하고 계급적 각성을 통해 진정한 노동자로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용광로」나, 조합을 통한 노동자의 현실 변혁을 추구한 「석공조합대표」가 그 좋은 예이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의 작가들이 보인 한계처럼 송영 역시 주관주의로 인해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면을 띠고 있지만, 염상섭이나 현진건, 최서해 등과 달리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긍정적인 전망이 작품의 성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 시대를 극복하려고 한 의지는 인정할 만한 것이다.
「교대시간」에서 “선녀”의 존재는 충격적이다. “선녀”란 광부들 사이에서 쓰이는 은어로 탄광 속에서 술을 파는 여자를 가리킨다. 몇 백 미터의 탄광 속에 술파는 여자가 있다……. 주점에는 위스키, 포도주, 정종, 막걸리 등 온갖 술이 있고, 과자며 고기 등의 음식물도 있다. 술파는 여자도 조선 여자, 청나라 여자, 일본 여자 등 다양하다. 정녕 믿기지 않는 일인데, 사업주는 광부들이 위험한 곳에 잘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자 여자를 이용해 유혹한 것이다. 잠깐 동안의 기쁨으로 닥쳐오는 죽음을 잊게 하려는 간계였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충격을 주는 또 다른 면은 광부들의 운명관이다. 작업을 마치고 탄광에서 나오는 광부들은 “에구, 인제는 하루는 더 살았구나.”라고 인사한다. 그리고 교대해서 탄광으로 작업하러 들어가는 광부들은 “낼 아츰에 다시 살아나와 볼까?”라고 인사한다. 시커먼 얼굴에 웃음을 띤 채 역설적으로 죽음을 인사하는 광부들의 삶은 실로 슬프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민족적 차별이 있었다. 일본인 노동자들과 조선인 노동자들 사이에는 임금, 주거지, 음식물, 하다못해 승강기를 타는 것에도 차이가 존재했다. 그리하여 조선인 노동자들은 좌절과 분노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가 퇴근 후에 세수를 하다가 부딪힌 일이 민족 감정으로 번져 순식간에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교대시간」은 민족적 차별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식민지 시대의 광산 노동자들이 처한 비참한 삶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나아가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연유를 제시해주었다. 조선 광산 노동자들의 시대적인 삶을 나름대로 반영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면은 아직까지 제대로 고찰되지 않고 있는 광산 노동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 이청리, 『영혼 캐내기』, 사사연, 1988.
2) 박영희, 『해 뜨는 검은 땅』, 창작과비평사, 1990.
3) 이원규, 『빨치산 편지』, 청사, 1990.
4) 박세현, 『정선아리랑』, 문학과지성사, 1991.
5) 성희직, 『광부의 하늘』, 황토, 1991.
6) 임길택, 『탄광마을 아이들』(동시집), 실천문학사, 1991.
7) 정연수, 『꿈꾸는 폐광촌』, 혜화당, 1993.
8) 정연수 편, 『한국 탄광시전집』1, 2권, 푸른사상, 2007.
9) 최승익, 『휘파람소리』, 시와에세이, 2007.
위의 내용은 1980년대 이후 간행된 광산 노동시의 성과물들이다. 이외에 권혁소, 김명숙, 박대용, 박유석, 서종규, 이건청, 정영주, 정일남, 최승학, 최승호 등의 성과도 들 수 있다. 물론 김종성의 『탄』(미래사, 1988)이나 이인휘의 『활화산』(세계, 1990) 같은 소설작품과, 안재성의 『타오르는 광산―80년대 광산 노동운동사』(돌베개, 1988) 같은 보고문학, 그리고 광산 노동을 집중적으로 담은 『탄전문학』의 발간도 주목된다. 노동문학 분야에서 시가 압도적인 성과를 거둔 것은 소설이나 보고문학보다 창작 시간이나 체험 요소, 전문 학습이 덜 필요로 하면서도 대상을 폭넓게 반영할 수 있는 장르 자체의 특성과, 또 시인들이 노동운동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창작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광산 노동시의 주제 혹은 주요 관심사는 (1) 작업 상황 (2) 산업재해 문제 (3) 진폐 및 규폐 문제 (4) 임금 문제 (5) 열악한 생활 실태 (6) 노동조합 활동 (7) 석탄합리화 문제 등으로 볼 수 있다.
2
가진 것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아무런 빽도 없어 선택한 막장 인생
열심히 탄을 캐면 돈을 벌 줄 알았다
열심히 일하면 희망이 있을 줄 알았다
죽기 살기로 일하면 막장인생 벗어날 줄 알았다
하지만 도급제 노동은 그게 아니었다
땀 흘린 대가는 너무도 보잘 것 없고
회사는 안전보다 늘 생산이 먼저였다
노동조합은 한 번도 우리 편이 아니었다
공권력마저도 한통속이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보고도 못 본 체 듣고도 모른 체
‘주면 주는 대로 받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
그렇게 짐승이길 강요했다 노예처럼 살라했다
짐승도 발길에 차이면 눈빛이 달라지기 마련
더 이상 참고 살 수가 없었다.
둑이 무너지듯, 활화산 불길처럼 폭발해버렸다
계엄령 서슬에 꽁꽁 얼어붙은 대한민국
지식인들은 침묵했지만 우린 무식했기에 용감했다
1980년 4월 ‘사북항쟁’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인권사각지대’ ‘안전사각지대’에 버려진 막장 인생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고
막다른 골목에선 쥐도 고양이를 물기 마련
우리의 투쟁은 원초적 본능이다
광산쟁이도 ‘사람’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언한 거다
이러한 원인과 시대상황엔 무관심한 채
누가 우리를 폭도로 내모는가?
왜 언론마다 ‘무법천지’ ‘폭동’으로 진실을 왜곡했던가?
그 시절 역사의 현장에 함께했던 주역들은
고문 후유증과 생활고에 하나둘 쓸쓸히 죽어가고
사북광업소마저 폐광으로 2004년 10월 문을 닫았다
우리의 억울한 사연들도 무너진 굴 속에 묻혀버리고 마는가?
이 세상천지에
우리들의 검은 손 잡아줄 사람 아무도 없단 말인가?
이제 늙은 아버지 어머니 된 우리의 소원은
자식들 앞길 막고 평생의 한으로 남은
폭도라는 이름의 주홍 글씨
‘사북사태’란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 성희직, 「‘1980년 사북’을 말한다」 전문
1980년 4월 21일에 일어난 사북 동원탄좌 노동자들의 파업은 충격적이다. 사업주의 편에 선 경찰이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을 무시한 채 강압적으로 진압하려는 바람에 노동자들이 격분했다. 노동자들을 차로 쳤고, 총을 쏘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에 의해 지서가 점령당했고, 경찰들이 몰매를 맞았으며, 어용 노조위원장의 아내가 붙잡혀 광업소 옆 게시판에 전선줄로 묶였다. 흥분한 노동자들은 어용 노조위원장의 아내에게 욕설을 퍼붓고 할퀴고 침을 뱉고 심지어 옷까지 벗기고 모욕했다.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 이유는 사업주의 가혹한 노동 강요와 임금 착취 때문이었다. “죽기 살기로 일하면 막장인생 벗어날 줄 알았다/하지만 도급제 노동은 그게 아니었다/땀 흘린 대가는 너무도 보잘 것 없고/회사는 안전보다 늘 생산이 먼저였”던 것이다. 1985년 노동부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광부들의 평균 임금은 32만 5천원으로 제조업(27만원)을 제외하고는 가장 낮았다. 운수업(34만원), 도소매음식점(37만원), 건설업(40만원), 금융업(52만원) 등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노동을 강요하면서 임금을 착취하는 ‘도급제’는 우선적으로 철폐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도급제란 일명 돈내기 작업 방식이다. 작업의 성과에 따라 임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일제 강점기에 조선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시행된 것이었다. 해방 후에도 여전히 적용되어 노동자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일하는 대로 번다는 허황된 인식을 노동자들에게 심어주어 더욱 열심히 일하게 하는,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은 시키는 대로 하고/임금은 주는 대로 받아라./광산이 싫으면 그만두지/왜 말이 많아.”(이청리,「캐내기 작업 2」)라는 명령의 한 형태일 뿐이었다. 도급제 형식은 막장이 여러 개 있는 광산에서 갱 작업자에게 나눠주는 갱 도급제 또는 “갱도 도급제”, 출근 조별(갑, 을, 병)로 작업량을 계산하는 방도급제 또는 “가다 도급제”, 3~5명이 한 조를 이루는 막장 도급제 또는 “마구리 도급제” 등이 있다.
노동자들이 분노한 또 다른 이유는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이익을 챙겨주어야 할 “노동조합은 한 번도 우리 편이 아니었”고, 국민들의 기본권을 보호해주어야 할 “공권력마저도 한통속”이었다. 진보적인 인식과 양심을 가졌다는 지식인들도 침묵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보고도 못 본 체 듣고도 모른 체/‘주면 주는 대로 받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그렇게 짐승이길 강요했다 노예처럼”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인권사각지대’ ‘안전사각지대’에 버려진 막장 인생들”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고/막다른 골목에선 쥐도 고양이를 물기 마련”인 것처럼, “짐승도 발길에 차이면 눈빛이 달라지기 마련”인 것처럼 살아야겠다고 나섰다. “광산쟁이도 ‘사람’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언한” 것이다.
1980년 사북 광산 노동자들의 항쟁은 이와 같은 배경을 갖고 있었다. 노동 강요와 임금 착취, 비인간적인 대우, 어용 노조의 배신, 암행독찰대라는 정보 조직에 의한 감시, 목욕탕조차 없는 생활환경, 영세한 주거환경, 빨래를 널 수 없는 공기 오염, 공원·도서관·박물관·전시장이 전무한 문화 환경, 즐비한 퇴폐업소, 열악한 교육 환경, 부실한 의료시설, 높은 범죄율…… 노동자들은 더 이상 비참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인간답게 살기 위해 거리로 나섰고 노동조합의 결성을 추구한 것이다.
노조 속에
또 하나의 노조가 만들어졌던 날
제1노조는
노조가 엄연히 살아있는데
그게 무슨 개수작들이냐고
법적 처리를 강행했지만
막장꾼이 아닌 놈들은 노조가 아니라며
만든 막장 노조는
끌려가는 개가 되기로 했다
사장 다음으로 빽이 좋은
주둥아리 제1노조는 자꾸
임금 인상액이 몇 퍼센트냐고 물었지만
1,200명 막장 노조는
주둥아리 노조가 센가
막장 노조가 센가 해보자고
사기꾼들의 법 앞에 맨주먹을 쥐었다
하루, 이틀, 사흘……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도
탄광소엔 광부가 없다
주인이라고 떠들던 놈들만 출근해
갱 입구를 서성일 뿐
한 마리가 짖어대면
덩달아 짖어대던 개들이 없다
개새끼가 되겠다고 출근을 거부한
막장 노조 앞엔
주둥아리 노조 따윈 있을 수 없다
― 박영희, 「막장 노조」 전문
광산의 어용 노조는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가 대의원에 의한 간선제라는 점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조합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금전과 주먹, 지연 등이 동원되었다. 따라서 어용 노조는 조합원들을 위해 제대로 역할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했다. 조합원의 권익이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1년에 한두 번씩 체육대회나 열 뿐이었다. 또한 거둔 조합비를 조합원들의 복지사업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전무하고 판공비나 행사비로 쓰거나, 회사 간부, 경찰, 안기부 등의 회식비나 선물 구매를 위해 지출했다. 조합원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막장에서 일하는 동안 노조 위원장은 사치와 향락에 젖은 생활을 한 것이다.
노동자들이 어용 노조의 퇴진을 위해 서명에 참여하거나 파업을 해도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치밀한 준비를 조직적으로 갖추지 못했고, 경찰이나 회사가 어용 노조를 법과 금력으로 보위함으로써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타락한 노조를 퇴진시키더라도 또 다른 어용노조를 들어서게 하는 결과만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의 과정에서 많은 탄광들이 어용 노조를 퇴진시키는 데 성공했다. 6·29선언 후 전국을 강타한 파업에 동참해 “하루, 이틀, 사흘……/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도/탄광소엔 광부가 없다/주인이라고 떠들던 놈들만 출근해/갱 입구를 서성일 뿐”인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1985년 3월 : 장성 석탄공사
1986년 6월 : 태백 연진탄광
7월 : 도계 경동탄광
8월 : 경북 연화광산
9월 : 태백 덕우탄광, 영월 흥원탄광
1987년 3월 : 태백 미성탄광
4월 : 태백 오성탄광
7월 : 어룡광업소, 동원노조, 동해광업소, 통보광업소, 한성광업소
8월 : 황지광업소, 호남탄좌, 대성탄좌 정선광업소, 함백광업소, 도계
석공, 함백석공, 동해광업소, 대성탄좌 문경광업소, 동원광업소,
장원광업소, 장성광업소,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강원탄광, 동원
탄좌 사북광업소, 경일광업소, 두정광업소, 경동탄광 이양광업
소, 보성탄광, 석공 나전광업소, 서진탄광, 명주 효경탄광, 태영
광업소, 강원산업, 세원탄광, 재동광업소, 자미원광업소, 동일광
업소, 태백 서울광업진흥, 거진광업소, 묵산광업소, 흥일광업소,
중앙탄광, 보성탄광, 서울건업, 동산탄광, 영월 서진광업소, 강
릉 영진광업, 삼왕광업소, 성동광업소, 사북광업소, 태극광업소,
금산탄광, 삼화광업소, 상동광업소, 신성광업소, 옥계광산, 속초
함동연탄, 명주 효명광업소
위에서 보듯이 광산 노동자들은 전국적인 총파업과 연대해 위력적인 투쟁을 했다. 기습적이고 기만적인 선언으로 보수 세력을 결집시키고 중산층을 와해시키는 데 성공한 정권은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지만, 노동자들은 억눌린 처지를 딛고 일어선 것이다.
3
발파사고로 두 명이 죽고
돌다리 박씨의 얼굴엔 탄가루가 박혔지
오천리 조차공 이씨는 손가락 둘이 날아가고
산속골 천씨는 도끼날에 발등이 찍혔지
나도 탄 덩이에 손이 짓뭉개지고 발톱이 빠졌지만
그 누구도 다치지 않은 사람은 없었지
흉터 자리 선연한 훈장 하나쯤
달지 않은 막장꾼은 아무도 없지
이마에 얼굴에 손에 무릎에 발등에 허리에
온몸에 훈장을 달고도 우리는 비겁하게만 살았지
흉터 자리가 너무 커
행여 신체검사에 불합격이 되면 어쩌나
하루아침에 쫓겨나게 될까봐
아픈 몸 감추며 흉터 자리 애써 숨겼지
사장이 볼까 감독이 볼까
허리가 쑤셔오고 팔다리가 저려 와도
건강한 노예, 멀쩡한 종으로 살아왔지
서러운 훈장일랑 막장 어둠 속에 묻어두고
비겁하게 비겁하게만 살아왔지
자랑스럽고도 빛나는 훈장을 비겁하게만 만들었지
― 이원규, 「비겁한 훈장」 전문
1986년 동력자원부가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1976년부터 1985년까지 10년간 광산 지역에서 발생한 산업재해는 2,101명의 사망에 6만여 명의 부상이었다. 전체 부상자 중에서 4% 정도가 사망했다. 탄광을 죽음의 막장이라고 부르는 증거가 되는데, 사업주의 무리한 작업 요구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수백, 수천 미터의 지하에서 작업하므로 40도에 이르는 지열로 인해 온몸이 땀에 젖고, 붕락 위험에 시달리고, 몇 미터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탄가루와 돌가루가 날려 호흡하기가 어렵고, 폭발 사고·운반 사고·전기 사고 등의 위험 속에서 희생된 것이다.
노동자들은 산업재해를 입어도 신속하게 치료받거나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사업주는 노동자들이 반항하기 힘든 점을 악용해 “도끼날에 발등이 찍”히거나 “탄 덩이에 손이 짓뭉개지고 발톱이 빠”진 경우에 자체 공상처리 하기를 유도했다. 공상이란 업무상 재해를 입은 산재 환자를 가리킨다. 사업주는 사고의 치료비만 물어주고 나머지는 사고자 자신이 해결하도록 한 것이다. 그 때문에 노동자는 제대로 진단이나 치료를 받거나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오천리 조차공 이씨는 손가락 둘이 날아”간 경우처럼 외상이 뚜렷한 사고를 제외하고는 규정 이하의 불리한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적극적으로 보상을 요구하지 못했는데, “행여 신체검사에 불합격이 되면 어쩌나/하루아침에 쫓겨나게 될까봐”였다. 다시 말해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광산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중에서 진폐·규폐 문제는 또한 큰 아픔이다.
장성 규폐요양소에는 나의 종질 녀석이 있다
도계탄광에서 얻은 병으로 삼 년째 있는데
사촌 형수는 미망인으로 요양비 받아
별 내색 없이 내가 찾아가면 반긴다
형수의 고운 눈썹 밑에 내가 읽을 수 없는
비밀이 있는 듯한데
토요일이면 집에 왔다가 일요일에 요양소로 간다는
종질 녀석은 내 앞에서도 술이 취한 채
개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규폐 환자를 치료하는 약이 아직은 없다는 절망의 노래
― 정일남, 「요양소」 전문
진폐증은 광산 노동자들에게 치명적인 직업병이다. 유해한 분진을 장기간 흡입함으로써 폐에 분진이 달라붙어 호흡이 마비되는 병으로, 돌처럼 굳은 폐는 소생시킬 수 없다. 진폐에 걸리면 산소 부족으로 온몸이 허약해지고 숨이 답답해져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연명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산소호흡기를 잠시라도 뗄 수 없는 부자유스러운 몸이 되어 병원에 “삼 년째 있”거나 영안실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개 광산에서 5년 이상 일을 하면 진폐나 규폐의 소양을 갖게 된다. 나이가 많을수록, 장기 근속자일수록, 허약할수록 발병 가능성이 높다. 광부들은 분진을 피하기 위해 마스크를 쓰지만 방진 효과를 제대로 보기 어렵다. 지하에서 작업을 하므로 숨이 차고 땀이 많이 나 마스크를 쓸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진폐에 걸린 노동자는 항외부로 보직이 바뀌는데, 임금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기 때문에 생활이 곤란해진다. 장기간 근무한 노동자의 경우에는 퇴직금에 큰 손해를 본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퇴직하지만, 진폐 보상금은 100일치의 임금만 지급되므로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의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4
바람을 많이 타는 탄전지대
석탄산업 합리화 돌풍은 태백지대를 휩쓸고
도계로 내려와
대방·삼마·국일 탄광을 문닫아 놓고
석공 점리갱 거목 하나를 쓰러뜨렸다.
나무에 앉았던 새들이 까닭을 묻자
― 국제 에너지 환경 변화
― 국민들의 에너지 환경 변화
― 체탄화 급증
― 인건비 대폭 상승
― 갱도 심부화로 오는 원가 부담 상승
이라며 합리화는 톱날을 다시 벼리었다.
대체산업 유치는 멀고
먹지 않고 살 수 없는 수많은 새들이
새끼 새들을 데리고 떠났다.
다시 거목의 뿌리가 흔들린다.
합리화 톱날에 쓰러졌던
태백 한성탄광의 출수(出水)가 겁이 나
그 아래 황지탄광이 문을 닫았다.
약속의 땅 전체가 흔들린다.
도계를 떠난 철새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불 보듯 보이는
석공의 흥전항·나한항 폐광
또다시 얼마나 많은 철새들이
도계를 떠날 것인가.
― 도계를 살리자
― 도계를 살리자
서식지를 잃어가고 있는 새들이
성명서 발표, 가두서명,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국회의원 수 늘이기에 급한
대권 차지가 급한
높은 곳 공작새들의 귀에는
동자부·대한석탄공사의 귀에는
탄전지대 새들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가슴에 와 닿을까.
약속의 땅이 흔들린다.
갱 밖이 흔들리고 갱 속이 흔들리고
합리화의 톱날은 멈출 줄을 모르고
숲의 거목이 쓰러질 때마다
서식지를 잃은 철새들은 떠난다.
떠나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 김진광, 「탄전지대·5」 전문
안재성의 『타오르는 광산』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1987년 현재 우리나라의 광산촌은 760개의 광산과 8만여 명의 광부들로 구성되어 있다. 약 60만 명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광산에 생계를 걸고 있는 것이다. 탄전지대 중에서 태백 지대의 매장량이 남한 전체의 56%로 집중되어 있다. 업체별로는 석탄공사가 연 500여만 톤으로 전체 25%를, 나머지는 사북의 동원탄좌, 고한의 삼척탄좌, 점촌의 대성탄광 등의 민영탄광이 채우고 있다.
태백에 광산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26년 일본인 광산 기사 시라키 다쿠치(素木卓工)에 의해서이다. 시라키 다쿠치는 ‘먹돌백이’라는 곳에서 석탄 광맥을 발견했는데, 지금의 태백시 금천마을이다. 시라키 다쿠치는 석탄 탐사를 마친 뒤 1936년 삼척개발주식회사라는 석탄 개발 회사를 세웠다. 1939년에는 강원도 철암에서 동해안 묵호까지 철도를 놓는 사업이 펼쳐져, 이 철암선의 개통으로 태백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지하다시피 1960년대부터 정부는 수출주도형 정책을 펼쳐나갔기 때문에 에너지의 수요가 확대되었다. 정부는 석탄 개발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만들어 사업주에게 소득세를 면제시키는 등 각종 특혜를 베풀어 석탄 생산을 증대시켰다. 그 결과 8개에 불과하던 민영탄광이 38개로 늘어났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1981년에는 12만 명의 인구를 가진 태백시로 승격되었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영탄광과 개인 사업주가 운영하는 민영탄광, 기존의 회사가 광산을 포기하거나 폐광한 것에서 이삭줍기를 하는 조광탄광 등이 있었는데, 강원산업, 삼천리산업, 동원그룹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민영탄광은 석탄산업을 기반으로 사업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렇지만 1989년 석탄합리화 정책이 발표되면서 탄광촌은 급속하게 무너졌다. “국제 에너지 환경 변화/국민들의 에너지 환경 변화/체탄화 급증/인건비 대폭 상승/갱도 심부화로 오는 원가 부담 상승” 등이 정부가 내건 명분이었다. 석탄합리화 정책으로 인해 광부들은 광산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부상당했거나 진폐나 규폐에 걸렸거나, 마땅히 갈 곳 없는 광부들만 남아 근근이 살아가게 된 것이다.
사북 갱구 막은 자리에 카지노 간판을 달았다
카지노 불나방
탄광이냐 카지노냐
살고 죽는 확률은 마찬가지
막장으로 선택한 갱구가 닫히면서
그래도 몇이야 잭팟을 터트렸겠지
탄광은 밤을 새워 석탄을 실어 나르고
카지노는 밤을 새워 코인을 실어 나르는
탄광촌의 병방은 오늘도 막장
이마에 희미한 안전등 달고도 수만 명 죽었는데
갱도보다 삐까번쩍
얼마나 더 죽이자고 카지노 불빛 저 난린지
카지노 불나방의 눈은 점점 커지고
채탄막장이야 뺏길 것도 없이 찾아왔다지만
있는 것 다 뺏고도 새로운 막장으로 떠미는 카지노
갱도보다 더 독한 막장.
― 정연수, 「카지노 불나방」 전문
“사북 갱구 막은 자리에 카지노 간판을 달”게 된 것은 지역 주민들이 정부가 대책 없이 폐광정책을 시행하는 것에 대항해서 얻은 산물이었다. 그런데 그 카지노가 지역 주민들 사이의 통합을 저해하는 주범이 되고 있다. 매년 매출액이 높아지고 이익금과 주가가 상승해 외부에서 보기에는 지역 주민들의 삶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지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99% 이상의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1,300여 명의 비정규직 양산이 그 단적인 예이다. 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은 129
만원(2006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의 평균 임금인 136만원(2006년 기준)에도 못 미친다. 따라서 폐광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투쟁해서 얻어낸 노동자들의 결실은 사라졌고 또다시 굴레에 갇힌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강원랜드는 유일하게 내국인이 출입할 수 있는 카지노를 소유하고 있는데, 폐광 지역의 발전과 국가 경쟁력을 제고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다. 1995년 ‘폐광지역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공포하여 카지노 건설의 근거를 마련했고, 2000년에 개장했다. 2003년에는 폐광 지역의 저소득 계층과 소외 계층에 대한 지원사업과 자활 의지를 갖는 프로그램을 개발할 목적으로 복지재단까지 창단했다. 그런데도 폐광 지역 주민들의 생활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오히려 용역업체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차별만 생겨났다. “있는 것 다 뺏고도 새로운 막장으로 떠미는 카지노/갱도보다 더 독한 막장” 같은 사행산업이 폐광 지역에 설립될 수 있는 근거는 열악한 주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지역 주민들은 또다시 비정규직의 굴레를 쓰고 있다. “탄광은 밤을 새워 석탄을 실어 나르고/카지노는 밤을 새워 코인을 실어 나르는/탄광촌의 병방은 오늘도 막장”인 셈이다.
(출처 : 『만인보의 시학』, 푸른사상, 2011)
맹문재
『문학정신』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론 및 평론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지식인 시의 대상애』『현대시의 성숙과 지향』『시학의 변주』『만인보의 시학』『여성시의 대문자』『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 등이 있다. 현재 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