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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교회의 사상
서론
많은 사람들은 객관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무런 편견 없이 세계를 보는 일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일인가? 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의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닐까? 이 렌즈가 어떠한가에 따라 세계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 곧 패러다임에 의존한다. 패러다임을 바꾸면 세계가 달리 보인다. 과학철학자 쿤은 패러다임을 “특정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의 총체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정의하였다.[1]
일반적으로 패러다임은 세계를 보는 방식을 지칭한다. 패러다임이 다르면 세상에 대한 시각적인 경험은 같다고 하더라도,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해석은 달라진다. 패러다임은 세상 자체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의견이나 해석이다. 마찬가지로 역사도 패러다임에 따라 역사를 보는 방식과 삶의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 재건교회의 역사도 한국 교회사 학자들의 해석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재건교회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관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재건교회에 대한 한국교회사 학자들의 글을 읽을 때 그들의 기준과 입장 과 그들의 패러다임과 사관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재건교회의 역사를 살필 때 재건교회의 신앙과 사상이 초기 한국 장로교의 신앙과 사상에 연결된다는 전제와 교회의 거룩성이 교회의 본질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재건교회의 사상적 근거
우리의 논의를 한국 장로교의 사상적 근거 즉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을 알아보는 것으로 시작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재건교회의 사상적 근거가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의 사상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라고 말할 때 그 시기를 1920년대까지로 한정하고 그 당시 선교사들의 신학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2] 말하자면 선교사들이 한국의 신학교육과 신학적 논구를 주도하였으므로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란 바로 선교사들의 신학을 의미했다.
초기 한국 선교사들의 사상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A. J. Brown)은 “개국 이후 첫 25년간 내한한 선교사는 전형적인 청교도 형의 선교사였다”고 하였다.[3] 곽안련(Charles Allen Clark)도 “초기 선교사들 대부분은 스코틀랜드 옛 언약자들의 후손이었다”라고 하였다.[4] 김홍만은 “한국장로교회의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들은 언약신학의 특징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를 청교도로 본 브라운 박사의 평가는 정확한 것”이라고 하였다.[5]
박용규는 “초기 한국에 파송 된 장로교 선교사들 대부분은 청교도 전통의 보수적 복음주의 노선에서 신앙훈련을 받고 또 그와 같은 입장의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파송 된 자들이었다”고 하였다.[6] 박응규도 “한부선 평전”에서 한국에 파송된 미국 선교사들은 대체적으로 복음주의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고 하였다.[7]
박형룡은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은 “영미계통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구현된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하였다.[8] 이를 따라 신복윤도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은 “유럽의 칼빈주의와 영미의 청교도 사상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구현된 신학’이라고 보아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을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평가했다.[9] 백낙준은 12개 신조가 “철저한 칼빈주의적 경향을 지닌 것”이라고 평했고[10] 하비 콘은 이를 평가 없이 인용하고 있다.[11] 백낙준에 이어 김양선[12], 민경배[13], 이영헌[14], 김인수[15]는 12신조를 칼빈주의, 엄격한 칼빈주의, 강직한 칼빈주의, 근본주의로 평가하고 있다.
이상규는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을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미흡하다고 하였다.[16] 12신조는 ‘철저한 칼빈주의적’ 고백으로 규정할 수 없고 자유주의가 아닌 한 수용할 수 있는 기본교리를 표명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하면서 초기 한국교회 신학전통을 ‘개혁주의’로 간주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흡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칼빈주의나 개혁주의라는 용어는 1930년 이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한국교회사 학자들은 초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이 청교도 사상, 칼빈주의 사상, 복음주의 사상으로 각각 주장하였는데 앞에서 살펴본 대로 칼빈주의 사상이라 할 수 없고 복음주의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적 시각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재건교회 선배들에게 초기 선교사들이 전해준 신학사상은 청교도 신학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원종천의 말대로 한국 초기 청교도 언약신학은 경건생활을 위주한 개인언약, 교회의 자발성과 거룩성을 내용으로 하는 교회언약이었다. 그러나 청교도 혁명에 나타난 사회언약 또는 국가언약은 초기 선교사들의 국가와 종교의 분리 사상에 따라 혁명적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칼빈의 주장처럼 소극적 저항으로 나타날 뿐이었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은 그 당시 영국의 청교도 3개파 즉 국교회 청교도, 장로회 청교도, 회중주의적 독립파 청교도 중에서 회중주의적 독립파 청교도에 의해 주도되었다. 크롬웰을 위시하여 그 당시 군대는 대부분이 독립파였다.
재건교회 내부에서 재건교회 역사에 대한 연구는 있었지만 재건교회 신앙과 사상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였다. 그러나 2006년 12월에 있었던 재건교회 6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되었던 김영호목사의 “재건교회의 신앙전통-언약신앙”이 유일하다.[17] 그는 구약의 언약사상과 스코트랜드 장로교의 언약사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재건교회의 신앙을 분석하고 있다. 그는 서요한의 “언약사상사”[18]에서 지적한 5가지 언약사상의 요소 중 처음 4가지 요소를 따라 1. 재건교회와 언약신앙 2. 언약백성으로서의 경건생활 3. 언약 공동체로서의 재건교회 4. 언약공동체의, 무신론 사상과 사회와의 신앙투쟁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원종천의 “청교도 언약사상: 개혁운동의 힘”[19]에서 그는 1부 청교도 개인언약 사상 2부 청교도 교회언약 사상 3부 청교도 사회언약 사상으로 구분해서 서술하는데 이는 서요한의 “언약사상사”에서 지적한 언약사상의 2,3,4의 내용과 일치한다. 다시 말하면 장로교의 언약사상과 청교도 언약사상이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상을 살펴보려고 한다.
낙스의 언약사상
청교도 언약신학을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낙스의 언약신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낙스의 언약사상이 칼빈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가의 문제는 스코트랜드의 종교개혁과 대륙의 종교개혁 간의 관계 문제이며 장로교 사상의 기원의 문제와도 상관이 있다. Richard L. Greaves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에서 낙스는 가장 유명한 인물이지만 그의 사상은 학자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다”고 하였다.[20] 사실 장로교가 낙스에게서 시작되었지만 장로교의 원조를 칼빈으로 보아 한국에서도 칼빈에 대한 연구는 많으나 낙스에 대한 연구는 별로 없다.
그러나 언약에 대한 낙스의 관점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그의 사상이 칼빈에게 의존적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21] 그의 언약사상은 1550년 이후 저서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22] 낙스가 처음으로 칼빈과 상봉한 것은 1554년 3월경이었다.[23] 그 이전에 낙스는 “훈계 또는 경고”라는 글을 썼는데 여기에 언약의 기본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 나타난 언약의 개념은 낙스 사상이 칼빈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24]
최초의 언약개념은 영국의 윌리암 틴데일에게서 나타난다. 틴데일은 언약개념을 쯔윙글리와 그의 제자 불링거로부터 빌려왔다.[25] 특히 그는 그들에게서 하나님과 인간을 함께 묶는 신인계약으로서의 언약개념을 발전시켰다 그 강조점은 신적 언약의 조건적 성격에 있었다. 이런 틴데일의 관점은 언약 개념에 대한 낙스의 발전에 큰 동기가 되었다.[26]
그러나 칼빈의 언약개념은 낙스에 의해 발전된 개념과는 다르다. 칼빈은 언약을 인간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설명했다. 언약에서 인간의 의무는 무시되었다. 한편 낙스는 인간의 상호복종을 요구하는 조건적 약속으로서의 언약개념을 강조한 틴데일과 불링거에 더 가깝다. 낙스가 되풀이 해서 강조하는 점은 만일 인간이 언약 안에 머무르기를 원한다면 그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삶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된다고 하였지만 그 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신적인 언약이 폐지된다고 위협하지 않았다.[27] 그러나 낙스는 그러했다.
이러한 낙스의 언약개념은 프랑스 위그노와 영국 청교도들과 그를 따르는 스코틀랜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언약사상으로부터 비롯된 저항사상이 끼친 그의 영향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이런 낙스의 급진적 저항사상은 그의 구약의 문자적 해석에 근거하였다.[28] 저항사상에 대한 칼빈의 미온적인 태도에 낙스는 실망하였다.[29] 칼빈은 신정적인 국가의 이상을 제시하면서 어떤 권세든지 그에 복종하라고 함으로써 기성 세속권력과의 충돌을 회피하였으나, 낙스는 힘이 있으면 무력으로라도 제네바의 국가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의무라고 국민에게 가르쳤다.[30] 낙스의 언약사상의 영향력은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혁명에도 연결된다. 위그노들 역시 칼빈의 은혜언약에 행위언약을 첨부시키면서 로마교회와 절대군주정치를 거부하였다.[31] 낙스의 저항론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그가 반항은 언제나 나쁜 것이라는 칼빈의 신념을 초월하였다는 것이다.[32] 그리고 낙스의 언약사상은 프랑스의 위그노, 영국의 청교도뿐만 아니라 근대 정치사상가인 존 로크와 루소의 정치사상에도 실질적 기여를 하였다.[33]
청교도의 언약신학
청교도들이 언약신학을 독창적으로 고안해서 발전시키거나 그들만이 언약신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언약신학은 청교도 사상의 주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청교도 신학의 전형이라 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는 언약교리를 주류교회의 고백서로는 처음으로 고백 속에 담았다. 더욱이 그 신앙고백서의 구성원리는 언약체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청교도 언약 신학은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 특히 칼빈의 신학과 관련해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었다.어떤 학자들은 청교도 언약신학에 끼친 칼빈의 영향은 거의 없으며 오히려 언약개념이 청교도 신학을 칼빈의 신학과 구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페리 밀러(Perry Miller, 1905-1963)는 언약신학을 연구한 학자들 가운데 신학자가 아님에도 일반 학계는 물론 신학 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연구가이다.[34] 청교도의 언약 신학과 관련하여 밀러는 중요한 주제를 제시했다. 청교도의 언약 신학은 칼빈의 신학 전통에 중대한 수정을 가했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예정론 만으로 그들의 강한 개혁의지를 영적으로 창출하기 어려워 능동적이고 자발적이고 참여적인 신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언약개념을 도입하였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일종의 결정론인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수정 내지 대안으로서 등장한 것이 바로 청교도의 언약신학이다. 밀러는 언약신학을 칼빈에게서 찾을 수 없는 청교도 신학의 특징이라 본다. 칼빈의 신학과 청교도 신학 사이의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학자는 밀러 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중심 교리로 삼는 칼빈의 신학 체계와 청교도의 언약 신학 사이에 첨예한 대립 각을 세우는 밀러의 해석은 1970-80년대에 제임스 토란스(J. B Torrance)[35], 홈즈 롤스톤 3세(Homes Rolston III)[36], 로버트 켄달(Robert T. Kendall)[37], 트린터루드(Leonard J. Trinterud)[38]에게서 계승된다. 비록 내용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모두 칼빈의 신학과 청교도 언약 신학의 단절을 주장한다. 트린터루드는 청교도 언약 사상 주류에 대한 칼빈의 영향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청교도 언약 신학 주류가 칼빈 전통과 상반된다고 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칼빈주의적 요소보다는 언약주의 전통의 산물이라고 본다.
또 어떤 학자들은 언약 신학이 각기 다른 두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즉 하나는 쯔빙글리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다른 하나는 칼빈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는 것이다.[39]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언약신학을 쯔빙글리-불링거-틴데일로 이어지는 쌍방적 조건적 언약전통과 칼빈과 그 계승자들의 일방적 무조건적 언약전통으로 가르고자 한다. 그들은 칼빈이 언약 개념을 사용한다고 인식했다. 그러나 칼빈이 언약 개념을 사용한 것은 당시 청교도와는 다른 입장이었다고 생각한다. 양보할 수 없는 그의 예정론과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칼빈은 무조건적인 일방적 언약을 가르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청교도는 쯔빙글리와 불링거를 통하여 상호 조건적 언약 사상을 실현했기 때문에 제네바보다는 취리히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단절 주장과 상반되게 에머슨(Everett H. Emerson)[40], 폰 로르(John von Rohr)[41], 후크마(Anthony A. Hoekema)[42], 마스덴(George M. Marsden)[43]은 청교도의 언약 교리가 언약에 관한 칼빈의 가르침과 일관됨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마스덴은 나중에 “언약은 ‘기독교강요’의 주요 내용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칼빈 신학에 언약 역할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이 부류에 속하는 분들은 게어하드 보스(Geerhardus Vos)[44], 존 머리(John Murray)[45], 라일 비어마(Lyle D. Bierma)[46], 그리고 데이빗 위어(David A. Weir)[47] 등이다. 이들은 칼빈이 언약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나 그를 언약신학자로 명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칼빈이 자신의 신학을 체계화하는 원리로써 언약을 사용하지 않았고, 행위언약과 구속언약 개념을 발전시키지도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언약에 대한 칼빈의 관점은 전면적으로 은혜 중심적이고 그러므로 행위언약은 함께 나란히 설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종교 개혁자들이 언약의 조건적 측면과 무조건적 측면을 함께 조화시키는 훨씬 더 복합적인 언약 사상을 가졌으며, 청교도 언약 신학 또한 종교개혁자들의 그 전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한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인 릴백(Peter A. Lillback)[48]은 칼빈이 인간의 행위와 책임을 강조했던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신학에 행위언약 즉 행위의 조건성이 존재할 것이라는 가정을 세우고 이를 자신의 논지를 통해 증명하려고 하였다. 칼빈이 말한 은혜언약 안의 행위적인 요소로 인해 칼빈의 언약신학에 여전히 행위의 조건이 포함되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 릴백의 주장이다. 그는 이러한 칼빈의 은혜언약을 ‘상호적 은혜언약’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하며 은혜언약 안에 조건성 또는 언약의 쌍방성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칼빈의 일방적 은혜언약이 문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상은 아니다.
낙스와 청교도의 언약사상을 살펴본 결과 이 언약사상과 칼빈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언약사상 또는 언약신학은 쌍방성이 있는 것으로 일방성을 강조한 단일 언약주의(monocovenantalism)[49]와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낙스와 청교도의 언약사상은 행위언약의 강조가 특징적이다. 물론 은혜언약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은혜언약안에 있는 자들이 개인 언약에 따라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 뿐 아니라 교회언약을 따라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교회의 거룩함과 순수함을 지키고 나아가 사회언약을 따라 이를 저해하는 정치집단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사상과 신학이 그들의 언약사상이요 신학사상이다. 앞에서 서술하였듯이 한국 초기 장로교는 청교도 사상 중 개인언약과 교회언약에는 충실했지만 사회언약에 따른 녹스와 청교도의 혁명사상과 저항사상은 보여주지 못했다. 양현혜는 “근대 한일 관계사 속의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런 소극적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50]
재건교회의 사상은 칼빈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청교도 및 낙스의 장로교 언약사상을 따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책임있는 행위를 강조하고 개인과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려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태도
신사참배가 강요되었을 때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태도는 다음 네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51]
첫째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계명과 신앙정조를 범하는 죄악으로 알아 일선에서 순교적 각오로 반대, 투쟁하는 입장이다. 신사참배를 반대한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청교도적인 신앙을 소유한 장로교인이었다. 신사불참배 운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거기에 순종하려는 신앙의 자세를 가졌다. 이것은 이들의 신학이며 신앙이었고, 또 그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할 수 있는 원천이었다.[52]
그런데 신사참배를 반대한 입장도 두 가지로 구별된다. 소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과 철저하게 반대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소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은 신사참배 한 교회를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것 자체를 힘으로 생각하는 입장이다.[53] 민경배가 지적하듯이 이 입장에 서 있었던 대표적인 경우는 주기철이다. 그는 노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자는 한상동의 의견에 시기 상조라는 이유를 내세워 반대하였다. 민경배는 이것을 바른 교회론이라 칭송하면서 한상동 목사의 교회론과 다르다고 하였다.[54] 이런 주기철의 입장은 전통적인 칼빈주의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한상동은 신사참배 한 교회가 이미 배교한 단체임으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노회해체운동을 통해 신사참배를 항거하는 자들만의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자 하였다. 해방 후에 재건교회를 세웠던 김린희나 최덕지는 이런 한상동의 제안에 찬성하고 함께 적극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55]
그 신학적 배경은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이 전해준 청교도의 언약 신학이라 생각된다. 이들은 청교도적 훈련과 사고에 익숙한 장로교계의 사람들이었다.[56] 양낙흥은 “초대 교회나 청교도들 같은 특별한 시대의 특수한 그리스도인 집단을 제외하면 대체로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죽음을 감수하고 신앙을 지키기보다는 타협을 통해 살아남는 쪽을 선택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57] 여기서 그는 청교도들의 신앙이 철저한 저항을 하게 하였다는 점을 암시한다.
한부선은 1940년 1월경 그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던 김윤섭, 박의흠, 박인지, 김경락, 최용삼, 계성수, 김성심등과 함께 하얼빈의 자기 집에 모여 며칠씩 금식 기도를 하면서 이 운동방향을 토의한 결과, 스코틀랜드 언약자들의 모범을 따라 성명서를 작성하여, 신사참배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과 우상숭배를 묵과하는 사람들과 철저하게 단절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였다.[58] 국내에는 “신사참배 반대이유서”로 알려졌던 이 문서는 인쇄하여 서명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이 문서에 서명, 동의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세례도 베풀지 않았고, 교제를 끊으며, 예배도 인도하지 못하게 하였다.[59] 여기서도 우리는 청교도의 언약사상이 강한 저항의 배경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둘째는 신사참배를 반대, 투쟁하는 것이 정당한 줄 알면서도 공직을 사임하고 도피하여 신사참배 강요를 피한 경우였다. 민경배는 보수신학의 거두 박형룡이 신사참배를 한사코 반대하던 주기철과 다투다가 일본에 잠깐 가 있었으며, 곧 신사참배를 벌써 하고 있었던 만주의 봉천 신학교로 옮겨 갔다고 하였다.[60]
민경배를 비롯한 적지 않은 교회사가들은 박형용이 도미타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그의 신사참배와 결부시키고 있다. 이들은 더구나 박형용이 신사참배를 하고 있던 만주의 봉천신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남영환은 박형용이 봉천신학교 교장으로 부임할 때 강제로 신사에 참배하게 하지 않겠다는 학교의 약조를 받고 갔고, 실제로 그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61]
그러나 박형용을 위시해 박윤선과 같은 도피적 입장은 그들이 칼빈주의, 개혁주의자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칼빈주의는 신사 참배 반대에 소극적으로 저항하게 하였고 청교도의 언약신학은 강한 저항을 하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는 일제의 탄압과 박해에 이기지 못하고 자기 안위를 위하여 마지못해 신사참배를 인정하고 따라가는 기회주의적 입장이다. 이런 입장은 신학적 배경과 상관없는 현실주의의 입장이요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여기에 속한다.
넷째는 신사참배가 국가의식이라 하여 신앙양심에 가책이 없이 일제에 아부하여 신사참배를 적극 옹호하는 친일적 입장이다. 감리교회는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1936년 6월 신사참배에 순응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이것은 한국감리교가 다른 어떤 교단보다도 사회운동, 사회의식에 있어서 강한 면을 보이면서도 신사참배 문제에 있어서는 둔감하거나 타협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62]
이와 같이 비기독교종교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청교도적 장로교인들은 엄격한 배타주의로 나타났던 반면, 자유주의적 감리교인들은 동정적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자유주의적 기독교는 특별히 불안정한 믿음체계를 가지고 있다. 신앙에 대한 일련의 역사적 진술을 강하게 신봉함으로써 상대주의를 피하는 보수적 기독교와는 달리, 종교적 자유주의의 본질적 측면은 그것을 특히 세속적 세계와 동화되기 쉽게 만든다.[63]
우리나라의 대표적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김재준은 신사참배를 하였을 뿐 아니라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신학적으로 무지한 자들이라고 하였다.[64] 어떤 사람은 자유주의와 신사참배는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증거로 김재준을 들면서 숭인 상업 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 교장이 신사참배에 행동을 같이 해 달라고 요구하자 궁색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사표를 냈다고 하였다.[65] 그러나 김재준은 “편지에 대신하여”라는 글에서 자기가 신사참배에 어쩔 수 없이 굴복했었다고 말하고 있다. “신사참배에 불의의 굴종은 하였을망정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은 변함이 없으신지라.”고 하였다.[66]
출옥성도들의 재건운동 노선의 차이
출옥성도들 중에도 희미한 재건운동 노선을 취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보다 철저한 재건운동의 방향과 노선을 주장하는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재건교회 지도자들이었다.
이기선과 한상동은 기성교회에 들어가서 혁신 재건 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재건교회 지도자들인 김린희와 최덕지는 기성교회는 이미 사단의 회가 되었으니 들어갈 수 없고 나와서 하나 하나 끌어내어 새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이 기선이나 한상동은 신사참배 하였던 성전이라도 수리해서 다시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재건교회 지도자들인 김린희와 최덕지는 마귀를 섬기던 곳이라 하여 사용할 수 없다고 하면서 새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기선이나 한상동은 기성교회 성도들과 성도의 교제를 할 수 있다고 했으나 재건교회 지도자들은 기성교회 성도들과 교제하게 되면 신앙사상과 노선이 희미해 지기가 쉽고 나아가서는 동참죄가 된다고 하여 절교를 주장했다.
특히 한상동은 동방요배가 개인적 양심 문제라고 한 반면 재건교회 지도자들은 동방요배는 물론이요 묵도, 국기배례도 우상숭배이니 다 회개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출옥 성도들 간의 해방 후 한국교회 재건운동의 기본원칙과 노선의 차이는 그 배경에 어떤 신학사상이 영향을 미쳤을까?
필자는 그 차이가 칼빈주의적 개혁주의와 청교도적 언약사상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신사참배 강요 당시 두 그룹은 함께 철저하게 조직적인 투쟁을 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교회재건 과정에서 한상동은 철저한 청교도적 입장보다 온건한 개혁주의적 입장으로 선회함으로 철저한 회개운동보다 개혁주의 신학교를 시작하였다. 그래서 고려신학교 초대 교장으로 개혁주의의 표상인 박형용을, 2대교장으로 역시 개혁주의자인 박윤선을 취임하게 하였다. 이상규는 한상동이 개혁주의자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고려신학교 설립취지서에서 이 학교가 칼빈주의를 기반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67] 그리고 그는 초기 고려신학교의 신학은 박윤선 신학이라고 하였다.[68] 김남식 교수는 이를 진리운동이라 하고 재건교회 지도자들의 노선을 정화운동이라고 평가 하나[69] 이런 평가는 그 또한 개혁주의 신봉자임을 보여주는 것 이상은 아니다.
재건운동의 정의[70]
재건운동은 먼저 회개운동이었다.
한국교회가 범죄했으니 먼저 회개해야 하는 것이 바른 순서였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감행한 교회 지도자들은 회개나 자숙보다 교회조직의 재건에 힘썼다. 이는 해방 이전부터 교권을 가지고 있었던 교권주의자들이 해방 후 교회 재건과정에서도 교권을 그대로 누리겠다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이런 현상을 김재준 은 “한국사에 나타난 신교자유에의 투쟁”이란 논문에서 “해방 후 이른바 출옥성도들은 그 수에 있어서 극소하였을 뿐 아니라 그 성격이 내향적, 자의적이어서 해방과 함께 신국면에 직면한 전체 교회를 맡아 지도하기에는 그 역량이 부족하였으며 따라서 교회 지도는 대체로 일제시대의 그 사람들에 의하여 답습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해석하였다.[71]
이에 초기 재건교회 지도자들은 강한 회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강조는 “철두 철미 회개하자”는 초기 재건교회의 3대 주의의 하나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도나티스트가 범죄한 성직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배타주의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회개하면 용납할 수 있다는 생각이 회개운동의 배후에는 강하게 깔려있었다. 혹자는 복구파와 고려파는 회개하면 용납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재건교회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나[72] 그런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이런 평가를 정당화하기 위해 민경배는 1945년 9월 20일 출옥성도들이 교회재건원칙을 제시할 때 이미 재건파가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73] 그러나 재건교회 지도자들은 회개운동을 전개했지만 기성교회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므로 이북에서는 1946년 4월 초순, 이남에서는 1946년 2월에 재건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재건운동은 역시 성별운동이었다.
이 거룩한 구별은 두 가지 면으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신사참배를 철저히 회개하지 아니한 사람들과 단절하는 것이었다. 성별운동으로서의 절교를 일반교회는 비난하지만 회개와 자숙을 마다하고 교회의 권징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 일시적 교제를 끊는 것은 언제나 성경적이다. 그리고 초기 재건교회는 “마귀당은 일절 버리자”고 하였고 “마귀당에 구원이 없다”고도 하였는데 이도 신사참배를 회개하지 아니한 무리들을 구별해서 부른 것이라 생각된다. 청교도 언약신학 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5장 5절에는 “어떤 교회는 너무나 타락해 그리스도의 교회라 하기 보다 사단의 모임이 되고 만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초기 재건교회는 새 교회당 건축에 힘썼다. 이것은 작은 우상을 교회당에 들여 놓아 예배하였던 곳이라 그곳에서 계속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예배자의 의식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전 예배당을 버리고 새 예배당 짓기를 희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성별운동은 교회 생활과 사회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주일성수, 십일조생활, 금식, 그리고 서양교회의 구제품을 사양하고 파마와 나이롱 옷을 금지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세상과 구별하려는 성별사상의 결과였다. 이런 사상은 청교도 언약사상에서 이미 나타난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김남식은 재건운동의 이런 면을 실천적 정화운동이라고 부른다. 오덕교가 리차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의 구분을 따라 재건교회의 ‘교회와 세상의 구별성’을 문제 삼고 세상에 적대적인 교회의 전형으로 말하는 것은 니버의 사상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74]
리차드 니버는 잘 알려진 전형적인 자유주의자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세상에 적대적인 분으로 매도하고 있다. 최근 이런 니버의 사상은 메노나이트 전통을 가진 존 요더에 의해 비판되고 있다. 그는 니버가 예수님이 문화를 파괴하러 온 것으로 보는 유대 역사가 랍비 Joseph Klousner를 증거로 인용하는 것을 주목한다. 니버는 예수님을 이 세상으로부터 홀로 절대적이며 예배할 가치가 있는 성부로부터 멀리 떠난 분으로 묘사한다. 니버에게 충성의 궁극적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절대자 하나님이다.[75]
재건운동은 궁극적으로 교회회복운동이었다.[76]
다시 말하면 신사참배로 상실한 교회의 본질인 거룩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청교도 언약신학은 이미 살펴본 대로 교회언약을 통해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재건운동은 본질적으로 교회론적이다.
교회의 단일성과 거룩성의 상관관계에 대한 딜레마는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이에 대한 연구로 알턴돌프의 “교회의 단일성과 거룩성”[77]과 로버트 에반스의 “하나됨과 거룩함”[78]이 있다. 고대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교회의 단일성은 국가교회의 단일성과 깊은 연관이 되어왔다. 국가교회는 국가 내에 있는 모든 국민들이 교인이 되는 교회다. Jaroslav Pelikan은 “어그스틴의 딜레마”라는 논문[79]에서 어그스틴의 은혜론과 교회론은 서로 충돌한다고 말했다. 도나티스트와의 논쟁에서 혼합교회론을 정립한 어그스틴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예정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 말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루터에게도 있었다. Leonard Verduin은 “루터의 딜레마”라는 논문[80]에서 루터의 딜레마는 개인 신앙에 기초한 고백적 교회와 지역 모두를 포함하는 국가 교회 간에 발생했던 문제라고 하였다.
최종규는 재건교회의 신학 원칙을 선택의 원리, 남은 자의 원리, 소수의 원리라고 했는데[81] 이것을 김남식의 말처럼 단지 선택 받은 자의 우월성과 기존교회에 대한 배타성으로 이해[82]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 고찰이라 생각하는 것이 더 바른 해석이다. 재건교회의 삼대 신학 원칙은 재건운동의 담지자로서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교회가 그 본질인 거룩성을 어떻게 유지하며 이를 위한 교회 운영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단지 국가교회의 단일성을 위해 신앙고백이 확실하지 않고 그 고백대로 살지 않아도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교회론은 비성경적이다. 현대교회에서 국가교회는 존재하지 않지만 국가교회의 단일성을 위해 주장된 혼합교회론이 그대로 비판 없이 받아들여짐으로 교회의 타락을 정당화하고 교회 구성원의 수만 확보하겠다는 교회론은 비성경적이다.
혼합교회론의 근거인 마태복음 13장의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는 교회에 적용되는 비유가 아니라 세상에 적용되는 비유다. 다수의 신약학자들은 이 비유를 세상을 향한 선교적 전망으로 해석하고 있다.[83] 그러나 어그스틴을 위시하여 루터와 칼빈 역시 그 비유를 교회에 적용하여 국가교회의 단일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어그스틴은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를 구분하였는데[84]이 구분은 플라톤주의[85] 또는 신플라톤주의[86]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거룩성을 그리스도의 거룩성으로 대체시켰다.[87]
키프리안 이전 교회의 본질적 표지는 거룩성으로 알려졌다.[88] 키프리안이 교회의 본질을 단일성에 두는 것으로 보이나 그에게 교회의 거룩성은 단일성의 전제였다.[89] 그 후 어그스틴은 교회의 거룩성이 교회의 본질적 표지라는데 동의하나 거룩성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거룩성’에 둠으로 그 이후 지상교회는 순수성이나 거룩성보다 단일성, 보편성에 더 많이 천착하게 되었다. 물론 어그스틴은 전술한 바와 같이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하고 지상교회가 ‘혼합교회’임을 강조함으로 이 문제를 피하려 하지만 이것이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다. 여기에 도나티스트가 반기를 든 것이다. 도나티스트는 초기 기독교가 지켜온 교회의 본질인 거룩성을 단일성보다 우위에 두는 아프리카 신학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이었다.[90] 재세례파 역시 루터와 칼빈의 교회론에 문제를 느끼고 그들의 길을 갔다.
초기 재건교회의 재세례와 관련하여 김남식은 이를 재건주의라고 부르면서 교회론의 오해에서 온 결과라고 하였고 재건교회의 약점인 배타주의라고 하였다.[91] 그가 말하는 교회론은 어그스틴과 루터, 칼빈의 교회론을 말하는 것 같다. 이는 다분히 재건교회가 도나티스트나 재세례파의 교회론과 같다는 말이다. 물론 그는 재건교회가 유아세례를 인정하는 것을 보아 재세례파와는 다르다고 하였다. 어그스틴이 교회의 단일성을 중시하여 세례의 유효론을 주장하였고 루터, 칼빈도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드렸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초기 기독교의 전통인 교회의 거룩성을 주장한 아프리카 교회는 배교한 자들과 이단의 세례를 부정하고 재세례를 인정하였다. 터투리안과 키프리안에서 이 같은 주장이 나타난다.[92]
재건운동은 청교도 언약신학을 따라 이런 교회의 거룩성과 구별성 그리고 순수성을 교회의 본질로 보고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께만 충성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자고 교회의 목적과 목표를 설정하였다. 여기서 “우상을 타파하자”는 실천적 요강이 나왔다. 이런 교회의 본질 유지를 위해 재건교회는 불가불 분리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을 개혁자들의 주장대로 ‘이신득의’의 구원론적 교리로만 그 분리의 정당성을 인정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이라는 교회론적 측면도 강한 교리적 요소라는 점을 결코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덕교가 재건교회를 분리주의라 부르고 자기 교단의 분리를 칼빈적이라 강변하며 김남식이 고신운동을 신학적이라 부르고 재건운동을 단지 실천적 정화운동이라 부르는 것은 바른 판단과 해석이 아니다. 교회론에서 교회의 본질인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해 회개하지 않는 교회에서 분리함은 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종교개혁도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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