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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500(14)법화칠유~보리수~부루나존자
173. 법화경, 법화칠유 (法華七喩), 법화육서(法華六瑞)
법화경(法華經)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약칭(略稱)으로 일곱 권(七卷)으로 이루어진 경전으로
묘법화경(妙法華經)이라고도 하며 후진 구마라습(後秦鳩摩羅什)이 번역한 경전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이 경은 인도에서 재가 신도들이 중심이 된 대승불교 운동의 태동과 그 맥락을 같이 해서 성립된 경이다. 그래서 이 경의 주용 내용은 대승 불교적이다. 따라서 이 경전의 종지는 회삼귀일 구원성불
(會三歸一久遠成佛)의 사상으로 이루어진 대승경전이다.
법화경(法華經)은 대승경전(大乘經典)들 중에서도 대체로 초기의 경전에 소속되는 경전으로
현행 28品은 동시에 성립된 것이 아니고 시간을 달리하면서 순차적으로 성립된 경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불교사상(佛敎思想)을 '공(空)'계통과 '유(有)'계통으로 구분할 때 법화경(法華經)은 '유(有)'계통에 속한
경전(經典)으로 전반부(前半部)의 일불승사상(一佛乘 思想)과 후반부(後半部)의 불신상주 사상
(佛身常住 思想) 모두가 실재(實在)에 입각한 사상(思想)으로, 전체 28品에 대한 구성을 천태대사 지의
(天台大師 智顗:538∼597)는 전후(前後)로 양분(兩分)하여
⌾ 전반 14品을 “적문(迹門)”
'적문(迹門)'이란 이 세상에 수적(垂迹)한 석가불(釋迦佛)이 개삼현일(開三顯一)에 의하여 일승(一乘)을
밝히고, 이승(二乘)을 성불(成佛)로 인도하는 길을 연 교설(敎說)을 가리키며,
⌾ 후반 14품(品)을 '본문(本門)'이라고 구분했다.
'본문(本門)'은 이 적불(迹佛)을 넘어 실재(實在)하는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본불(本佛)을 밝힌 부분이다.
이 부처는 열반(涅槃)에 들지 않고 항상 영축산에 머물며 중생을 구제(救濟)하고 있다고 설한다.
인연설화, 악마설화, 범천설화, 비유설화(因緣說話, 惡魔說話, 梵天說話, 譬喩說話) 등 다양한 비유와
인연담(因緣談)으로 설하게 된다.
* 구원실성(久遠實成) : 구원(久遠)의, 아득히 오래 전인 옛적부터 영겁 (永劫)의 부처
* 개삼현일(開三顯一) : 삼승(三乘) 즉, 성문, 연각, 보살(聲聞,緣覺,菩薩)을 열어서 일불승(一佛乘)을 나타내는 것을 말함.
☀ 법화칠유 (法華七喩)
법화경에는 많은 비유설화(譬喩說話)가 있는데, 이를 법화칠유(法華七喩) 라 하며 그 일곱 가지 비유는
다음과 같다.
1)화택유(火宅喩) 2)궁자유(窮子喩) 3)약초유(藥草喩)
4)화성유(火城喩) 5)의주유(衣珠喩) 6)계주유(髻珠喩) 7)의자유(醫子喩)
① 화택유(火宅喩)
불타는 집에 비유한 내용으로 어떤 사람이 집에 불이 나자 자식들을 구하기 위해 자식들이 좋아하는
물건 이름을 부르며 빨리 나와 가져가라고 했다. 이 사람은 세 가지의 수레에 물건을 가져왔는데,
이들 수레는 삼승(三乘), 즉 성문, 독성, 보살(聲門, 獨聖(緣覺), 菩薩)을 뜻한다.
세상사의 번뇌에 쌓인 고통스러움의 현신을 가르치고, 바른 인생의 길을 걷도록 하기 위하여 불에 타고
있는 집안을 비유로 설법하신 내용이다.
② 궁자유(窮子喩)
어떤 사람의 아들이 어려서 출가하였는데, 아들을 찾아다녔으나 아들은 아버지가 두려워서 늘 도망
다녔다. 아버지는 꾀를 내어 아들이 친아들임을 사람들에게 밝히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상속(相續)하자 아들이 돌아왔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아들은 이승(二乘)의 사람이며, 재산은 대승(大乘)임을 비유하고 있다.
이 '궁자의 비유(窮子,譬喩)'는 세존의 '화택의 비유(火宅,譬喩)' 설법을 들은 장노(長老) 성문(聲門)들에
의해 말하여 진 것으로, 자신들은 비록 궁핍(窮乏)한 아들이지만, 깨닫고 보면 '부처님의 아들'이라는
자각(自覺)을 표현한 내용이다.
③ 약초유(藥草喩)
같은 수분(水分)을 취하면서도 약초(藥草)가 크고 작은 것이 있으며, 나무도 작은 것 큰 것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각자(各自)가 성장하는 정도는 노력에 달려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마하가섭(摩訶迦葉) 등의 성문 제자들이 '궁자의 비유'로써 '부처님의 자식'이라는 자각을 표현한 것에
대하여, 세존께서 올바른 깨달음에 이른 것을 아시고, 그것에 대한 인증으로서 차별과 평등에 대한
이치를 설명하신 것이다.
④ 화성유(化城喩)
성(城)을 만든 이야기로 어떤 지도자가 사람들을 이끌고 길을 가다 힘든 길을 지나가게 되자 환상의
성을 만들어 고달픔을 잊게 한 뒤 진짜 목적지에 도달하였음을 비유(譬喩)한 것이다.
세존께서 수행 목표인 '일승묘법(一乘妙法)'의 먼 길을 가기 위해 힘든 수행의 중간에 '사제(四諦)'
'12연기설(12緣起說)' 등을 설하며 성문승(聲門乘) 연각승(緣覺乘)들의 성취 만족감을 주며
'일승묘법'으로 더욱 정진하게 하기 위한 방편설을 비유하여 설한 내용이다.
⑤ 의주유(衣珠喩)
친한 친구가 취했을 때 옷 속에 귀한 보물을 넣었으나 친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가난하게
산다는 이야기이다.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에 들어 있는 내용으로 부처님께 '화성의 비유(化城,譬喩)'를 듣고
부루나, 교진여 등의 제자들이 기뻐하고 불타를 예찬(禮讚)하였다. 세존은 부루나, 교진여를 위시한
1,200인의 아라한과 우루빈라가섭을 위시한 500인의 아라한도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受記)를 한다.
⑥ 계주유(髻珠喩)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상투 속에 있는 보석(寶石,명월주)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곧 세상 사람이 다 믿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법화경(法華經)'이 더없이 훌륭한 경전임을 역설(力說)하시면서 법화 행자로써 갖추어야 할 자세와 마음가짐도 함께 비유로 설하신 내용이다.
⑦ 의자유(醫子喩)
독이 든 음식을 먹고 괴로워하는 아이에게 약을 마시게 하는 방편을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자신이 죽었다고 알리게 하여 아이가 마음을 바로잡아 약을 마시고 되살아나게 한다.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있는 '의사의 비유(醫師,譬喩)' 내용으로 부처의 영원함(永遠性)과
보편성을 시설(施設)하신 내용이다.
☀ 법화육서(法華六瑞)
부처님이 법화경을 말씀하실 적에 나타난 6종의 상서로운 현상, 즉
①설법서(說法瑞: 부처님께서 무량의경을 설하여 마쳤으나, 청중이 물러 가지 않고,
다음 설하실 것을 기다림)
②입정서(入定瑞: 부처님이 무량의처삼매에 드심)
③우화서(雨花瑞: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내림)
④지동서(地動瑞: 대지가 여섯 가지로 진동함)
⑤중희서(衆喜瑞: 대중이 우화, 지동의 상서를 보고 큰 설법이 있을 줄 짐작하고 기뻐함)
⑥방광서(放光瑞: 부처님이 미간백호에서 광명을 놓아 동방 1만 8천 불토 를 비치신 것)
174. 벽송선사 (碧松禪師)
벽송선사는 성이 송(宋)씨이고 이름은 지엄(智嚴)이며 벽송은 선사의 당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골상이 비범하고 용력(勇力)이 뛰어나서 장수의 소질을 갖추었는지라 성종 22년 야인의 난리 때는 도원수 허종(許宗)의 막하에서 종군하여 크게 전공을 세웠다.
그 때 그가 승전을 하고 돌아와서는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마음을 한번 깨달아 밝혀 보지 못하고 남의 막하 군사를 쫒아 다니는 것을
일삼았으니 비록 한마(汗馬)의 공은 있다 할지라도 그까짓 허명이 생사해탈에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이냐.’ 하고 그길로 곧 계룡산으로 들어가 와초암 조증대사에게 귀의하여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이로부터 금강불퇴의 신념을 갖고 불도 공부를 시작하여 연희(衍熙)선사에게 <능엄경>을 배우고
벽계정심(碧溪正心)선사에게 전등밀지를 받은 뒤에 5년 동안 금강산과 능가산 등 여러 명산을 돌아다니며 공부하다가 나중에는 지리산에 숨어서 춘하추동 오직 누더기 한 벌을 입고 하루에 한끼씩 먹으며
문을 닫고 고심 수행하였다.
벽송선사는 말년까지 지리산에 있었는데 하루는 <법화경>을 강설하다가 방편품에 이르러 문득 길게
한숨을 쉬고 탄식한 뒤에 여러 납자에게 이르되,
“중생이 어리석어 스스로 광명을 가리우고 오랜 윤회를 받아옴으로써 세존께서 이것을 불쌍히 여기사
입이 아프도록 이렇게 개시(開示)한 것이다. 정말 실법(實法)은 아닌 것이다.
실법이란 적멸허확(寂滅虛廓)하여 마음의 근본 바탕을 보일 수가 없는 것이니 이제 너희들도 정말 부처님의 진실한 것을 믿으려거든 지금 바로 자기 심지(心地)를 깨쳐 들어가라. 그리하여 여래보장(如來寶藏)을 여는 것이며 불은(佛恩)을 갚는 것이 될 것이다.
오늘 나도 너희들을 위하여 또한 적멸상을 보일 터이니 너희는 애당초 밖으로 향하여 구하지 말고 오직
일심으로 안을 더듬어 볼지니라.“ 라고 하더니 시자를 불러 차를 가져오라 하여 마신 뒤에 문을 닫고
정좌하여 오래도록 말씀이 없으므로 이상하게 여기고 문을 열어본즉 벌써 앉은 채로 돌아 가신지가
오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비하여 모시니 상서로운 광명이 하늘에 뻗히고 사리가 또한 많이 나왔다고 한다.
☀
조선 성종 때는 불교에 대한 압박이 극에 달해 나라에서 사태불법(沙汰佛法)이란 명을 내렸다. 그래서
절을 헐고 불상을 없애고 중은 노소를 막론하고 강제로 절문 밖으로 쫓아내서 환속, 퇴속케 하였다.
그리하여 절이 텅텅 비게 되었고 중들은 좋으나 싫어나 환속을 하게 되어 불교의 명맥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때 김천 황학산 직지사에는 벽계정심이라는 견성오도하신 도인 스님이 계셨는데 이 스님도 관원의
등쌀에 견디다 못하여 직지사를 버리고 황학산을 넘어 물한리라는 산골짜기 동내로 숨어들어 오두막을 짓고 여신자로 시봉하던 여자를 부인이라 가정하고 날마다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장작을 패서 김천장에 팔아 좁쌀되나 사서 연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님의 공부에 대한 정진은 조금도 중단함이 없었다.
이때 벽송 지엄선사가 선법을 배우려고 아무리 선지식이 풍부한 스님을 찾아다녀도 절간마다 중이
살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만나 볼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에게 물었다.
‘아무리 난세라도 공부가 높은 선지식 스님이 계실 터이니 유명한 선지식스님이 숨어 계신 곳을 알 수가 없겠습니까?’
그러자 떠돌이 스님으로 여러 소식을 잘 아는 스님이 가르쳐 주었다.
‘훌륭한 도인 스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 스님은 직지사에 계시는 벽계정심선사라는 노스님인데 이
불법사태 난리에 견딜 수가 없어 직지사 뒷산인 황학산 넘어 물한리에서 어떤 여 보살 하나를 데리고
환속하여 살림을 하신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리로 가보시오.’
그래서 벽송 지엄선사는 불원천리하고 단숨에 그곳을 찾아가서 벽계 정심 선사를 뵈온즉 풍모만
보아도 도인 스님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승 문안드립니다.’
‘어디서 온 수좌인가?’ ‘소승은 계룡산 와초암에서 왔습니다.’
‘이름은 무엇인가?’ ‘지엄이 올시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도를 배우러 왔습니다. 선지(禪旨)의 묘도를 가르쳐 주신다면 몇 해라도 시봉하면서 배우려고 왔습니다.’
‘고마운 말이네 마는 같이 거처할 방이 없네.’
‘그것은 문제없습니다.
소승이 스님의 토굴 옆에 아무렇게나 한 간 얽어서 방을 만들어 놓고 지내겠습니다.’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두 내외가 살아가기도 어려운 형편이라 자네까지 조석지공을 할 수가
없네.’
‘소승은 이래뵈도 힘이 장사니까 스님과 같이 나무장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있어 보게. 신심이 그만하면 장한 사람일세.’
지엄은 기뻐하며 당장 흙을 파서 터를 만들고 나무를 베어다가 토굴 하나를 얽어서 구들을 놓고 거처를
만들고 벽계스님과 함께 산으로 나무를 베어 장작을 패서 김천장에 내다 팔고 쌀을 구해오니 생활이
그 전보다 여유가 있게 되었다.
그는 벽계스님을 따라 산에 들어갈 때마다 물었다.
‘스님 선지란 어떤 것입니까? 또한 도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은 좀 바빠서 일러줄 수가 없네. 내일 일러줌세.’ 하고 벽계선사는 요리핑계, 조리핑계를 대며
정식으로 일러주지를 않았다.
다만, ‘제 공부는 제가 하는 것이니 행주좌선에 내 마음이 무엇인가 그것만 의심하고 찾아보게.’라고
할 뿐이었다.
이렇게 내일, 내일 미루어 오는 것이 벌써 삼년이 지났다.
지엄스님은 화가 났다. 그래서 이곳을 떠나려고 생각했다.
‘사모님, 저는 오늘 떠나겠습니다.’ ‘별안간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제가 스님을 찾아올 때는 도를 배우러 온 것이지 고용살이를 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야 그렇지.’
‘그런데 삼 년이 다 지나도 내일 내일 미루기만 하고 도를 가르쳐 주시지를 아니하시니 속이 상해서
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엄은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떠나갔는데 때마침 벽계선사가 나무를 한 짐 지고 들어왔다.
그래서 마나님이 한 걸음에 다가서며 말했다.
‘여보, 지엄이가 갔소.’ ‘왜 떠났지?’
‘당신이 도인지 무언지 밤낮으로 미루기만 하고 가르쳐 주지를 아니해서 화가 나서 가는가봅디다.’
‘내가 왜 안 가르쳐 주었나. 제가 몰랐지. 자고 나서 인사할 때에도 내가 받으니 가르쳐 준 것이요,
밥상을 갖다가 줄때도 내가 반갑게 받았으니 가르쳐 준 것이요, 산에 가서도 대화문답을 하였으니
가르쳐 준 것인데 제가 몰랐지 내가 안 가르쳐 주었나?’
‘그런 것이 다 도예요?’ ‘그렇지, 이 밖에 따로 무슨 도가 있겠나.’
그러면 저도 가르쳐 주었게요?’ ‘암, 가르쳐 준 셈이지.’
‘그러고 보면 지엄이가 바보로구려.’
‘말하자면 그렇지, 그런데 지금 어디까지나 갔을까?’
‘얼마 못 갔을 것이에요. 지금 막 나갔으니까.’
정심선사가 지엄이 간 쪽으로 쫒아 나가보니 멀찍이 가는 모습이 보였다.
정심선사는 높은 바위 위에 서서 큰소리로 불렀다.
‘지엄아, 지엄아 나를 좀 보고 가거라.’
그러자 지엄이 획 돌아다보았다.
이때에 정심선사는 주먹을 번쩍 들고 말했다.
‘지엄아. 아나 네 법 받아라.’
이때 지엄은 뒤돌아보다가 크게 깨닫고 되돌아와 용서를 빌었다.
벽송선사는 이렇게 하여 겨우 법맥이 끊어져 가는 우리나라의 선맥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175. 별지화 (別枝畵)
머리초와 머리초 사이의 공백과 벽체, 공포벽, 편액 등에 회화적인 수법으로 그려 넣은 장식화를 특별히 별지화라 부른다. 별지화는 궁궐 단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찰 단청의 특징적인 요소이다.
별지화에 등장하는 소재들을 종류별로 보면, 실존하는 자연계의 경물(景物)을 묘사한 것, 불, 보살, 용,
봉황 등의 상상 동물, 귀면처럼 신령계를 구상화한 것, 기하문 등의 길상 상징물, 그리고 역대 위인이나
시성(詩聖)등을 그린 고사(古事) 인물화(人物畵) 등이 있다.
1) 자연 경물에 있어서 식물은 화초가 주류를 이루는데 연꽃, 모란, 사군 자 등이 두로 등장하며 석류도
눈에 띈다. 조수(鳥獸)로는 학을 비롯 한 다양한 종류의 새와 사슴, 물고기 등이 있다. 그밖에 산야, 물결, 암석 등 자연계의 경치와 구름, 번개도 등장한다.
특히 구름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흐름의 모양에 따라 점운 (點雲), 비운(飛雲), 유운(流雲),
용운(聳雲), 십자운(十字雲) 등 여러 형태로 도안화된다.
2) 신령계에 있어서는 극락조와 가릉빈가, 용, 봉황 등 신격화한 상상의 동물들이 많이 그려진다. 또
우아한 영태와 화려한 색채의 아름다움, 비상하는 경쾌함을 지닌 나비도 별지화의 중요 소재로 등장한다.
3) 길상 상징물로는 원, 각형, 삼각형, 쌍에쓰(SS)자 문양은 그리기 간단 하고 변화가 크고 아름답기 때문에 많이 사용한다. 원을 사용한 것으 로는 태극문양과 원얼금문양, 원에 가까운 타원형과 심장형 등이
있 다. 태극문양은 음양오행사상을 상징적으로 도식화한 것으로, 파문(巴 紋)이라고도 하며 2태극과
3태극이 많다.
4) 길복(吉福)과 장수영락(長壽永樂)의 기원을 담은 팔보문과 칠보문 등도 있다. 드문 예지만 파주
보광사 대웅전 공포의 쇠서부리에는 수(壽), 복(福) 등의 길상문자도 나타난다. 불, 보살은 공포 벽면에
그려지는 것이 상례인데, 주로 여러 가지 모습의 화불(化佛)로 표현된다.
5) 고사 인물화의 주인공은 삼국지(三國志)의 주인공이나 이백(李白),
맹호연(孟浩然) 같은 중국 시인, 한산(寒山), 습득(拾得), 임포(林逋) 같은 은일처사(隱逸處士),
그리고 하우(夏禹)처럼 전설상의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6) 현존 사찰 단청의 별지화에 등장하는 소재 가운데 비교적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용, 연꽃, 봉황,
만(卍)자, 태극, 비천, 가릉빈가, 호랑이, 귀 면, 고사인물, 팔보, 보상화, 모란, 당초, 산수, 십이지신상,
화불 등이 다.
176. 보리수 (菩提樹)
종교(宗敎)를 ‘숲의 종교’와 ‘사막의 종교’로 구분할 경우,
불교는 숲의 종교에 포함(包含)된다. 일방적으로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논리(論理)로 상대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려는 종교가 숲의 종교다.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자연과 인생을 이야기하며 고행과 수행을 통해 무명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친다.
무리에서 이탈해도 살아가는데 별 지장이 없다. 다른 나무 밑에 자리 잡고 앉으면 된다. 강압적 조직
(强壓的組織)보다는 ‘깨달음’이 중시된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숲의 종교를 대표한다.
반면 ‘사막의 종교’는 다르다. 사막에는 나무가 없고 물도 희박(稀薄)하다. 사람이 쉴 곳이 없을 뿐더러
사방에 위험이 가득하다. 논리(論理)로 상대방을 설득할 장소도 사막에서는 찾기 쉽지 않다.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대상(隊商)을 생각해보면 간단하게 이해된다. 대열(隊列)에서 벗어난 상인과
낙타는 정처 없이 헤매다 끝내는 모래에 묻히고 만다. 때문에 지도자의 말은 율법이 되고 거역하면
벌이 뒤따른다. 지도자(指導者) 혹은 절대자(絶對者)에 대한 맹목적(盲目的) 믿음이 강요될 수밖에 없다.
불교가 ‘숲의 종교’라 그런지 경전에는 유난히 나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경전에 등장하는 여러 나무 중에서 불교를 대표하는 나무를 꼽는다면 바로 보리수(菩提樹)다.
특히 붓다가야 대보리사(大菩提寺) 대탑(大塔) 옆에 있는 보리수는 불교도(佛敎徒)라면 누구나 한번쯤
참배하고자 하는 성스런 나무다. 싯다르타가 이 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됐기 때문이다.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제3권에 의하면, 니련선하 강에 들어 가 목욕한 싯다르타는
핍팔라나무 아래로 가서 발원(發願)했다.
“이 나무 아래 앉아서 나의 도가 이룩되지 않으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깊은 명상(冥想)에 들어간 그에게 마라라는 악마(惡魔)가 다가 왔다.
갖은 유혹(誘惑)의 손길을 뻗쳤으나 끝내 굴하지 않은 그는 오히려 악마(惡魔)의 항복(降服)을 받아내고 만다. 싯다르타는 2월7일 밤 큰 광명을 내며 곧 선정에 들어 진리를 생각했다.
『명상(冥想)의 마지막 날 초저녁에는 온갖 중생들의 과거를 보았다.
그리고 한 밤중에는 악(惡)을 行한 자는 지옥에서 태어나고 선(善)을 행(行)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죽음과 탄생(誕生)을 보았다. 새벽이 되자 고통과 죽음의 원인이 보였으며 마지막으로 동틀 무렵에는
무명을 깨뜨리고 지혜의 광명을 얻어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했다 진리를 보았고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
보리수(菩提樹) 아래서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명상(冥想)에 들어간 지 1주일이 지난 뒤였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 얻고 아자빨리 니그로다(印度菩提樹) 아래로 가서 가부좌(跏趺坐)
한 채 다시 7일 동안 깨달음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 때 한 사람의 브라만이 지나다 부처님께 말을 걸었다.
“그대 고타마여. 무엇을 브라만이라 하며 브라만이 지켜야 할 규범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부처님은 노래로 대답했다.
“악덕(惡德)을 버리고 교만(傲慢)하지 않으며 수행을 실천한다면 진정 브라만이다”고 했다.
그 후 부처님은 다시 무차린다수로 옮겨 7일, 그 다음에는 라자야타나수 아래서 7일을 보냈다.
그리고는 아자빨리 니그로다나무 아래로 되돌아와 범천(梵天)에게 설법을 했다. 불교의 삼대성수
(三大聖樹)라 하면 흔히 사친나무와 보리수(菩提樹), 사라쌍수(沙蘿雙樹)를 꼽는다.
마야 부인이 사친이라는 나무 그늘에서 아기를 낳았고, 그 아기가 자라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으며,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涅槃)에 들었다.
부처님이 그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 ‘핍팔라(pippala) 나무’는 ‘보리수(菩提樹)’로 이름이 바뀌었다. “깨달음을 준 나무”라고 해서 각수(覺樹)ㆍ도량수(道場樹)ㆍ도수(道樹) 등으로도 옮겨졌다.
붓다가야 대보리사(大菩提寺) 대탑과 보리수 사이에는 약 2m정도 간격이 있고 사이에 직사각형의
반석(磐石)이 놓여있다. 부처님이 앉은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금강좌(金剛座)인데 보리수와 함께
부처님 성도(成道)의 상징물(象徵物)이다.
금강좌(金剛座) 옆의 보리수가 싯다르타가 그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나무 바로 보리수다.
정식 이름은 ‘아자팔라 니그로다 나무(Ajapala nigrodha tree)’ 또는
‘반얀 나무(Banyan tree)’로, 현재의 보리수가 물론 부처님 당시의 나무는 아니다.
부처님 당시 그 나무는 몇 번이나 수난을 받아 생과 사를 되풀이하다 1876년 쓰러졌다. 그간의 사정을
알게 된 영국 출신의 고고학자(考古學者) 알렉산더 커닝햄은 그 자리에 다시 보리수를 살리기 위해
붓다가야 보리수(菩提樹)의 직계자손(直系子孫)인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의 보리수 묘목(苗木)을
가져다 심었다.
스리랑카의 보리수는 아소카왕의 딸이었던 상가미타 비구니스님이 약 2350여 년 전,
오빠 마힌다 비구스님과 함께 붓다가야 대보리사의 보리수를 가져 가 키운 나무였다.
때문에 지금의 보리수는 부처님이 정각(正覺)을 이룰 당시 나무의 손자(孫子)에 해당된다.
나무의 나이는 약 100여년, 키는 약 30m 정도다.
177. 보살 (菩薩)
‘보살’은 산스크리트어 보디삿트바(bodhiㅡsattva)의 음을 한자로 표기한 보리살타(菩提薩埵)란 말에서 첫 번째 글자와 세 번째 글자만을 따서 만들어 낸 말이다.
‘보디(보리:菩提)’는 ‘깨달음(自覺:부처님)’을 뜻하고 ‘삿트바(薩陀)’는 미혹, 유정(有情) ‘사람(人間)’을 뜻하는 말이다. 요컨대 인간으로서 자각의 길을 걸을 정도에 이른 사람이면 모두 보살이니까 그 의미는
매우 광범위하고 크다.
따라서 보살(菩薩)은 ‘깨달음을 얻는 유정’ 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중생’으로 보통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는 중생을 구제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으로 설명된다.
보살(菩薩)에는 두 가지가 있다. 종인향과(從人向果)라고 해서 인간으로부터 불과(佛果)를 향하는
수행자의 모습과 종과향인(從果向人)이라고 해서 성불한 부처님이 인간을 향하는 모습이다.
관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은 이미 불위(佛位)에 이른 보살이 자비와 지혜의 덕을 가지고 다시 세계 구제를 위해 인간의 형상을 취한 예이다.
석가모니불의 양옆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있고, 아미타불의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있다. 보현보살은 행원(行願)의 덕, 세지보살도 지혜(智慧)의 힘으로 각각 본존불에게 협력한다. 자비는 사랑, 지혜는 이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인간은 이성에 치우치면 가혹해지고 사랑에 치우치면 어리석어지거나 맹목적이게 된다. 또한 행동뿐이어서 더욱 좋지 않다. 모두 덕이 합쳐져야 한다.
불교의 취지는 대체로 치우침이 없는 중도(中道)이긴 하지만 치우치지 않는 그대로 역시 자유로이
치우치는 독립된 구체적, 현실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 인간 자신이 보살이라는 식으로 자만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지만 보살(菩薩)에의 길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 항상 불교신앙의 요체일 것이다
178. 보왕삼매론 (寶王三昧論)
"보왕삼매론"은 수행과정에서 나타나는 장애를 극복하기위한 10가지 지침으로 원말 명초(元末 明初)의 이름 높은 선승인 묘협스님이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가르침을 설파한 내용으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금언입니다.
[신념불구무병 신무병즉 탐욕이생](身念不求無病 身無病則 貪欲易生)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시고성인설화 이병고위양약] (是故聖人說化 以病苦爲良藥)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처세불구무난 세무난즉 교사필기](處世不求無難 世無難則 驕奢必起)
삶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에 곤란함이 없으면 교만이 생기나니,
[시고성인설화 이환란위소요](是故聖人說化 以患難爲逍遙)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느니라.
[구심불구무장 심무장즉 소학과등](究心不求無障 心無障則 所學過等)
공부 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시고성인설화 이차장위해탈](是故聖人說化 以遮障爲解脫)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장애속에서 해탈을 얻으라』하셨느니라.
[입행불구무마 행무마즉 서원불견](立行不求無魔 行無魔則 誓願不堅)
수행 하는데 마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 지지 못하나니
[시고성인설화 이군마위법려](是故聖人說化 以群魔爲法侶)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모든 마군을 수행의 벗으로 삼으라』하셨느니라.
[모사불구이성 사이성즉 지존경만](謀事不求易成 事易成則 志存輕慢)
일을 도모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이 경솔해 지나니,
[시고성인설화 이류난위성취](是故聖人說化 以留難爲成就)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하셨느니라.
[교정불구익오 교익오즉 휴손도의](交情不求益吾 交益吾則 虧損道義)
친구 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 게 되나니,
[시고성인설화 위결교위자량](是故聖人說化 以潔交爲資糧)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하셨느니라.
[어인불구순적 인순적즉 심필자긍](於人不求順適 人順適則 心必自矜)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 이 스스로 교만해 지나니,
[시고성인설화 이역인위원림](是故聖人說化 以逆人爲園林)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원림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시덕불구망보 덕망보즉 의유소도](施德不求望報 德望報則 意有所圖)
공덕 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시고성인설화 위포덕위엽교](是故聖人說化 以布德爲葉屩)
그래서 성현이 말씀 하시되『덕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하셨느니라.(신,짚신/교)
[견리불구첨분 이첨분즉 치심역동](見利不求沾分 利沾分則 癡心亦動)
이익 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 나니,
[시고성인설화 이소이위부귀](是故聖人說化 利疎利爲富貴)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어라』하셨느니라.
[피억불구신명 억신명즉 원한자생](被抑不求申明 抑申明則 怨恨滋生)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 게 되나니,
[시고성인설화 이굴억위행문](是故聖人說化 以屈抑爲行門)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써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하셨느니 라.
[여시거애반통 구통반애](如是居碍反通 求通反碍)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도리어 통하는 것이요, 통함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는 것이다.
[시이여래 어장애중 득보리]도(是以如來 於障碍中 得菩提道)
이래서 부처 님께서는 저 장애 가운데서 보리도를 얻으셨느니라.
[지약앙굴마라지배 제바달다지도 개래작역](至若鴦窟摩羅之輩 提婆達多之 徒 皆來作逆 )
앙굴마라와 제바달다의 무리가 모두 반역의 짓을 했지만
[이아불실여기 화령성불](而我佛悉與記 化令成佛)
우리 부처님께서는 모두 수기를 주셔서 성불하게 하셨으니,
[기비피역 내오지순야](豈非彼逆 乃吾之順也) 어찌 저 거슬리는 것이 나를 순종함이 아니며
[피양내 아지성야](彼壤乃 我之成也) 그가 방해한 것이 오히려 나를 성취 하게 함이 아니리요.
[이금시세속 학도지인 약불선거어애](而今時世俗 學道之人 若不先居於碍)
요즘 세상에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만일 먼저 역경에서 견뎌보지 못하면
[즉장애시 불능배견사](則障碍之時 不能排遣使) 장애에 부닺칠 때 능히 이 겨내지 못해서
[법왕대보 유자이실](法王大寶 由玆而失) 법왕의 큰 보배를 잃어버리게 되 나니,
[가불석재 가불석재](可不惜哉 可不惜哉)
아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아 어 찌 슬프지 아니하랴.
<보왕삼매론 끝 (寶王三昧論 終)>
179. 태고보우선사 (太古普愚 1301-1382ㆍ충렬왕27-우왕8)
공민왕에 의해 국사로 봉해졌던 고려말의 선승. 일명 보허. 호는 태고. 고려 말기 권문세족인 홍주홍씨
출신으로, 아버지는 연(延)이고, 어머니는 정씨이다.
13세 때 구산선문 중 가지산파에 속하는 회암사의 광지선사에게 출가했다. 19세 때에는 '만법귀일'의
화두를 참구했으며, 화엄학에 정진해 26세에 화엄선에 합격했다. 그러나 경전 공부의 한계를 깨닫고
다시 선(禪)의 수행으로 돌아가 정진하기 위해, 용문산 상원암에 들어갔다가 감로사에서 고행했다.
1337년(충숙왕 복위 6) 송도 전단원에서 참선하여 이듬해 정월 크게 깨달았다. 그뒤 삼각산 중흥사에
있다가 1341년(충혜왕 복위 2) 중흥사 쪽에 태고암을 짓고 그곳에 머물면서〈태고암가〉를 지었다.
1346년 중국의 선승에게 인가를 받으러 원(元)에 건너가 임제종 18대 법손 석옥청공의 법을 이어받았다. 원에 가서 2년간 머물렀는데, 원의 마지막 왕인 순제(順帝)에게 〈반야경〉을 강설할 정도로 환대를 받았다. 1348년 귀국 후 광주 미원장에 우거하면서 친척을 모아 일가를 이루고 공민왕에게 요구하여 현(縣)으로 승격시키고 감무를 설치하게 했다.
1356년(공민왕 5) 왕사로 책봉된 뒤 조정에 별정직 기관인 원융부를 설치하고 승직의 임명권을 장악했는데, 이는 종래의 교단운영 원칙이 무너졌음을 말하는 것이며 나아가 고려의 전통적인 오교양종의 교단체제도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그는 구산선문의 통합을 건의했으며, 수도를 남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건의는
신돈과의 권력다툼 속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돈이 집권하자 보우는 사승으로 지목받고 속리산에 금고당했다.
신돈이 죽은 후 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한 뒤 영원사에 머물기를 청했으나 병을 핑계삼아 사양했다. 1381년(우왕 7) 양산사로 옮겼는데 이때 우왕이 다시 국사로 봉했다. 1382년 소설사로 돌아와 죽었다.
<사상>
보우는 먼저 시대의 폐단과 운수의 변화를 관찰할 것을 주장하고, 당시의 구산선문에서의 파벌싸움이
심각함을 시대의 큰 폐단으로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하여 구산을 일문으로 통합할 것을 주장하고
선문의 규칙도 일원화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안은 구산선문을 넘어 전체 불교 교단의
문제로 확대되지 못했고, 당시 불교계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에 이르지 못했다.
그는 당시 국가기반을 붕괴시키고 있던 권문세족과 같은 입장에 서서 그들의 후원을 받으며 농장을
확대하고 신돈과 대립하기도 했다. 그는 사상적으로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입장을 취했다. 즉 임제종의
간화선을 내세워 선의 지적 이해를 철저히 배격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 천편일률적으로
무자화두만을 참구하도록 했다.
보우가 주장하는 선의 실천방법은 처음부터 선문의 쇄락(灑落)한 활구(活句), 즉 화두만을 철저히
참구할 것이며, 만일 그것에서 소득이 있으면 본분종사(本分宗師)를 찾아가 확인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화두를 참구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지해도 용납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가 거의 모든 경우에 내세우고 있었던 무자와 같은 화두에는 지해나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용납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조선 중기 휴정의 제자들에 의해 보우의 법통이 크게 강조되었다.
저서로〈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ㆍ〈태고유음,太古遺音〉등이 있다. 탑호(塔號)는 보월승공(寶月昇空), 시호는 원증(圓證)이다.
179 - 1. 허응보우선사 (虛應普雨禪師)
조선 13대 왕 명종(1534-1567)의 어머니 문정황후(文定王后)가 섭정을 하면서 나라의 정사를 도맡아
보게 되던 때였다. 그는 불교신자였는데 전조(前朝)에서 불교를 탄압하던 정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므로 자기 대에서 만이라도 불교의 재기(再起)를 계획하였다. 그래서 국내에 훌륭한 승려를 물색하게
되었다. 이때 강원도 감사 정만종이 백담사(百潭寺)의 스님인 허응보우(虛應普雨)를 추천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화상은 힘이 장대하고 기상이 늠름하고 말솜씨가 좋고 글이 문장이요, 선지(禪旨)가 고명하여 범상한 스님이 아니었다 한다. 그러므로 그는 문정왕후의 융숭한 대우를 받아 대궐에 거처하면서 유신들의 무서운 비방과 방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승과(僧科)를 회복시키고 사원을 창설하고 법회를 크게 열어 잔명(殘命)을 유지하던 불법(佛法)으로 하여금 다시 중흥케 하였다.
그래서 그는 한국 불교사상 큰 공로자로 일컬음 받았는데, 그가 당시
얼마나 열렬한 숭앙(崇仰)의 대상이 되었던가는 그를 배척하는 유생들의
상소 가운데 ‘온 나라 사람들이 승망(昇網)하기를 군부(君父)와 같이 하니 이런 거물은 그냥 둘 수가
없다.’고 한 내용의 글을 보아도 그의 위인됨을 알 수가 있다.
그는 고려(高麗)에서 시행하던 승과(僧科)를 복구하여 서울 뚝섬 건너 봉은사(奉恩寺)에서 천하의 승려들을 모아 과거를 보게 하여 승려로서의 인재를 발탁하였는데, 유명한 서산대사와 사명당도 그때 승과에
응시하여 급제한 분들이었다.
이리하여 불교가 새로운 때를 만나 온갖 시설이 잘 정비되고 승풍(僧風)이 진작(振作)되고 승려의 자격이 향상되고 불교사업이 크게 발전하게 되려 했으나 도중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모든 사업이
좌절되고 한국불교는 큰 치명상을 입게 되었다.
명종 20년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에 양주 회암사에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고 굉장히 큰 불사를
벌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팔도의 승려와 사부대중 수만 명이 떼를 지어 들어오게 되었다.
그 당시 열 섬이 넘는 쌀을 각각 가마솥에 나누어 밥을 지었는데 밥의 색깔이 빨갛게 피로 물들인 것
같았으므로 사람들마다 모두 해괴하게 여겨 불길한 징조라고 수군거렸다.
그런데 초 7일에 문정왕후가 홀연히 승하하여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승려들에게 있어
이 소식은 마치 청천벽력과 같았다. 회장(會場)은 갑자기 수라장이 되어 사분오열로 헤쳐지고 말았다.
그 때 불교를 미워하는 유신들은 문정왕후가 보우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불교사업을 반대하고 과거(科擧) 보는 것을 저지하려 했으나 문정왕후의 억압에 눌려 꼼짝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왕후가
승하하고 나니 평소에 눈에 가시였던 보우를 사죄(死罪)로 처단하자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다. 그래서
보우선사에 대한 배척의 상소(上疏)가 빗발치듯이 올라가고 마침내 보우선사의 입성(入城)을 금지하고
지방으로 쫓아버리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보우선사는 불교중흥의 꿈이 좌절됨을 가슴 아파하며 자기를 존경하던 왕후의 빈소에 가서 독경과
염불 한번 못해 주게 된 것을 통탄하며 지방으로 내려가다가 인제에서 잡혀 다시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귀양지인 제주도에 도착했으나 그곳 목사의 손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 순교자 보우선사
조선시대 명종때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국사를 망친 요승으로 알려져 있는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
선사를 순교자로 재평가한 책의 내용이 불교신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아직까지 낯설게 다가온다.
사실 우리가 아는 상식에서 한국불교사의 순교자하면 신라시대 이차돈을 빼놓고는 떠오르는 인물이
없는 것이 현실 아닌가.
지난해 ‘허응당 보우 연구’로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소장 불교학자 박영기씨가 최근 펴낸
‘순교자 보우선사’는 보우선사를 이차돈 이후의 순교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종의 한국판 ‘로로로’라고 할 수 있는 출판사의 ‘위대한 한국인’시리즈 중 13번째 나온 책으로
보우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최초의 평전이기도 하다.
보우선사가 활약했던 명종대는 조선초기 이래 정국을 주도해온 훈구파와 성종대 이후 4대 사화를
겪으면서도 꾸준하게 중앙 정계를 노크해온 사림파가 마지막 일전을 벌인 시기였다. 당시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림들에게 그렇지 않아도 왕실과 외척인 윤원형 등과 연결돼 있었던 보우선사는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율곡 이이가 올린 ‘요승 보우를 논하는 소’가 계기가 돼 보우선사는 제주도로
유배됐으며, 결국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이이는 상소문에서 “(보우가)임금과 윗사람을 속였으며 궁내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백성들에게 환난을 끼쳤으며 교만하고 뽐내어 스스로 잘하는 체하며 자신을 높여
사치하고 참람하니 이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죄는 용서할 수 없다”며 그를 변방으로 귀양 보낼 것을
명종에게 주청했었다.
이 것 뿐만이 아니다. 비참한 죽음으로 다른 선사들과 달리 생애를 정리한 행장도 전하지 않는 보우선사에 대한 평가는 조선시대 내내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박씨는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보우선사가 금강산에 들어가 수도하던 때부터 임종시까지 쓴 시문들을 모은 문집인 ‘허응당집’을
집중분석,그의 새로운 면모를 밝히고 있다.
‘허응당집’은 지난 1959년 일본 불교학자 다카하시 도루(高橋亨)에 의해 일본 나고야시 호사분코
(蓬左文庫)에서 처음 발굴됐으며, 지금까지 집중적인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박씨의 설명이다.
‘허응당집’은 보우선사의 문인이었던 태균(太均)이 편집하고,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이 발문을 써
보우선사가 제주에서 죽은지 8년만인 선조 6년(1573년)에 간행됐다. 당시 사림들에 의해 요승으로
배척받고 있었던 상황으로 볼 때 그의 저술은 금서로 취급됐을 것이고 새로운 간행도 어려웠을 것을
박씨가 추정하는 그의 문집이 일본에서 첫 발견된 이유다.
박씨가 이해한 보우선사는 조선의 불교말살정책 속에서 쓰러져가던 불교를 중흥시켜 폐지됐던
선(禪)ㆍ교(敎)양종과 승려 과거제도를 다시 일으키고 이를 통해 서산대사ㆍ사명당과 같은 훌륭한
인재를 발굴해 불교계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선두에 설 수 있는 계기를 만든 인물이다.
박씨는 특히 ‘허응당집’에 나오는 483편,623수의 시를 적극 활용, 기존의 보우선사에 대한 연구가 과거
배불론자들의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가령 ‘명종실록’과 이를 인용한 다카하시의 논문 ‘허응당집과 보우대사’에선 보우가 금강산 수도를
마친후 수륙재(水陸齋)를 베풀어 사람과 재화를 모아 큰 일을 도모하려 했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박씨는 보우선사가 금강산에서 하산한 이후 양식이 떨어져 굶주린다는 소식을 듣고 한 선비(진사)가 식량을 보내준 것에 화답한 시를 인용하며, 이같은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오히려 정만종(鄭萬鍾) 윤춘년(尹春年) 상진(尙震)등 당대의 대신과 문사 30여명과 주고받은 시문을 통해 불교를 바탕으로 유교와 도교등 삼교의 도가 원융무애하게 용해돼 있는 그의 도량과 학식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우선사가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주살당했다는 ‘명종실록’의 기록에 대해서도
박씨는 그가 남긴 임종게(臨終偈)를 들어 비판한다.
열반송과는 달리 본인이 임종에 임해 직접 쓰는 임종게를 남길 수 있었다면 적어도 자신을 정리할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박씨의 설명이다. 결국 박씨는 보우가 주살됐다는 것은 척불론자들이
보우선사의 말로를 아주 비참하게 묘사하기 위해 지어낸 말일지도 모른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주살됐든, 병으로 죽었든 간에 제주에서 입적했으니 순교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이 박씨의 논지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보우선사가 순교자란 주장을 교계차원을 넘어 일반화시키기에는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검토해봐야 할 측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학자의 시각에서 보우선사와 그의 역할을 긍정 일변도로 서술했으나 새로운 자료의 활용과 역사인물로서 보우선사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이 책이 가진 미덕이다.
< 문화일보: 최영창기자>
180. 보조국사 지눌 (普照國師 知訥)
목우자(牧牛子)는 고려 때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의 아호(雅號)다. 고려 때 경서(京西)의 동주(洞州=瑞興)태생으로, 八세에 조계후예(曹溪後裔)인 종휘(宗暉)에게 나아가 출가입도(出家入道)
하였다.
뒤에 남방으로 내려가 창평(昌平=羅州) 청원사(淸源寺), 하가산(下柯山=醴泉) 보문사(普門寺), 팔공산
(八空山=永川) 거조사(居祖寺),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靈源寺 末寺)등에 머무르면서 습정균혜
(習定均慧=선정과 지혜를 고루 닦는 것)의 이치를 닦았다.
청원사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의해 크게 깨달은 바 있었고
보문사에서 대장경 열람을 한 후 거조사에서 고승대덕들과 정혜(定慧=선정과지혜)를 익혔으며,
상무주암에 들어가 깊은 내관(內觀=마음을 고요히 하고 자성을 관하는 참선)을 닦아 현묘한 경지를
증득하였다.
그 후 정혜사(定慧社)를 결성하고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에서 11년(十一年) 동안 선(禪)을 닦고
도(道)를 펴니, 법을 배우는 학자들의 래학(來學)이 많아 선학(禪學)이 크게 떨쳤으며, 승속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대총림(大叢林)을 이루었다.
희종(熙宗=二十一代)도 그의 명성을 듣고, 절 이름을 고쳐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寺)라 친필을
내리고 만수가사(滿繡袈裟)를 보내 왔다.
고려 희종 6년 법랍(法臘) 三十六年, 세납(世臘) 五十三世로, 법상(法床)에 올라 설법하다가 앉아서
입적(入寂)하였다. 이에 조정(朝廷)에서는 불일보조국사나옹(佛日普照國師羅諡) 호(號)를 내리었다.
지눌 보조국사는 정혜쌍수(定慧雙修: 禪定과 智慧를 함께 닦음)를 주장하였으며, 저서(著書)로는
定慧結社文, 眞心直說, 修心訣, 誡初心學入文, 法集別行錄, 節要並入私記, 圓頓成佛論, 看話決疑論,
念佛要門, 上堂錄 法語, 歌頌 (정혜결사문,진심직설,수심결,계초심학입문,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원돈성불론,염불요문,상당록,법어,가송) 등이 있다.
181 보현보살 (普賢菩薩)
석가모니부처님의 오른쪽에 모셔지며 실천행으로 대행원(大行願)의 상징이며 이덕(理德), 정덕(定德),
행덕(行德)을 맡은 보살로서, 석가모니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도우며, 특히 중생의 수명을
연장해주는 덕을 갖추고 있어서 연수보살(延壽菩薩) 혹은 연명보살(延命菩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흰 코끼리를 타고 연화좌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상왕보살(上王菩薩) 연좌보살(蓮坐菩薩)이라고도 부른다. 흰 코끼리를 타는 것은 힘과 현명함과 신중함을 상징한다.
부처가 성도한 후 보리수 아래에서 화엄경을 설할 때 보현보살은 많은 게송을 읊어서 부처의 공덕과
권위와 자비를 일일이 말하여 찬탄하였다.
☀ 보현보살 십대원 (普賢十代願)
화엄경의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 설한 보현보살의 열 가지 큰 서원. ①예경제불(禮敬諸佛): 더불어
사는 모든 사람을 부처님처럼 받들고 공경 하라. ②칭찬여래(稱讚如來): 남을 위해 칭찬하고 찬탄하고
축원하며 격려하라. ③광수공양(廣修供養): 모든 사람을 부처님께 공양 올리듯 대접하라. ④참회업장
(懺悔業障): 자기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죄업을 참회하라.
⑤수희공덕(隨喜功德): 남의 공덕을 기뻐하라.
⑥청전법륜(請轉法輪): 법을 청하여 세상을 밝혀라.
⑦청불주세(請佛住世): 모든 선지식이 오래 사시기를 청하라.
⑧상수불학(常隨佛學): 부처님의 가르침을 끝없이 배워 익혀라.
⑨항순중생(恒順衆生): 모든 사람의 뜻에 따르라.
⑩보개회향(普皆回向): 널리 모든 사람에게 되돌려 나누어라.
182. 복장물 (腹藏物) ☀불교에서 나온 말
불상을 조성하면서 불상(佛像)의 배(내부) 안에 사리(舍利), 불경(佛經) 등을 넣는 것으로 넓은 의미로는 불상 즉 불보살이나 나한상 등의 여러 존상 내부에 봉안(奉安)되어 있는 여러 가지 불교적 상징물 또는
그것을 넣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사리(舍利)는 처음에는 탑파에만 봉안되었는데 생신사상(生身思想)이 유행됨에 따라 탑뿐만 아니라
불경이나 불화(佛畵)에도 봉안하였고 점차 불상 안에도 장치하게 되었다.
복장품은 그 밖에도 사리함ㆍ만다라ㆍ오곡(五穀)ㆍ오색실ㆍ의복 등이 있으며 조상기(造像記)나
복장기(腹藏記) 등도 장치된다.
☀ 복장의식 (腹藏儀式)
복장의식(腹藏儀式)은 《복장진언》이라는 경전에 따라 진행되는데, 이 경전은 중국 송나라 육조삼장
선무외 스님의 《금강정경》에 수록된 '복장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에서는 조선시대 용허
화악 스님에 의해 현재의 복장의식이 담긴 《복장진언》이 정립되었습니다.
복장의식은 보통 점안식 하루 전에 행해지는데, 의식을 앞두고 절 주지 스님은 오곡 밥 세 그릇과
반찬 세 그릇, 떡 세 접시를 정성스레 준비합니다.
그리고 일주문 밖과 도량 한가운데, 법당 문 앞에 각각 차려놓고 삼배를 올립니다. 이를 생반삼분
(生飯三分)이라 하는데 사찰 안팎의 선신과 미물에게 부처님을 모시는 것을 알리는 의식입니다.
생반삼분 의식이 끝나면 의식을 주관하는 스님을 도울 다섯 명의 스님을 선정해서 다섯 방위에 따라
봉안할 물품을 담을 다섯 개의 보배 병을 배치하는데 병의 재질은 일정하지 않고, 상황과 형편에 따라
금 은 동 종이 등으로 다양하게 만들어 씁니다. 그러나 오행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동쪽 푸른색, 서쪽 빨간색, 남쪽 노란색, 북쪽 녹색, 가운데 흰색의 을 구분해 사용합니다.
복장의식을 주관하는 스님이 봉안할 물품을 호명하면 다섯 개의 병 앞에 있는 스님들은 따라서 복창하며 물품을 하나씩 병 속에 넣습니다. 보배병 속에 들어가는 물품은 우주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물품으로 세상에서 가장 신성시하고 소중히 하는 것들인데 도합 65가지가사용되고 있습니다.
보리 피 나락 녹두 마자(삼씨) 같은 오곡(五穀)과 생금 진주 생은 수정 호박과 같은 오보(五寶)는 기본이고 부처님이 깔고 앉았던 풀인 거사(길상)초 등 오길상초 오산개 오금강저 오윤종자 오방경주 오약 오향
오황 오개자 오채번 오색사 오시화 오보리수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다섯 가지 곡식인 오곡이나 다섯 가지 꽃인 오시화의 경우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따른 재료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복장 물을 준비하는 기간은 보통 1년이 꼬박 걸립니다.
또 각각의 물품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데 예컨대 다섯 가지 약은 다섯 종류의 번뇌를 다스리고
다섯 가지 향은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이라는 다섯 가지 향이 법신과 법계에 충만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다섯 개의 보배 병이 완성되면 한데 모아져 더 큰 병인 후령통에 넣는 의식이 진행되고, 후령통에 보배 병을 넣은 의식은 밑바닥에 거울(하면경)을 까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거울은 광명을 비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복장 물에 부처님의 광명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거울 위에 다섯 가지 보배 병을 오행에 따라 올려놓고 그 위에 사리함과 무공심주가 담긴 통을 올립니다. 그리고 그 위에 거울(상면경)을 덮고, 다음으로 오방을 표시하는 범어가 쓰여진 후령통 뚜껑을 오방에 맞춰 덮습니다. 후령통이 완성되면 오색 천을 포개어 깔고, 그 천위에 오방 위를 지켜주는 보살님이 그려진 지방을 깝니다.
후령통을 싸기 이전에는 후령통 위에 여덟 잎새의 연꽃을 상징하는 천운을 덮고 발원문과, 불상 봉안시기, 시주자 명단들이 적힌 복장기와 조성기 따위를 넣습니다. 이어 오색 천을 싸고 그것을 오색실로 묶으면
비로써 복장물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작업은 불상 속에 복장 물을 봉안하는 과정입니다.
‘화취진언(火聚眞言)’
"옴 살바바바 보타나 하나 바아라야 사바하"(108번)
복장의식을 주관하는 스님이 불로써 잡귀를 몰아내는 화취진언(火聚眞言)을 외우고 불상 속에
복장물을 넣는데,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불상 배속에 후령통을 안치할 때 부처님 배꼽을 기준으로 똑
바로 세우고 복장물이 기울거나 숙여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불상의 목과 팔, 그리고 비어있는 부분에 각종 경전이나 사경본 등을 집어넣는데 옛날 불상의 복장 물에서 많은 경전이 발견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렇게 복장의식이 끝나야만 불상은 비로소 점안 식을 통해 광명과 신이를 지닌 생명력 있는 한 분의
부처님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 <위와 같이 복장의식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참선도량이나 큰스님 계신 곳에서는 선호하는 경전과
금으로된 큰 동전만한 둥근판을 종이에 정성껏 싸서 복장을 하기도 합니다. 병이나 번뇌를 다스리는
것이나 복이나 모든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경전이면 족하고 금은 불상의
점안이 오래오래 변치 말라는 뜻으로 넣습니다. 미리 정갈한 마음으로 복장을 넣고 정해진 시간에
점안 의식을 바로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역사적 기록이나 필요한 자료를 넣기도 합니다.>
183. 부도 (浮屠), 비(碑)
1) 부도(浮屠)는
부두ㆍ불도ㆍ보도(浮頭,佛圖,蒲圖)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범어(梵語)의 붓다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스투파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탑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뒤부터는 화장하여 그 유골을 거두는 불교식 장례제도가 유행하게 되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선종이 크게 일어나 스님들의 지위가 높아져 불탑과 함께 스님의 부도가 많이
건립되게 되었다. 제자와 문도(門徒)들이 돌아가신 선사(先師)를 추모하고 섬기는 극진한 마음에서
입적한 뒤에 온 정성을 다해서 세웠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나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경과 불상 등 법신사리를 봉안한 불탑(佛塔)은 가람의
중심이 되는 곳에 건립하는 반면에 부도는 사찰 주변의 호젓한 곳에 비(碑)와 함께 조성되었다. 부도는
불탑과 구분되어 단층의 건물 모양을 하고 있으며 고려시대부터는 석등이 함께 조성되기도 하였다.
부도는 기본적으로 팔각 원당형과 종형(鐘形)의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기본구조는 불탑과
마찬가지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륜부는 불탑보다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다.
부도는 다른 석조물과는 달리 부도에 따라 탑비가 함께 세워져서 부도 주인공의 생애와 행적 등을
기록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부도 가까이에는 부도와 함께 많은 비석도 찾아볼 수가 있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을 먼저 밟아 가신 선현들의 자취가 바로
부도와 비(碑)이다.
2) 비(碑)는
부도에 부속되어 석조로 조성된 것으로, 碑에는 고승의 일평생 행적이 건립 시기와 함께 새겨져 있어서
그 비문의 내용이 역사적으로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또한 서체는 금석학의 입장에서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기도 한다.
탑비는 맨 밑에 구부(龜趺)가 조각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이 세워지며 상부에는 용머리가 구름과 함께 화려하게 조각 장식되어 진다. 사적(事蹟)을 후세에 오래도록 전하기 위해서 나무나 돌 또는 쇠붙이
따위에 글을 새겨 놓는다.
우리나라에는 목비(木碑)는 거의 보이지 않고 철비(鐵碑)는 간혹 있으며 주로 돌로 만든 석비(石碑)가
대부분인데, 돌로 된 비(碑)를 비석(碑石)이라고 한다.
부도가 서 있는 부근이나 일주문 부근에는 많은 비석이 서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
비석에 적힌 글자도 풍화되어 지워지는데 그 글자를 지우는 것은 비바람이 아니라 바로 망각을 잘하는
인간들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비석을 세울 때는 후세의 사람이 거기 적힌 글을 보고 길이 잊지 말라는 뜻에서 세웠는데 세월이 흐르면 아무도 봐 주는 이도 없이 홀로 쓸쓸히 잡초 속에 묻히고 마는 것이 세상사다.
비(碑)의 종류는 비문의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이 간추릴 수 있다.
⌾묘에 세우는 비로써,
죽은 사람의 이름, 가계, 행적 등을 돌에 새긴 묘비(墓碑),
스님의 묘비인 탑비(塔碑),
임금의 묘비인 능묘비(陵墓碑),
임금이나 고관의 무덤 앞에 세우는 일종의 묘비인 신도비(神道碑),
⌾큰 공사나 행사를 하고 기념으로 세우는 사적비(事蹟碑),
어떤 사람의 공적을 기념해서 세우는 기공비(紀功碑),
어떤 사람의 덕을 숭상해서 세우는 송덕비(頌德碑),
효자의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효자비(孝子碑),
열녀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열여비(烈女碑),
충신 열사의 사당에 세워진 사비(祠碑),
⌾또한 비석의 풍화작용을 방지하기 위해서 비석 위에 세운 집을 비각(碑閣)이라 한다.
184. 부루나존자 (富樓那尊者): 설법제일 부루나존자
설법제일(說法第一)부루나 존자는 부처님이 태어난 바로 그날 카필라성 이웃에 사는 부유한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찍부터 바라문교의 모든 경전을 공부하여 총명한 능력을 발하다가, 질투심에 견디지 못한 부루나는
세속의 은애(恩愛)을 끊고 산으로 들어가서 고행 정진하였습니다.
그 뒤 96종에 달하는 경서(經書)와 논서(論書)를 탐독하여 스스로 일체지(一切智)를 얻었다고 자부하였는데, 왕사성에서 부처님을 뵈옵고 크게 감화를 입어 제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부루나 존자에게는 독특한 설법 요령이 있었습니다. 일단 설법을 시작하면 먼저 뛰어난 말솜씨로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고, 두 번째는 폐부를 찌르는 고언(苦言)으로 그들의 마음에 절실한 가책감을
가지게 하며, 마지막에는 밝은 지혜로 모든 것이 공(空)함을 가르쳐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외 없이
해탈케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설법 요령은 오늘날에도 응용해 봄직합니다.
부루나 존자는 열반에 이르기까지 9만9천명을 제도하였다고 하는데, 마지막 수나아파란타국으로
교화의 길을 떠날 때의 모습은 참으로 숭고하기 그지없습니다.
☀ 어느 날 부루나 존자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서쪽 수나아파란타국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혀 모를 뿐 아니라, 사람들이 난폭하고 의심도 많다.
그들이야말로 부처님의 법이 필요한 자들이다. 그들에게 불법을 전하여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리라.’ 부루나 존자는 부처님께 그 결심을 말씀드리고 허락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 나라가 의심이 많고 난폭한 사람들이 사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존자에게 물었습니다.
“부루나야, 그곳 사람들은 성질이 거칠고 의심이 많다. 만약 그 나라 사람들이 너에게 욕을 한다면 어찌 할 것이냐?”
“그들이 저에게 욕을 한다면 저는 ‘이 나라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먹으로 때리지는
않는구나.”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부루나야, 만약 그들이 너를 주먹으로 때린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렇다면 저는 사람들이 막대기로 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착하게 여길 것입니다.”
“부루나야, 그들이 막대기로 때린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들이 막대기로 때린다면 칼로 베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은 사람들이라 여길 것입니다.”
“부루나야, 그들이 너를 칼로 벤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때는 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 ‘세상에는 살아가면서 생기는 온갖 슬픈 일과 괴로움 때문에 덧없는
육신을 벗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원하는 죽음을 그들이 나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다.’라고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부루나 존자의 확고한 결의를 확인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훌륭한 일이다. 부루나야, 능히 인욕 할 줄 아는 그대야말로 수나아파란타국 사람들 사이에서
머물만하다 가거라, 가서 열심히 불법을 펼쳐 그들은 제도하라.”
마침내 부처님의 허락을 얻은 부루나 존자는 그 나라로 가서 불법을 펼치다가 열반에 들었습니다.
무섭고 나쁜 사람들로 소문이 났던 수나아파란타국 사람들은 부루나 존자의 설법을 듣고 1년 동안
5백명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사찰도 5백개나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 백성들은 열심히
부처님을 믿고 가르침을 따르는 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월간 법공양:조계종 원로위원 석주스님 글>
[출처] 법화칠유~부루나존자|작성자 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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