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퇴치법 / 미산스님(상도선원 선원장)
오늘의 법문 주제는 ‘스트레스’로 잡았습니다. 제가 스트레스를 연구해보니,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더군요.
심리학자들이 연구한 ‘스트레스 완화 프로그램(Stress Reducing Program)’이라는 것이 이미 병원이나 심리상담 현장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미국 매서추세츠 대학교 의과대학의 존 카바진 교수가 실험을 통해 개발하고 검증한 이 프로그램은 7주에 걸쳐 실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몸 스캐닝(Body-scanning)’,
'스트레칭‘ 그리고 ’알아차림-마음챙김‘입니다. 이것은 병원에서 실제로 활용되고 있고, 영국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마음챙김 센터(Mindfulness Center)’가 설립되어 활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는 명상 센터 겸 심리학 실습 센터로서, '스트레스 완화 프로그램'을 심층연구하고 보급하기 위해 장차 의료보험 혜택까지 받는 체계를 만들려고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 사람들이 우리 쪽에 있는 것을 갖다가 실질적으로 포장해서 이용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 사회의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몸과 마음의 상태를 봅시다. 예를 들어 법회에 올 때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길이 막혀 차가 서 있다고 해봅시다. 몸은 압박감을 느낍니다. 특히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은 조급하고 여유가 없지요. 이것이 스트레스의 대표 증상입니다. '스트레스'라는 영어 단어를 요즘은 생활 속에 많이 쓰는데, 이 어원을 추적해보면 100년 전에는 공학 용어였습니다. ‘누른다’는 뜻으로, 단위 면적당 누르는 압력을 뜻하는 말인데,
이 용어가 현대에 정착된 것은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부터입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스트레스 양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옛날엔 그저 해가 뜨면 농기구를 챙겨 밭일하러 나가면 되었지만, 지금은 아침 출근 때만 보더라도 시간에 맞추기 위한 교통 스트레스 등 압박의 정도가 커졌습니다.
만약 누가 ‘스트레스 제로’라면 둘 중 하나입니다. 그 분이 신경정신과에 가든지, 아니면 제가 그분께 삼 배를 하고 법문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아라한일 테니까요. 평범한 정상인이라면 스트레스 제로 상태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탐진치 삼독의 번뇌를 갖고 살기 때문입니다. 욕계(欲界) 세상은 욕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누구나 삶의 역동적 의지작용[상카라, 行]을 갖고 살아갑니다. 즉 삶의 지향성이 있고,
이것이 물질적으로 반응을 일으켜 일정량의 긴장, 스트레스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 역동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스트레스 양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요즘은 스트레스를 ‘없앤다’는 말을 쓰지 않고 ‘스트레스 경영(Stress-management)'이라는 말을 쓰지요. 즉 적정 수준의 스트레스를 스스로 파악할 능력을 길러야 하는 겁니다.
스트레스가 꽉 차서 터질 지경이 되면 위험 수준이고, 또 스트레스가 너무 없어 무기력 상태로 가면 이 또한 위험 수준입니다. 긴장감이 있고 나태하지 않으면서 두뇌가 명쾌하게 깨어 있어 순간순간 판단이 흐려지지 않고,
몸도 힘이 있어 역동적인 상태를 유지한다면 이것이 적정 수준의 스트레스입니다. 배구공의 예를 들어 봅시다. 공에 공기가 꽉 차서 칠 때 손이 아플 정도면 공이 제대로 튀지 않습니다.
이때 공기를 조금 빼서 탄력 있게 공이 탁탁 튀게 되면 적정 수준입니다. 바람을 많이 빼면 효과가 떨어집니다. 공이 잘 튈 수 있는 만큼 들어간 공기, 이것이 스트레스의 적정 수준입니다.
이를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순간순간 '연기-중도'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늘 관계성 속에서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마음을 견지하여 강한 취착, 증오의 마음이 없다면 평정심, 균형 잡힌 마음이 자리하게 됩니다.
말은 쉽지요. 여러분도 수긍은 하시지만 막상 삶의 현장에 가면 쉽지 않을 겁니다. 예를 들어 여기 계신 교사분들, 현장에서 아이들과 부딪칠 때 연기-중도적 관점이 적용되어야 하는데 그러하신가요?
그게 잘 된다면 정말 불교의 핵심을 이해, 실천하고 계신 겁니다. 그것이 안 되면 불철주야 정진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법회가 있고 여러 수행 정진 행사들이 있는 것입니다. 수행의 바탕이 되는 핵심 이론을 이해하고 접근하는가, 모르고 접근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수행하다가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이론을 알고 하는 분은 그 난점을 해결하고 진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에 균형을 잡으려면 부처님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집착심을 내려놓으면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집니다. 여기서 부처님 말씀을 음미해보겠습니다.
합장하시고 들어보십시오.
부처님께서 사왓티의 기원정사에서 말씀하셨다.
“쾌락(kama), 견해(ditthi), 규칙과 관습(silabbata), 자아의 이론(attavada: 靈魂論)에 대한 집착 등 네 가지 집착이 있다.
비구들아, 이 네 가지 집착들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욕망[愛:tanha]이 그 뿌리이다. 또한 욕망의 뿌리는 감각[受:vedana]이고,
감각의 뿌리는 감각적 접촉[觸:phassa]이고, 감각적 접촉의 뿌리는 감각적 느낌의 여섯 가지 바탕[六入:salayatana]이며, 감각적 느낌의 여섯 가지 바탕의 뿌리는
마음과 형체[名色: namarupa]이고, 명칭과 형체의 뿌리는 의식[識:vinnana]이고, 의식의 뿌리는 업의 형성[行:sankhara]이고, 업을 형성하는 뿌리는 무명[無明:avijja]이다.
이 네 가지 집착을 이해한 체하지만 이해한 것을 옳게 버리지 못하는 수행자들이 있다. 쾌락에 대한 집착을 버렸지만 견해에 대한 집착이나 규칙과 관습에 대한 집착,
자아의 이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이가 있다. 그는 견해에 대한 집착, 규칙과 관습에 대한 집착, 자아의 이론에 대한 집착을 사실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쾌락에 대한 집착과 견해에 대한 집착을 버렸지만 규칙과 관습에 대한 집착이나 자아의 이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이도 있다. 규칙과 관습에 대한 집착과 자아의 이론에 대한 집착을 사실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쾌락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규칙과 관습에 대한 집착을 버렸지만 자아의 이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이도 있다. 자아의 이론에 대하여 사실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잡아함경 제12:298경)
맛지마 니까야 등 경전의 몇 군데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입니다.
네 가지 집착은 쾌락, 견해, 규칙과 관습, 자아 이론입니다. 이 네 가지 집착 때문에 우리는 윤회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위의 내용은 부처님께서 12연기의 역관(逆觀) 입장에서 설하신 말씀입니다.
첫째, 쾌락이 집착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들은 좋은 것에 도가 넘치게 취착한다는 것입니다. 몸을 통해 그러니까 안, 이, 비, 설, 신을 통해 집착을 하지요. 눈으로는 어떤가요. 도처에 볼 거리가 하도 꽉 차 있어 마음공부하기가 너무 힘들지요.
아이들은 인터넷 게임에 중독되어 그것만 하고요. 소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클래식 음악, 염불 소리요? 그런 것은 마음을 정화시키고 차분하게 해주니까 좋지요. 문제는 요즘엔 심지어 ‘듣는 마약’까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양에서 생기고 확산되어 우리나라에도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마약을 흡입한 상태의 뇌파를 면밀히 조사분석하여 그와 똑같은 파장을 자아내는 소리를 합성해서 들려준다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 들어보려고 했는데 인터넷에서 찾을 수가 없더군요. 이런 소리는 들을 때는 황홀경에 빠지겠지만, 그 상태에서 나오면 정상 생활을 못합니다. 마약처럼 강한 중독성, 즉 집착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냄새도 마찬가집니다.
자기가 선호하는 냄새에 대한 집착심이 특별히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맛에 대한 취착심도 그러해서, 좋아하는 것 이외엔 일체 안 먹기도 합니다. 몸에 대한 집착이란 신체적인 접촉, 성(性)과 관계된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은 쾌락(카마, kama)입니다. 이를 중도적 관점에서 해결하지 못 하면 삶이 힘듭니다.
둘째, 견해에 대한 집착입니다. 특히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자기 견해만 옳고 남의 견해는 틀리다며 고집하기가 쉽습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구절 ‘원리 전도몽상(遠離 顚倒夢想)’ 이것이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불법을 불법이라 하면 불법이 아니다’라는 구절도 금강경에 있습니다. 명칭, 개념, 주의주장들이 들어 있으면 진실을 드러낸 상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견해에 집착하여, 종교를 믿음으로써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족내 종교 갈등을 보십시오. 제가 전에 이것을 다룬 방송 프로그램의 요청을 받아
몇 마디 한 적도 있습니다.
셋째, 규칙과 관습에 관한 집착입니다. 그래서 선불교에는 형식, 관습, 규칙을 파괴하는 파격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사(禪師)들을 만나보면 시원시원하지요. 왜 사람들이 규칙과 관습에 집착하는가 하면, 마음속 깊은 밑부분에 두려움이 있기에 이를 안 지키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집안의 아버지가 제사를 지낼 때 개가 자꾸 음식 차려놓은 곳으로 달려들기에 개를 묶어놓고 지냈습니다. 이것이 번번이 되풀이되다가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이 제사를 물려받아 지내게 되자,
아버지가 하던 것을 지킨다며 없는 개를 일부러 사다가 묶어놓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습의 오류입니다. 여기에 집착하는 순간 많은 스트레스가 생깁니다.
넷째, 자아가 있다는 집착심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있다’라는 관념을 좀처럼 떨치지 못하고 사는데, 이를 떨치는 순간 대자유인이 됩니다.
‘스트레스 제로’ 상태라면 미쳤거나 아니면 온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상태입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여 스트레스 제로가 되면 삶을 100퍼센트 역동적으로 살지만 삶의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아라한의 행(行)은 그래서 ‘상카라’가 아니고 ‘키리야(kiriya)'라 합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행위, 허공에 새가 날아가듯이 그러한 행을 하는 것이 불자들의 이상이고 목표입니다.
이 법문을 들은 후에도 여러분 마음속에 흔적이 많다면, 스트레스가 많은 것입니다. 요즘은 스트레스 수치를 정확히 잴 수가 있답니다.
컴퓨터가 우리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시대가 곧 옵니다. 예컨대 제가 이 옆에 있는 종을 생각하면서 MRI 찍는 기계 같은 것 속으로 들어가서 뇌파를 다 찍으면 그것을 정밀 분석해서 컴퓨터가 ‘종’이라고 지금 제 머릿속의 생각을 단어로 말해주는 겁니다.
이렇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 해도 발달하면 할수록 근본을 이해하면 불교가 더욱 삶 속으로 확산되리라고 저는 자신 있게 생각합니다. 오늘 법회에 오신 불자님들, 집착심을 내려놓고 ‘스트레스 제로’의 삶을 향해 열심히 정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