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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걸
지난 주에 연합뉴스를 비롯한 한국 언론들이 한 미국인 선교사의 굿긴 소식을 보도하였다. 이어서 나온 애도성명들은 한결같이 한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미국인 선교사를 추모하고 있었다. 91세로 이 땅에서 삶을 마감한 조지 E. 오글(George E. Ogle) 목사 이야기다. 그는 11월 15일, 미국 콜로라도에서 소천(召天)하였다.
감리회 본부에서도 오는 27일 오후 1시에 추도식을 한다니 마땅한 일이다. 준비과정에서 그날 조화순 목사의 참석여부가 큰 관심사가 되었다. 아무쪼록 역사적 인물들이 오래도록 건강하게 사시는 일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새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인터넷을 통해 추모의 글을 찾아 읽으면서 몇 가지 알지 못하던 에피소드를 발견하였다. 김형민 피디는 1954년 한국을 찾아 온 젊은 미국인 선교사 조지 오글이 대전 지역에서 중고등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쳤는데, 그때 함께 생활한 한국인 손명걸 전도사로부터 ‘명걸’이라는 이름을 따고 오글 성에서 ‘오’씨를 가져와 오명걸이라는 한국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소개한다.
미국 UMC 김정호 목사의 글에도 두 사람의 ‘명걸’ 이야기를 다루면서 오글 목사에게 오명걸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손명걸 목사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 목사들이 조지 오글 목사님이라고 부르면 “오명걸이라는 좋은 이름 있는데, 왜 자꾸 미국 이름 부르냐?”하시면서 웃곤 했다고 회고한다. 덧붙이면 도로시 오글 사모님의 이름은 오선화이다. 참 고마운 이름들이다.
김흥수 교수는 1954년부터 3년간 한국에서 임무를 마치고 귀환한 이후 미국에서 그의 행적을 알려주었다. 2002년 10월 한국방문 중 인터뷰한 내용이다. 1957년부터 오글 목사는 낮에는 루즈벨트대학교, 밤에는 맥코믹 신학교에서 공부한다. 두 학교는 시카고에 소재한 학교들로, 산업선교와 노사관계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노동문제를 공부한 이유가 있다. 지금은 러스트 벨트(Rust Belt)로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지만 그의 고향 피츠버그는 철강 산업의 메카였고, 아버지도 이웃들도 모두 철강이나 철도 산업에서 일하였다.
“우리 이발소에 있는 아저씨 그 분이 머리를 깎으면서 항상 노동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아이 때부터 노동근로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듀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노동자 신부(Worker-Priest) 그것에 대해서 교육을 받고 마음에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는 감동이 왔어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조지 오글 목사는 본격적으로 오명걸이 되었다. 고통 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그들의 아픔과 동참한 것이다. 1961년 4월 인천에 터를 잡았고, 이듬해 화수동에 초가집을 마련하여 도시산업선교회를 시작하였다. 산업전도에 나섰고, 한국인 동역자를 세웠다. 조승혁, 조화순 목사는 인천산업선교회의 1, 2대 총무로 조승혁 목사는 대성목재에서, 조화순 목사는 동일방직에 취업하여 소그룹 활동을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일깨웠다. 당시 노동자, 특히 여성노동자는 그 시대에 ‘지극히 작은 자’였다.
서슬 퍼런 유신정권이 오명걸 목사의 눈부신 활약을 그냥 버려둘 리 없다. 당시 이 땅은 노동현장 뿐 아니라, 민주주의 역시 아수라(阿修羅)장과 다름없었다. 중앙정보부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조직으로 인민혁명당 재건위가 있다고 발표하였고,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도예종 등 8명의 사형을 확정하고,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9일에 사형을 집행하였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인혁당 사법살인 사건이다.
이후 32년 만인 2007년 1월 23일,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 8명은 재심을 거쳐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목요기도회를 통해 고난 받는 사람들을 옹호했던 조지 오글 목사는 강제추방 당하였다. 오명걸은 ‘예수님은 우리 중 가장 보잘것없고 약한 자를 통해 오신다’는 믿음으로 인혁당 사건의 가족들을 품었고, 석방 청원을 촉구하는 서명자들을 연결하였다. 그 역시 중앙정보부에 강제 연행되어 20시간 동안 곤욕을 치룬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다른 자료를 찾던 중 ‘고난함께’ 1994년 여름호(제38호)에서 오명걸 자신이 쓴 글을 발견하였다. 그 시절 강제추방 당하던 순간의 내용이 생생하다.
“20년 전 저는 한국에서 강제 출국당했습니다. 12월 14일 저는 가택구금되었고 그날 오후 5시에 경찰봉고차에 실려 곧바로 김포공항으로 끌려갔습니다. 경찰차에서 내리라고 하더니 곧바로 비행기에 태웠습니다. 제가 경찰차에서 내리기 전 차 뒤에 있던 4,5명의 남자들을 돌아보면서, ‘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없었으니 여러분에게나 작별인사를 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자동차 문으로 향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평안히 가십시오, 곧 돌아오시기를 빕니다.’ 저는 그때 큰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52쪽).
마침내 그는 20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민청학련 사건 20주년을 맞아 처음 인혁당 추모식에 초대받았던 것이다. 봄볕이 환하고 따듯하던 그날, 몇 해 전 의왕으로 이주한 서울구치소 옛 터 마당에서 공개적인 첫 추모식이 열렸다. 나는 그날 아침 8시 앰배서더 호텔에서 조지 오글 목사를 난생 처음 만나 인사드렸고, 오후 2시 다시 추모현장에서 재회하였다. 오글 목사는 시민사회를 대표해 추모곡을 부른 감리교 고난중창단을 자랑스러워하였다. 그는 역시 감리교회의 애정어린 목회자였다. 1994년 4월 9일(토) 일이었다.
만남은 서대문 고난사무실로 이어졌고, 오명걸 목사는 선물로 고난천달력을 받고 무척 흐믓해 하였다. 아마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으로 후원하다는 사실만으로도 20년 전 아스라한 끔찍한 기억들을 조금은 위로 받았던 듯하다. ‘고난함께’에 원고를 보내주었는데 제목은 ‘과거를 뒤로 하고 미래를 향할 때’(오명걸)였다.
2020년 6월 10일, 정부는 6.10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에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민주주의 발전 유공포상’ 국민포장을 드렸다. 1970-80년대에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종교계, 학계, 시민사회 인사 12명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하면서, 오글 목사와 시노트 신부의 수난을 포함하였다. 비로소 예의를 갖춘 것이다.
감리회 본부에서 근무하던 2007년 연초에 감독회장의 분부로 조지 오글 목사님께 편지와 선물을 보내드린 일이 있다.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였고, 남북관계 역시 불안정하지만 조금씩 평화를 모색해 나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인권이 성숙하였으며, 사회가 안정되고 있습니다. 특히 부끄러운 과거가 바로잡혀지고 있습니다. 조지 오글 목사님께서 관여하셨습니다만, 며칠 전에는 인혁당 사건으로 인해 사형 당했던 8명의 희생자들이 무죄로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고통당하는 가족의 눈물을 통해 역사가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이러한 발전과 회복의 배경에는 조지 오글 목사님과 사모님의 수고와 사랑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선교사로서 역할은 70년대 산업선교 활동 뿐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하나님의 사역이었기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오글 목사님의 선각자로서 역할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바르게 실천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건강이 허락하시는 한 한국감리교회를 위해서 계속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감독회장 신경하”(2007.1.31.).
오명걸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여전히 우리에게는 ‘가장 보잘것없고 약한 자’를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직도 이 땅에는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마 25:40)들이 수 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못 되고 밟히고 손가락질 받는다고 부끄러워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제가 더 부끄럽습니다 -.-
삶의 현장은 제가 서 있는 이곳임을 기억하며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한 기도와 손길을 멈추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