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禪軒 독서일기 2025년 10월 13 월요일]
《『대동야승』 中 趙慶男 著 『續雜錄 속잡록』
이이첨에 대한 경상좌도와 우도 선비들의 상반된 상소》 (151)
<1621년 신유년 천계(天啓) 원년, 광해 14년>
○ 유학(幼學) 채득인(蔡得仁)과 박중진(朴重振) 등이 잇달아 올린 상소문의 대강은, 사간 유숙(柳潚)ㆍ승지 유혁(柳湙)ㆍ지평 유활(柳活) 등의 용납하기 어려운 죄와 헌납 성하연(成夏衍)과 정언 기수발(奇秀發) 등의 어진 사람을 모함한 죄상이었다. 이에 이르러 유학 박인(朴嶙)(모두 대북(大北)의 소인들이다)이 올린 상소문에 이르기를, “유숙ㆍ유혁ㆍ유활 한 집안의 더러운 행실은 형제가 서로 간음하고, 숙질(叔姪)이 서로 간통하였다는 등의 일은 박중진(朴重振)의 상소문에 이미 다 말하였으니 다시 말할 필요는 없으나, 간원에서 유숙과 유활을 처리하는데 감히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은 자를 가지고 상중(喪中)에 예(禮)를 다하였다 하고, 윤기(倫紀)를 더럽히고 어지럽게 한 자를 집안에서 행실이 깍듯하여 사람들이 딴말이 없다고 하며, 혹 삼충(三忠)이라고 지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집을 지나가는 자는 반드시 침을 뱉는데도 혹은 고을에 명예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유숙과 유활의 마음을 마음속에 지니고, 유숙과 유활의 행실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면, 간사한 자들과 편당하여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런 지극함에 이르겠습니까?
이이첨의 충효와 청백함과 문장과 공훈은 온 세상이 추중하는 바이고, 곧 전하의 사직의 신하입니다. 이제 유숙ㆍ유활 등이 사주를 받고 창을 돌려서 반드시 죽이고야 말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이 나라를 위하여 원망을 감당하여 다행히 여순(汝淳)에게서 면하였고, 다행히 유영경(柳永慶)에게서도 면하였으며, 다행히 김제남(金悌男)에게서도 면하였고, 다행히 역적 허균에게서도 면하였던 것인데, 이제 장차 유숙과 유활의 흉악한 모략에서는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이 의논은 누가 주장한 것입니까? 70 노인이 오히려 해칠 마음을 품었으나 기이한 계략을 이루지 못하고 강호(江湖)에 물러나와 있더니, 호랑이의 위엄을 빌리려고 하여도 나귀의 재주가 이미 다하였으므로, 말도적 천한 종으로 하여금 흉악한 상소문을 대신 올리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유숙 등이 스스로 공의(公議)라고 칭하는 것이 과연 이와 같은 것입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상감께서는 흉악한 역적을 통찰하시어 빨리 뇌정같은 위엄을 내리시어 먼저 유숙ㆍ유활 두 역적의 집안에서 화를 만들어 그것을 궁중에까지 미치게 한 대역무도한 죄를 다스리시어 임금의 형벌을 바로잡으시고, 여러 사람들의 의분을 쾌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상소문이 정원(政院)에 올라왔다.
[첨언] 유학 박인(朴嶙)이 이이첨을 충효, 청백, 문장, 공훈이 온 세상이 추중하는 사작의 신하로 떠받들고 있다. 그러면서 이이첨을 비판한 사간 유숙(柳潚)ㆍ승지 유혁(柳湙)ㆍ지평 유활(柳活) ㆍ 헌납 성하연(成夏衍)ㆍ정언 기수발(奇秀發) 등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 유학(幼學) 채득인(蔡得仁)과 박중진(朴重振)을 옹호하고 있다.
○ 승지 유만(柳灣)의 계에 이르기를, “신은 요즈음 박중진(朴重振)의 무고를 뒤집어쓰고 집에서 짚자리에 엎드리어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합니다. 상감께서 사퇴하지 말라고 비답을 내리신 이후로 패초(牌招)가 여러 차례 이르니 신은 진실로 황공합니다. 대간(臺諫)에서 신의 형제를 처리한 후에 비로소 은혜로운 명에 따라 가까운 지위에 직책을 받들게 되어 죽은 자를 살리시고 뼈에다 살을 붙여주시니 감격의 눈물이 먼저 떨어집니다.
요즈음 박인(朴嶙) 등이 상소문을 올려 박중진의 뒤를 이어 오로지 신의 형제들을 공격하고 다음에 신에게까지 언급하였습니다. 합사(合司)는 온 나라의 공의(公議)로 형제가 홀로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신의 형제가 양사(兩司)에 참여하여 의논한 것도 또한 정원에 있는 신과 같은 자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근거 없는 말을 날조하여 죄목으로 지적하여 불측한 곳으로 같이 몰아넣으려 합니다. 신의 형제가 한두 번 사피하는 말에 대략 줄거리를 진술하였으니 신은 많이 변명할 필요도 없으나, 박중진이 다시 올린 상소문에 이르러서 이른바 대정(大湞) 및 환(喚)이 잇달아 신 등을 사주하였다고 하였으나 방금 죄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니 그의 상소문이 무슨 의도이며, 정과 환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어제 이정원(李挺元)이 올린 상소문을 보니 허환(許喚)은 곧 면천(沔川)의 천한 종이라 합니다. 과연 그 말과 같다면 신이 일찍이 병조 참의로서 내조(內曹)에 들어가 당직하였는데, 지난달 10일 종이 당번을 하지 않았으므로 병조에 잡아들일 때 허환이 스스로 양반으로서 천역(賤役)에 잘못 결정되었다고 말하므로, 신이 ‘네가 비록 천역에 잘못 결정되었으나 그래도 아직 역을 면하지 못하였으므로 전후의 값을 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곧 곤장 30도(度)로 판결하고 가두었습니다. 허환이 신에게 곤장을 맞은 것이 이처럼 중하였으니, 그 처음에 서로 알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박중진이 이미 그 사사로운 사주를 받았다 하고 나중에 그가 곤장을 맞았다는 것을 듣고는 저의 말에 맞추려 해도 되지 않으므로 도리어 노비가 서로 송사할 때 종놈의 말을 들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른바 송사란 사사로운 곳에서가 아니라, 반드시 공공의 장소에서 해야 하는 것으로 밖에 있어서는 모관(某官), 안에서는 모사(某司)가 반드시 이에 당직하는 것입니다. 서로 송사한 것이 그 장소가 있고, 곤장을 맞는 데 그 증거가 있으니, 지휘하고 사주하였다는 말은 또한 헛되고 망령되지 않겠습니까? 눈으로 이 상소문을 보고, 마땅히 해야 할 것은 곧 물러나가 짚자리를 깔고 죄를 내리시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나, 마침 당직하는 곳에 있고, 지위(地位)도 또한 같지 않으므로 감히 마음대로 당직하는 곳을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황공히 죄를 기다립니다.” 하였다.
그 비답에, “죄를 기다릴 것 없다.” 하였다. 유(柳) 등은 중북(中北)이었다.
○ 의주(義州) 사람 은식(殷軾) 등이 올린 상소문의 대강은, “장의범(張懿範) 등의 삼흉(三凶)을 효수하여 변방 장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변방 백성들의 바람을 쾌하게 하기를 청합니다.”라는 것이었다.
○ 7월 가을 윤인(尹認)이 대사헌이 되어 계(啓)를 올려 중북(中北) 유혁(柳湙) 등을 물리치고, 대북(大北)의 여러 간신들을 신구하였다.
○ 신구(新舊)의 출신(出身)으로 60세 이하를 함께 서변으로 가도록 명령하였는데, 본도(本道)의 감병사(監兵使)는 25일 익산에서 호군(犒軍)하였다. 전후의 자목(資木)은 15필이었는데, 항상 8결을 거두어 지급하였다.
○ 오랑캐 사신이 또 와서 무기와 군량을 청하고, 또 황화지(黃花紙) 1천 권을 요구하였다.
○ 안동 진사 김시추(金是樞) 등 2백여 인이 상소하여, 이이첨이 나라를 그르친 간악함을 죄주기를 청하였다.
[첨언] 안동의 선비들은 이이첨을 간신으로 성토한다.
○ 요동 도사(遼東都司) 모문룡(毛文龍)은 성이 함락되는 날 탈주하여 의주(義州)로 건너왔는데, 요민(遼民)을 수습하여 군사 수천 명을 얻어서 진강(鎭江) 구련성(九連城)의 도적들을 습격하니, 누루하치 도적은 분노하고 원한에 사무쳐 본국을 공갈하여 크게 모문룡을 찾게 하였다.
○ 8월 체찰사 이경전(李慶全)은 명을 받들고 남하하여 나주에 이르러 행궁(行宮)의 형세와 남쪽의 군사 일을 살피고, 과(科)를 설치한 후에 영남으로 향하였다.
○ 만포 첨사(滿浦僉使) 정충신(鄭忠信)이 명을 받들고 오랑캐 진중에 갔다가 돌아왔다.
○ 은(銀)을 받고 벼슬을 주며 부역을 마구하고 징계함을 범하여 일이 이에 이르러 배는 심했는데, 궁궐의 무명을 한결같이 베 값에 의거하였고, 삼결목(三結木)ㆍ사결목ㆍ오결목 등 명목(名目)도 또한 많아서 사람들은 살 수가 없어 원망과 호소가 날로 심했는데, 게다가 궁노(宮奴)를 나누어 정하여 혹은 동궁농소(東宮農所)라 하고, 혹은 중전시위농소(中殿侍衛農所)라고 불렀으며, 삼창(三昌)의 대북(大北) 권세가들은 그 둔장(屯莊)이 8도에 널려있어 백성의 밭을 빼앗아 점유하여 간혹 온 읍에 사유지가 없기도 하였다.
○ 10월 안음 진사 유경갑(劉敬甲)ㆍ거창 진사 여후망(呂後望) 등 백여 인이 상소하여, 허환(許喚)ㆍ이창정(李昌庭)ㆍ김시추(金是樞) 등이 어진 사람을 모함한 것을 죄주기를 청하고, 인하여 곧 이이첨의 공덕을 칭송하였다.
[첨언] 안음, 거창의 선비들은 이이첨을 칭송한다. 유학을 공부하는 같은 선비인데도 경상좌도 안동의 선비들은 이이첨을 간신으로 비판하고, 경상우도 안음과 거창의 선비들은 이이첨을 칭송한다. 안동 선비들은 남인이고 경상우도 선비들은 이이첨을 받드는 북인-대북이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중앙 정치를 보는 관점 여하에 따라 시각이 다르다. 다음 해 인조반정은 서인-남인들이 합작하여 북인들을 방축한 정치 혁명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북인들은 28가를 제하고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출사가 막힌 경상우도의 북인들은 남인으로 잠복하여 불만을 키우다가 1628년 이괄의 난으로 폭발하였다. 그러나 실패하여 완전히 반역향으로 찍혀 출사가 차단되었다. 덩달아 경상좌도의 남인들도 노론에게 배척당해 출사에 제한을 받았다. 이괄의 난 이후 영남에서는 낮은 벼슬에만 겨우 들뿐 고관대작 당상관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다.
○ 용천 부사(龍川府使)의 계목(啓目)에 이르기를, “24일 밤에 모장(毛將)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이 내려와 이르기를, ‘서쪽에서 이겼다는 소식이 있다.’ 하여, 환성이 사방에서 일어나, 신이 초탐인(哨探人) 고계공(高繼功)을 불러 상세히 소식을 물어보니, ‘일찍이 요동성에 들어갔는데 웅 노야(熊老爺)께서 계책을 꾸며 서달(西㺚)로 하여금 누루하치의 장수를 꼬여서 데려오도록 하여 백토장(白土場)에 모여 피를 마시고 맹세할 때 웅 노야께서 군사를 놓아 그들을 쳐서 추장의 두 아들이 죽고, 나아가서 사로잡은 자가 거의 수만 명에 이르렀으며, 삼차하(三叉河)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습니다. 이영방(李永芳)은 진짜 오랑캐 3천 명을 거느리고 통원(通遠) 누루하치의 병영에 이르러 요동성은 외롭고 미약하니, 급히 관전(寬奠)과 애양(靉陽) 등의 달자(㺚子) 등을 조발하게 하여 일일이 모았는데, 요동의 진강(鎭江)에는 단지 말을 먹이는 가짜 오랑캐 수천 명만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비답에, “침착하게 마땅히 잘 처리하라.” 하였다.
○ 한준겸(韓浚謙)이 도원수가 되었다.
12월 아래 세 도(道)의 근왕병(勤王兵)을 징집하였는데, 본도는 3천여 명이었다. 15일 감병사(監兵使)가 전주에서 점검하고 떠났는데, 세 도의 군사는 모두 수원에 모였다가 이듬해 2월에 진(陣)을 파하였다.
○ 27일 한준겸은 서울을 떠나 서쪽으로 내려갔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석호 (역) | 1972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