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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eon Bonaparte" 乾, 1769년 8월 15일 "11:34" 前 프랑스 황제
양력 : 1769년 8월 15일 "11:34"
음력 : 1769년 7월 14일
시 일 월 년
庚 甲 壬 己 남자
午 午 申 丑
73 63 53 43 33 23 13 3
甲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1769년(1세) -- 8월 15일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에서 카를로 부오나파르테와 레티치아 라몰리노 사이에 태어남.
1771년(3세) -- 부친 카를로가 지방법원의 판사보좌관에 임명됨, 식민 총독의 비호 받음.
1778년(10세) -- 형 조세프와 같이 섬을 떠나 프랑스 내륙 콜레주 도툉에 입학함. 이 후 브리엔, 파리에서 학교를 다녔다
1785년(17세) -- 2월에 부친 사망.
1785년(17세) -- 9월에 58명 가운데 42등으로 파리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젊은 포병장교를 위한 훈련기관인 라 페르(La Fère) 연대에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1786년(18세) -- 9월에 코르시카로 돌아감.
1788년(20세) -- 6월에 연대에 복귀했는데 그때는 이미 프랑스 혁명의 불안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1789년(21세) -- 입헌군주정을 세우기 위해 모인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가 파올리의 코르시카 귀환을 허용하자 나폴레옹은 코르시카로 가 파올리와 합세했다. 그러나 파올리는 대의명분을 버린 자(부친이 총독의 비호를 받았었음)의 아들에게 전혀 호감을 보이지 않았고 실망한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돌아왔다.
1791년(23세) -- 4월에 발랑스 주둔 제4포병 연대에서 중위로 임명된 뒤 곧바로 자코뱅 클럽(원래 입헌군주정을 지지하는 토론 모임이었음)에 들어갔고 곧 회장이 되었다.
1791년(23세) -- 9월에 3개월의 휴가를 얻어 코르시카 섬으로 돌아가 국민 방위군 중령으로 선출되었으나 곧 최고 사령관인 파올리와 사이가 나빠졌다.
1792년(24세-계축년) -- 1월 코르시카에서 정치판 싸움으로 귀대가 늦어지자 탈영자 목록에 오름, 4월에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하자 사면되어 파리로 감. 나폴레옹은 대위로 진급했으나 연대로 복귀하지 않고 1792년 10월 코르시카로 돌아갔다. 그곳에서는 파올리가 독재권력을 쥐고 코르시카의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나폴레옹은 파올리의 정책에 반대하는 코르시카 자코뱅당에 들어갔다.
1793년(25세-갑인년) -- 4월 코르시카 섬에서 내란을 일으킨 파올리가 부오나파르테(부친 이름) 가문을 탄압하자 나폴레옹의 집안은 모두 프랑스로 달아났다.
1793년(25세-갑인년) -- 6월에 나폴레옹은 니스에 있던 자기 연대로 복귀했다. 이때 그는 〈보케르의 만찬 Souper de Beaucaire〉을 집필하여 자코뱅당과 지난 가을에 왕정을 타도한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를 중심으로 모든 공화주의자가 단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93년(25세-갑인년) -- 8월말에 국민공회의 군대는 마르세유를 함락했으나 툴롱에서 왕당파가 불러들인 영국군에게 저지당했다. 국민공회의 포병사령관이 부상당하자 나폴레옹은 그의 집안과 친분이 있는 코르시카 대표이자 군사위원 앙투안 살리세티 덕택에 그 자리를 차지했고 빠르게 진급했다. 그는 12월 16일에 부상을 입었으나 이튿날에는 영국군을 툴롱에서 몰아냈으며 그 공로로 12월 22일 24세의 나이에 준장으로 진급했다
1794년(26세-을묘년) -- 2월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 파견된 프랑스 포병의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파리에서 로베스피에르가 테르미도르(熱의 달) 9일(1794. 7. 27)에 권력을 빼앗기자 로베스피에르의 앞잡이로 몰린 나폴레옹은 음모와 반역 혐의로 체포당했다. 그는 9월에 풀려났으나 군지휘권은 돌려받지 못했다.
1795년(27세-병진년) -- 3월 방데에서 반혁명군과 싸우고 있던 서부군의 포병을 지휘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그 직책이 아무 장래성이 없다고 여겨 거절했다. 더 나은 자리를 얻으려고 파리로 갔으나 야심이 지나치고 국민공회의 과격파인 '산악당'(Montagnards)과 가깝다고 의심받아 만족스러운 직책을 맡지 못했다.
1795년(27세-병진년) -- 1795년 5월 경 해산을 앞둔 국민공회는 공회 의원의 2/3를 새 입법부 의원에 재선하도록 규정한 법령 및 새로운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왕당파는 법령이 통과되지 못하도록 파리에서 반란을 선동했다. 국민공회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은 폴 드 바라스는 나폴레옹에게 진압책임을 맡겼고 나폴레옹은 방데미에르(포도의 달) 13일(1795. 10. 5) 반란군을 무찔러 국민공회와 공화국을 구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군 국내 사령관이 되었고 그때부터 프랑스의 모든 정치 흐름을 잘 알게 되었으며 새 총재정부에서 군사문제 고문직도 맡았다. 또 두 아이를 둔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장군의 미망인으로, 숱한 염문을 뿌리던 조제핀 타셰 드 라 파제리를 알게 되었다.
1796년(28세-정사년) -- 3월 9일 조제핀과 결혼하고 그가 원했던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4월 12일에 공격을 시작해 오스트리아군과 사르데냐군을 잇달아 격파하면서 토리노로 진격했다. 사르데냐 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요청으로 5월 15일에 파리에서 평화조약을 맺었고, 1792년부터 프랑스에게 점령당해 있던 니스와 사보이(사부아)를 프랑스에 병합시켰다. 오스트리아와는 계속 싸워 밀라노를 점령했으나 만토바에서 더 나가지 못했고 그의 군대가 만토바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 그는 파르마 공(公), 모데나 공, 교황 피우스 6세를 상대로 휴전을 맺었다.
1796년(28세-정사년) -- 10월에는 모데나·에밀리아 지역과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던 교황령 볼로냐·페라라를 병합해 치살피나 공화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군이 철수한 코르시카를 되찾기 위해 원정군을 보냈다.오스트리아군은 만토바를 구하려고 4차례나 공격해왔으나 나폴레옹은 그때마다 물리쳤다.
1797년(29세-무오년) -- 1월 결국 만토바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다음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진격해 빈에서 100km 되는 곳까지 쳐들어가자 오스트리아는 휴전을 요청했다. 오스트리아는 네덜란드 남부를 프랑스에게 넘겨주고 롬바르디아 공화국을 인정한 대신 옛 베네치아 공화국 일부를 넘겨받았다. 이로써 옛 베네치아 공화국은 오스트리아·프랑스·롬바르디아 영토로 나뉘어졌다. 그 뒤 보나파르트는 북이탈리아의 공화국들을 통합·재편했으며 베네치아에서 자코뱅파(급진적인 공화주의파) 활동을 부추겼다. 몇몇 이탈리아 애국자들은 이런 과정들이 곧 프랑스와 같은 통일된 '이탈리아 공화국'을 만들어 주리라 기대했다.
1797년(29세-무오년) -- 보나파르트는 이해 봄 선거에서 왕당파가 거둔 성공에 불안을 느껴, 총재정부에게 무력으로라도 그들을 누르라고 충고했다. 왕당파에 맞서 일으킨 쿠데타(7월)가 실패하자 그는 피에르 오주로 장군을 파리로 보냈고 오주로는 프뤽티도르(열매의 달) 18일(1797. 9. 4)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와 입법부에서 왕당파를 몰아냄으로써 보나파르트의 위신을 크게 높였다. 따라서 보나파르트는 가장 좋은 조건으로 오스트리아와 캄포포르미오 평화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총재정부는 베네치아를 오스트리아에게 넘겨주고도 라인 강 왼쪽 유역을 차지하지 못했으므로 그 조약에 불만을 품었지만, 5년에 걸친 대륙전쟁 끝에 프랑스에게 승리를 안겨준 보나파르트의 인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1798(29세-무오년) -- 원정 전쟁 시작, 6월 10일 모타 점령, 7월 1일에는 알렉산드리아가 원정군 손에 들어왔고 나일 강 삼각주도 곧 함락되었다. 그러나 8월 1일 나일 강 전투에서 호레이쇼 넬슨의 함대에게 완전히 패배함으로써 나폴레옹은 자신이 정복한 땅에 갇히게 되었고, 더구나 9월에는 명목상 이집트의 종주국인 투르크가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다. 투르크의 이집트 침략을 막고 아나톨리아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갈 생각으로 보나파르트는 1799년 2월 시리아로 진격했으나 아크레에서 영국군에게 저지당했고, 5월에는 이집트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1799년(30세-기미년) -- 봄 이탈리아에서도 프랑스군이 패배해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고 패배가 이어지자 프랑스 내에서도 동요가 일어났다. 프레리알(초원의 달) 30일(1799. 6. 18) 쿠데타로 온건파가 실각, 자코뱅파가 집권했다. 상황은 여전히 혼란했고 새 총재 가운데 한 사람인 에마뉘엘 시에예스는 군사독재만이 왕정복고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상황을 알아차린 보나파르트는 공화국을 구하면서 권력도 잡으려는 생각에서, 부하 몇 명만을 데리고 1799년 8월 22일 이집트를 떠나 10월 14일 파리에 도착했다.
1799년(30세-기미년) -- 11월 9일 ~ 10일 사이에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들을 사퇴시키고 입법부를 해산했으며 새로운 통령정부(統領政府)를 수립했다. 통령은 보나파르트를 포함해 사임했던 두 총재 시에예스, 피에르 로제 뒤코 3명이었으나 그 뒤 보나파르트가 정권을 독점했다.
1800년(31세-경신년) -- 그는 지난날의 승리에 비추어 이탈리아를 공격목표로 택했으며 제노바를 포위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했다. 6월에 벌어진 마렝고 전투로 프랑스는 아디제 강까지 이르는 포 강 유역을 장악했고 12월에는 또다른 프랑스 부대가 독일의 오스트리아군과 싸워 이겼다.
1801년(32세-신유년) -- 2월 오스트리아가 뤼네빌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프랑스는 자연국경, 곧 라인 강과 알프스 산맥 그리고 피레네 산맥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제 프랑스와 전쟁을 하는 나라는 영국뿐이었으나 영국도 곧 싸움에 지쳐 평화를 원했다. 1801년 10월 런던에서 예비조약을 맺은 뒤 1802년 3월 27일 아미앵 평화조약을 맺었다
1802년(33세-임술년) -- 유럽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나폴레옹의 위신은 더욱 드높아졌고 8월에는 그를 종신통령으로 삼자는 안건이 국민투표에서 대다수 지지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국제평화에 대한 그의 생각은 영국과 달랐다. 영국에게는 아미앵 조약이 더 물러설 수 없는 종착점이었지만 나폴레옹에게는 프랑스의 새로운 패권을 향한 출발점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관세도 낮추지 않고 유럽의 반을 프랑스 시장으로 삼으려 해 영국 상인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다시 해외팽창을 꾀했는데 반란이 일어나 잃었던 산도밍고를 되찾고, 1800년 스페인에게서 받은 루이지애나를 점령하며 지중해와 인도양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그는 유럽에서도 피에몬테를 프랑스에 병합시켰을 뿐 아니라 스위스 연방에 더 민주적이고 분권화한 통치체제를 강요하는 등 자연국경 너머로 세력을 넓혀갔다. 프랑스의 팽창을 경계한 영국은 프랑스가 제노바에서 안트웨르펜에 이르는 해안을 독차지한 것에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평화가 깨진 직접 계기는 몰타 문제였다. 아미앵 조약에 따르면 프랑스가 물러간 뒤 몰타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아미앵 조약에 따라 원래 주인인 구호기사단(Knights Hospitallers)에게 그 섬을 돌려주어야 했지만 프랑스가 나폴리의 몇몇 항구에서 철수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영국은 몰타를 떠나지 않았다. 두 나라의 관계는 점점 긴장되었다.
1803년(34세-계해년) -- 5월 마침내 영국이 프랑스에 대해 전쟁을 선포. 이 전쟁은 나폴레옹을 황제로 만들어 주었다.
1804년(35세-갑자년) -- 영국이 뒷돈을 댄 왕당파의 암살음모가 1804년에 밝혀지자 보나파르트는 다시는 그런 음모를 꾸미지 못하도록 강력히 대응하기로 했다. 부르봉 가문 출신으로 독일에 살고 있던 앙기앵 공작이 음모의 주범이라고 믿은 경찰은 탈레랑과 경찰총수인 조제프 푸셰의 동의를 얻어 그를 납치하여 총살했다(3. 21)
1804년(35세-갑자년) -- 푸셰는 보나파르트에게 종신통령제를 세습제정으로 바꾸어 암살로 체제를 뒤엎으려는 희망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보나파르트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1804년 5월 28일에 제정을 선포했다. 통치조직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나폴레옹은 황제로서 앙시앵 레짐 때의 것과 비슷한 여러 제도를 만들었다. 우선 그는 위신을 높이기 위해 1804년 12월 2일 교황 피우스 7세가 직접 참석한 가운데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마지막 순간에 황제는 교황에게서 황제관을 건네받아 손수 자기 머리에 썼다. 1804년 나폴레옹 집안 사람들에게 황족(皇族) 칭호를 내렸고 1808년에는 제국의 작위(爵位) 체제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 반발이 있었으므로 선전을 강화하고 언론을 엄격히 검열했다. 그러한 독재체제 덕분에 나폴레옹은 여론에 신경쓰지 않으면서 여러 해 동안 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
1804년(35세-갑자년) -- 스페인은 1804년 12월 영국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프랑스와 스페인 함대는 앤틸리스 제도(諸島)에서 만나 영국 함대 하나를 유인해 쳐부숨으로써 두 진영의 해군력을 비슷하게 만든다는 작전을 세웠다. 해협 입구에서 싸운다면 승리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 작전은 실패했다. 빌뇌브가 프랑스 함대를 이끌고 지중해에서 앤틸리스 제도로 갔을 때 스페인 함대는 오지 못했다.
1805년(36세-을축년) -- 프랑스 함대는 넬슨에게 쫓겨 공격 한번 못한 채 1805년 7월 유럽으로 되돌아가 카디스로 피했고 그곳에서 영국 함대에게 봉쇄당했다. 빌뇌브는 스페인 함대의 도움을 얻어 봉쇄를 뚫으려 했으나 1805년 10월 21일에 트라팔가르 곶 앞바다에서 넬슨의 공격을 받았다. 그 전투에서 넬슨은 목숨을 잃었지만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궤멸시킴으로써 영국은 침략당할 위험에서 벗어나 마음껏 바다를 누빌 수 있었다.
1805년(36세-을축년) --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스웨덴·나폴리로 이루어진 새로운 대(對) 프랑스 동맹 결성에도 성공했다. 트라팔가르 전투가 벌어지기 3개월 전인 1805년 7월 24일에 나폴레옹은 군대를 불로뉴에서 도나우 강으로 옮겼다(따라서 프랑스가 트라팔가르에서 승리했더라도 영국 침략은 이루어질 수 없었음). 트라팔가르 전투 1주일 전 프랑스군이 울름에서 오스트리아를 크게 이겨, 나폴레옹은 11월 13일 빈에 입성했고 12월 2일에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무찔러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이탈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 베네치아와 달마티아를 나폴레옹에게 넘겨주었으며 독일에 있는 광대한 영토를 나폴레옹의 속국인 바이에른·뷔르템베르크·바덴에게 넘겨주었다. 그다음 프랑스는 나폴리 왕국의 부르봉 왕가를 내쫓고 그 왕관을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에게 씌웠다.
1806년(37세-병인년) -- 7월에는 라인 연방(聯邦)을 만들었고 얼마 안가 서부 독일 전체가 프랑스의 보호를 받는 연방 속으로 들어왔다(→ 울름 전투).
1806년(37세-병인년) -- 9월에는 프로이센이 전쟁에 뛰어들었으나 10월 14일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패배했다. 러시아군은 1807년 2월 아일라우에서는 힘겹게 버텼으나 6월 프리틀란트에서 크게 패배했다. 바르샤바에서 나폴레옹은 그가 폴란드를 되살려주리라 기대하던 폴란드 애국자 마리에 발레프스카 백작부인과 사랑에 빠져 아들을 하나 얻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와 싸움을 계속할 수도 있었으나 영국과 맺은 동맹에 지쳤다. 그는 프로이센 북부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틸지트에서 나폴레옹과 만나 프로이센에서 떨어져 나온 폴란드 지방에 바르샤바 대공국(Grand Duchy of Warsaw)을 세운다는 조약을 맺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동유럽은 러시아가, 서유럽은 프랑스가 지배하게 되었다.
1807년(38세-정묘년) -- 나폴레옹의 남동생과 조제핀의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출생한 딸이 결혼하여 낳은 아들(1802년 출생)을 나폴레옹은 양자로 삼았었는데 이 양자가 6세 나이로 사망함.
1808년(39세-무진년) -- 영국에 대한 봉쇄 정책 시작, 나폴레옹은 봉쇄정책에 비협조적인 포르투갈을 쳐부수기로 마음먹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는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지나가도록 허용했고 프랑스군은 리스본을 점령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북부 스페인에 너무 오래 주둔하자 스페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카를로스 4세는 아들 페르난도 7세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는데 나폴레옹은 이를 부르봉 가문 출신의 마지막 군주를 유럽에서 몰아낼 기회로 삼아, 1808년 4월 카를로스와 페르난도 둘 모두 퇴위를 강요하면서 탈레랑의 성(城)에 붙잡아 두었다. 그러나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봉기가 잔혹하게 진압된 뒤에 스페인 전지역으로 반란이 퍼졌으며 스페인 사람들은 나폴리 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새 국왕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1809년(40세-기사년) -- 초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반란을 거의 진압했으며, 그뒤 4월에는 바이에른을 공격하기 시작한 오스트리아를 또다시 패배시켰고(7. 6), 쇤브룬 조약(1809. 10. 14)으로 일리리아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대륙봉쇄 체제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었다.
1810년(41세-경오년) --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실패했지만 나폴레옹의 운세는 1810년 절정에 올라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샤를마뉴의 후계자로 생각했으며 아이를 낳지 못한 조제핀을 버리고 1810년 4월 2일에 오스트리아 황제의 딸 마리 루이즈(당시 20세)와 결혼했다.
1811년(42세-신미년) -- 3월 새 황후인 마리 루이즈가 아들을 생산함.
1812년(43세-임신년) -- 에어푸르트 회합(1808. 9~10) 뒤부터 러시아 황제는 나폴레옹에게 점점 더 믿지 못할 태도를 보였고 나폴레옹은 그를 위협하기 위해 1812년 봄 폴란드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마지막 협상이 실패한 뒤 6월 말에 그의 대군(Grande Armée), 즉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군에서 빼내온 부대를 포함해 총 45만 3,000명 가량의 병력은 니멘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1812년(43세-임신년) -- 8월에 러시아의 스몰렌스크로 진입함, 이탈병력이 많아 병력이 15만 명으로 감소됨, 9월 5일에 브로니노 전투에서 러시아 군대 격파, 9월 15일에 초토화된 모스코바에 입성, 10월 19일에 추위와 기근으로 10만 병력이 모스코바에서 철수 시작함, 11월 9일 스몰렌스크로 퇴각함, 병력 3만 7천명으로 감소됨, 12월 18일 파리로 돌아옴.
1813년(44세-계유년) -- 5월 다시 20만 병력을 모아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연합군을 격파함. 그러나 10월 16일~18일 사이에 벌어진 라이프찌히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선이 프랑스 국내가 됨.
1814년(45세-갑술년) -- 5만의 병력으로 23만 명의 연합군을 상대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2일 만에 파리가 함락됨. 4월 2일에 프랑스 원로원은 나폴레옹 황제의 폐위를 결정함. 4얼 6일에 루이 18세 즉위 결의, 4월 20일에 나폴레옹 엘바섬으로 귀양감, 5월 3일에 3천명이 사는 엘바섬의 군주로 섬에 도착함. 이해 여름에 조제핀이 자살함, 황후 마리아 루이즈는 아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후에 젊은 남자와 살았음.
1815년(46세-을해년) -- 2월 16일에 엘바섬을 탈출함, 3월 1일에 칸느 근처 쥐앙만에 도착함, 3월 19일에 루이 18세 파리를 탈출함, 3월 20일에 나폴레옹 파리 입성함, 6월 1일에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고 나폴레옹은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름, 6월 14일부터 19일까지 워터루 전투에서 유럽 연합군에게 패함. 7월 8일에 루이 18세 다시 왕위에 오름, 7월 15일에 나폴레옹은 영국 군함에 승선하여 항복함. 영국은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보내기로 결정함, 9월에 헬레나 섬에 도착,
1817년(48세-정축년) -- 위암 증세 보임.
1821년(53세-신사년) -- 5월 5일에 53세의 일기로 섬에서 위암으로 사망함.

첫댓글 묘대운에 토를 극하니... 위암으로 사망함.... 기사대운도 정재/식신대운으로 재가 강해지는 대운이므로 발복이 시작됨.
출생시 출처: 가족/모친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