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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뎀나무 탈출기(왕상19:1-8)-2013.7.21
영국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조지 버나드쇼는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절망감이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 하나는 무슨 일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찾아오는 절망감이요, 또 하나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성취된 이후에 찾아오는 절망감이라는 것입니다. 즉, 돈도 벌어보고 원하는 명예와 권세를 다 가져 봐도 만족함이 없고 공허함 때문에 절망감이 온다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최고의 정상에 올라 보았지만 허탈감에 빠지고 극도의 상실감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솔로몬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이처럼 모든 것을 성취한 이후에 찾아오는 상실감을 듀크 대학의 정신분석학 교수 월리엄 넬스 박사의 말을 빌어 설명하면 “알렉산더 콤플렉스”라고 부릅니다. 그가 유명한 논문을 썼습니다. 옛날 알렉산더 대왕이가 세계를 다 정복하고 나서 큰 소리로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의 참모가 “대왕님, 왜 우십니까?”라고 물으니 “이제는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 허전해서 운다”고 대답했답니다. 그래서 넬스 박사는 알렉산더와 같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느끼는 공허감을 가리켜 ‘알렉산더 콤플렉스’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그런데 넬슨 박사는 이 논문을 쓰면서 자신이 알렉산더 콤플렉스의 주인공임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도 자기만의 컴플렉스에 붙잡힌 것으로 보입니다. 이른바 "엘리야 컴플렉스" 말입니다.
이래서 인간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요, 모순덩어리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못 살아도 절망하고, 잘 살아도 절망합니다. 사실 인간이 만물 중에서 가장 강한 것 같지만 약하고, 약한 것 같지만 강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건강을 자랑하던 사람도 의사의 부정적인 말 한마디에 주눅이 들고 금방 낙심합니다. 천하를 지배하며 거침없는 인생을 살던 자도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 하나 이겨내지 못하고 무력하게 죽습니다. 때로는 그토록 강한 사람도 낙심하고 심각한 절망감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영적 침체는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영적 침체를 경험했던 사례가 있습니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심각한 영적 침체를 경험했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소리에 극도의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민11:15). 심각한 영적침체의 경험입니다. 또한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동족을 향해 예언하던 선지자 예레미야는 제사장 바스훌이 자기를 때리고 착고에 채우자 극도의 정신적인 압박을 당합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을 저주합니다. 차라리 자기 어미가 자기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다면 좋았으리라고 투정합니다(렘20:14).
오늘 엘리야의 절망감도 심각한 수준입니다. 급기야는 우울증으로 발전했고 자살충동까지 느꼈습니다. 영적 탈진상태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에 붙들려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한손으로 때려잡았던 전설적인 영웅입니다. 그랬던 영웅이 하루 아침에 초라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전락했습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실패자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더 이상 그에게서 갈멜산 전투의 용맹스러운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어떤 믿음과 용기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한 시대의 전설적인 영웅이 왜 이토록 하루 아침에 패배자같이 된 것일까요? 성공 뒤에 찾아오는 상실감 때문입니다. 그는 바알 선지자들을 초토화시킨 후에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알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나면 영적 혁명이 일어날 줄로 알았을 것입니다. 아마 아합왕도 자기를 무서워서 벌벌 떨 것이며, 이세벨은 아예 죽은 듯이 살아갈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영적 개혁이 일어날 것이며, 사람들은 자기를 믿음의 영웅같은 존재로 여길 거라는 착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아니었습니다. 엘리야는 실망했습니다. 극도의 상실감에 빠졌습니다. 사역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얼 하시는 분이신가라는 의구심 말입니다. 갈멜산의 승리를 통해 뭔가 대단한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했던 엘리야의 실망감은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바알신을 수입해온 바알 숭배의 원흉 이세벨은 더욱 기세등등하여 자기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자 엘리야는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에 빠진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졌습니다. 사역에 대한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을 친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도 큰 소리 칠 수 없습니다. 비록 영웅호걸 열사라고 할지라도 한순간에 찾아오는 절망감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입니다(약5:17). 한때 링컨 대통령도 극심한 절망감에 빠져서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느꼈다고 합니다. 심지어 링컨 대통령 주변 사람들이 면도칼 같은 위험한 도구를 치워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절망감이나 상실감을 치유하지 못하면 우울증이 됩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현대인들에게 우울증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우울증은 정말 무서운 병입니다. 삶을 포기하도록 충동질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합니다. 절망은 마귀가 주는 영혼의 악성 바이러스입니다. 절망은 내 영혼의 어두운 밤과 같고, 컴컴한 동굴과 같으며, 앙상한 겨울나무와 같습니다. 때문에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가장 무서운 병이라고 말합니다. 절망은 성도의 믿음을 방해하는 무서운 적입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침체가 나에게도 찾아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치유해야 합니다. 우리는 엘리야가 어떻게해서 이런 컴플렉스에 붙잡혔는가를 분석해보고, 어떻게하면 엘리야 컴플렉스에서 벗어나는지를 알아보기 원합니다. 이른바 로뎀나무 탈출기입니다.
(1) 원인을 분석해야 합니다(원인/3절)
모든 문제는 원인이 있습니다. 영적침체도 원인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원인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기분이나 감정 때문에 침체당하고, 어떤 이는 매끄럽지 못한 인간관계 때문에 침체를 당하며, 어떤 이는 일이나 소유에 의해 침체되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침체의 원인이 다릅니다. 소유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는 없는데, 사람들로부터는 쉽게 상처를 받고 스트레스를 받는 자가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하여 상처받는 경우가 드문데, 소유에 약하여 상처나 스트레스를 쉽게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가 절망에 빠진 원인은 무엇일까요? 3절을 보십시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이것이 엘리야가 상처를 받고 절망한 증거입니다. 당시 형편이 어떠했길래 그는 이런 상처를 받았을까요? 엘리야가 사역하던 당시 아합왕의 종교적인 탄압과 우상숭배는 극에 달했습니다. 하나님의 종교가 가장 악랄하게 탄압을 받던 시대였습니다. 이세벨이 시집오면서 수입해온 바알종교를 국교로 삼고 포교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한 때입니다. 그러니까 이세벨은 바알종교의 선교사였던 셈입니다.
그래도 엘리야는 아합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사명을 감당한 선지자입니다. 갈멜산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엘리야는 정말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무척 대단한 일을 한 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영적 포만감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바알종교는 사라질 줄로 알았을 것입니다. 비록 원수들이 있더라도 종이호랑이가 된 줄로 착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착각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이든지 사단을 완전히 박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시기 전까지는 사단도 결코 굴복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주님 재림이 가까울수록 오히려 극성을 부릴 것입니다. 최후 발악을 할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 전투이래로 사단의 역사가 완전히 끝날 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아니 최소한 자기 땅에서 바알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질 줄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바알을 수입하여 자기 땅에 퍼트린 장본인 이세벨의 난동이 더욱 악랄해졌습니다. 아예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그것도 내일 이맘때까지라고 최후통첩을 합니다. 자기가 믿는 바알신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합니다. 그럴지라도 엘리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겁내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이 거기서 거기인 것 같습니다. 엘리야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기대감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자신에 대한 기대감이 있습니다. 이른바 자신을 과대포장하는 기대감도 있고, 자기를 과소평가하는 기대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감이 무너지면 낙심합니다. 엘리야 같은 경우는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말한 것을 보십시오. 자신의 열심이 특심했다고 말하며, 오직 자신만 용맹스럽게 남아 있다고 증언합니다(10,14절). 아닙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입 맞추지 아니한 자가 칠천명이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착각도 유분수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으로 인하여 천지가 개벽될 줄로 여겼을 것입니다. 영적 혁명이 일어날 줄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지금 무얼 하고 계십니까?라는 의구심만 증폭됩니다. 드디어 그는 자기 연민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조적인 불만을 하나님께 토해낸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상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무척 섭섭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시위를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지자의 옷을 벗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라도 엘리야처럼 당시 형편을 영적으로 보지 못하면 착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형편이든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보면 상황이 더 악화됩니다. 오히려 더 꼬입니다. 어떤 형편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만의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인간의 시각은 항상 부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자기한계 상황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상황을 초월하시는 전능자십니다. 모세는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12지파의 대표자를 선발하여 가나안땅을 정탐케 합니다. 그런데 12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습니다. 열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두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열명의 정탐꾼은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았고, 두명의 정탐꾼은 하나님을 통해서 환경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났습니다.
엘리야도 당시의 형편을 자기 눈으로만 본 것입니다. 그 형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누구나 쉽게 범하는 죄악입니다. 우리도 그저 눈앞에 보이는 현상만 가지고 낙심하고 두려워하고 절망합니다. 특히 영웅주의자들이나 완벽주의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증상들입니다. 영적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서도 쉽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심각한 절망감에 빠져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인생의 실패자입니다. 제가 생각한 것의 절반도 성취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살맛이 안납니다”. 목사님은 젊은이의 말을 한참 듣더니 “이봐 젊은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보게. 뉴욕타임즈지 1970년판 년감의 930페이지를 보고 다시 오게나” 말합니다. 그길로 젊은이는 도서관을 찾아 년감을 열람했더니 거기에는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야구선수 타이콥의 이름과 함께 연간 타율이 3할6푼7리라고 기록되어 있더랍니다.
젊은이가 목사님을 다시 찾아와 말씀을 드렸더니 목사님이 말하더랍니다. “바로 그거라네 젊은이, 그처럼 훌륭한 야구선수도 세 번 타석에 등장하여 한번밖에 안타를 때리지 못했다는 걸세”. 그렇습니다. 전설적인 미국 야구의 홈런타자 베이브 루스는 통상 714개의 홈런을 쳤지만, 홈런의 두 배가 넘는 1330개의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했던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그러므로 절대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지나치게 과소평가하지 말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가시적인 형편만 보면 실망합니다.
(2) 로뎀나무 그늘에서 나오십시오(처방/4-7절)
원인이 밝혀지면 처방이 나옵니다. 엘리야의 침체원인이 밝혀졌습니다. 엘리야는 눈앞에 펼쳐진 형편만 보고 브엘세바로 도망을 친 것입니다. 브엘세바는 팔레스틴의 최남단 지역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이스라엘의 경계를 말할 때 북쪽 단에서 남쪽 브엘세바까지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사환을 데리고 브엘세바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광야길로 하루정도 더 들어갔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말입니다. 광야는 뱀과 전갈이 있고,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닙니다. 아예 죽을 작정을 하고 들어간 것입니다.
한마디로 더 이상 세상을 살 자신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섭섭한 마음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넋두리를 한 것입니다(4절). 자신은 살 만큼 살았고, 지금 죽어도 억울하지 않으며, 자기 조상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어서 더 이상 살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진짜 겸손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에 대해 반항적인 투정을 한 것입니다.
그곳에는 로뎀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는 뜨거운 광야 햇빛을 피하기 위하여 로뎀나무 그늘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잠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진짜 죽을 사람은 거기까지 안갑니다. 또 진짜 죽으려는 사람이 잠이 옵니까? 로뎀나무는 엘리야에게 좋은 안식처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왜냐면 로뎀나무는 3-4미터 크기의 광야의 관목으로서 나그네들에게 일시적인 그늘이 되기는 충분한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주 잠간입니다.
로뎀나무는 엘리야의 절망감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나무가 아닙니다. 엘리야의 상처입은 영혼을 쉬게 할 수 있는 안식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저 잠간의 도피처는 될지 모르지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습니다. 마치 요나가 하나님의 눈을 피해 도망치던 다시스의 배에 불과합니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장소밖에 안됩니다. 더 이상 엘리야가 머물 장소가 아닙니다. 그곳에서 충동적인 삶의 회의와 절망감만 쌓여갈 뿐입니다. 오히려 우울증만 쌓여갈 뿐입니다.
지금 당장 로뎀나무 밑에서 나와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도피 할 로뎀나무를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한적한 로뎀나무를 그리워합니다. 가끔씩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떠난다고 해결됩니까? 문제를 가지고 아무리 로뎀나무 그늘을 찾을지라도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합니다. 내 인생의 로뎀나무는 어디 있을까요? 아니 내 인생의 로뎀나무는 무엇일까요? 더 이상 그곳에서 궁상, 망상, 허상 떨지 말고 나오십시오. 오직 그 길만이 당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3)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가십시오(치유/8절)
당신이 문제와 상황을 핑게삼아 로뎀나무 밑에서 누워있는 이상 당신은 절대로 당신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없습니다. 로뎀나무 밑에서 상처받은 당신의 영혼은 치유받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영적인 기력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어떤 영적 침체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언약하신 사명의 장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곳에 가면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치유가 있습니다. 회복이 있습니다.
로뎀나무 그늘에서 나온 당신이 가야 할 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현장입니다. 그곳이 바로 호렙산입니다. 호렙산은 하나님의 정기가 서린 곳입니다. 그곳에 가야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으며, 회복을 받습니다. 로뎀나무 밑에 있던 엘리야는 걸어가기조차 힘들 정도로 탈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일어나 가야 합니다. 당장 사역의 현장이 아니라 충전 시킬 수 있는 장소로 말입니다. 그곳이 바로 호렙산입니다. 그곳에 가면 당신의 영혼이 새 힘을 얻고, 새로운 능력을 갖게 됩니다. 새 힘을 얻지 못한채 사역의 현장에 바로 투입되면 또 다른 침체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방전된 받데리는 다시 충전을 해야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엘리야에게 육신적인 탈진은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이 주신 떡과 물을 통해 충전되었지만, 영적 회복이 된 것은 아닙니다. 로뎀나무 밑에서 나와야 영적 충전이 가능합니다. 실망과 낙심, 좌절의 자리에서 나와야 합니다. 더 이상 로뎀나무 밑에 머무르면 안됩니다. 우물쭈물 하면 안됩니다. 지체없이 나와야 합니다. 로뎀나무 밑에서 나오는 결단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입니다. 로뎀나무는 사역자가 머물 장소가 아닙니다. 로뎀나무는 당신을 얽어매는 동굴입니다. 지금 절망의 자리에서 나와야 합니다. 죄와 불법과 안일과 나태의 자리에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육신을 간신히 추스린 엘리야가 영혼의 위로자를 찾아 나섭니다. 40일동안 주야로 걸어서 도착한 곳이 호렙산입니다. 호렙산은 하나님의 산입니다. 하나님은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아니하시지만 호렙산은 사명을 재확인 할 수 있는 산입니다. 상징적인 의미가 훨씬 더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로뎀나무에서 탈출하여 가야 할 장소는 하나님의 집, 교회가 최적의 장소입니다. 교회는 세상 어떤 장소보다 하나님을 만나기에 가장 좋은 곳입니다.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말씀과 사명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최고의 장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우리중에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절망중에 낙심된 자 없습니까? 주변 환경만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절대 로뎀나무 밑에 들어가서 절망하지 마십시다. 삶을 힘겹다고 포기하지 마십시다. 지금 나오십시오. 그리고 호렙산으로 들어가십시오. 그 길만이 내 영혼이 소생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고, 새 힘을 얻으시며, 사명의 현장으로 용기있게 나아가십시다. 지금 지치고 힘드십니까? 절대 낙심치 말고 오직 여호와를 앙망함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2013.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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