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諛者不忠(선유자불충), 好諫者不偝(호간자불배)
지금부터 약 200년 전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 용인편(用人篇)에서 “아첨 잘하는 사람은 충성스럽지 못하고(善諛者不忠), 간(諫)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배반하지 않는다.(好諫者不偝) 이 점을 잘 살피면 실수하는 일이 적을 것이다. (察乎此 則鮮有失矣)”라고 설파하였다.
경기도 능내리에는 다산(茶山) 정약용의 생가에 당호(堂號) ‘여유당 (與猶堂)’있다. 여유(與猶)란 성급하게 굴지 않고 사리판단을 너그럽게 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여유의 뜻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도인(道人)의 풍모를 갖추지 않으면 감히 쓸 수 없는 말이다.
다산 정약용 여유당의 세 가지 좌우명은 첫째 '동트기 전 일어나라' 둘째 '글쓰기를 좋아하라' 셋째 '차(茶)를 즐겨 마셔라‘이다.
그리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외침(外侵)이 아니라 공직자의 부정부패(不正腐敗)가 민심(民心)을 이반(離反)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중국 제나라 때 환공은 의자 오른쪽엔 항상 술독 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그 술독은 텅 비어있을 때는 기울어져 있다가 술을 반쯤 담으면 바로 서지만, 술을 가득 채우면 다시 엎어지는 술독이었다.
환공은 술이 가득 찰 때의 술독을 보며 자기 스스로를 가다듬고 경계하며 살았다고 한다.
겸손한 사람은 반쯤 담긴 술독처럼 부족한듯하지만 바로 세우는 인생이 될 것이다. 孔子도 환공의 술독(좌우명) 을 보고서 자기 스스로를 가다듬기 위하여 자신의 의자 오른쪽에 술독을 두었다고 한다.
사람은 먹는 나이는 막을 수 없고,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없으며, 뜻은 세월과 더불어 사라져 간다.
그러니 사람은 채우기만 하면서 살 게 아니라 조금씩 비우면서 살아야 하며, 언제 어디서나 여유롭게 지낼 수 있어야 한다. 이 여유(與猶)가 바로 다산의 마음이다. 마음 비우기의 첫 번째 조건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내려놓음은 포기가 아니고, 최선을 다하고 마음을 비웠을 때 행운이 따른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슬럼프도 없다.
어느 시인은 집착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함을 “기슭에 닿으려면 배를 버려야 한다”는 말로 표현했다.
두 번째는 부정적인 자기 연민에서 벗어야 한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겠어’가 아니고 내 마음 내가 안 뒤에야 마음을 내려 놓을 수 있다. 나도 잘하는 일이 있고, 잘 되는 일이 있고, 꽤나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느낄 때 비로소 자기 연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세 번째는 혼자 끙끙 앓을 것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가족이든 직장 동료든 친구이든 간에 털어놓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나와 상대의 마음을 나누면 좋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라면은 ‘함께라면’이라고 한다.
노자(老子)의 허(虛)사상, 석가모니의 방하착(放下着), 예수의 케노시스(Kenosis)는 서로 다른 단어이지만 ‘비움’을 말했다. 방하착(放下着)이란 이 세상 모든 것이 본래 공(空)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내 것’에 ‘집착’하는 마음, 아집을 내려 놓으라는 것이다. 케노시스(Kenosis)는 그리스어로 ‘비움’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가 자신을 비우고 ‘아무런 명성 없는 존재’로 만든 것을 의미한다. 나도 오늘 따라 나승빈의 ‘비움의 미학’이라는 시(詩를) 한번 적어보고 싶다.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 무엇을 채워갈 때가 아니라 비워갈 때이다. 사람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 무엇이건 다 비워 놓고 채우지 않은 때이다. 사람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 무엇이나 다 비워 놓고도 마음이 평화로울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