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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 오산면에 위치한 남전교회는 익산 최초로 1897년 전킨 선교사(W.M.Junkin)의 헌신으로 설립이 되었으며, 2대 불(W. F. Bull) 선교사 3대 해리슨(W.B. Harrison) 선교사가 담임목사로 교회의 기초를 놓았고 박연세 목사(목포양동교회 시무) 등 많은 애국지사와 목회자가 배출하였다. 남전교회는 1919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일본 경찰의 칼에 현장에서 순국하여 문용기 열사, 박영문 열사, 장경춘 열사(殉國烈士는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해 싸우다 죽은 사람을 뜻한다)가 하나님 나라에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1919년 4월 4일 솜리(현 익산시) 장날에, 식량 수탈의 거점인 대교농장(현 남부시장) 창고 앞에서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최대진 목사, 문용기 등 여러 성도와 남전교회에서 운영하던 도남학교 학생 등 200여 명이 시작했으며, 시민들이 합류하여 1천여 명이 모인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흰 두루마리를 입은 문용기 열사는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문용기 열사는 익산시 오산면 태생으로 한문을 공부하여 마을에서 훈장이 되었고, 남전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중 24세에 선교사의 권면으로 군산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했으나 워낙 출중하여 한문 교사를 겸하였다. 1908년 30세에는 목포영흥학교에 입학하여 또한 한문교사를 겸했다. 그는 영흥학교에서 영어실력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다 이 시기에 이승만 박사와 뜻을 같이했다. 이승만 박사가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YMCA를 통해 전국을 순회하며 계몽강연을 할 때 목포에서는 주제 강연을 이승만 박사가, 찬조강연을 문용기 선생이 맡았는데 청중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1911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함경도 갑산 미국인 광산에 통역사로 취직하고 지역에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3.1운동이 벌어지자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중 41세 나이로 순국했다.
일본군은 시위 군중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고 곤봉과 갈고리로 무장한 수백 명의 소방대원과 농장원들까지 시위 군중들에게 닥치는 대로 폭행했다. 이때 문용기 신도는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문용기의 오른팔을 내려치니 팔과 함께 들고 있던 태극기도 땅에 떨어졌다. 문용기는 분연히 일어나 남은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다시 전진했다. 헌병은 남은 왼팔마저 베어버렸다. 문용기 성도는 두 팔을 잃었지만 계속 만세를 외쳤고 일본 헌병은 온몸을 사정없이 칼질하여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는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과정에서 문용기 등 6인이 그들의 칼에 쓰러졌고 수십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39명이 구속되었다. 1919년 전주지역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던 부위렴(Bull) 선교사는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보고서에서 남전교회의 교인들의 4.4 만세운동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현재 오산면 소재지에는 문용기 열사의 순국열사기념비, 익산역 광장에는 ‘삼일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1949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친필로 ‘순국선열비’ 비문을 써서 만세운동의 현장이었던 남부시장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문용기 열사에게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됐다. 유족으로는 손자 문성도 목사(미국)가 있다. 익산시는 3.1절 즈음에 4.4 만세운동 재현행사를 열고 있다. 정의를 실천하는 의인을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 문용기 성도의 나라 사랑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본받고 따라가야 할 발자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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