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기다리던 “다시 유학의 의미를 묻다”라는 책자가 마침내 한국으로부터 어제 도착해 설레는 마음으로 한 번
쭉 훓어 보았다.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의 글들도 책에 실려 있었고, 눈에 익숙한 유품들도 간혹 눈에 띄어 전체적으로 그렇게 낯설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알고 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다시 유학의 의미를 묻다”라는 책자는 안동 소호문중,
특히 목은선조님의 14대손 되시는 휘 상정 대산 할아버지와 그 학맥을 재조명하는
차원에서, 지난 2011년 대산선생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여 열렸던 학술발표회
행사때에 발간된 전시도록이다.
대산종가와 소호문중에서 관리하기 힘든 유물
6,000여점을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하는데 그 중 55점이 엄선되어 지난 2011년 학술발표회 때 일반인들에게 소개 되었다 한다. 개중엔 목은영정 (사본품), 소호문중 가족들간에 주고 받았던 간찰, 대산선생일기, 류씨남매 상속관련 화회분기, 호패 등등 종류도 다양했다.
대산선생 혼서: 대산선생 혼인때에 부친인 휘 태화께서 보낸 혼서이다
이중환의 택리지발문에서 다산 정약용도 인정하였듯이, 소호문중에서 “현조”로 모셔지며 크게 추앙받고 있는 분이 대산 할아버지신데, 대산 할아버지의 그늘에 들어 간 우리 후손들은 큰 자부심을
갖는다. 나는 엄밀히 따지면 방계 8대손이니 나의 8대조부되신 휘 경정 할아버지께서는 대산 할아버지의 두 살 연상 사촌형이 되셨던 것이다. 그렇게 몇대를 내려오다가 나의 증조부님이 되시는 휘 대규 할아버지께서 대산 할아버지 가계에 양자로 가시는 바람에 직계
8대손도 되 버렸다.
대산 할아버지 뿐 아니라 휘 광정 소산 할아버지, 휘 현정 할아버지, 휘 사정 할아버지, 휘 택정 할아버지, 휘 완 할아버지, 휘 우 할아버지, 휘 병운 할아버지, 휘 병원 할아버지, 휘 수응 할아버지, 휘 돈우 할아버지, 휘 돈욱 할아버지 등등의 문명이 높은 선조님들이 계셨으니, 벼슬아치보다는 훌륭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된 가계가 바로 소호문중이다. 안동 입향이 타 문중들에 비해 보통 150-200년 정도 뒤졌던 소호문중이 “양반의 고장” 안동에서 다른 이름난 안동 명문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데는 대산 할아버지의
힘이 크셨다. 그렇게 대산 할아버지는 소호문중을 다른 수준으로 영구히 끌어 올리셨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대만-일본을 비롯한 동양국가들 뿐만 아니라 미국과 독일같은 서구 선진국가에서도 퇴계 이황 선생의
성리학 공부가 한창인것은, 대산 할아버지의
힘이 크다. “소퇴계”라 일컬어졌던 대산 할아버지는 퇴계 선생이후 영남이 배출한 최고의 학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선생의 274명이나 되었던 제자들은 대산 할아버지가 퇴계 선생과 흡사한 수준에 까지 이르렀다고까지 믿었다.
외손으로 계승되는 학맥가계도 또한 흥미로운데, 대산 할아버지는 본인의 외조부 밀암 이재를 사사하여 퇴계 이황에서 학봉 김성일로 내려가는 호계 학문을 계승하였고, 정재 류치명 선생 또한 외증조부되는 대산 할아버지의 학맥을 계승하였던 큰 학자였던 것이다.
대산 할아버지가 퇴계의 성리학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완성단계로 끌어 올리지 않았더라면,
과연 오늘날 퇴계선생과 성리학에 관한 연구가 타국가들에서 이처럼 활발할
수 있을 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만큼 대산 할아버지가 이룩한 학문적 성과는 대단하다. 그 분은 조선후기 유학의 “큰” 별이며 대종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산 할아버지에 관한 그간 연구 성과및 학술논문 발표는 현재까지 전병철의 "대산 이상정 성리설의 회통적 성격" (경상대 대학원, 2007 ) 주제의 박사논문 한 편 및 전성건의 "대산 이상정의 심성론에 대한 연구 (고려대 대학원, 2004), 이지양의 "강좌 권만과 대산 이상정의 문학 논쟁 : 18세기 영남의 문풍 속에서의 그 의미" (성균관대 대학원, 1992),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정동의 "대산 이상정 시의 유형적 성격과 도학시적 양상" (경산대 대학원, 2002) 이란 주제들의 석사논문 세 편에만 그친다. 대산 할아버지가 이룩한 학문적 성과에 비하면 후세의 대산 할아버지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너무도 미미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2009년도를 기준으로 볼때 퇴계 선생에 관한 박사논문은 57편이나 나왔었고, 석사논문은 무려 220편이나 되었다. 퇴계 선생 석-박사 논문 277편이고 대산 할아버지 석-박사 논문 도합 4개이다. 아무리 대산 할아버지께서 퇴계 이황을 감히 따라 갈 수 없었던 부족한 제자였었다 치더라도 퇴계선생의 적통을 이은 대학자 이셨는데, 이것은 지나치게 편파적으로만 느껴진다. 업적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과하게 선조를 치켜세우는 것은 잘못이지만, 대산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업적에 비해 후세 사람들이 너무 무관심 한 것 같다. 왜 이리 대산 할아버지에 관한 학술적 연구가 후세에 활발하지 못한 까닭일까?
이는 현 학자들이 쾌쾌 오래묵은 어려운 한자 내용의 고문서를
번역하는 일에 기피하는 현상에도 기인하지만, 조선후기 200여년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영남 남인세력 가계의 후손이셨던 대산 할아버지의 정치적
배경에도 그 이유가 좀 있다고 생각한다.
대산 할아버지의 외증조부되신 분이 남인의 거두로 이조판서를 역임했던 갈암 이현일인데, 갈암선생은 말년에 실각하여 귀향살이도 하였다. 또한 사후에 다른 당파들로부터 계속 정치적 공격을 받아 선생에 대한 추증과 삭탈이 여러번 되풀이 되기도 하였다. 갈암선생이 외증조부된다는 이유때문에 대산 할아버지의 관료생활도 편안하지 못했었다. 물론 이것은 대산 할아버지께서 오로지 학문에 정진 할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여하튼 영남지역에서 그렇게 존경받으며 위상이 대단하셨던 대산 할아버지의 전국구 지명도는 절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후손된 우리들이 어쩜 영락된 처지에 이르러 선조의 업적을 제대로 후세에 못 전하고 있는데에도 그 이유가 있는지는 않겠나 하는 생각마저도 든다. 대산 할아버지는 정치적 이유로 계속 밀리다가 사후 101년의 세월이 흐른 1882년에 처음 이조참판직에 추증되고 얼마후 이조판서직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사후 129년의 세월이 지나 조선왕조가 망한 1910년 그것도 조선이 망했던 8월에야 기적적으로 "문경"이란 시호를 받을 수 있었다. 한 달만 더 늦춰졌더라도 대산 할아버지는 문경이란 시호를 결코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하튼 2011년 학술발표회는 성공적으로 치뤄졌다고 하니 기쁜 일이고, 그를 구심점으로 삼아 한산이문의 큰
학자이셨던 대산 할아버지 및 대산학단에 관한 연구가 앞으로는 더 활발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대산 할아버지는 소호문중뿐만 아니라 모든 한산이문 후손들이 크게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훌륭한 분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