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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용(金敎容) : 1918-2014, 예천읍 노상리 출신, 본관은 경주, 호는 송원(松園), 벽천 석희(碧泉碩熙)의 장자, 예천공립보통학교(醴泉公立普通學校), 김천고등보통학교(金泉高等普通學校, 1回), 보성전문(普成專門, 現 高麗大) 법률 전공, 일본명치대(明治大) 법학부 졸업, 45년 경북도속 예천군청(慶北道屬醴泉郡廳) 근무, 49년 대창중(大昌中) 교사, 50년 동 교장, 53년 대창고 설립 중고 겸임 교장(1953-1996), 97년 학교법인 대창학원 이사장(學校法人大昌學園理事長, 現)이다. 경북교육대상(慶北敎育大賞, 1982), 국민훈장 목련장(國民勳章木蓮章)을 받았다. 저서는 <송원수상록(松園隨想錄)>이 있다. 귀공자 타입으로 청백하고 강직하고, 언제나 합리주의(合理主義)를 기조로 하는 실천적인 교육가이고, 민족적 양심으로 민족 장래의 회생은 후진의 얼과 의기(義氣)와 지식의 교육에 있음을 절감하고 초지일관(初志一貫) 뜻을 오로지 교육 구국에 두고 자기의 신념을 고스란히 바쳐온 애국애족 정신이 투철하다. 학원(學園) 운영에서도 의론과 타협을 본지(本旨)로 하였다. [李泰權의 松園頌] : 성실과 그 부지런함/ 강한 의지 자본으로/ 향토 예천 교육의 전당/ 송대학원(松臺學園) 터전 담아/ 상기도/ 님의 가슴은/ 젊은 맥박 뛰누나/ 오손도손 가족들과/ 송대 가족 삼천여 명/ 엊그제 심은 씨앗/ 어느덧 열매 주렁/ 비바람/ 가시밭길이/ 님에겐 없었을손가/ 불같은 그 정열을 / 뉘라서 따를 손가/ 펼치소서 님의 꿈을/ 방방곡곡 꽃 피소서/ 육영의/ 선봉장되어/ 비상(飛翔)하리 송대학원/ 주소는 예천읍 노하리 62-1번지이다.(韓國人士大鑑, 大韓敎育人士大鑑, 慶北大觀 1958, 每日年鑑 1984, 光復40年史, 醴泉文學 3輯(1991) 6輯(1992), 韓國을 움직이는 人物들1997)
김교용(金敎容) : 1918- , 예천읍 노하동 출신으로 대창중고등학교의 교장이다. 대창학원은 건실한 사학(私學) 재단으로서 경북 북부 일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음이 사실이다. 동교(同校)는 규모로나 전통으로나 사학(私學)으로서 손색이 없는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거니와 역시 동교의 오늘의 발전을 가져온 뒤에는 창립자인 씨(氏)의 선친(先親) 김석희(金碩熙) 선생의 노고와 1950년 10월에 선친의 뒤를 인계받아 동교 교장에 취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은 헌신적인 노력의 결정(結晶)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일찍이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기 보성전문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하였고, 이어청운(靑雲)의 대지(大志)를 품고 도일(渡日) 명치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탁월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화려한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길을 스스로 택하지 않고 민족교육의 온상이라 할 수 있는 사학(私學)에 투신하였다. 명문(名門)의 가정에서 태어나 청백(淸白)하며 강직(剛直)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언제나 합리주의(合理主義)를 기조로 하는 실천적(實踐的)인 교육가이며, 민족적 양심으로 민족 장래의 회생(回生)은 후진의 얼과 의기(義氣)와 지식의 훈육에 있음을 절감하고, 초지일관(初志一貫) 뜻을 오로지 교육 구국에 두고 자기의 신념을 고스란히 바쳐온 애국 애족 정신이 투철한 교육자라는 정평(定評)을 받아왔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도 강하여 학원을 운영하고 학생을 교육함에 있어서도 의론(議論)과 타협(妥協)을 본지(本旨)로 하고 있다는 여론이며, 기민성(機敏性)으로 학교 발전을 더욱 촉진시키고 있다고 한다. 부인 박(朴) 여사와의 슬하(膝下)에 4남매를 두고 있다.(韓國人士大鑑, 大韓敎育人士大鑑)
김교용(金敎容) : 김천고보(金泉高普) 제1회 졸업생인 바, 동교(同校) 재학 중에는 초대 교장 안일영(安一英), 2대 교장 낙산(洛山) 정열모(鄭烈模)로부터 총애(寵愛)를 두텁게 받은 만큼 귀여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어느 모로 봐도 귀공자(貴公子) 타잎으로 보이는 씨(氏)는 대전(大田)에서 개업하고 있는 변호사 최재덕(崔在德), 정법이론가(政法理論家) 배영환(裵瑛煥) 등과 김천고보(金泉高普) 동기(同期)라는 것이다. 씨는 그 후 보성전문(普成專門, 高麗大 前身) 법과(法科)를 거쳐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서 명치대(明治大) 법학부(法學部)를 우수한 성적으로서 졸업했다고 한다. 이윽고 1945년 3월 8일자로 경북 도속(慶北道屬)으로 임명되어 해방 전후에 걸쳐 몇 해 동안 근무하다가 1950년 10월 1일에 대창중학교(大昌中學校) 교장으로 취임하자, 곧 중고교(中高校) 별설(竝設)에 노력한 나머지 1953년 4월 15일자로 초지(初志)를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본시(本是) 전형적(典型的)인 성실한 사람이니만큼 앞으로 동교(同校) 발전을 위하여 한결 더 심혈(心血)을 기울일 것이라고 본다.(慶北大觀 1958)
김교용 : 집념의 탑 송대/ 존경하는 교장 선생님! 선생님의 가르침 아래 호연지기의 기개를 마음껏 펼치며 진리의 책갈피를 넘기던 때가 어제인 듯 생생한데 선생님을 뵈올 적마다 눈가의 주름살과 희끗희끗한 백발을 뵈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매사에 합리(合理)를 앞세워 원리 원칙(原理原則)대로 행하고 항상 정성과 정열을 다하라 하시는 가르침을 따라 열심히 살아 온 것 같은데도 아직도 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고 있는 못난 제자는 부끄럽기만 합니다. 무슨 일에서건 합리와 정성(精誠)이 담기지 않으면 불호령을 내리시며 저희들을 훈도하실 적마다 야속한 생각 마져 들었던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만 선생님의 그 고귀하신 가르침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3.1독립 정신을 창학 이념으로 모교를 설립하신 선(先) 교장 선생님의 유지를 높이 받들어 이 나라와 지역 사회의 건아들을 키워내기 위해 오직 한 곳만을 응시하시고 당신께서 가지신 모든 정열을 바쳐 30 수 개 성상을 교육 일념으로 살아오신 교장 선생님! 단아한 모습으로 교내 이곳저곳을 보살피며 순시하시던 교장 선생님의 얼굴에는 항상 자애로운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런 선생님을 뵈올 때면 저는 부모님을 대하는 둣한 친근감을 느끼며 교장 선생님 앞에서 어리광이라도 부려보고 싶은 충동이 일곤 했답니다. 존경하는 교장 선생님! 선생님에 대한 주옥같은 기억의 편린들을 하나씩 모아 봅니다. 허름한 교무실과 몇 동의 흙벽돌 건물만이 있을 때 수학했던 저는 그런 기억으로 모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우람한 현대식 도서관, 음악실, 새로 지은 교무실, 그리고 VTR 시설을 비롯한 온갖 교육 시설을 경이의 눈으로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오늘의 모교가 있기까지 교장 선생님께서 젊은 건아들을 위해 쏟으신 노력과 정열에 또 한번 존경하는 마음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존경하는 교장 선생님! 입을 굳게 다무시고 교육을 통한 백년대계를 설계하시던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인자함과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 어떻게 하면 좀더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어떤 고난도 물리칠 수 있는 건강한 송대인을 키워낼 수 있을까' 하는 일념으로 굳게 입을 다문 선생님을 뵈올 때마다 제 자신 숙연해짐을 느낀답니다. 아침 자습 시간이면 항상 교실을 순시하시며 무언의 격려를 보내주실 때면 마치 부모님을 대한 듯 마음이 포근해지며 쌓인 피로는 눈 녹듯 사라지고 용기백배하여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고, 체전에 우승을 할 때나 학력경시대회에서 우승을 할 때 만면에 웃음을 함빡 머금고 저희들과 함께 한껏 기뻐해 주실 때면 우리는 모두 함께 라는 일체감을 맛보기도 했답니다. 모교에 몸을 담고 있는 저는 교장 선생님께서 저의 후배들에게 예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한결같은 정열과 정성으로 지금도 오직 학생들 편에 서서 학생들의 인격 도야와 학력 향상을 위해 펼치고 계시는, 다른 학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어려 가지교육 제도에 감격해 마지않습니다. 호연, 용성, 지지의 교시와 정심, 자립, 협동의 교훈을 따라 실시되는 애국 조회로부터 효 조회, 시조 조회, 명상 조회, 국민정신강화 조회, 반성 조회에 이르기까지 매일 다른 형태의 조회를 통해 학생들로 하여금 선인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제도, 수시로 명사들을 초청하여 교양 강좌를 개설하는 한편 방학 때면 붓글씨를 배우게 하고 학생들 모두가 가훈을 만들어 액자에 넣어 가정에 걸어두게 하신 일, 학생들의 미래상 정립을 위해 위인들의 위대한 점을 본받게 하고, 좌우명을 설정케 하여 매달 한 번씩 학생들 자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평가하게 하고 담임이 다시 평가하는 "내 자랑 만들기' 제도를 마련하신 일 등은 학생들의 인격 도야를 위한 교장 선생님의 투철하신 교육 철학이 스며있지 않는 것이 없고, 한 단원을 끝낼 때마다 그 단원의 핵심 내용을 문제로 추려내어 학생들에게 복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 '단원 분석 제도', 매일 영어 단어와 한자를 다르게 제시하도록 하여 외게 하는 '일일 학습 제도', VTR시설을 이용하여 시청각 교육의 모범을 보이신 일 등은 학생들의 학력 향상을 위해 교장 선생님이 정열을 아니 쏟은 일이 없다할 것입니다. 또한 어려운 형편이나 향학열에 불타는 학생들을 위해 마련하신 학업 성적 우수 장학생, 체육 특기자 장학생, 음악 특기자 장학생, 송대 장학생, 사랑의 씨앗 장학생, 동창회 장학생 등 다양한 장학 제도를 두시어 연간 1,600여만 원의 막대한 장학금으로 배움에 목말라하는 학생들을 마음 놓고 열심히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신 일, 도시락을 데우는 스팀 시설, 비가 올 때면 모두 우의를 쓰고 갈 수 있게 해 주신 일 등은 마치 불은(佛恩)과도 같다고 할 것이며, 전국에서도 유일한 학생 복지 시설이라 할 것입니다. 초라한 흙벽돌집에서 웅대한 콘크리트 교실로 발전하게 한 것은 모두가 선생님께서 쏟으신 피와 땀의 결정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1982년 12월 7일 경북교육상을 수상하시게 된 일은 때늦은 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숱한 세월 갖은 풍상 속에 뚜렷하게 정립된 교육관을 통해 이 나라와 지역 사회의 장래를 염려하시어 한 평생을 교육에 몸 바쳐 오신 보람의 결실이며, 선생님에 대한 포상은 진작 있어야 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생각컨대 선생님께 주어졌던 출세와 영달의 모든 기회와 유혹을 뿌리치시고 오직 교육 일념으로 살아오신 정열과 집념에 새삼스러이 감탄하고 존경을 금할 길 없답니다. 존경하는 교장 선생님! 벌써 세색은 없어져 낙엽은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드러나고 파랗던 솔잎도 차가운 바람에 추운 듯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못난 제자이지만 교직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으며 생계의 수단으로 여기는 일 없이 나약하게 살지는 않으렵니다.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제가 가진 정열과 능력을 다 바쳐 후배 양성에 열과 성을 다할 것을 조용히 다짐해 봅니다. 존경하는 교장 선생님! 감히 바라옵건대 오래오래 교정에서 선생님을 뵈올 수 있게 해주시고, 후배들에게도 '원리 원칙'대로 살고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정성(精誠)'과 '정열(情熱)'을 다해 살아가라는 교장 선생님의 가르침을 깊이 심어주시기를 바랍니다.(玄雨澤, 大昌中 敎師, 醴泉敎育, 1982, 醴泉敎育廳, 237-240쪽)
김교용(金敎容) : 1918- , 예천인, 일본(日本) 명치대(明治大) 법학부(法學部) 졸(卒), 예천군청(醴泉郡廳) 근무, 현 대창중고교장(大昌中高校長)(每日年鑑 1984)
김교용(金敎容) : 1918- , 예천 생(生), 관(貫) 경주(慶州), 아호(雅號) 송원(松園), 김천고보(金泉高普) 및 보성전문(普成專門)과 명치대학(明治大學) 법학부(法學部) 졸업, 1982년 경북교육대상(慶北敎育大賞)을 받았다.(光復40年史)
김교용 : 송원송(松園頌)(松園은 金敎容의 號)// 성실과 그 부지런함/ 강한 의지 자본으로// 향토 예천 교육의 전당/ 송대 학원 터전 닦아// 상기도/ 님의 가슴은/ 젊은 맥박 뛰누나// 오손도손 가족들과/ 송대 가족 삼천여 명// 엊그제 심은 씨앗/ 어느덧 열매 주렁// 비바람/ 가시밭길이/ 님에겐 없었을 손가// 불같은 그 정열을/ 뉘라서 따를손가// 펼치소서 님의 꿈을/ 방방곡곡 꽃 피소서// 육영의/ 선봉장되어/ 비상하리 송대 학원//(李泰權, 醴泉文學 Ⅲ 1991 84-85쪽)
김교용(金敎容) : 예천읍 출생, 시조문학인, 호 송원(松園), 보성전문학교 법과 졸업, 일본 명치대학교 법학부 졸업, 현 대창중고등학교장(예천문학 Ⅲ 1991 71쪽, 예천문학 6 1992)
김교용 : 대창학원 발전에 평생을 바친 김교용 교장/ 경북 예천 대창중고등학교/ "우리 인간의 본연지성(本然之性)은 한 점 티끌도 없이 순수한 것인데, 기질지성(氣質之性)에 의한 욕망이 본성을 덮어 버림으로써, 타락된 인간이 나타나고, 사회가 무질서해지는 것입니다. 인간 본연지성을 빛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김교용 교장은 올해 일흔 아홉, 연세가 무색할 정도로 건강해 뵌다. "지금 우리 교육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바른 교직관을 가진 교사의 양성과 인간다운 인간을 길러 내는 일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오랜 교육 경륜에서 우러나온 말씀임을 느끼게 한다. 김교용 교장은 1942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했다. 당시로서는 법조계의 출세 가도를 예약한 거나 다름없는 경사였다. 사실 그 때 보성전문학교 동기로서 이 대학을 나온 사람 중에는 우리나라 고등법원장을 지낸 분을 비롯하여 내로라하는 법조인들이 많다. 그렇지만, 김 교장은 선친께서 전 재산을 희사하여 창립하신 이 학교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반평생을 2세 교육에 정성을 기울여 오면서 단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대창중고등학교는 3.1운동 직후인 1922년 2월 15일, 예천청년회가 앞장서고, 예천유도회(醴泉儒道會)가 후원하여 창설한 사설 대창학원이 그 전신이다. 당시 조국을 잃은 설움도, 찌든 가난도 모두가 배우지 못한 데서 비롯하였음을 통감하고,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교육 구국의 외침이 국민들 사이에 물결처럼 번질 때, 해방 조국의 내일을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이다. 김 교장의 선친이신 벽천 김석희(碧泉 金碩熙) 선생께서 설립 당시부터 초대 원장으로 추대 받아, 어려운 가운데도 민족 교육을 펼쳐 오시던 중, 1927년에 예천 객사(客舍)를 이전, 120평 교사(校舍) 1동을 갖게 되었으니, 지금도 남아 교장실과 서무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 그것이다. 1946년 2월 15일, 학원 창립 기념일을 맞아 벽천 선생께서 전 재산을 희사, 중학교 설립 운동을 펼친 끝에 1948년 교명을 대창중학원으로 개명하기에 이르렀고, 1948년 드디어 재단법인 대창학원 설립인가를 받았다. 대창초급중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벽천 선생께서 6.25전쟁을 만나 돌아오시는 길에 순직하시자, 김 교장이 1950년 10월, 30대 젊은 나이에 대창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 교직 첫 출발이었다. 당시 교사 수는 5,6명, 김 교장은 손수 종을 치며, 수업도 하고, 학교도 관리하는 1인 3역을 해야 했다.
지금 중학교 9학급, 고등학교 18학급에 교직원 수가 63명에 이른 것과 비교하면 까마득한 옛 이야기다. 6.25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당시 교실로는 불어나는 학생 수를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김 교장은 교실 증축을 위해 흙벽돌을 만들었다. 학생들에게도 몇 장씩 가져오도록 했다. 손수 교사를 설계하고, 담을 쌓아 교실을 짓는 김 교장의 손은 노동자의 손 그대로였다. 그러나 학생과 교사가 한데 어울러져 흙벽돌을 만들어 교실을 지으면서 가르치고 공부하는 가운데, 스승과 제자의 정은 깊을 대로 깊어져 잊을 수 없는 값진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우천시 운동부 훈련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흙벽돌집 한 동은 그 어려웠던 시절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 후 김 교장은 46년 간 '정성(精誠)'과 '합리(合理)'라는 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이 지역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발전시켜 왔으니, 그 동안 길러낸 제자가 무려25,000명에 이른다.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감동은 정성을 다할 때 우러납니다. 우리 선생님들이 바른 교직관과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정성을 다해 교육에 임할 때, 바른 인간, 실력있는 인간은 길러집니다." 김 교장의 이와 같은 감동 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은 하나같이 김 교장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지금 교육부에 근무하고 있는 K 사무관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교장 선생님 앞에서 대충대충이란 통하지 않아요. 수업도, 생활 지도도 철두철미하시죠. 그래서 너무 엄격하시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어요. 그러나 제자의 어려움을 모른 체 안 하시는 데서 항상 감동을 받았지요." 김 교장이 누구나 부러워할 법조계로 나가지 않고 교육계에 남아 있으면서도, 한번도 후회해 보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제자들의 바른 성장이었다. "가정이 극히 어려워 공납금 낼 돈마저 없이 어렵게 공부했던 제자가 육군 장성이 되어 밤 12시에 선생님한테 맨 먼저 기쁨을 전한다고 전화를 했을 때, 내가 '정 장군! '하고 환호성을 울렸던 기억은 지금도 가슴 뭉클합니다." 육군대학 총장을 지낸 이 제자 외에도 어려운 시절 김 교장의 도움으로 사회의 동량으로 성장한 제자가 많다. 청주지방법원장으로 있는 J모 판사도 이 학교 5회 졸업생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고 6년 간 장학금을 주었는데, 그 해 3명이 서울 S대에 당당히 합격했던 것이다. 지방 학교로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또, 현재 우리나라 서예계의 거성인 K씨도 이 학교 출신으로, 그의 작품이 교내 곳곳에 걸려 있는가 하면, 건실한 중소기업체 회장으로 있는 B씨는 10여 년 이상을 매년 200만 원 상당의 장학금을 보내오고, 김 교장이 특별히 추천하는 학생에게는 대학 등록금까지 대신 내주는 이 학교 6회 졸업생이다. 학교에 다닐 때 도와주신 김 교장의 은혜에 보답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여긴 까닭이다. 김 교장이 가르쳤던 제자 중 대학 교수만도 현재 60명, 이들은 내년 여름 김 교장의 팔순을 맞이하여 기념 논문 봉정식을 갖기로 했단다. 김 교장은 지금 인성 교육과 지력 교육을 조화롭게 실천하고 있다. 인성 교육을 위한 교육 방법이 독특하다. 매일 아침 조회를 색다르게 진행한다. 월요일엔 애국조회의 날로, 김 교장이 직접 훈화를 한다. 화요일엔 효도조회라 해서, 학생들의 효행 일기 중에서 한 편을 골라 본인이 직접 낭독하게 하고, '어머니의 마음'이란 노래를 제창한다. 수요일에는 명상조회라 해서, 김 교장이 명현들의 가르침을 방송하고, 다같이 교가를 부른다. 목요일에는 시조조회라 해서, 교감 주도로 충효 관련 시조를 낭송하고, 학교 응원가를 부른다. 금요일에는 교사가 민주시민 자질 함양을 위한 방송을 하고, '선구자'를 다 함께 부른다. 토요일에는 반성조회라 해서 주번장 학생이 주관해서 1주일을 반성한다. 그리고 매일 전심 시간 중 5교시 수업 시작 전 3분 간, 경북 도교육청에서 발간 배부한 <동현의 교훈> 중에서 한 구절씩을 방송하는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이 학교가 이렇게 인성 교육에 관심이 큰 까닭은 호연(浩然), 용성(勇誠), 지지(至知)라는 교시(校是)에서도 연유한다. 즉, '浩然'은 뜻이 크고 넓은 것을 말함이니, 모름지기 남아는 하늘과 땅 사이에 넘치는 큰 뜻을 세워야 한다. '勇誠'은 씩씩하고 기운차며 정성스러움을 가르침이니, 모든 일의 성패가 여기에 달려 있느니라. '지지'는 더없이 뛰어난 슬기로움을 이름이니, 부지런히 갈고 다듬어 우리와 나를 빛나게 하라는 건학 이념이다. 그리고 이 학교가 자랑으로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75년의 역사에 변하지 않은 세 가지다. 곧 '대창'이라는 교명이 그렇고, 학교 위치가 그렇고, 학교 경영 주체가 변하지 않았음이다. 그러나 예와는 달리 오늘날엔 이 지역 인구 수가 매년 줄어듬에 따라 중·고교 취학 학생 수도 크게 줄어들고, 그나마 초등학교에서 우수한 학생들은 인근 도시 등으로 유학을 가는 상황 속에서, 지역 주민들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한, 학생들이 부진한 학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 또한 게을리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김 교장은 이 고등학교 신입생으로 확정되면, 겨울 방학 중 희망 학생을 모두 불러 80시간씩 영어와 수학 교과 기초 학력 보완을 위한 교육을 실시한다. 고등학교에 들어오면 공부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음을 일깨워주는 뜻도 있다. 그리고 학교에 입학하면 도회의 학교들처럼 정규 수업 외에도 보충 수업과 야간 자율 학습을 철저히 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늘 당부하는 말이 있다.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최고가 되려 하기보다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아울러, 교사들에겐 기억에 남는 스승이 되라고 당부한다.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가슴을 두드린 교육이 기억에 남는다고 강조한다. 이 학교의 특색 사업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송대오서제도(松臺五書制度)이다. 1962년부터 실시해 오고 있는데, 한 학년 동안 최소한 5권의 책을 읽도록 하는 독서운동이다. 그래서 책을 구입할 때는 30권씩(한 학급 60명 기준) 복본으로 구입하여, 전학년 전학생들에게 대출해 주고, 15일마다 바꾸어 읽게 한다. 그리고 매일 아침 40분씩 독서 시간을 운영하는데, 이 시간에는 이따금씩 산새 소리만 정적을 깰 정도로 고요한 가운데 진행된다. 이 지역에서 2만여 권의 도서를 갖춘 도서관을 갖고 있는 유일한 학교라는 점도 이 학교의 자랑이다.
김 교장은 또 해박한 지식과 거침없는 웅변술로 유명하여 민방위 교육 등 지역민들의 정신 교육 강사로서도 활약이 크다. 그리고 종합 잡지(醴泉文學) 동인회를 창립 당시부터 이끌어 온 이 지역의 정신적 지주로서 대우받고 있다. 예천읍을 감싸고 있는 봉덕산 자락에서 첫 삽을 든 후, 재정이 허락하는 대로 산자락을 깎아 교실 한 칸을 짓고, 또 깎아 한 칸을 지어오기 75년, 이젠 산중턱까지 파고들어 더 이상 증축할 수도 없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도서실, 과학실, 어학실습실, 음악실, 미술실 등 중고교로서 갖추어야할 기본 시설을 지형에 맞게 오밀조밀 잘도 갖추었다. 그러나 어느 시설 하나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교장실도 소박하기만 하다. 학교 현황을 보여주는 몇 가지 통계표와 성현들의 어록을 적은 족자 몇 개가 걸려 있을 뿐, 여느 학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한 장식장도, 안락한 의자도 없다. 교육 활동과 직접 관련이 없는 시설은 겉치레일 뿐이라고 생각한 까닭이기도 하다. 승용차도 거꾸로 들어가야 하는 비좁은 학교 진입로, 그래서 김 교장의 바람은 근교에 넓은 부지를 마련, 최신식 건물로 교사를 다시 짓고, 기숙사도 완비하여 쾌적한 환경에서 2세 교육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보는 것이다. "우리 학교 재단은 과거 토지로만 구성, 설립되었기 때문에 토지가 없는 현재는 재단 전입금을 한 푼도 지원받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국가에서 공사립 학교를 균등하게 지원해 주거나, 재단의 재정 형편을 감안하여 어려운 학교에 좀더 지원해 준다면, 더욱 용기를 얻어 교육 활동을 활발히 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개인의 영달이나 명예보다는 2세 교육을 걱정하고, 낡은 당신 집을 수리하기에 앞서 학교 건물을 증축하여 오늘에 이른 김 교장,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선친의 공덕으로 돌리면서, 1985년 벽천 선생 탄신 100주년을 맞아 제자들이 교정에 송덕비를 세우고, 초대 문교부장관이었던 안호상 박사가 글을 지은 송덕비문을 또박또박 읽어 소개해 주신다. "맑은 샘물처럼 고결한 인생을 살다 가신 휘(諱) 석희(碩熙)요, 자(字)는 태익(泰益)이며, 호(號)는 벽천(碧泉)으로서, 이 고장 예천의 근대 문화를 개척한 선구자요, 신교육을 제창하시다. ..(중략)... 높도다 예천을 아끼고 가꾸신 은혜여! 크도다. 대창을 세우고 키우신 공이여! 탄신 100주년을 맞아 여기에 한 덩이 돌을 세워 후세의 거울로 삼으며, 겨레의 가슴에 영원히 거룩한 님의 뜻을 느끼게 하리라." (글: 김영윤 교육부 교육연구사, 교육월보 1996.11, 통권 179호, 교육부)
김교용(金敎容) : 1918- , 예천 출신, 본관은 경주, 일본 명치대 법학부 졸업, 50년 대창중 교사, 53년 대창중고 교장이다.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주소는 예천읍 노하리 62-1번지이다.(한국을 움직이는 인물들 1997)
김교용(金敎容) : 1918- , 출신지는 慶尙北道 醴泉郡(본적), 주소는 慶尙北道 醴泉邑 西本洞 6, 가족 관계는 부인, 자녀 2남 1녀, 학력은 普成專門學校 法科 졸업, 明治大學 法學部 졸업, 경력 및 활동은 醴泉郡廳 서무계장 등 6년 근속, 慶尙北道 大昌中高 등에서 교장 역임, 종교는 불교, 취미는 독서이다.(대한민국건국십년지 966, www.history.go.kr 2006)
김교용 [記事] : 인재 양성의 외길을 걸어온 지역 교육계의 원로 김교용(대창중고 이사장)/ "일을 너무 지독하게 한다고 아이들이 '독사'라 불러요." 대창중고를 졸업한 학생들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별칭 '독사', 그러나 김교용(80) 대창중고 이사장은 '독사'와는 거리가 먼 풍모를 지녔다. 김 이사장은 1950년 대창중 교장 취임 후(53년부터 대창중고 교장 겸임) 만 46년 5개월 동안 대창중고를 진두 지휘해온 예천 교육 발전의 산증인이요, 큰 산이다. 지난 3월 1일 대창중고 교장 퇴직 후 이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요즘도 매일같이 학교에 나와 구석구석을 살핀다. 젊음을 바쳐 일궈놓은 배움의 전당에서 손주녀석 같은 학생들이 열심히 익혀 이 나라의 튼튼한 재목으로 자라나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 때문이다. 김천 고등보통학교(36년), 보성전문학교 법과(39년), 동경 명치대학 법학부(41년)를 졸업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던 김 이사장은 유년 시절부터 줄곧 법조계 진출이 꿈이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좌절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즈음 일제는 징발 인원을 늘리기 위해 고등고시제도를 폐지했다. 김 이사장은 징용을 피하기 위해 예천군청에 봉직(44-50년)한 적도 있으며 광복 후에는 한동안 미군 통역을 맡기도 했다. "선친은 기골이 장대했을 뿐 아니라, 위엄이 대단해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비단옷을 몸에 한번도 걸치지 않을 정도로 검소했지요." 3.1운동 직후인 1922년 민족 교육에 뜻을 품은 선친 고(故) 김석희 선생과 예천청년회 및 유도회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사설 대창학원은 숱한 영욕의 세월 속에서도 꿋꿋하게 백년대계(百年大計)의 초석을 다져왔다. 1950년 8월 23일, 당시 예천군 우익 단체의 거두였던 선친이 교사 증축을 위한 자재 구입과 지원을 얻기 위해 서울을 다녀오던 중 좌익 세력에 의해 화를 당했다. 김 이사장은 암울한 시대를 만나 참교육의 이상을 맘껏 펼쳐보지 못한 채 억울한 죽음을 맞아야 했던 선친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평생을 살았다. 33세의 젊은 나이로 교장에 취임했던 김 이사장은 소사, 교사, 교장 등 1인 3역을 묵묵히 해냈다. 웃통을 벗어부친 채 학생들과 산을 깍고 벽돌을 만들었다. 자재를 나르고 교사를 한동한동 지어나갔다. 요즘도 그 때를 생각하면 물씬 그리움이 솟구친다. 행여나 장년이 다된 초창기 대창중고 졸업생들을 만나는 날이면 모두 얼싸안아주고 싶을 만큼 정이 각별하다. 김 이사장의 교육 이념은 실력 배양, 체력 단련, 인성 교육으로 집약된다. 그 중에서도 인성 교육은 단연 으뜸. "가급적 자유의 규제를 풀어줘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자치력을 키우고 민주 시민이 갖추어야 할 소양을 쌓도록 인도하는 것이 교육자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김 이사장은 애국조회, 효조회, 명상조회, 반성조회 등 매일 조회 형태를 달리하면서 전인교육을 실천했다. 또한 3만여 권의 장서를 비치해 일년 동안 책 5권 이상 읽기(송대5서 운동)를 적극 권장, 창의력 배양에도 앞장섰다. "우수 학생들을 유치하자면 기숙사 완비 등 약 10억 원의 예산이 소요됩니다. 황병태 의원이 명문고 육성을 위해 많은 힘을 써주었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매일 대창중고 27개 학급을 둘러봐야 안심이 된다는 그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군단위로는 대학 진학률 전국 최고를 차지하는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지난해에도 대창고는 서울대 의대를 비롯 4년제 대학 112명, 전문대학 88명을 진학시키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자식놈들 보살필 틈도 없이 일했는데, 2남 2녀 모두 사회에서 제몫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어 무엇보다 흐뭇합니다." 팔순이 될 때까지 오직 지역 인재 양성의 외길을 묵묵히 걸어온 교육계의 원로 김교용 이사장, 그의 빛나는 정신 위에 온 군민의 정성이 담긴 월계관 하나쯤 씌워 주어야겠다.(권오근 기자 인터뷰 예천신문 1997.4.3자)
김교용("極樂世界에서 永遠無窮토록 安息하소서" : 弔詞) [記事] : ꡒ왕산(亡人 金二俊의 號, 김이준은 醴泉郡守 秀男의 父)이 어-이 오랜만일세.ꡓ 이것이 우리들의 다정한 만남의 첫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왕산이라고 불러도 대답이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요? 유명이란 이렇게도 쌀쌀하고 냉정한 것입니까? 兄의 비보를 듣고 한참동안 망연자실하다가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어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원기 왕성한 목소리로 자작 작곡한 창을 뱃심 좋게 불렀던 그 목소리, 웃음 섞인 이야기가 만장을 웃기던 그 기지는 어디에 두었습니까? 한 잔 하고 얼큰히 취해 추던 그 유명한 불란서춤은 저 세상에 가서도 출 것입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가지가지 화젯거리가 너무도 많습니다. 영결종천의 지금 이 시간이 너무도 아쉽습니다. 예부터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요 사야하처거(死也何處去)라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인생으로 태어난 것이 어디에서 왔으며 죽어서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요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이라.' 생이라고 하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이 생기는 것이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부운자체(浮雲自쯜)가 본무실(本無實)인데 생사거래(生死去來)가 여거연(如居然)이라.' 뜬구름 자체가 원래 실체가 없는 것인데 나고 죽고 가고 오고 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생각을 바꾸어 옷깃을 가다듬고 정좌하여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왕산이를 잘 인도하여 극락세계로 보내 주십사 하고 기도를 드리려고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이 나오질 않습니다. 이곳 예천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전국에서도 복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한데 어찌 이다지도 급하게 떠나야 합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왕산이 없으면 쓸쓸하고 재미가 없을 정도로 좌중을 화합하게 만드는 통솔력도 있었으며 남의 사정도 잘 보아주던 왕산인데 이제 그 자리가 텅 비어 있으니 허전함을 느낍니다. 왕산은 이왕 황천길을 떠났으니 황천 가는 길이 어떤가요? 만고충신 성삼문은 사형집행장인 한강 나룻터로 가는 도중 마지막 시 한 수를 남겼습니다.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하니 회두일욕사(回頭日欲斜)라 황천무일점(黃泉無一店)하니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리오. 번역하면 북을 둥둥치고 사람목숨을 재촉하는데 머리를 돌리니 해가 이미 저무는구나. 황천 가는 길에는 주막이 없다는데 오늘 밤은 누구 집에서 잘 것인고…. 그런가 하면 진묵당(震黙堂) 일옥 선사는 천금지석산위침(天衾地席山爲枕) 월촉운병해작준(月燭雲屛海作樽) 대취거연내기무(大醉居然乃起舞) 각혐장수괘곤륜(却嫌長袖掛崑崙)이라 하였는데 이 시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분임을 뜻합니다. 풀이하면 ꡐ하늘을 이불로 삼고 땅을 자리로 삼아 산을 베개로 하고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하여 바닷물을 술로 빚어 동이에 담아 마셔대다 대취하여 조용히 일어나서 춤을 추니 긴 소맷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저어하노라ꡑ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연 속에서 살고 자연의 일부분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령입니다. 왕산형이여! 슬하에 3남 3녀를 훌륭하게 키워 사회 각처에서 크나큰 활약을 하고, 특히나 맏자제 수남은 3선의 예천군수로 10여 년을 군태민안(郡泰民安)을 도모하는 고을 수령으로 우뚝하니 만인이 부러워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과 가정사정 모두 잘 될 터이니 이 세상 모든 일 훌훌 털어버리고 극락세계에서 영원 무궁토록 안식하소서. 명목을 빕니다. 오호 통재라. <金敎容 大昌中ㆍ高 理事長>(醴泉新聞 2007년 12월 20일 15:39:04)
김교용(金敎容) : 구분: 한국근현대인물자료/ 날짜: 1918-07-21/ 분류: 인물 > 한국근현대인물자료/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이름 김교용 ( 金敎容 )/ 민족구분 한국인/ 생년월일 1) 1918-07-21/ 출신지 1) 慶尙北道 醴泉郡(본적)/ 현주소 1) 慶尙北道 醴泉邑 西本洞 6/ 가족관계 배우자 1) 부인/ 가족관계 자녀 1) 2남 1녀/ 학력 1) 普成專門學校 法科 졸업, 明治大學 法學部 졸업/ 경력및활동 1) 醴泉郡廳 서무계장 등 6년 근속, 慶尙北道 大昌中高 등에서 교장 역임/ 종교 1) 불교/ 취미특기 1) 독서/ 참고문헌 건국십년(대한민국건국십년지), 966//
김교용(金敎容, 1950.10.1-현재) 1918.7.21- , 본적, 출생지, 주소 : 노하동 62-1(1952.2.14에는 주소가 서본동 6번지), 본관은 경주, 김석희(金碩熙)와 황신흥(黃新興)의 장자, 처는 박규회(朴圭繪, 1943.10.15 結婚), 아들 : 경호(慶濠, 1950.8.11 생), 정식(正湜, 1953.3.30 생), 사학육성공로장 연공상(송학장, 1980.12.5), 공로표창 연공상(사립중등교장회, 1981.10.29), 제8회 경상북도 교육상(1982.12.5), 국민훈장(1988.12.5), 자랑스러운 신한국인상(1995.11.29)/ 1931.4.1-1936.3.5 김천고등보통학교(金泉高等普通學校) 졸업/ 1936.4.1-1939.3.20 경성 보성전문학교 법과(京城普成專門學校法科) 입학 졸업/ 1939.4.1-1941.12.26 동경 명치대학 법학부(東京明治大學法學部) 입학 졸업/ 1944.2.9-1944.8.21 충청북도 고원(忠淸北道雇員, 이재과, 저축담당)/ 1944.8.22-1945.2.28 예천군청 특별 연성사무 촉탁(特別鍊成事務囑託)에 임명/ 1945.3.1 조선총독부 경상북도 군속(郡屬) 예천군청 근무에 임명됨/ 1947.4.1 임 참사(任參事) 경상북도 명 서무계장(命庶務係長)/ 1949.10.1-1950.9.30 주사(主事)/ 1950.10.1-1953.4.1 대창중학교장(大昌中學校長) 취임/ 1950.11.1 대창학원 이사(大昌學園理事) 피임/ 1953.4.1-1997.2.28 대창중학교장 겸 대창고등학교장/ 1961-1988 예천군 선거관리위원장/ 1973-현재 예천군정 행정자문위원/ 1979.9.22 경북도지사 표창(민방위 육성 발전 공로)/ 1980.12.5 경북도교육감 표창(국민교육이념구현)/ 1980.12.15 한국학교재단연합회 사학육성 공로장(韓國學校財團聯合會 私學育成功勞章, 年功賞 松鶴章)을 받음/ 1981.4.21 내무부장관 표창(지역사회 발전)/ 1981.10.29 대한사립중고등학교장회의 표창(교육 공로)/ 1982.10.6 경북교육회장 표창(특별공로상)/ 1982.12.7 경북교육대상을 수상함/ 1983.4.27 예천군정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됨/ 1983.9.29 예천군정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됨/ 1985.12.31 경북교육감 표창/ 1988.4.30 한국청소년연맹 책임지도자로 위촉됨/ 1988.5.15 문교부장관 표창(연공상)/ 1988.5.15 대한교육연합회 표창(연공상)/ 1988.12.5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음/ 1997.2.29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음./ 1997.3.1 학교법인 대창학원 이사장 취임/
김교용 : 대창80년사 : 제5권 목차(2)-추가(1)/ 작성 장병창/ 7시간전, 2011년 3월 29일 오전 6:44/ ...한 대창은→우리 대창은, 20세기→21세기 2. 1977학년도 대창고등학교 학도호국단 기구 단장에 김교용(교장), 부단장에 이재녕(교감), 대대장에 김도현, 부대대장에 장근석, 작전에 정종대, 인사에 .../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부록(54)/ 작성 장병창/ 어제, 2011년 3월 28일 (월)/ 대창중고등학교 학교운영위원회.......824 8. 김교용 회장, 예천문학 출판기념회를 염.......824 9. 대창고 중퇴생, 군대 3번/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부록(51) 행정실 현직원-사령서(1)/ 작성 장병창/ 지난주, 2011년 3월 25일 (금)/ 중학교 교사, 1976.11.1 반공주임에 보함, 1978.11.31 휴직을 명함. 1979.2.25 교사를 면함 김교용(金敎容) : 1950.10.1-1953.3.31 대창중학교 교장, 1953.4.1-1997.2.28 대창중학교장 겸 대창고등학교장에.../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부록(47) 강사 및 교사(14)-현직 교원(1)/ 작성 장병창/ 지난주, 2011년 3월 21일 (월)/ 대창고등학교 윤리과장 1998.3.1-1999.8.31 대창고등학교 윤리부장(명예퇴직) 56. 현직 교원 김교용 (金敎容, 1950.10.1-현재) 1918.7.21- 본적, 출생지, 주소 : 노하동 62-1(1952.2.14에는 주소가.../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부록(34) 재단이사 및 감사(2)-강사 및 교사(1)/ 작성 장병창/ 3주전, 2011년 3월 8일 (화)/ ...1리 388, 주소 : 서울 강동구 잠실동 우성Apt 22-1006, 본관은 강릉, 인실(仁實)의 아들, 김교용(金敎容)의 사위(아내는 金惠瑛) 1966.2 부산고등학교(釜山高等學校) 졸업 1966.3-1972.2 서울대학교.../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부록(33) 설립자(3)-재단이사 및 감사(1)/ 작성 장병창/ 3주전, 2011년 3월 7일 (월)/ ...(大昌同友會長) 1949.1.17-1976.7.14 재단법인 대창중학원 이사장(財團法人大昌中學園理事長) 피임 김교용 (金敎容, 1950.11.1-1997.2.28)→설립자란 및 현교직원란 참조 장명환 (張命煥, 1948.12.20-?).../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부록(32) 설립자(2)/ 작성 장병창/ 4주전, 2011년 3월 5일 (토)/ 김교용 (金敎容) 대창고등학교(大昌高等學校) 설립 1. 서언(序言) : 성실과 합리(合理)를 신념으로 육영에 평생을 바친 스승 송원(松園) 김교용 교장은 일본 명치대 법학부(明治大法學部) 출신으로.../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부록(31) 학교경영계획(2)-설립자(1)/ 작성 장병창/ 4주전, 2011년 3월 4일 (금)/ (大昌中學校)로 교명 변경 1950. 8.23 김석희 교장 선생 순직 1950.10.20 제2대 교장 김교용(金敎容) 선생 취임 1952. 3.27 제1차 교사 증축 공사 준공(강당 70평) 1952.12. 9 대창고등학교(大昌高等學校.../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부록(28) 새학교문화창조추진위-동문회(1)/ 작성 장병창/ 4주전, 2011년 3월 1일 (화)/ 김호남, 박동기, 임문남, 박용, 신청해, 한대석, 윤형호, 황재석, 양재석, 권오규, 황차기, 김교용, 감사(監事) 김춘우 김시환, 2) 고등학교 : 회장 최태락, 부회장 조영옥 정재윤, 이사 이장우, .../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부록(27) 학생근태규정-2종교과서선정위/ 작성 장병창/ 지난달, 2011년 2월 28일 (월)/ 단, 위원은 학무모 3명, 각 교과 주임교사 10명으로 구성한다. 1995. 8.24 현재 : 위원장 김교용(교장), 부위원장 정양수(교감), 위원 김시호(군의원, 육성회장), 박금란(학모, 어머니회장), .../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부록(4) 장학금지급현황/ 작성 장병창/ 지난달, 2011년 2월 5일 (토)/ 장학금 지급 현황 (獎學金 支給 現況) 1) 김교용 학교장 특별 장학금(學校長特別?學金) 고 : 1995 장재은, 1996 김윤태, 1997 정현욱, 2) 재단이사장 장학금(財團理事長?學金) 중 : 1984 이상윤.../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부록(1) 위치-졸업생수/ 작성 장병창/ 지난달, 2011년 2월 2일 (수)/ (正心) 자립(自立) 협동(協同), 1960.4.15 제정 4. 교가 (校歌) : 1951년 10월 1일 제정, 작사 김교용(金敎容), 작곡 김성태 1) 송대(松臺) 옛터 높은 언덕 넓은 동산에/ 유서 깊은 크나큰 집 우리의.../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중고병설시대(34) 송대봉사회-총동문 송년의 밤/ 작성 장병창/ 지난달, 2011년 2월 1일 (화)/ (박문한), 국민의례, 내빈 및 은사님 소개, 공로패 전달(장세하 김동길), 동창회장 인사, 격려사(김교용 이사장), 축사(신영국 국회의원 등), 교가 제창이 있었고, 케익 절단 및 건배 제의가 있었다..../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중고병설시대(29) 송원선생논문집-영풍수련장 입소/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27일 (목)/ 송원 김교용 선생 송수(頌壽) 기념 논문집 발간 1996년 10월 1일 본교에서는 논문집을 발간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서신을 예천 출신 석학(碩學)들과 동문(同門)들에게 보냈다. "원고를 청탁합니다.../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중고병설시대(28) 신입생 모집-열린 교육/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26일 (수)/ ...)로 문의한다. 112. 열린 교육 계획 (1996) 이는 1996년 8월 25일에 김교용 교장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장병창 교무과장이 세워서 실시한 교육 계획이다. 1. 필요성 : 1) .../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중고병설시대(22) 우리학교는요?-전인교육/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20일 (목)/ 보원무역의 박운하 회장 등 수 많은 인사들이 있다. 오직, 교육 일념으로 우리 학교를 가꾼 김교용 교장 선생님은 1982년 12월 5일 경상북도 교육 대상을 수상하여 그 공이 치하된 바도 있으며, .../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중고병설시대(21) 학교운영위원회-재경동문회/ 작성 장병창/ 2달전, 1월 19일 (수)/ ...위원 : 김원식(사업, 학부모위원(고)), ㅇ 위원 : 김영숙(주부, 학부모위원(중)), ㅇ 위원 : 김교용(학교장(중고)), ㅇ 위원 : 권영춘(교사위원(고)), ㅇ 위원 : 권영식(교사위원(고)), ㅇ 위원 .../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중고병설시대(20) 개교70주년 행사(2)-고22회 동기회.../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18일 (화)/ 컴퓨터연구회(회장 권영식)가 발행한 책으로, 가로 20cm, 세로 33cm, 38쪽이다. 김교용 교장 선생님의 권두언(세계가 뛰고 있다)에 이어 김종보(DOS의 起動), 김중희(첨단의 필기도구 Word .../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중고병설시대(19) 친목회 규약-개교70주년 행사(1)/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17일 (월)/ ( ) 안은 총회 장소, 모임의 회장이다. 민주시민교육연구회(대창중 2-1교실, 대창중 김교용), 교도교원연구회(1-3, 대창고 오수영), 영어교원연구회(1-1, 대창고 정재형), 중등역사연구회.../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중고병설시대(18) 송대사진모임-제2권 목차/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16일 (일)/ 요강(전기)--...--254 112. 열린 교육 계획(1996)--...--256 113. 송원 김교용 선생 송수(頌壽) 기념 논문집 발간--...--265 114. 송대회--...--266 115./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중고병설시대(17) 청운실 운영-통기타와 함께/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15일
(토)/ 이 수련회를 계속 실시하였다. 청운실 담당 교사들은 입실자 관리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김교용 교장 선생님의 지시에 대한 대처와 선생님들의 건의 사항을 반영하랴, 틈나면 공휴일이고 야간이고.../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중고병설시대(15) 벽천선생탄신100주년 기념행사(2)/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13일 (목)/ 개인적 영달이나 출세를 다 버리고 정성과 합리를 바탕으로 선대의 업적을 계승하여 온 김교용(金敎容) 교장의 탁월한 능력과 성실한 인격과 부단한 노력의 결과입니다. 우리 기념사업회 일동의 .../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중고병설시대(14) 벽천선생탄신100주년 기념행사(1)/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12일 (수)/ (國旗 降下), 교가 제창(校歌齊唱), 주악(奏樂), 폐회사(閉會辭)였다. 대회 임원으로 대회장에 김교용, 부대회장에 정양수, 총무에 정홍 배순택, 식전부(式典部)에 황시환 권태한, 진행(放送)에 장병창.../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중고병설시대(13) <대창춘추> 발행-대창미전/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11일 (화)/ 8면으로 된 이 신문의 편집은 현우택(玄雨澤) 교사가 맡았는데, 1면에는 학교전경 사진, 김교용(金敎容) 교장 선생님의 '창간사(創刊辭)'와 '신년사(新年辭)', 본교의 장학금 제도 소개와 그 .../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중고병설시대(12) 원놀음 재현(2)-<말> 제5집 간행/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10일 (월)/ , 예천로타리클럽 장학금 1명, 농업협동조합 공제회(共濟會) 장학금 1명, 계 12명이다. 69. 김교용 교장 선생님, 제8회 경북교육상 수상 1982년 12월 7일 본교 김교용(金敎容) 교장 선생님은 경상북도.../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중고병설시대(10) 개교60주년 행사-영어암송대회/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8일 (토)/ 1982.4. 학교법인 대창학원(學校法人大昌學園) 이사장 조동휘(趙東輝), 대창중고등학교장 김교용(金敎容)" 또한 동창회장이 동문들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대창 동문 .../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중고병설시대(9) <한송이꿈> 간행-군지 집필 위촉/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7일 (금)/ 金正浩)의 프린트판으로 낸 학급지(19x26cm, 86쪽)이다. 본교에서는 여덟 번째의 학급지인데, 김교용(金敎容) 교장 선생님의 격려사(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와 이재녕(李載寧) 교감 선생님의.../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중고병설시대(8) <송대2집> 간행-<버들피리> 간행/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6일 (목)/ 달하는 2집의 표지는 홍현기 미술 교사가, 컷은 박효웅 전임(前任) 미술교사가 수고하였다. 김교용(金敎容) 교장 선생의 "10월 유신을 학생들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인가?"라는 권두사(卷頭辭.../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대창80년사 : 중고병설시대(7) 개교50주년 행사(3)-교사 증축/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5일 (수)/ 말미암아 파괴되고 허물어진 교사와 화약 냄새만이 풍기는 교정에선 제2대로 취임하신 김교용 교장 선생님의 심중은 응당 착잡하셨을 것임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제2경>에 나왔던 구교사.../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김교용 : 재경예천군민회cafe/ 제2회 대창동문가족골프대회-대창인의 함성이 고향에 가득/ 작년, 2010년 9월 8일/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상연 회장은 개회사에서 "21C를 주도할 인재양성을 위해 애쓰고 있는 김교용 이사장님을 비롯한 교직원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고 오늘 대회가 82년의 아름다운 전통을 갖고.../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김교용 : 고향산행 & 모교방문 행사 성황리 개최- (인터넷뉴스 제공)/ 작년, 2010년 6월 16일/ 회상하며 교정을 돌아보고 함께한 동문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김교용 이사장은 "이렇게 많은 동문들이 모교를 찾아주어 고맙다"고 인사, 동문들은 건강과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김교용 : 고향산행&대창탐방-여러분들의 뜨거운 성원에 감사합니다(보고)/ 작년, 2010년 6월 15일/ 옛추억을 더듬으며 함께한 동기들과 기념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대창의 역사를 함께한 김교용 이사장은 이렇게 많은 동문들이 모교를 찾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삿말을 대신하여 참가한 대창동문들의.../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김교용 : 이상연 대표 훈훈한 모교사랑 펼쳐'(예천신문)/ 작년, 2010년 5월 21일/ 모교발전을 위한 다양한 의견과 덕담을 나누었다. 오후에는 모교인 대창고를 방문해 은사인 김교용 재단이사장을 찾아보고 카네이션을 전달했으며, 후배들을 위한 3천5백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하고 .../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김교용 : 이상연 회장 대창모교 2차장학금 전달식-2010.05.17/ 작년, 2010년 5월 19일/ 교장은 대창교직원과 전교생을 대신하여 감사인사를 전했다. 지나간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김교용 이사장과 현우택 교장에게 도금명장 배명직 교수가 직접 제작한 금도금 찻잔세트를 선물하며 학교발전과.../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김교용 : 대창중60회/대창고55회 졸업식 다녀왔습니다./ 작년, 2010년 2월 15일/ 감사인사를 더해 이날 참석한 졸업식에 참석한 기관단체장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김교용 이사장은 치사에서 정심,자립,협동의 교훈을 잊지 말고 백전불굴의 투지와 십전구도의 정신으로 미래를.../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김교용 : 재경 대창중.고등학교 총 동문회-송년의 밤 성황리 개최/ 2년전, 2009년 12월 18일/ 대창중고등학교가 한 세기를 바라보는 역사와 전통을 갖도록 훌륭한 사학 재단으로 만들어주신 김교용 선생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고 국적과 학적은 바꿀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이 있듯이 대창중고등학교가.../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김교용 : 최혁영 前 재경대창 총동문회장-1천 5백만원 모교발전기금/ 2년전, 2009년 9월 18일/ 모교인 대창고등학교를 방문해 후배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10일에는 은사인 김교용 재단이사장과 환담을 나눴으며, 현우택 교장은 전 교직원과 학생들을 대신해 자랑스런 송대인상을 전달하고.../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김교용 : 대창중고등학교 졸업식 이모저모-2월14일(보고)/ 2년전, 2009년 2월 16일/ 대창중고등학교 졸업식이 14일 오전 10시 많은 내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김교용 이사장 현우택 교장, 이한성 국회의원, 재경대창총동문회 이상연 회장, 전우대 예천대창총동문회장, 최명환 예천교육장,../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김교용 : 大昌中高-김교용 재단이사장 夫人 박규회 여사 별세/ 3년전, 2008년 3월 20일/ 故 박규회 여사( 김교용 대창재단이사장 夫人) 故 박규회 여사가 하늘나라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무척 슬픈 일입니다. 삼가 故人은 분명 平和로운 하늘나라로 가셨을 겁니다. 故 박규회 .../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김교용(金敎容) : 1918년7월21일 예천에서 출생, 본관은 경주, 석희의 장자/ 1931년4월1일~1936년3월5일 김천고등보통학교 입학 졸업/ 1936년4월1일~1939년3월20일 경성 보성전문학교 법과 입학 졸업/ 1939년4월1일~1941년12월26일 동경 명치대학 법학부 입학 졸업/ 1944년2월9일~1950년9월30일 충청북도, 경상북도 참사 및 주사/ 1950년10월1일~1953년4월1일 대창중학교장 취임/ 1953년4월1일~1997년2월28일 대창중학교장 겸 대창고등학교장/ 1961년~1988년 예천군 선거관리위원장/ 1973년~현재 예천군정 행정자문위원장/ 1979년9월22일 경북도지사 표창(민방위 육성 발전공로)/ 1980년12월5일 경북도교육감 표창(국민교육이념 구현)/ 1980년12월15일 한국사학재단연합회 사학육성 공로장(연공상 송학장)을 받음/ 1981년4월21일 내무부 장관 표창(지역사회 발전)/ 1981년10월29일 대한사립중고등학교장회의 표창(교육 공로)/ 1982년10월6일 경북교육회장 표창(특별공로상)/ 1982년12월7일 경북교육대상을 수상함/ 1983년4월27일 예천군정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됨/ 1983년9월29일 예천군정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됨/ 1985년12월31일 경북교육감 표창/ 1988년4월30일 한국청소년연맹 책임지도자로 위촉됨/ 1988년5월15일 문교부장관 표창(연공상)/ 1988년5월15일 대한교육연합회 표창(연공상)/ 1988년12월5일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음/ 1997년2월28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음/ 1997년3월1일~현재 학교법인 대창학원 이사장(대창고등학교 홈페이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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