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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인 2 - 건국 신화를 뺏긴 부여국과 고구려국와 낙랑국의 반역자들!
1. 부여국은 동명왕 건국 신화를 고구려국 주몽에게 뺏기다!
서기 60년 후한 (後漢) 의 왕충이 쓴 《논형》(論衡) 에 보면.... 북이 (北夷) 탁리국 (고리국) 왕의 시비가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 하니,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저에게로 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자 돼지 우리에 던져 두었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으니 죽지 않았다.
마굿간에 두어 말이 밟아 죽이도록 하였으나 죽지 않았다. 왕이 하늘의 아들 (天子)인가
여겨, 여자가 기르도록 하였다. 이름을 동명 (東明) 이라 하고 소와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았기에 왕은 나라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
와 자라가 다리를 풀어버리니 추격하던 병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왕 노릇을 하였다.
저건 고구려 주몽의 신화와 거의 일치하니..... 고구려가 부여국의 건국신화를 훔친 것인데
부여는 서기전 2세기부터 494년까지 북만주지역에 존속했던 예맥족 (濊貊族)
의 국가로... 국호인 부여는 평야를 의미하는 벌 (伐· 弗· 火· 夫里) 에서 연유했다고 봅니다.
부여는 서기전 1세기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데 『논형 (論衡)』과 『위략 (魏略)』 에서는 시조
동명 (東明) 이 북쪽 탁리국 (橐離國) 에서 이주해와 건국하였다 하며, 『삼국지
(三國志)』 동이전에서는 부여인들이 옛적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유이민의 후예라 하였습니다.
부여국은 서로는 오환 (烏桓)· 선비 (鮮卑) 와 접하고, 동으로는 읍루 (挹婁) 와 잇닿으며, 남으로는
고구려와 이웃하고, 서남으로는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되어 있으니 3세기에 영역은 2천리에
달하는 광활한 평야지대로 부여성 (夫餘城) 의 위치는 장춘 (長春)· 농안 (農安) 부근으로 봅니다.
중앙에 왕 아래 마가 (馬加)· 우가 (牛加)· 저가 (猪加)· 구가 (狗加)· 대사 (大使)· 대사자 (大使者)· 사자 (使者)
등의 관인이 있었고, 가 (加) 는 수장 (首長)으로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지니고 있었으니
대가 (大加) 는 수천호를, 소가 (小加) 는 수백호를 지배하고 있었으니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햇습니다.
120년 위구태 (尉仇台) 는 부여 왕자로, 136년에는 부여왕으로서 직접 한 (漢) 나라를 방문했고, 한은 그를
융숭히 대접하였으며.... 또한 위구태는 요동의 지배자였던 공손탁 (公孫度) 집안의 여인과 혼인을 합니다.
유주자사 (幽州刺史) 관구검 (毌丘儉) 이 고구려를 침공해 환도성(국내성) 을 점령할 때 (244∼245) 관구검의
수하인 현도태수 왕기(王頎) 가 부여를 방문했고 부여는 그들에게 군량을 제공해 고구려 침공을 도왔습니다.
부여는 동으로 읍루족 (훗날 여진족) 을 복속시켜 공납을 징수하였지만 그러나 220년대 초 읍루가 떨어져
나가자 몇번 공격했으나 험난한 지형과 읍루인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끝내 평정하지 못합니다.
285년에는 선비족 모용씨 (慕容氏) 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고 1만여명이 포로로 잡혀갔는데... 이때 국왕 의려는 자살
했고 부여 왕실은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했으며 의라 (衣羅) 가 왕위를 계승한뒤 진(晉) 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선비족을 격퇴하고 나라를 회복했지만 북옥저로 피난했던 부여인들 일부는 그대로 머무니 동부여 입니다.
부여는 그뒤 계속 선비족 모용씨의 침공을 받게 되고 많은 부여인들이 포로가 되어
북중국에 노예로 끌려갔는데..... 사마씨의 진 (晉) 나라가 쇠망해 지원이
끊긴데다가 고구려의 공략을 받자 길림 일대에서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됩니다.
부여는 346년에 서쪽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 (前燕) 의 공격을 받아 대타격을 입었고
이때 국왕 현 (玄) 이하 5만여명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니...... 그 뒤
쇠약해진 부여는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며 동부여도 410년 광개토왕에 의해 병합됩니다.
북부여는 457년 북위에 조공해 국제 무대에 얼굴을 내밀었지만 5세기말 동만주 삼림 지대에
거주하던 물길 (勿吉) 이 흥기해 고구려와 상쟁을 벌이고, 송화강 (松花江) 을 거슬러
부여를 침략하니 부여왕실은 고구려 내지로 이주하면서 마침내 494년(문자왕 3)에 소멸됩니다.
2. 고구려의 반역자 왕자 발기 (發岐)
발기 (發岐 ~ 197년)는 고구려 신대왕의 아들이고, 고국천왕의 바로 아랫동생으로.... 동생 산상왕이
고국천왕의 사후 왕위 계승 서열을 무시하고 즉위하자 반발하여, 후한의 요동태수 공손도의
도움을 받아 난을 일으켰으나 패하고 자살하였다. 한자가 다른 발기 (拔奇) 는 보통 동일인으로 봅니다.
197년에 형인 고국천왕이 죽자, 왕후인 우씨 (于氏) 가 그 사실을 비밀로 한 채 밤중에 발기를
찾아와 '(고국천) 왕이 후손이 없으니 발기가 왕을 잇는 것이 마땅하다' 고 하니.....
고국천왕의 죽음을 몰랐던 발기는 당연히 거부하고 부인이 어찌 밤중에 돌아다니냐고 호통칩니다.
우씨는 그대로 동생인 연우에게 가서 왕의 죽음을 알리고는 함께 궁궐로 들어갔으며 다음 날 새벽 우씨가
선왕의 유명이라 둘러대며 연우를 왕으로 옹립하니 곧 산상왕인데, 발기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군사를 동원해 왕궁을 포위하고 소리치니..... "형이 죽으면 아우가 잇는 것이 예이다! 너는
차례를 뛰어 넘어 왕위를 빼앗는 큰 죄를 저질렀다! 속히 나오거라! 그러지 않으면 처자를 죽이겠다!"
사흘간 대치했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지니 연노가 (涓奴加) 와 함께 하호 3만명을 이끌고 요동의 공손도 (公孫度)
에게 귀순하고는 공손도에게서 병사 3만명을 지원받아 고구려로 쳐들어왔지만 동생 계수에게 패하고
추격당했는데, '이 늙은 형을 해칠 수 있겠느냐' 는 발기의 말에 계수는 형제의 정이 떠올라 도저히 해치지 못합니다.
"연우형이 나라를 넘겨주지 않은 것이 도리에 어긋난다 하여도 순간의 감정으로 자기 나라를 멸하는
것은 무슨 경우입니까. 죽은 후에 조상님을 어찌 뵈려고 하십니까." 라고 답하니....
발기는 밀려오는 후회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배천 (裴川) 으로 달아나 자살하자
계수가 슬피 울며 시체를 거두어 두었다가 산상왕에게 청해 왕의 예로 배령 (裴嶺) 에 장사지냅니다.
삼국사기에는 한자가 다른 발기 (拔奇) 가 고국천왕의 형이자 신대왕의 맏아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건안(196년~
220년) 초 동생 이이모에게 밀려나 왕이 되지 못하고 공손강 (공손도의 아들) 에게 귀순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김부식이 산상왕 1년(197년) 조에 썼어야 할 《통전》의 기록을 고국천왕 1년 (179년)
조에 잘못 옮겨 쓴 것으로 해석해 두 발기를 동일인으로 보는 게 통설인데..... 그 이유는
건안 연간이 196년에서 220년 사이라는 점, 공손씨 정권은 요동에 189년부터 들어섰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삼국지에서 이이모는 산상왕을 가리킨다는 점, 고국천왕은 176년에 이미 태자로
책봉되어 후계 문제가 정리되었다는 점 등 때문인데, 중국의 기록에서
고국천왕이 누락된 것을 삼국사기에 억지로 잇다가 잘못 옮겨 쓴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역사학자는 삼국사기에 민족 반역자 발기가 두 명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한 명은
신대왕의 장자로 고국천왕의 형인 발기 (拔奇) 이고, 다른 한 명은 고국천왕의 바로 아랫
동생인 발기(發岐) 니 두 명을 다른 사람으로 보는데 발기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고국천왕의 이름은 남무 혹은 이이모 (伊夷謨) 이니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삼국지 위서에....
백고가 죽자 나라사람들이 왕의 맏아들 발기(拔奇) 가 불초하다는 이유로 이이모를 왕으로 세웠다.
한나라 헌제 건안초 발기가 형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와 함께
각각 민호 3만여명을 거느리고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 에게 가서 항복한후 비류수가로 돌아와 살았다.
②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죽자 동생 연우(산상왕) 가 뒤를 이어 즉위한다. 그러자 고국천왕의
바로 아래동생이며 산상왕의 형인 발기(發岐)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호응하는 자가 없자 처자들을 데리고
도주해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에게 투항하면서 군사 3만명을 빌려달라고 청해 승낙받아 고구리로 쳐들어온다.
위 삼국사기의 두 기록을 종합하면 신대왕에게는 모두 다섯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첫째 아들이
발기(拔奇) 이고, 둘째아들이 고국천왕(남무/이이모) 이며, 셋째아들이 발기(發岐) 이고,
넷째아들이 산상왕(연우) 이고, 다섯째 아들이 계수(罽須) 라고 보는데 물론 이건 소수 학설 입니다.
3. 사랑을 위해 조국의 배신자가 된 낙랑공주
낙랑 공주는 호동 왕자와의 사랑을 위해 자국의 국보이자 경보기인 자명고를 찢고 자명각
을 부숴버린 이야기로 유명하니....... 이로 인해 아동 대상 위인전에서는
사랑을 위해 취한 행동으로써 각색되어 슬픈 로맨스 만화로 출판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여름 4월, 왕자 호동 (好童) 이 옥저 (沃沮) 에서 유람하고 있었는데
그때 낙랑왕 (樂浪王) 최리 (崔理) 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 신왕 (神王) 의 아들이 아니리오?”
낙랑왕은 호동이 고구려 신왕의 아들임을 알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킨다. 고구려의 팽창을 두려워한 낙랑왕
이 고구려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낙랑왕 최리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 후, 호동이 본국에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네가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수어 버릴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맞이
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다면 너를 맞이하지 않겠다.” 이전 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적병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것을 부수어 버리게 한 것이었다.
이에 최씨의 딸은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모르게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의 입을 베어 버린 뒤에
호동에게 알려 주었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대비를 하지 않았고, 우리 병사들이 소리 없이 성 밑까지 이르게 된
뒤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夏四月 王子好童 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 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遂同歸 以女妻
之 後 好童還國潛遣人 告崔氏女曰 若能入而國武庫 割破鼓角 則我以禮迎不然則否 先是 樂浪有鼓角 若有
敵兵 則自鳴故令破之 於是 崔女將利刀 潛入庫中 割鼓面角口 以報好童 好童勸王襲樂浪 崔理以鼓角不鳴
不備 我兵掩至城下 然後知鼓角皆破 遂殺女子出降[或云 欲滅樂浪 遂請婚 娶其女 爲子妻 後使歸本國壞其兵物]
낙랑공주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인 최리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이미 자명고가 박살난 낙랑은 고구려의 군대를
막지 못해 32년 (고구려 대무신왕 15년) 에 멸망당했는데 사랑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순정녀이지만,
현대에서 동화 등으로 익히 알려진 호동왕자 - 낙랑공주 사이의 로맨스는 사실 후대의 창작이라고 여겨집니다.
저 설화의 원전을 번역한 것과 호동왕자 문서만 봐도 알수 있듯 원전의 호동왕자에게 낙랑공주는 낙랑을
무력화 시키기 위해 이용할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게다가 호동이 낙랑 공주를
사랑한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니 낙랑 공주는 그저 낙랑을 무너뜨리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공주가 이웃나라 사람에 반해 아버지를 배신하고 나라를 판다' 는 이야기는 동서양을 불문 메데이아
등에서도 등장하는 상당히 인기있는 클리셰며, 이런 경우 십중팔구 그 공주의 사랑은 안 이루어지게 되어
있으며 여성의 의리, 절개를 상징하며 일부종사 (一夫從事), 출가외인 (出嫁外人) 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그런데 한사군인 평양 일대의 낙랑군과 최리의 낙랑군은 같은 나라인지 다른나라인지 아직도
학계에서는 의논이 분분한데.....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가 보낸 군대에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수도인 평양일대에 세워진 나라로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에게 망합니다.
한나라, 위나라, 서진 (西晉) 의 군현 (기원전 108년~기원후 313년) 으로 평양 일대에서
많은 유물과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군수등 핵심 관료는 한나라
사람을 파견했으나 현지 유력자 들을 포섭하여 관료로 삼는 식으로 동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임둔과 진번 2군이 폐지되고 현도군이 고구려현의 반발로 만주로 이동했지만 낙랑은 폐지된 군의
일부를 흡수하면서 인구가 40만명이 넘었으며 25개 현을 두고 함경남도 ~ 강원도 옛
임둔군 '영동 7현' 에 동부도위를, 황해도 옛 진번군에는 남부도위를 두었는데 훗날 대방군이 됩니다.
삼한의 군장 염사치의 귀화 시도와 진한이 용서를 바라며 애원하는 기록, 초기 백제와 신라가 낙랑군으로부터 견제를
당하는 기록에다가 고구려, 삼한, 왜 등 동방외교 창구가 되었고, 단조 철기나 칠기(漆器) 등 중국문물을
전했으며 주변국의 유력층에게 낙랑군으로 부터 얻는 조복 (朝服) 과 의책 (衣幘)이 지위의 상징으로 인기를 누립니다.
전한- 신나라- 후한의 교체기로 중국 대륙이 혼란했던 서기 25년에 왕조 (王調)가 태수를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 를 자칭해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지만 유수가 후한을 재건한후 서기 30년에
왕준을 파견하니.... 내분이 일어나 왕조가 세운 낙랑은 멸망하고 낙랑군은 다시 후한의 군현으로 됩니다.
32년에 등장하여 37년에 고구려 대무신왕에 멸망하는 최씨 낙랑국도 낙랑군의 일부 지역이
독립한 것으로 보는데, 호동이 함경도로 추정되는 옥저에 유람했다가 낙랑공주의
아버지 최리와 만났다고 했으니.... 그럼 낙랑국은 평양이 아닌 함경도 영흥지방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사기》에는 광무제 유수가 44년에 살수 (청천강) 이남을 편입했다고 나오며 먼 동부도위는
폐지하니 영동의 7현이 버려지는데 아마도 동예와 옥저 같은 토착세력의 성장 때문인가 합니다.
2세기 후반기에 중국의 후한(後漢)이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 삼보의 난 등으로 붕괴되면서 낙랑군의 많은 인구가
중국이나 삼한 지역으로 빠져나갔으며 고구려의 한군현 공격등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지만, 요동의 동연이
낙랑군을 장악하면서 삼한과 왜로부터 다시 인구가 회복되니 낙랑군은 황해도 남부도위를 대방군으로 격상시킵니다.
238년 위나라 사마의가 공손연의 요동을 멸망시키니 낙랑군도 유주자사 관구검의 관할에 들어갔는데, 고구려는
요동 공손씨 정벌때 지원군 1천을 보내 도왔으나, 위는 낙랑군을 통한 국제 질서 확립이 목표로
고구려와 직접 교역할 생각이 없었으니 불만을 가진 고구려 동천왕은 242년에 위나라의 서안평을 선제 공격합니다.
위나라는 244년 비류수 전투에서 고구려 원정군 2만 중에 18,000명을 사살하는등 참패시키고
도주한 고구려군 2천을 추격해 수도 환도성 (국내성) 을 함락시켰으며.... 동천왕은
남옥저로 도주했으나 위의 추격군에 북옥저까지 쫓기는 처지가 되는데, 위나라는 고구려
왕을 추격하는 중에 동예, 옥저 까지 정벌하니 고구려는 300년 경 까지는 낙랑에 접근하지 못합니다.
위 나라는 그간 마한이 갖고있던 진한 내륙 소국들에 대한 교역종주권을 낙랑군이 갖도록
하려했고 이에 마한은 반발하니, 마한과 백제 고이왕은 낙랑태수가
고구려 전쟁에 투입된 틈을 타 246년에 낙랑 변방인 대방군 기리영을 기습했으나 패배합니다.
246년 전쟁 초반 마한 연합군은 대방군 태수 궁준을 전사시키는등 성과를 올리지만, 곧 이은
낙랑군과 대방군의 반격으로 신분활국은 멸망했으며 백제는 위나라의 무력을
실감하며 확전을 피하려 했으니 낙랑군 포로를 돌려주고 화친을 청해 전쟁
피해를 수습했으며..... 반면에 목지국은 화친에 반발하고 낙랑군의 위협을 피해 남하 합니다.
248년 신라와 고구려가 화친하니 위나라는 신라를 압박하는데 신라는 지리적으로 멀어 직접 군대를
파견하지는 않고, 240년에 조공국으로 삼았던 왜의 군대를 동원했으며, 마한의 패배로 인한
낙랑군의 교역 독점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으니... 고대 국가는 무역을 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위나라의 압박 타켓은 신라의 실세 석우로였으니 석우로는 고구려 말의 연개소문과 비슷한 위상을 갖는 인물로
대고구려 화친의 배후로 의심되고 있었는데, 당시 신라왕 첨해 이사금과 차기왕 미추 이사금의 최대 정적
이기도 했으니 석우로는 국내외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249년에 왜국에 끌려가 허망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낙랑군은 남쪽의 소국들이 줄줄이 항복, 복속하는 상황에서 백제 고이왕과 혼인 관계를 맺고,
제9대 책계왕 때는 낙랑군은 말갈과 함께 백제왕을 전사시켰으며 이후
분서왕 에게는 패했지만 그후 분서왕을 암살하는등 무시할수 없는 세력으로 급부상합니다.
이후 위나라는 사마의가 249년에 고평릉의 변으로 불리는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니 반발한 왕릉,
관구검, 제갈탄의 내란(15만)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내부 혼란이 가중된 결과 낙랑군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축이 되지 못하고 동아시아 국가들은 권력의 공백 속에서 도약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서진은 274년 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주 동이교위에 소속시키며 동방에 개입해 동이교위가 동방정책의 중심이 되면서
낙랑군, 대방군, 현도군은 세력이 쇠퇴해 갔으며, 한반도 남부 마한과 진한은 이제 낙랑군이나 대방군을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과 교류하지 않고, 마한과 진한의 이름으로 중국 본토 서진에 직접 통교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런데 서기 300년에 서진에서 여덟명의 왕(왕자들)이 잇따라 군사를 일으킨 8왕의 난이 일어나니 결국 성도왕
(成都王) 사마영(司馬潁) 은 흉노족을 끌어들이고 사마월은 산비족을 끌어들여 난장판이 되고 307년에는
영가의 난으로 황제 사마치가 흉노에 포로로 잡혀 나라가 망하니 317년에 강남으로 달아나 동진을 세웁니다.
그러니까 낙랑군은 서기 300년부터는 중국과 교통이 두절되니 끈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태수 조차 부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주민들은 중국과 삼한으로 달아나는데, 관구검에게 망하다시피 했던 고구려는
힘을 회복해 미천왕이 낙랑군과 요동 · 현도군을 이어주는 압록강 하구의 요충지 서안평을 점령합니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중국 본토와 고립되어 외로운 신세가 되니.... 군현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고
요동에서 온 군벌 장통(張統) 의 지배를 받는 중에 망조가 드니 낙랑인 1천여가는
모용선비의 모용외에게 투항하는데 한때 40만을 헤아렸던 인구는 이제 1~2만 내외로 줄어들었습니다.
전성기 때 40만이던 낙랑 인구가 2만 이하로 줄어들자 313년 10월에 미천왕이 낙랑군을
공격하여 2천의 남녀를 포로로 잡아가 낙랑군이 망하게 되자..... 장통은 민호
1천여호 (5천명) 를 이끌고 요동의 선비족 모용씨 (摹容氏) 가 세운 전연에게
투항하니 모용외는 "요서에 낙랑군을 설치해" 장통을 태수로, 왕준을 참군사로 임명합니다.
이를 낙랑군 교치(僑置) 라고 하는데, 재야 사학계에서는 요서 지역에서 낙랑군이
언급 된다는 이유로 낙랑군 요서설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으로.... 영국의 요크 (York) 와 미국의 뉴욕 (New York) 을 헷갈리는 수준 입니다.
300년이 흘러 7세기에 수나라 양제의 원정 때도 요서 지방에 낙랑군 이름은 버젓이 남아 있었는데..... 수양제는
"한(漢) 의 땅을 둘러보니 동쪽이 전부 오랑캐의 땅이 되어있더라" 라는 감회를 남겼으며, 미천왕은
다음해 314년 대방군도 멸망시키지만 황해도 대방군을 두고 백제와 싸우다가 고국원왕이 평양에서 전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