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래강 전설이 깃든 섬진강
섬진강은 지리산 자락에 흩어진 전설을 모아 이를 남해로 흘려 보낸다. 눈부시게 흰 모래밭과 강바람에 휘청대는 대나무 숲, 어느 강보다 맑은 이 물은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함께 담고 있다. 섬진(蟾津)이란 강이름을 한자말 그대로 해석하면 ‘두꺼비나루’가 된다. ‘두꺼비 섬(蟾)’이라는 어려운 한자를 강이름에 끌어다 쓴 것은 이 강에 두꺼비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왜구의 침탈이 잦던 고려 우왕 때의 이야기다. 왜구가 이 강을 거슬러 침범해 왔을 때 밤에 난데없이 두꺼비떼가 나타나 엄청나게 큰 소리로 울었기에 놀란 왜구가 광양 쪽으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왜구를 물리친 두꺼비의 공적을 기려 섬진을 강이름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전설만을 의지하여 지명을 해석할 수는 없다. 섬(蟾)은 차자표기에서 산을 뜻하는 ‘달’로 읽히는 차훈자(借訓字)이다. 따라서 섬진(蟾津)은 ‘달나루’ 또는 줄여서 ‘달래’란 고유어를 한자어 지명으로 적은 것이다.
하늘에 있는 달〔月〕이나 산골을 뜻하는 ‘달’은 발음상 흡사하다. 달〔月〕을 한자어로 표현할 때 섬토(蟾土) 혹은 섬백(蟾魄)이라 하고, 달빛을 섬광(蟾光)이라고 한다. 이는 예로부터 달 속에 두꺼비가 살고 있다는 신화에서 비롯되어 섬(蟾)을 때로 ‘달’로 읽은 관습이 생겼다. 이런 연유로 섬진강은 본래 ‘달래강’으로 불렸으리라 짐작된다. 달래강은 대개 산골 계곡을 흐르는 강이름으로서 충주의 달래강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30여 곳에 산재해 있다. 섬진강은 난달래골 즉 진안고원에서 발원하여 백두대간의 대미를 장식하는 지리산 계곡을 감싸고 흐르기에 이런 이름을 얻었다. 충주의 달래강도 그렇지만 그것이 강이든 산이든 ‘달래’란 이름이 붙는 곳엔 그 내용이 엇비슷한 달래형 전설이 있다. 옛날 혼기에 찬 남매가 여름날 함께 길을 가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난다. 비에 젖은 얇은 옷 속으로 비치는 누나의 탐스런 몸매에 동생은 그만 강한 성적 충동에 휩싸인다. 그것도 한순간, 정신을 차린 동생은 참담한 죄의식을 느껴 한껏 부풀어 오른 자신의 남성을 꺼내 돌로 짓이겨 버린다. 뒤따라오던 누나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동생을 찾았을 때 그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채로 죽어 가고 있었다.
모든 사정을 알아차린 누나는 동생을 끌어안고 이렇게 외친다. “그렇다면 한번쯤 말이나 해 보지, 차라리 달래나 보지.” 그래서 달래란 이름이 생겼다던가. 이런 일이 벌어진 곳이 고개일 때는 달래고개가 되고, 강가일 때는 달래강이 되었다는 그런 얘기다. 등장하는 인물의 관계가 누나와 남동생이 아니고 누이동생과 오빠, 또는 아저씨와 조카딸일 경우도 있지만 모두 근친 사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가운데 특이한 변이로는 남자의 자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굴 같은 곳에서 실제로 근친상간을 행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는 대개 벼락이 쳐서 남매 모두 바위에 맞아 죽는 것으로, 즉 하늘이 내린 징벌로 결말이 나기도 한다. 이 전설은 재미있기는 하나 그 구성이 말꼬리를 잡는 이야기여서 뒷맛은 웬지 개운치가 않다.
섬진강이 스쳐 가는 하동(河東)이란 이름은 이 강의 동쪽 마을이란 뜻인데 옛 문헌에는 한다사(韓多沙)라 적고 있다. 한다사의 상류 쪽 그러니까 지금의 악양을 소다사(小多沙)라 이름한 것을 보면 한다사는 큰 강을 지칭하는 고유어라 생각된다. ‘다시’ 또는 ‘다사’는 다시마〔海帶〕라는 말에서 보듯 강이나 바다를 뜻하는 또 다른 고유어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가 이곳 하동의 평사리임은 결코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집필 기간 25년에 장장 16권에 달하는 이 대하소설이 말 그대로 대하(大河), 즉 ‘한다사’를 무대로 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하동포구 팔십 리가 시작되는 화개(花開) 탑리에는 지금도 화개장이 열리고 나루터에는 나룻배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최근 십여 년 사이 화개는 몰라보게 변하고 있다. 옛 정취를 맛보기엔 화개가 너무 개화(開化)해 버렸다고 할까. 김동리의 단편 〈역마(驛馬)〉에서 보이는 시골 장터 특유의 흥청거림이나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에서 들을 수 있는, 그 인정스러움은 이제 섬진강 물결 따라 먼 바다로 흘러간 지 오래다. 탑리 버스 터미널 한켠에 선 작은 비석 하나가 그 유명했던 화개장터임을 알린다. 해마다 봄이면 쌍계사 가는 십리길에 벚꽃 터널이 펼쳐지고 작설차(雀舌茶)가 영그는 차밭가로 산수유·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다고 한다. 환상적인 드라이브코스라고 자랑하는 화개·하동 간 19번 도로가에는 그래도 군데군데 배롱나무꽃이 피기는 한다. 그러나 어쩌랴. 옛 풍정만은 찾을 길 없으니, 꽃피는 산촌 화개도 이제 어쩔 수 없이 꽃 지는 도시가 되어 가고 있다.
출처:(물의 전설)
하동송림[河東松林]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광평리 일원에 있는 수령 약 300년의 소나무 숲.
개설
하동 송림은 인공림으로 섬진강 변 백사장에 소재한다고 하여 ‘백사 송림(白沙松林)’ 또는 소나무가 푸르다는 의미의 ‘하동 창송(蒼松)’이라고도 한다. 하동 송림을 ‘창송(蒼松)’이라 부르는 것은 ‘창(蒼)’이 ‘푸르다·우거지다·늙다’ 등 여러 의미로 쓰여, ‘푸른 소나무’라는 의미 외에 ‘노송(老松)’을 뜻하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형태
하동 송림은 섬진강 백사장을 끼고 있으며, 면적은 2만 6400㎡에 달하고 길이는 약 2㎞이다. 900여 그루의 노송이 서식하고 있다. 껍질 모양은 마치 옛날 장군들이 입었던 철갑을 두른 듯하다.
역사/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1745년(영조 21) 당시 도호부사(都護府使) 전천상(田天詳)이 강바람과 모래바람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소나무를 심은 것이 오늘날의 하동 송림이다. 송림 공원 주차장에는 노거수 소나무 밑에 ‘백사청송(白沙靑松)’이란 글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거센 모래바람에도 굴하지 않는 소나무의 기상과 백성을 위하는 목민관의 정신을 의미한다. 숲 안의 ‘하상정(河上亭)’이라는 정자는 옛날에 활을 쏘는 곳이었다고 한다.
현황
하동 송림은 1983년 8월 2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2월 18일 천연기념물 제445호로 변경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천연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원래 방풍(防風)·방사림(防沙林)으로 조성되어 지금의 하동고등학교와 하동중학교 및 광평마을 일부까지 소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그 후 섬진강 홍수 예방을 위하여 하동 제방 제2호를 축조하면서 현재와 같이 제방을 사이로 양분되어 송림 바깥쪽은 학교 또는 배후 주거지가 되었다. 제방을 쌓기 전에는 제방 안쪽에도 1,000여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으나, 현재는 상당수가 고사하여 900그루 정도만 남아 있다. 이들 소나무마저 방치할 경우 고사될 우려가 있어 보식(補植)을 해 오고 있으며, 나무마다 일련 번호를 매겨 관리하고 있다. 또 나무의 보호를 위하여 송림을 반씩 나눠 3년 단위로 번갈아 자연 휴식년제를 시행하고 있다. 현재 7단계의 휴식년제가 2010년 3월 1일부터 2013년 2월 28일까지 시행되고 있다.
하동 송림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뒤 문화재의 보존 및 관리와 함께 활용 측면도 보다 강화되었다. 이에 문화재청과 하동군, 하동군내 생태해설사회가 협력하여 문화재 생생사업을 추진하면서 하동 송림이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하동군민들에게 하동 송림의 유래, 소나무의 생태, 하동 송림 내 야생화와 식물에 대해 정보를 제공하며, 송림내 산책, 짚신 신고 송림내 걷기 및 시낭송대회, 작은음악회(콘서트) 등 각종 문화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하동 송림에는 현재 하동송림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1976년 12월 7일 건설부고시 194호 도시근린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공원의 송림 면적은 72,205 ㎡, 백사장 면적은 146,521㎡, 주차장 면적은 7,879㎡이다. 옛날에 활을 쏘던 하상정이 있으며, 운동기구, 벤치, 화장실, 급수대, 분수대, 야영장, 주차장, 매점 등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섬진강 가에는 테니스장, 족구장, 그라운드 골프장, 산책로 등이 조성되었다. 2009년 6월 공원에 분수대를 준공하고, 2010년 부터 분수대 바닥에 조명 설치를 시작하여 2011년에 완료하였다. 분수대 뒤에는 물놀이장이 있고, 광장 바닥에는 태양광을 이용해 여름을 대표하는 4개 별자리를 만들었다. 하동송림공원은 여름철 피서객과 지역민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특히 분수대와 물놀이장이 있어 어린이들이 매우 좋아하는 곳이다.
참고문헌
『하동군지』(하동군지편찬위원회, 1996)
오구균, 『손에 잡히는 생태수목도감』(광일문화사, 2005)
이영로, 『한국식물도감』Ⅰ·Ⅱ(교학사, 2007)
서정호·조계중 외, 『지리산권의 섭생식물』(도서출판 다컴, 2009)
서정호·조계중, 『지리산권의 큰 나무』(디자인흐름, 2010)
하동군 내부자료(하동군 문화관광과 제공)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화개장터:[花開場址]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에 있는 재래시장.
개설
화개장터는 옛 화개장 터에 현대에 들어와 복원한 재래식 시장이다. ‘화개시장’이라고도 부르지만 옛 명칭을 그대로 써서 ‘화개장터’로 부르는게 일반적이며, 공식 명칭 역시 ‘화개장터’이다. 화개장은 본래 화개천이 섬진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열리던 장으로, 섬진강의 ‘가항종점(可航終點)’ 즉 행상선(行商船) 돛단배가 들어올 수 있는 가장 상류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이곳에 대규모의 장터가 들어서게 되었다. 화개장은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있으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에 소속되어 있고, 5일마다 정기적으로 장이 섰다. 조선 시대 때부터 중요한 시장 중의 하나로 주로 지리산 일대의 산간 마을들을 이어주는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옛날에는 섬진강의 물길을 주요 교통수단으로 하여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이 시장에 모여, 내륙에서 생산된 임산물 및 농산물과 남해에서 생산된 해산물들을 서로 교환하였다.
건립 경위
현재 복원된 화개장터는 옛날 화개장터의 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1999년 12월 4일에 하동군 화개면 탑리 726-8번지 일원 부지 면적 9,917㎡에 17억 원 가량의 예산을 투입하여 전통 장옥 3동, 장돌뱅이들의 저잣거리와 난전, 주막, 대장간 등 옛 시골장터 모습을 원형 그대로 되살리고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등 편의 시설을 곁들여 2001년 봄에 개장하였다.
변천
화개장이 언제부터 형성되어 상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화개면지』에서는 「조선 시대 하동 지역의 시장 분포[1770-1830]」라는 제하(題下)에서 당시의 시장 다섯 곳을 소개하면서, 화개장은 1770년대에 1일·6일 형식의 오일장이 섰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하동군사(河東郡史)』의 기록을 보면 1913년경에는 2일·7일 형식으로 장이 서다가 1928년경부터 1일·6일로 바뀌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중간에 개시 일에 다소 변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하동군사(河東郡史)』에서는 “옛적에는 화개장이 전국 7위의 거래량을 자랑한 큰 시장이었고", "남원과 상주의 상인들까지 모여들어 중국 비단과 제주도 생선까지도 거래를 했다.”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로서는 다른 시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해방 이후에도 1일과 6일에 서는 정기시로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 등으로 산촌이 황폐해지면서 화개장도 함께 쇠퇴해 갔다. 1948년 김동리(金東里)가 소설 「역마(驛馬)」를 쓸 당시의 낭만어린 화개장터는 현대화 바람에 의해 사라지고, 현재 그 자리에는 상설 상점 및 식당, 그리고 노래방과 술집 등 유흥업소 등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지금은 화개면사무소 앞 쪽 화개다리 옆에 1997년부터 복원한 현대식 화개장터가 옛날 전통시장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구성
화개장터는 공공시설과 사유 시설로 구성이 되어 있다. 공공시설로는 야외 장옥 3동·화장실·전망대·대장간·물탱크실·관광 안내 센터가 있으며 총 대지 면적은 3,012㎡이며, 건축 면적은 595.54㎡, 연면적은 391.29㎡, 건폐율은 19.77%, 용적률은 12.99%이다. 그리고 사유 시설로 구장옥 4동이 있으며 대지 면적은 3,330㎡이고, 건축물의 면적은 749.7㎡이다. 이 중 야외 장옥 3동과 관광 안내 센터·대장간·물탱크실은 모두 목구조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화장실은 경량 철골에 와이어 판넬로 되어 있고, 전망대는 목구조에 한식 기와로 되어 있다. 구장옥 4동은 경량 철골에 와이어 판넬, 목구조에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다.
현황
2010년 현재 화개장터의 점포수는 야외 장옥 3동 79개, 구장옥 3동 18개, 난전 12개, 좌판 및 보따리 점포 15개 등이다. 야외 장옥 3동에서는 지리산과 섬진강에서 나는 특산물인 야생녹차·둥글레·더덕·오미자·천마·참게장과 같은 약재 및 식품 등을 주로 취급하고 있다. 구 장옥 3동은 5개의 일반 식당, 4개의 다구 및 녹차 가게, 2개의 개량 한복 가게, 그리고 1개의 기념품 가게로 구성되어 있다. 음식점에서는 보리밥·산채비빔밥·국밥·참게탕·재첩·은어회·도토리묵 등을 팔고 있다. 화개장터에는 ‘화개장터’라고 쓰인 표지석과 화개장터의 유래 및 「화개장터」노래 가사를 적은 석조물, 역마상과 옛 보부상의 조형물이 있다. 또한 장터 내에 작은 공원이 있으며, 화개장터에서 일어난 3·1운동을 기념하는 화개장터 삼일운동 기념비도 서 있다. 매년 4월 초가 되면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10리에 걸쳐 벚꽃이 만발하며, 화개장터 벚꽃 축제가 열려 민속놀이 체험과 녹차 시음회 등 여러가지 행사를 벌인다. 또 5월에는 하동 야생차 문화 축제 기간에 맞춰 화개장터 역마 예술제도 열린다. 이는 김동리의 소설 「역마」를 주제로 하는 예술제로서 마당극과 판소리 공연 등이 펼쳐진다. 화개장터는 이제 영호남의 물산이 교류되는 시장을 넘어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하동의 물산과 문화를 찾아 방문하는 하동의 명소가 되었다.
참고문헌
여재규, 『하동군사(河東郡史)』(신영사, 1978)
『화개면지』(화개면지편찬위원회, 2002)
『통계연보』(하동군, 2009)
『한국일보』(2004. 11. 14)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하동 십리벚꽃길
혼례길 꽃비를 맞다
만개한 벚꽃나무 밑을 지난다. 40∼50년 된 벚나무들이 길가에 빽빽이 서 있다. 새하얀 꽃송이들이 겹겹이 포개지고 얽혀 두덩을 이룬다. 옆집 창가에도, 골목길 담 언저리에도, 산비탈에도, 화개천 계곡에도 벚꽃은 고개를 내민다. 슬쩍 하얀 소복자락 스치는 소리에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다. 눈에 들어오는 것 모두가 분홍빛 꽃물이 든 것 같다. 봄의 살비듬 콧잔등에 내려앉아 속살로 다시 스며든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바람에 날리는 꽃 이파리를 보며 어찌 인생을, 사랑을, 노래하지 않고 견디겠는가.”라고 했다. 소설가 박완서 는 벚꽃이 피는 모습을 “봄의 정령이 돌파구를 만나 아우성을 치며 분출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표현했다.
요란한 벚꽃 내음에 멀미가 난다
매년 봄이면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가는 국도는 어질어질하다. 전국에서도 알아준다는 벚꽃 군락지. 가지와 가지가 맞닿은 벚나무 터널은 멀리서도 단박에 눈에 띈다. 초입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라는 간판이 서 있다. 그 아래에 들어서면 분홍빛 빛깔에 눈을 베일 것 같아 걷는 것조차도 힘들다. 큰아기 속살같이 희뿌연 벚꽃이 피어나 있다. 고개를 위로 쭉 뻗어 걷다 보면 똑바로 걷지 못한다. 자꾸만 갈지자걸음을 한다. 천(川) 이쪽과 저쪽, 산자락 강 언덕, 지천에 벚꽃이다. 환장하게 흐드러지게 피었다. 화개 십리벚꽃길은 흔히 ‘혼례길’이라고 부른다. 벚꽃이 화사하게 피는 봄날, 남녀가 꽃비를 맞으며 이 길을 함께 걸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이 꽃길은 낭만적이고 인상적이어서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다. 이 환장한 봄날의 벚꽃, 바람이라도 불어 보라지. 바람에 날리는 분홍꽃 이파리를 보며 어찌 환장하지 않겠는가. 어찌 저 꽃을 보고 견딘단 말인가. 분홍빛 벚꽃이 마음까지도 분홍색으로 물들인다.
하얀 꽃잎은 꽃비가된다
바람에 날리는 분홍 꽃 이파리들. 봄바람이 꽃가지를 흔들고 흙바람이 일어 가슴의 큰 슬픔도 꽃잎처럼 바람에 묻힌다. 저리고 앞섶을 풀어 제친 처녀의 화들짝 놀란 가슴처럼. 하얗고 분홍빛의 봄비는 온몸으로 춤추는 봄바람의 뺨을 때린다. 소리 없는 바람의 일렁임에 따라 허공에서 춤추듯 길가로 고요히 내려앉는 꽃비들.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장관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 어떤 화가가 그린 그림보다 아름답고 화려하다. 하지만 한편으론 처연하다. 마지막 생을 앞다퉈 지는 꽃잎들. 10일 동안 하얀 물감을 뿌린 벚꽃은 사방으로 색(色)을 흩뿌리며 사그라진다. 포장도로를 따라 선들선들 밟고 오는 봄바람 속에 잊혀진 봄 슬픔이 되살아난다. 바지게 가득 떨어진 꽃잎 위로 봄은 쉬엄쉬엄 다음 계절에 그 자리를 내어준다.
햇살 받아 고요하게 빛나는 물길
쌍계사를 기점으로 다시 거슬러 화개장터로 나오면 섬진강과 만난다. 뉘엿거리며 땅거미가 주위를 조용히 에워싸기 시작한다. 벚꽃도 점차 빛을 잃어간다. 미처 눈에 다 담기도 전에 지고 만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벚꽃은 잠깐 사이로 떨어져 짧은 봄날에 하얀 마침표를 찍는다. 그 흔들리는 듯한 땅거미 속에서 모든 것이 멀어져 간다. 바람은 휘청거리는 다리를 모아 허둥지둥 둥지로 숨어든다. 해질 무렵의 섬진강. 봄 언저리에 강은 자꾸만 밑으로만 흘러간다. 뭍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 깔렸는데도 수면에는 으스레하게 석양이 남아 있다. 바람에 따라 정처 없이 일렁이는 은빛 물결은 연신 숨 가쁜 토악질을 한다. 꺼져가는 생의 마지막을 잡으려는 안간힘처럼 느껴진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모래톱과 고요하게 느리게 흘러가는 강물 속에 점점의 섬처럼 사람들이 서 있다.
출처:(길숲섬)
2~300년 묵은 소나무가 즐비한 하동송림(河東松林) 공원
영호남 사람들이 장을 펼치는 화개장터의 모습
쌍개사 가는 벚꽃 십리길 일부
2024-03-27 작성자 청해명파
첫댓글 가고파든 쌍계사벗꽃길 화계장터 명사십리 의 영상으로 대신만족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현장에서 뵈올까 했는데
안 오셨더군요. 앞으로도 늘 건강하시고
서해랑길에서 매회마다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