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수행 / 한암 큰스님
결심이란 말은 결정적 마음이라,
가히 해야 될 일에 대하여 결코 한번 해보겠다는 마음이니
다시 말하면 곧 용맹심, 정직심, 견실심이다.
이 마음을 일으킨 자는 일의 크고 작고 간에 모두 이루어 냅니다.
보시요.
세존이 야반에 성을 넘어서 설산에 들어가 육년 고행을 하시다가
납월(12) 팔일 밤에 계명성을 보시고 도를 깨달으신 것도
용맹심에서 나온 것이요, 혜가대사가 눈에 팔을 잘라서
마침내 골수를 얻었다고 인가를 받으신 것도 용맹심에서 나온 것이요,
협존자는 성수 80에 옆구리를 자리에 대지 않고,
법상선사는 대매산 절정에서 연잎옷과 송화가루만 먹으며
30년을 여덟치 철탑을 머리에 이고 수면을 말하지 않으시고,
대의선사는 60년을 마음을 거두어 눕지 않으시고,
현사화상은 밥을 겨우 기운이 지탱할 만큼만 드시고 하루 종일 앉으시고,
영우선사는 대제봉정에서 40년을 정밀히 닦았는데
집도 없고 항상 계실 곳도 없었던 것이 모두 용맹심에서 나온 것이요,
진표율사가 손과 발이 끊어져 떨어지도록 돌을 두드리며 참화하여
지장, 미륵 두 성현이 출현하여 이마를 어루만져 계를 주시고
아간의 계집종 욱면이 줄로 두 손바닥을 꿰어서 합장하고
북을 두드리며 염불 정진하다가 지붕을 뚫고 올라가
서쪽 교외를 지나 가다가 몸을 버리고 진신(眞身)을 나타내어
연화대에 앉아서 대 광명을 뿜으니 그 밖의 옛 조사 성현들의
정진과 고된 수련을 다 들 수가 없도다.
이와 같이 그 참기 어려움을 능히 참고
실행하기 어려움을 능히 실행하셨는데
지금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고대광실에 잠만 자고
무명업식(無明業識)에 푹 취하여 분발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는가.
세상에서 사소한 기술직 한 가지를 배우더라도
성의가 없으면 교묘한 경지에 이르기 어렵거늘
위없는 대도를 구하려는 출가인이 어찌 결심이 없이
성공할 가망이 있으리오.
대도는 그만 두더라도 사업과 공명을 구하더라도
영웅호걸이라도 다 결심이 있는 그 사람들 차지이다.
사람마다 시작도 없는 겁(劫)으로 부터 익혀 왔기 때문에
결심을 내지 않아도 빛을 보고 소리를 들음에
자연히 물이 들어 때때로 생각 생각에 집착하여
구하고 바라는 것이 그뿐이니 어느 여가에
대사업과 대공명을 경영하며 존현경성(尊賢敬聖)과
성불작조(成佛作祖)할 큰 지원(志願-큰뜻)을 발 하리요.
이 결심이 아니면 도저히 이 싹도 얻기 어렵습니다.
결심은 한번 발할 뿐만 아니라 생각생각에 발하고
때때로 발하는 가운데 또 발하여 필경에는 견고하여
물러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야 성공합니다.
설사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최초의 발심을 저버리면 안 됩니다.
부처와 조사가 오랜 겁 전에 정각을 이루시고
만 가지 덕행을 겸비하여 닦아서 광도중생(廣度衆生)을 마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성공한 뒤에 자비와 지혜심을 일으켜
중생을 제도하지 않으면 또한 결심이 타락됩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 세존과 같이 입산고행하고
이조(二祖 - 혜가스님)와 같이 눈에 서서
팔을 잘라야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각기 자기 입장에서 자기의 직책을 용감히 진행하여
물러나지 않는 것이 진실한 결심입니다.
참선하는 이는 의심 덩어리가 홀로 드러나
성성하고도 고요한 것을 동등(함께)히 지니며,
염불하는 이는 입으로 외는 것을 마음으로 상응하여 일심으로 해야 하며,
경을 보는 이는 본성자리를 반조하며 문자에 초탈하며,
가람을 수호하는 이는 인과를 믿고 사리를 깊이 통달하며
공양과 예경을 부지런히 하며,
기도하고 주문을 외우는 이는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업장을 소멸하며, 또한 사람을 위하여 적은 일의
임무라도 성심을 다하여 실패하지 않게 함이,
하늘이 준 임무를 다하고 불타의 부촉하신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심으로 입산고행 함과 눈에 서서 팔을 자르는 것과 비교하면
크고 작기는 비록 다르나 결심의 공은 같으니
작은 일을 결심하여 공력을 들이는 이는 큰 일에도
능히 결심과 공력을 들일 뜻과 기운을 품었거니와
작은 일을 등한히 하는 이는 큰 일을 보고 들으면
물러날 생각이 나나니
그런즉 자기의 직무를 힘을 다하여 준공하는 것이
결심의 뿌리와 원류가 된다 하오니 뿌리가 부실하면
지엽(가지와 잎) 번성하지 못하고 원류가 부족하면
바닷 물에 도달하지 못하나니
비유하자면 기초를 평탄히 하는 이는
높은 곳은 높은대로 평탄하고 낮은 곳은 낮은대로 평탄히 하는 것과 같이
큰 일은 큰 일대로 결심하고 작은 일은 작은 일대로 결심하여
각기 직책 맡은 대로 힘을 다해 성공하면 사람마다 성공하고
집집마다 성공하고 사회가 성공하니,
사업, 공명, 문명, 도덕, 기술, 농축 등이 모조리 하나로
성공되지 않는 것이 없으리니 충효자선도 여기에 있고
성불작조도 여기에 있으니 우리 백성이 승속, 남녀귀천,
노소없이 아동주졸(兒童走卒)이 모두 결심을 발하고
용맹무퇴할 지원을 세우는 가운데 또 세웁시다.
결심을 발한 뒤에 실행이 되고 길이 창성 무궁하여
불일(佛日)이 더욱 빛나고 법륜(法輪)이 항상 돌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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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스님 행장
근대의 고승인 한암(漢巖)의 본관은 온양 방씨(方氏)이며
1876년 3월 27일에 강원도 화천에서 아버지 기순(箕淳)과
어머니 선산 길씨(吉氏) 사이에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호가 한암이고 법명이 중원(重遠)이다.
한암은 천성이 영특하고 총기가 빼어났으며,
한번 의심이 생기면 풀릴 때까지 해답을 구하기를
그만두지 않는 성격을 지녔다고 전한다.
9세에 서당에서 '사략'(史略)을 읽다가
'태고에 천황씨(天皇氏)가 있었다'는 첫 대목에 문득 의심을 일으켜,
선생에게 물었으나 답을 얻지 못했다.
이후 그의 가슴 속에는 잠시도 놓아버릴 수 없는 의심이 일었으며,
마침내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본래 면목을 찾는
내적인 문제로 화하게 되었다.
1897년 22세 때 금강산을 유람하던 중
인간의 능력과 욕망의 허망함을 사색하다
마침내 입산수도를 결심하고 금강산 장안사의
행름(行凜)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수행했는데,
그때 △진정한 나를 찾고 △부모의 은혜를 갚으며
△극락에 가겠다는 세 가지 원력을 세웠다.
출가한 한암은 어느 날 금강산 신계사의 보운강회(普雲講會)에서
우연히 보조(普照)국사의 '수심결'(修心訣)을 읽다가
제1차 깨달음을 얻었으며 1899년 24세 되던 해에
전국의 고승들을 찾아 구도의 길에 나섰으며
그해 가을 김천 청암사에서 경허(鏡虛) 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때 경허가 '금강경' 사구게(四句偈)를 일러주는데,
갑자기 안광(眼光)이 홀연히 열리면서 깨달았는데
이때 한암은
"발 아래 하늘 있고, 머리 위에 땅 있네(脚下靑天頭上巒)/
본래 안팎이나 중간은 없는 것(本無內外亦中間)/
절름발이가 걷고, 소경이 봄이여(跛者 行盲者見)/
북산은 말없이 남산을 대하고 있구나(北山無語對南山)"
라는 오도송을 읊었다.
이처럼 '다시 깨친' 이후 한암은 세상사의 넘나듦에
자유자재한 대자유인이 되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선풍(禪風)을 떨치며 후학을 교화하였다.
1921년 9월에 건봉사 만일암 선원의 조실로 추대받고,
선방납자들을 지도하였는데 이때 '선원규례'(禪院規例)라는
선원 규칙을 제정하여, 참가 대중의 화합과 수행정진에 전념하도록 가르쳤다.
50세가 되던 1925년 한암은 서울 봉은사에서 조실로 있다가
"내 차라리 천년동안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寧爲千年藏踪鶴)/
백년동안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不學百年巧言鶯)"
라는 게송을 남기고 이듬해 강원도 오대산에 들어
상원사에서 입적할 때까지 27년동안 주석하며 이곳에서 선풍을 진작했다.
한암은 1926년에는 '승가 5칙'을 제정했고
1928년 경봉선사와 서간문답이 시작된 후 총 24편의 서신을 교환했는데,
이 서간문은 '화중연화소식'(火中蓮華消息)에 실려 있다.
1929년 1월 5일 한암은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에서
원로기관인 7인의 교정(敎正)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대되었다.
1930년 '불교' 제 70호에 '해동초조(海東初祖)에 대하야'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서 한암은 보조법통설(普照法統說)에다가
초조를 도의(道義)로 설정하여, 구산선문(九山禪門)에까지 소급하여
조계종의 시초를 앞당기고 있다.
즉 그는 조계종이 육조(六祖)-마조(馬祖) 계통의 본원적 선이지,
임제선이 아니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 후 1931년 3월 '선사(先師) 경허화상 행장'을 저술했다.
1935년 3월에 선학원에서 개최한 조선불교 수좌대회에서
한암은 혜월, 만공과 함께 조선불교 선종의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1936년 봄 강원도 3대 본사 승려수련소를 상원사에 설치하고,
매년 각 절에서 수련생을 모집하여 불경을 강설했다.
1937년 한암은 '보조법어'(普照法語) '고려국보조선사어록찬집중간서'
'금강경오가해' 등을 편집해 현토를 붙여 간행하였으며
그 해 상원사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비구계와 보살계를 설하니
수계대중이 80여 명이었다.
1941년 6월 조선불교 조계종(曹溪宗)이 출범되었을 때
한암은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4년 동안 종단을 이끌었다.
1947년 정월 해제 직후 상원사에 화재가 발생해 법당과 요사채가
전부 타버렸는데 이때 한암의 문집인 '일발록'(一鉢錄)도 함께 소실되었다.
1948년 해방 후 조선불교 초대 교정이었던 한영(漢永)스님이 입적하자,
6월 30일 한암이 제 2대 교정으로 추대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절에 있던 대중들이 피난을 떠났지만 한암은 상원사에 남았다.
야밤에 대원들을 이끌고 와서 공비를 토벌하기위해
절을 불태워야 한다고 알리는 장교에게, 한암은 잠깐 기다리라고
이르고 가사와 장삼을 갈아입은 뒤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 앞에 좌정한 후 이제 불을 질러도 좋다고 말했다.
장교가 나올 것을 강요하자 한암은 "그대가 장군의 부하라면,
나는 부처님의 제자다. 그대가 장군의 명령을 따르듯이
나도 부처님의 명령을 따를 뿐이니, 어서 불을 지르시오"라 하였다.
결국 장교는 그의 인격에 압도되어 돌아갔다고 한다.
1951년 3월 초 한암은 미질(微疾)을 보였고
7일째 되던 날 아침인 22일,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신 후
장삼을 갖춰 입고 선상에 단정히 좌선하는 자세로 앉아 열반하니,
세수 76세 법랍 54세였다.
제자로는 탄허(呑虛) 보문(普門) 난암(煖庵) 등이 있으며,
1959년 3월 문도들이 상원사에 그의 부도(浮屠)와 비를 세웠다.
한암은 20여 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종정직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불교계의 최고지도자로서 한국의 전통 선을 진작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특히 '보조법어'(普照法語)를 현토 간행하고 선교겸수를 가르쳤다는 점에서
'보조 선의 근대적 계승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참선 중에도 반드시 납자에게 '금강경'을 송독하게 하여
선교일치를 실천했으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항상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참선에만 몰두했다고 전한다.
만공과 한암은 함께 경허의 법을 이어 조선 선가(禪家) 중흥의 전성시대를
풍미한 인물로서, 각기 독자적인 가풍을 이루어
당대에 '남만공(南滿空), 북한암(北漢岩)'으로 불렸다.
한암은 영원한 구도자로서의 꼿꼿함을 잃지 않았던 선사였으며,
앵무새이기를 거부한 선과 교를 아우른 진정한 스님이었으며
몇 차례의 깨달음 후에도 닦음을 멈추지 않은 당대의 뛰어난 선객이었다.
[출처] 나홀로 절로 | 작성자 성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