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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 秋 戰 國 時 代
秦(진)
《사기》에 의하면 진은 상나라 주왕 제신의 시중을 들던 간신 ‘오래’의 후예라고 한다. 오
래의 아버지는 蜚廉(비렴)인데 비렴에게는 季勝(계승)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계승의 후
손 중에 趙父(조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보는 말을 잘 몰아서 周 繆王(주 목왕)의 총애
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주 목왕이 명마를 얻어 서쪽으로 순수를 떠났는데 너무나 즐거
워 돌아오는 것을 잊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徐偃王(서언왕)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보는
목왕의 수레를 끌고 하루에 1,000리를 달려 주나라로 돌아와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
자 목왕은 趙城(조성)을 조보에게 분봉했고, 조보는 이때부터 趙氏(조씨)가 되었다고 한다.
비렴이 계승을 낳은지 5대째가 되는 조보 때에 이르러 조성에서 따로 살게 된 샘이다. 훗
날 조나라의 건국의 시조가 되는 조최가 바로 그의 후손이다. 때문에 오래의 자손들도 조
성에 살며 조씨로 살고 있었는데, 기원전 900년 즈음에 西周(서주)의 孝王(효왕)을 시중들
고 있던 非子(비자)가 말의 생산을 실시해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효왕이 “옛날 伯翳
(백예)가 순 임금을 위해 가축을 잘 번식시켜 봉토와 영씨 성을 받았는데 그 후손이 다시
가축을 잘 관리하니 땅을 주고 봉읍으로 삼는다.”하여 嬴(영)이라는 성, 趙(조)라는 씨를
받아 영씨의 제사를 잇고, 대부가 되어 秦邑(진읍)에 영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 후 진은
기원전 8세기 초 주나라가 犬戎(견융)의 공격을 받을 때 유왕을 도왔고 기원전 771년 周
平王(주 평왕)이 동쪽 雒邑(낙읍)으로 천도할 때 호위한 공으로 陝西省(섬서성)서부 지역을
맡아 제후로 승격하였다. 이때가 襄公(양공) 시절이다.
참고로 훗날 대립하게 되는 삼진의 조 왕실의 영성 조씨로 시조가 조보다. 조보의 장남의
후손이 진나라, 조보의 차남의 후손이 조나라다.
秦 王 朝 世 家
戰國時代(전국시대)
秦(진) BC. 9세기∼BC. 206 위치 陝西省(섬서성) 성: 嬴(영) 작위 백작
| 代數 | 在位期間 | 位 | 姓名 | 關係 | 首都 | 現地名 |
| BC. 900∼BC. 858 | 非子(비자) | 雍 | 陝西省 鳳翔 | |||
| BC. 857∼BC. 848 | 秦侯(진후) | 비자의 아들 | (옹) | 섬서성 봉상 | ||
| BC. 847∼BC. 845 | 公伯(공백) | 진후의 아들 | ||||
| BC. 845∼BC. 822 | 秦仲(진중) | 공백의 아들 | ||||
| 제1대 | BC. 821∼BC. 778 | 莊公(장공) | 其(기) | 진중의 아들 | ||
| 제2대 | BC. 777∼BC. 766 | 襄公(양공) | 장공의 아들 | |||
| 제3대 | BC. 765∼BC. 716 | 文公(문공) | 양공의 아들 | |||
| 제4대 | BC. 716∼BC. 704 | 寧公(영공) | 문공의 손자 | |||
| 제5대 | BC. 703∼BC. 698 | 出子(출자) | 曼(만) | 영공의 아들 | ||
| 제6대 | BC. 697∼BC. 678 | 武公(무공) | 헌공의 장자 | |||
| 제7대 | BC. 677∼BC. 676 | 德公(덕공) | 무공의 동생 | |||
| 제8대 | BC. 675∼BC. 664 | 宣公(선공) | 덕공의 장남 | |||
| 제9대 | BC. 663∼BC. 660 | 成公(성공) | 휘 | 덕공의 아들 | ||
| 제10대 | BC. 659∼BC. 621 | 穆公(목공) | 任好(임호) | 덕공의 아들 | ||
| 제11대 | BC. 620∼BC. 609 | 康公(강공) | 罃(앵) | 목공의 아들 | ||
| 제12대 | BC. 608∼BC. 604 | 共公(공공) | 稻(도) | 강공의 아들 | ||
| 제13대 | BC. 603∼BC. 577 | 桓公(환공) | 榮(영) | 공공의 아들 | ||
| 제14대 | BC. 576∼BC. 537 | 景公(경공) | 石(석) | 환공의 아들 | ||
| 제15대 | BC. 536∼BC. 501 | 哀公(애공) | 籍.(적) | 경공의 아들 | ||
| 제16대 | BC. 500∼BC. 491 | 惠公(혜공) | 寧(영) | 애공의 손자 | ||
| 제17대 | BC. 490∼BC. 477 | 悼公(도공) | 盤(반) | 혜공의 아들 | ||
| 제18대 | BC. 477∼BC. 443 | 厲共公(여공공) | 剌(날) | 도공의 아들 | ||
| 제19대 | BC. 443∼BC. 429 | 躁公(조공) | 欣(흔) | 여공의 아들 | ||
| 제20대 | BC. 428∼BC. 425 | 懷公(회공) | 封(봉) | 여공의 아들 | ||
| 제21대 | BC. 425∼BC. 415 | 靈公(영공) | 회공의 손자 | |||
| 제22대 | BC. 141∼BC. 400 | 簡公(간공) | 悼子(도자) | 여공의 아들 | ||
| 제23대 | BC. 399∼BC. 387 | 惠公(혜공) | 간공의 아들 | |||
| 제24대 | BC. 386∼BC. 385 | 出公(출공) | 혜공의 아들 | |||
| 제25대 | BC. 385∼BC. 362 | 獻公(헌공) | 師隰(사습) | 영공의 아들 | ||
| 제26대 | BC. 361∼BC. 338 | 孝公(효공) | 渠梁(거량) | 헌공의 아들 | ||
| 제27대 | BC. 337∼BC. 311 | 惠文王(혜문왕) | 駟(사) | 효공의 아들 | ||
| 제28대 | BC. 311∼BC. 307 | 武王(무왕) | 蕩(탕) | 혜문왕의 자 | ||
| 제29대 | BC. 306∼BC. 251 | 昭襄王(소양왕) | 稷(직) | 무왕의 동생 | ||
| 제30대 | BC. 250∼BC. 250 | 孝文王(효문왕) | 柱(주) | 소양왕의 자 | ||
| 제31대 | BC. 249∼BC. 247 | 莊襄王(장양왕) | 異人(이인) | 효문왕의 자 | ||
| 제32대 | BC. 246∼BC. 210 | 始皇帝(시황제) | 政(정) | 장양왕의 자 | ||
| 제33대 | BC. 209∼BC. 207 | 二世皇帝 | 胡亥(호해) | 시황제의 자 | ||
| 제34대 | BC. 206 | 秦王(진왕) | 子嬰(자영) |
비자
오래는 비렴의 아들인데 요절했다. 그에게 女防(여방)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여방은
旁皐(방고), 방고는 태궤, 태궤는 大駱(대락). 대략은 非子를 낳았다. 비자는 犬丘(
견구)에 살았다. 말과 가축을 좋아했고. 또 사육과 번식에도 뛰어났다. 견구 사람
들이 주 효왕에게 이런 사실을 말하자 주 효왕이 비자를 불러 汧水(견수)와 위수
사이에서 말을 사육하게 했다. 주 효왕은 비자를 대략의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그
러나 신후의 딸이 대략의 아내가 되어 아들 成(성)을 낳자 그가 적자가 되었다. 그
후 진나라 땅을 비자에게 봉지로 내리고 다시 영씨의 제사를 잇게 하고는 秦嬴(진
영)으로 불렀다.
진후
진영은 秦侯(진후)를 낳았다. 진후는 재위 10년 만에 죽었다. 진후는 공백을 낳았다.
공백
진후는 공백을 낳았고 공백은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공백은 진중을 낳았다
진중(BC. ?∼BC. 822) 진공백의 아들이며, 진 장공의 아버지.
이름은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공화 13년(기원전 842년), 周 厲王(주 여왕)의 폭정
으로 여왕이 국인의 반란 때문에 彘(체) 땅으로 쫓겨났다. 이 때를 틈타 서융이 침략해
왔다. 약탈과 살육을 자행해 견구에 이르렀다. 그리고 대락 부족을 죽였다. 주 선왕 원
년(기원전 828년), 주 여왕의 아들 주 선왕이 즉위했다, 주 선왕 5년(기원전 824년),
주 선왕은 진중을 대부로 임명해 진중에게 서융을 치게 했다. 주 선왕 7년(기원전 822
년), 진중은 서융과 싸웠는데 그들과 싸우다가 패해 죽어서 그 장남인 영기가 뒤를 이
으니 그가 바로 진 장공이다.
제1대 장공(BC. ?∼BC. 778) 진중의 아들, 진 양공의 아버지다.
진 장공 원년(기원전 821년), 주 선왕은 진 장공의 형제 5명을 주나라에 입조하게 했다.
그리고 7.000명의 병사를 데리고 서융을 쳐서 격파했다. 이에 주 선왕은 진 장공을 서
수 대부로 봉했다. 그리고 犬丘(견구) 땅을 진 장공에게 내렸다. 진 장공은 西犬丘(서견
구)에 살며 아들 3명을 낳았다. 장남을 世父(세보)라고 했는데 세보는 “서융이 나의 조
부인 진중을 죽였다. 내가 서융의 왕을 죽이지 않으면 봉읍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서융
을 치기위해 아우인 영기에게 자리를 양보해 영기가 태자가 되었다. 진 장공 44년(기원
전 788년), 진 장공이 죽으니 차남 영기가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진 양공이다.
제2대 양공(BC. ?∼BC. 766) 진 장공의 아들, 진 문공의 아버지
진 양공 원년(기원전 778년), 풍왕에게 여동생 繆嬴(목영)을 시집보냈다.
진 양공 2년(기원전 777년), 견구로 천도했는데 서융이 견구를 포위하자 세보가 서융을
치다가 포로가 되었다. 진 양공 3년(기원전 776년)에, 세보가 돌아왔다. 진 양공 7년(기
원전 770년), 申侯(신후)는 서융의 일파인 견융에게 호경을 치게해 周(주) 나라의 幽王
(유왕)과 鄭(정)나라의 桓公(환공)이 驪山(여산)에서 죽었다.
양공이 주나라를 구원하며 공을 세웠고 또한 주나라의 왕실이 견융의 반란을 피해 낙읍
(지금의 낙양)으로 천도할 때도 공을 세워 주 평왕이 봉지와 백작의 작위를 내렸다. 진
이 처음으로 나라를 가지게 되었다. 진 양공 12년(기원전 766년), 진 양공이 서융을 토
벌하기 위해 기산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죽어 서수 땅에 묻혔다.
제3대 문공(BC. ?∼BC. 716) 진 양공의 아들.
진 문공 원년(기원전 765년), 진 양공이 죽자 진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문공은 西垂宮(
서수궁)에 거주했다. 진 문공 3년(기원전 763년), 문공은 700명의 병사를 거느라고 동쪽
변경에서 사냥했다. 진 문공 4년(기원전 762년), 진 문공은 견수와 위수에 도착해 회합
하면서 말했다. “옛날에 주 왕실이 이 땅을 과인의 선조이신 진영(진 비자)에게 봉읍으
로 내리셨는데, 결국에는 제후가 되었소,” 잔 문공은 이 땅에서 일어날 운명에 대해 점
을 치게 했는데, 그 점이 길하게 나왔다. 이에 진 문공은 그 땅에 성읍을 세웠다.
진 문공 10년(기원전 756년), 문공이 꿈을 꾸었는데, 한 마리의 노란 뱀이 나와 그 몸이
하늘 위아래로 늘어뜨려 땅끝까지 닿았으며, 주둥이는 부성 이대의 밭에 이르렀다.
문공은 꿈에서 깨어난 뒤 사돈에게 그 꿈에 대해 물었다. 사돈이 대답했다. “이것은 천
제의 상징인데, 청컨대 군후께서는 제사를 지내시지요.” 문공은 명을 내려 부치에 제단
을 세우고 소, 말, 양을 잡아 백제에게 제사했다. 진 문공 13년(기원전 753년), 문공은
처음으로 사관을 두고 큰 일을 기록하게 했으며,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진 문공 16년(기
원전 750년), 문공은 병사들을 보내 서융을 쳤는데, 서융의 병사들이 패배하여 달아났다.
났다. 그리하여 서주의 유민들을 거두어 들이고, 기산 지방을 차지 했으며, 그 동쪽을 동
주의 천자에게 바쳤다. 진 문공 19년(기원전 747년), 문공은 진창 지방에서 사냥을 했는
데. 복판을 거쳐갈 때 진보라고 하는 돌을 얻었다. 그것의 색은 얼굴과 같았으며, 형상은
간과 같은 모습이었다. 문공은 북판에 진보사를 건설했고, 거기서 가축을 잡아 제사했다.
진보사의 동남쪽에서 마른 하늘임에도 불구하고, 벼락치는 소리가 들였고, 꿩의 울음소
리도 들리니, 문공은 거기에 산이 있다고 여겨, 그 산을 계명산이라고 했다.
. 진 문공 20년(기원전 746년), 문공은 삼족을 죽이는 연좌제 형벌을 만들었다. 진 문공
48년(기원전 718년) 태자가 죽자, 그 시호를 靜(정)으로 해서, 秦 靜公(진 정공)이 되었
다. 문공 50년(기원전 716년), 문공이 죽어 西山(서산)에 안장되었다. 정공의 아들인 태
자가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진 영공이다.
제4대 영공(BC. ?∼BC. 704) 진 문공의 손자. 추존된 진 정공의 장남이다.
영공 2년(기원전 714년), 신읍(平陽)에서 岐山(기산) 인근의 平陽(평양)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진 영공은 병사를 보내 탕사를 쳤다. 진 영공 3년(기원전 713년), 서융의 일족
인 亳(박)나라의 융족과 싸울 때 亳王(박왕)은 패해 서융으로 달아나자 마침내 蕩社(탕
사)를 멸망시켰다. 영공은 열살에 즉위해 재위 12년 만에 죽었다. 그를 서산에 안장했다
영공은 아들 셋을 두었다. 장남인 武公(무공)이 태자가 되었다. 무공의 동복 동생이 德
公(덕공)이고. 막내인 出子(출자)는 魯姬子(노희자) 소생이다. 영공 사후 大庶長 弗忌(대
서장 불기). 威壘(위루). 三父(삼보) 등이 장남인 무공을 폐하고 출자를 옹립했다.
제5대 출자(BC.?∼BC. 698) 진 헌공의 막내아들, 진 무공, 진 덕공의 동생
진 영공 12년(기원전 704년), 영공이 죽자 대서장 불기와 위루. 삼보 등이 태자인 무공
을 폐위시키고. 동생인 영만을 추대하여 영공의 뒤를 이어 군주가 되었다. 출자 6년(기
원전 698년). 삼보 등이 다른 마음을 품어서 사람을 시켜 출자를 죽였다. 그리하여 그
의 형이자 원래 태자였던 무공을 옹립했다. 무공이 진나라 군주가 된 뒤에 삼보의 무리
를 제거한다.
제6대 무공(BC. ?∼BC. 678) 진 헌공의 막내아들, 진 출자, 진 덕공의 형
무공 3년(BC. 695년), 무공은 삼보 등의 무리를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이들이 출자를
시해했기 때문이다. 무공 10년(기원전 688년), 邽(규)와 冀(기)지역의 戎族(융족)을 토벌
했다. 그리고 무공은 거기에 현을 설치했다. 무공 11년(기원전 687년), 杜(두) 땅. 鄭(정
정나라의 초기위치) 땅에 縣(현)을 두었고 小虢(소괵)을 멸했다. 무공 20년(기원전 678년
) 무공이 죽어 雍邑(옹읍)의 평양에 묻혔다. 그리고 진나라에서 최초로 순장이 시행되었
는데 순장을 당한 사람이 66명 이었다. 무공의 아들인 白(백)은 보위에 오르지 못하고
평양 땅의 제후로 봉해졌다. 그 대신 군위는 무공의 아우인 덕공이 이어 받아 무공의 뒤
를 이었다.
제7대 덕공(BC. 710∼BC. 676) 진 헌공의 아들, 진 무공의 아우, 진 출자의 형
덕공 원년(BC. 677년), 덕공은 옹성의 大鄭宮(대정궁)에서 태뢰로 돼지. 양. 소 300 마리
를 제물로 바쳤다. 梁(양)나라 군주와 芮(예)나라 군주가 조공을 바쳤다.
덕공 2년(기원전 676년), 복날에 개고기를 먹게하여 복날에 개고기를 먹는 풍습이 생
겼다. 같은 해에 덕공이 죽었다. 그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진 선공. 차남은 진
성공. 삼남은 晉 文公(진 문공)을 세워준 것으로 유명한 진 목공이다.
제8대 선공(BC. ?∼BC. 664) 진 덕공의 아들, 진 성공, 진 목공의 형
진 성공 원년(기원전 675년), 왕자 퇴가 周 桓公 黑肩(주 환공 흑견), 燕(연)나라 衛(위
나라 )짜고 周 惠王(주 혜왕)을 몰아냈다. 진 선공 3년(기원전 673년), 鄭 厲公(정 여공)
과 虢公(괵공)이 주 혜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던 왕자 퇴를 죽였다. 진 선공 4년(BC.
672년), 渭南(위남. 陝西省 渭南市)에 密畤(밀치)를 만들고 晉(진)나라와 河陽(하양) 땅에
서 싸워 이겼다 선공 12년(BC. 664년), 선공이 죽어 陽(양)에 묻혔다. 선공에게는 그에
게는 아홉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보위에 오르지 못했다. 덕공의 차남이자 선공의
동생인 성공이 그 자리를 이었다.
제9대 성공(BC. ?∼BC. 660) 진 덕공의 아들이며, 진 선공의 동생이고 진 목공의 형이다.
진 성공 원년(기원전 663년), 梁(양)나라의 군주와 芮(예)나라의 군주가 입조했다.
진 성공4년(기원전 660년), 성공이 죽고 그 동생인 임호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晉 文公
(진 문공)을 세워준 진 목공이다.
제10대 목공(BC. ?∼BC. 621) 진 덕공의 아들이며, 진 강공의 아버지다.
목공 원년(기원전 659년), 목공은 군사를 이끌고 茅津(모진) 땅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목공 4년(기원전 656년), 목공은 晉(진)나라 군주 헌공의 딸이자 태자 신성의 누이와 결
혼했다. 진 목공 5년(기원전 655년) 진 헌공이 결혼 예물로 晉나라가 멸망시킨 虞(우)나
라의 신하인 百里奚(백리해)를 혼인 선물로 보냈다. 진 목공 9년(기원전 651년), 진 헌공
이 죽고 군위 쟁탈전이 일어나자 진나라에 인질로 와 있던 晉 혜공이 고국으로 돌아가면
영토를 양도한다는 조건으로 진나라를 떠나 晉(진)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진 혜공은 약
속을 지키지 않았다. 하지만 진 목공은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았다. 목공 14년(기원전 6
14년), 이번엔 晉(진)에 기근이 들자 원조를 요청했다. 신하들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진나라에는 양식을 보내지 말자고 주청했지만 목공은 “진의 백성은 죄가 없다.“ 라면서
양식을 보내주었다. 목공 15년(기원전 645년), 이번엔 秦(진)나라에 기근이 들자 晉(진)
나라에 원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괵석이라는 신하가 기근을 틈타서 공격하면 큰 공을
세울수 있다고 하였고 진 혜공은 그의 이견을 따랐다. 진 목공 15년(기원전 645년, 진
혜공은 배은망덕 하게도 이 기회를 노려 진나라를 침략하여 韓原(한원)에서 전투를 벌
렸다. 이때 진 목공은 진 혜공의 군대에 포위를 당해서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데 뜬금없
이 300명 군사가 나타나 진 목공을 구출한다. 과거 진 목공이 명마를 잃어버렸는데 도
둑을 잡고보니 굶주린 야인들이 진 목공의 말을 잡아먹어 버린 상태였다. 관리는 즉각
처형하자고 주청했지만 진 목공은 짐승 때문에 사람을 해칠 수 없다며 그들을 풀어주고
고기만 먹으면 속을 버릴테니 곁들여 먹으라고 술까지 내려주었다. 이때 목숨을 구한
야인들이 진 목공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위기를 넘긴 진 목공은 진 혜공
을 격파해 사로잡는다. 그는 배은망덕한 진 혜공을 죽이려 했지만 목공의 아내인 혜공의
누나가 동생을 살려달라고 간청하고, 천자인 주 양왕도 한 번 봐주면 어떻겠느냐고 권유
해 죽일 생각을 접는다. 대신 같은해 11월 진 목공은 晉(진) 혜공을 진나라로 돌려보내
주는 대신 태자 어를 인질로 요구하고 자신의 딸과 진 혜공의 태자 어를 결혼 시켰다.
그리고 그전에 약속받은 하외의 성 다섯 곳을 가져왔다.
진 목공 22년(기원전 638년), 晉(진) 혜공이 병을 얻어서 위독하였다. 태자는 자신의 부
인인 진 목공의 딸을 버리고 진나라 군위를 계승하기 위해서 晉(진)나라로 도망갔다. 말
도 없이 도망을 가버린 데다 자기 딸까지 내팽겨 쳤으니 진 목공은 격분한다. 목공 23
년(기원전 637년), 晉(진)나라로 돌아온 태자 어는 진 혜공의 뒤를 이어서 晉(진) 회공이
된다. 목공 24년(기원전 636년), 목공은 진나라로 사신을 보내 전국을 유랑하던 공자 중
이를 귀국시킨다고 통보하였다. 2월 공자 중이가 진나라의 국군으로 즉위하니 그가 바
로 晉 文公(진 문공)이다. 그리고 진문공은 사람을 시켜 진 회공을 죽였다. 같은 해 가을
주 양왕의 동생 대가 翟(적)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주 양왕을 공격했고, 주 양왕은 鄭(정)
나라로 도망갔다. 진 목공 25년(기원전 635년), 주 양왕이 秦(진)나라와 晉(진)나라에게
사신을 보내어서 주나라에 난리가 일어난 것을 알렸다. 이에 응답한 진 목공은 진 문공
을 도와서 양왕의 동생 대를 죽이고, 주 양왕을 낙읍으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진 목공
34년(기원전 624년), 서융에서 신하로 온 由餘(유여)라는 사람이 있었다. 진 목공은 진나
라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 화려한 진나라 궁궐을 보여줬지만 유여는 ‘이 궁궐을 짓기
위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피땀을 흘렸을지’ 한탄하면서 오히려 진 목공에게 창피를 줬다.
그러자 진 목공은 유여가 인재임을 알아보고 유여를 얻기위해 계책을 썼다. 우선 유여가
서융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을 끌며 억류하는 한편 서융의 왕에게 16명의 미인을 보
냈다. 기까스로 유여가 서융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서융의 왕은 진나라애 오랜 세월 머
물었던 유여를 의심하는 한편 미인들을 가까이 하느라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이때 진
목공의 신하가 유여에게 접근하여 설득했고, 결국 서융에 희망이 없음을 깨닭은 유여는
진 목공의 신하가 되었다. 유여는 진 목공에게 서융을 정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
고, 진 목공은 이를 그대로 실행해 진 양공 때 주 평왕에게 받았던 서융의 12개의 땅
을 얻을 수 있었다. 진 목공 36년(기원전 622년), 진 목공은 맹명시 등에게 다시 명해
晉(진)나라를 공격했다, 강을 건너자 진나라의 군대는 배를 불질러 버리고 배수진을 쳐
晉(진)나라를 공격했는데 晉(진)나라의 군대는 진나라의 사기에 눌려 피해만 다니다가
결국 진나라가 승리하여 과거의 패배를 설욕했다.
진 목공 37년(기원전 621년), 진나라가 유여의 계책을 받아들여 융왕을 토벌하고 서역
의 12국을 병탄해 1.000리의 땅을 개척했다. 마침내 서융일대를 제패한 배경이다. 진
목공이 죽자 순장한 사람이 177명에 달하였고 진나라는 진 목공 때의 강성함을 그대
로 이어가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사기 등에서 진 목공이 저평가되기도 한다.
제11대 강공(BC. ?∼BC. 609) 진 목공의 아들이다. 진 공공의 아버지다.
진 강공 원년(BC. 620년), 진 목공이 서거했을 때 晉 襄公(진 양공)도 죽었다. 진 양공
의 동생 雍(옹)은 秦(진)나라 여인 소생으로 秦(진)나라에 살았다. 晉(진)나라의 대신 趙
盾(조돈)이 옹을 옹립하기 위해 대부 隨會(수회)를 보내 영접하게 했다. 진나라가 군사
를 보내 令狐(영호)까지 호송했다. 그러나 당시 晉(진)나라 조정은 오히려 진양공의 아
들인 희익를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晉 靈公(진 영공)이다. 이에 진 강공은 노하여 진나
의 영호를 쳤으나 패배했다. 진나라 군사를 쳤으나 패배했다. 秦(진) 강공 2년(기원전 6
19년), 晉(진)나라를 쳐서 무성을 빼앗아 1년 전의 한을 풀었다. 진 강공 4년(기원전 61
7년) 晉(진)나라가 거기에 대한 복수로 秦(진)나라의 소량을 취했다. 진 강공 6년(기원전
615년), 진 강공이 晉(진)나라의 기미를 빼앗자 晉(진)나라는 하구에서 秦(진)나라에게 패
했다. 晉(진)나라의 수회가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수요로 하여금 晉(진)나라에 반역한
것처럼 꾸며 결국 晉(진)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진 강공 12년(기원전 609년), 진 강공
이 죽고 아들인 영도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 공공이다.
제12대 공공(BC. ?∼604) 진 강공의 아들이며, 진 환공의 아버지다.
진 공공 원년(기원전 608년), 晉(진)나라의 趙穿(조천)이 秦(진)나라의 동맹국인 송나라를
쳤다. 진 공공 2년(기원전 607년), 그 복수로 晉(진)나라의 초당을 포위했다. 같은 해 晉
成公(진 성공)은 조천을 보내 구원하게 했다. 진 공공 4년(기원전 605년), 진 공공이 죽
고 그 아들인 진 환공이 뒤를 이었다.
제13대 환공(BC. ?∼BC. 577) 진 공공의 아들이며 진 경공의 아버지
진 환공 10년(기원전 594년), 진 환공이 晉(진)나라를 쳤다. 양군이 보씨에서 교전했다.
晉(진)나라의 장수 위과가 秦(진)나라 장수인 두회와 싸워 두회를 사로잡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첩을 아버지의 유언대로 순장시키지 않아 그 첩의 아버지가 풀을 묶어 도왔기
때문이라 한다. 이것이 바로 결초보은의 고사성어다. 진 환공 15년(기원전 589년), 노
성공, 초나라의 공자 영제, 송나라의 화원, 陳(진)나라 공손녕, 위나라의 공자 량부, 정나
라의 공자 거질, 제나라의 대부, 曹(조)나라, 邾(주)나라, 설나라, 鄫(증)나라와 촉 땅에서
회맹했다. 진 환공 21년(기원전 583년), 晉 景公(진 경공)은 秦 桓公(진 환공)과 황하에
서 회맹했다. 진 환공 22년(기원전 582년), 진 환공이 맹약을 저버리고 적과 함께 晉(진)
나라를 쳤다. 진 환공 24년(기원전 580년) 진 환공이 맹약을 파기했다. 진 환공 25년(기
원전 579년), 백적과 晉(진)나라를 쳤다. 그러나 같이 온 백적이 패해 결국 일은 실패했
다. 진 환공 27년(기원전 577년), 진 환공이 죽고 아들 석이 즉위 했으니 그가 秦(진) 景
公(진 경공)이다.
제14대 경공(BC. ?∼BC. 537) 진 환공의 아들, 진 애공의 아버지
경공 18년(기원전 559년), 晉(진) 도공은 荀偃(순언)을 보내 노나라의 숙손표. 제나라의
최저. 송나라의 화열. 중강. 위나라의 북궁팔. 정나라의 공손만. 조나라. 거나라. 邾(주)
나라. 등나라. 설나라. 杞(기)나라. 小邾(소주) 등과 함께 秦(진)나라를 쳤다. 거기에 견
디지 못한 秦(진)나라가 대패했다. 경공 36년(기원전 541년), 경공의 동복 아우인 后子
鍼(후자 감)이 모함을 받자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晉(진)나라로 달아났다. 경공 40년(기
원전 537년), 진 경공이 죽고 그 아들 영적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 애공이다.
제15대 애공(BC. ?∼BC. 501) 진 경공의 아들이며 진 혜공의 할아버지다
진 애공 원년(기원전 536년), 이 당시 초나라는 초 장왕 때에 전성기를 이룬 국력을 초
장왕의 아들인 초 공왕 때부터 조금씩 깎아 먹기 시작하더니 손자인 초 평왕 때에는 이
르러서는 국력이 쇠약해졌다. 진 애공 10년(BC. 527년), 초 평왕은 상황을 호전하기 위
해 秦(진) 애공의 여동생인 孟嬴(맹영. 伯嬴. 백영이라고도 함)을 태자비로 삼아 도움을
받고자 했는데. 간신 비무기의 농간 때문에 초 평왕이 대신 차지하고 건에게는 맹영을
따라온 제나라 출신 시녀를 공주라고 속여 맺어주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비무기는
태자 건과 그 스승인 오사. 그리고 오사의 아들인 오상과 伍員(오운) 등 형제까지 해치
려했다. 오사와 오상 부자는 도망치지 않고 처형당했지만 오운은 태자 건과 그 아들 공
자 승을 데리고 정나라로 갔다. 그러나 태자 건이 정나라 군주를 죽이려다가 오히려 들
켜서 잡혀 죽었다. 그리하여 오운 즉 오자서는 오나라로 달아나 공자 광의 신임을 받아
오왕 료를 죽이고 공자 광이 왕이 되니 그가 바로 합려다. 오자서는 물론 대병법가인 孫
武(손무)와 楚(초)나라애서 망명한 伯嚭(백비) 등을 등용해 국력이 매우 커졌다.
진 애공 31년(기원전 506년) 오왕 합려가 초나라를 쳐서 초 소왕은 달아나고 영도가 점
령되어 노략질로 개판이 되었다. 신포서는 진나라로 가서 구원을 요청했는데 진 애공은
초나라는 신의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신포서가 7일 동안 요청을 하니
결국 진 애공은 그 정성에 굴복해 초나라에 원군을 보내 초나라는 다시 서게 되었다
진 애공 36년(기원전 501년), 진 애공이 병으로 죽었고 아들인 平(평)이 일찍 죽었는데
그는 秦 夷公(진 이공)으로 추증 되었고 그 뒤를 이은 것은 손자인 녕이었다. 그가 바로
진 혜공이다.
제16대 혜공(BC. ?∼BC. 491) 진 애공의 손자며, 추존 군주인 이공의 아들이다.
혜공 원년(BC. 500년),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혜공 10년(기원전 491년), 혜공이 재위
10년 만에 죽고 아들인 영반이 뒤를 이어니 그가 도공이다.
제17대 도공(BC. ?∼BC. 477) 진 혜공의 아들이며 진 여공공의 아버지다.
진 혜공 10년(기원전 491년), 혜공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도공이 즉위하였다. 진 도공 1
5년(기원전 477년) 진 도공이 사망하여 丘里(구리)의 진 景公(경공)의 묘 서쪽에 묻혔다.
그리고 그 아들인 영랄이 뒤를 이어니 여공공이다.
제18대 여공공(BC. ?∼BC. 443) 진 도공의 아들이며 진 조공, 진 회공의 아버지다
여공공 2년(기원전 475년), 촉나라가 여공공에게 조공을 바쳤다. 여공공 6년(기원전 47
1년), 의거족이 조공하고 연저국이 구원을 청했다. 여공공 7년(기원전 470년), 초나라의
왕자 웅영이 진나라에 투항했다. 진 여공공 10년(기원전 467년), 하늘에서 혜성이 나타
났다. 여공공 24년(기원전 453년), 지백이 죽고 晉(진)나라는 사실상 삼분되었다. 여공공
26년(기원전 451년), 좌서장이 남정에 성을 쌓았다. 여공 28년(기원전 449년), 월나라
왕이 진 여공공의 딸과 혼인했다. 여공공 33년(BC. 444년), 義渠(의거)를 정벌해 왕을
사로 잡았다. 여공공 34년(기원전 443년), 일식이 일어나 하늘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별
이 보일 지경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 여공공이 죽고 아들인 흔이 뒤를 이어니 그가 진
조공이다.
제19대 조공(BC. ?∼BC. 429) 여공공의 아들이며 회공의 형이다
조공 2년(기원전 441년), 南鄭(남정)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조공 13년(기원전 430년), 의
거족이 渭南(위남)까지 쳐들어왔다. 조공 14년(기원전 429년), 조공이 죽고 그 아우인 영
봉이 뒤를 이어니 그가 회공이다.
제20대 회공(BC. ?∼BC. 425) 여 공공의 아들, 조공의 동생, 간공의 아버지
진 회공 원년(기원전 428년), 진 간공이 출생했다. 진 회공 4년(기원전 425년), 군사를
지휘하는 庶長 鼂(서장 조)가 대신들과 함께 진 회공에게 반란을 일으키니 진 회공은 자
결하였다. 그리고 櫟圍氏(역위씨) 땅에 묻혔다. 그 태자인 昭子(소자)가 이미 죽어서 소
자의 아들인 진 영공이 뒤를 이었다.
제21대 영공(BC. ?∼BC. 415) 진 회공의 손자며, 태자인 소자의 아들이다.
영공 3년(기원전 422년), 오양에 머물며 상치를 만들어 황제 헌원씨에게 제사지내고 하
치를 만들어 염제 신농씨에게 제사 지냈다. 진 영공 6년(기원전 419년), 魏(위)군이 소
량에 머물며 성을 세우자 진나라 군대가 몰아치니 2년 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렸다. 진
영공 8년(기원전 417년), 위군은 진군을 물리치고, 소량에 다시 성을 쌓았다. 진군은 위
군의 방어 기지 공사를 막지 못했다. 같은 해 하백에게 여자를 바쳤다. 영공 10년(기원
전415년), 번방성을 보수했고. 籍姑(적고)에 성을 쌓았다. 같은 해 진 영공이 죽어 구리
의 진 도공 무덤 서쪽에 묻혔다. 그런데 아들 헌공이 잇지 못하고 소자의 아우인 간공
이 즉위했다. 이에 진 헌공은 위나라로 망명했다.
제22대 간공(BC. ?∼BC 400) 진 회공의 아들이며, 진 소자의 동생이고 진 영공의 숙부다.
진 강공 2년(기원전 413년), 진 강공은 魏(위)나라를 쳐서 정 땅에서 이겼다. 진 강공 6
년(기원전 409년), 진 간공이 명을 내려 처음으로 관원에게 칼을 차게 했다. 간공 15년
(기원전 400년), 간공이 죽고 그 아들인 혜공이 뒤를 이었다.
제23대 혜공(BC?∼BC. 387) 진 간공의 아들이며 진 출공의 아버지.
혜공 5년(기원전 395년), 綿諸(면제) 땅을 쳤다. 혜공 9년(기원전 391년), 韓(한)나라의
宜陽(의양) 땅을 쳤다. 같은 해 초 도왕이 사자를 보내면서 금을 보내 진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혜공 10년(기원전 390년), 위나라와 武城(무성)에서 싸웠고 陝縣(섬현)을 설치했
다. 혜공 11년(기원전 389년), 위나라는 요충지인 하서 군수로 吳起(오기)를 임명해 5만
병력과 전차 500대 기병 300명을 배치했다. 이에 진나라는 군대를 소집해 위나라의 음
진을 치나 패배한다. 혜공 12년(기원전 388년), 진 출공을 낳았다. 혜공 13년(기원전 3
87년), 蜀(촉)나라의 남정을 쳐서 차지했다. 그해 혜공이 죽고 그 아들 출공이 즉위했다.
제24대 출공(BC. 388∼BC. 385) 혜공의 아들
출공 원년(기원전 386년), 출공이 어려서 태후가 다스렸는데, 태후가 환관을 중용해 국정
을 문란하게 했다. 이때 숙부인 진 헌공이 위나라에서 돌아와 기회를 노렸다. 출공 2년
(기원전 385년), 헌공이 군사를 이끌고 정변을 일으켜 옹성에 이르자 태후는 자결하고
출공은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헌공은 이들의 시체를 연못에 버리고 진나라의 군주가 되
었다.
제25대 헌공(BC. 424∼BC. 361) 진 영공의 아들이며 진 출공의 숙부.
헌공이 출공을 죽이고 찬탈하여 후위에 올랐다지만 영공이 사망한 뒤에 진나라의 군주가
되어야 했으나 간공이 뒤를 이어버렸으니 엄밀히 말하면 후위 계승권이 있던 사람이었다.
헌공 원년(기원전 384년), 헌공은 가장 먼저 무공 때 제정된 순장 제도를 폐지했다. 또한
헌공 2년(기원전 383년), 수도를 옹에서 櫟陽(약양. 역양)으로 옮겼다. 헌공 6년(BC. 379
년), 헌공은 남전, 선, 명씨 등에 현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곳을 군주의 직할지로 삼아
임기제 관리로 파견해 다스렸고, 그리하여 군주의 권위가 강력해졌다. 헌공 7년(기원전
387년), 헌공은 세금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그 내용은 상인들을 국가에서 관리해 국가
에서 그들의 이익에 세금을 매겨 국력은 날로 신장되어 갔다. 헌공 10년(기원전 375년),
헌공은 그 유명한 오가작통법을 실시해 5가 사람 중 하나가 죄를 지으면 연좌제로 책임
을 물었다. 그런 일련의 개혁으로 진나라는 옛날의 부정부패와 허약함은 사라지고 국력
은 날로 신장되어 갔다. 헌공 19년(기원전 366년), 양 혜왕, 한 의후가 함께 주 현왕을
위협해 그 입을 빌려 근왕병을 일으키고자 했다. 진군은 낙양에서 위군과 한군을 쳐서
주 현왕은 그에게 상을 내리니 진나라의 위세는 더욱 커졌다. 헌공 21년(기원전 364년),
헌공은 위나라를 쳐서 石門(석문)등 하서의 고토를 수복했다. 그리고 위군 5만 명을 죽
였다. 하서 땅은 원래 목공 때 晉(진)나라에게서 획득한 땅이다. 그 이후에 그 땅을 빼
앗겼는데, 그 땅을 국력을 신장시켜 되찾은 것이었다. 주 현왕은 그 일을 축하하며, 보
불(흰실과 검은 실, 푸른실로 도끼 모양과 두 개의 己(기)자를 수놓은 의복)의 복장을
하사했다. 헌공 23년(BC. 362년), 진군은 소량을 쳐서 위군을 크게 물리쳤다. 위군 장
수인 공숙좌를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방성을 차지했다. 그리고 공숙좌를 돌려보냈다.
헌공 24년(기원전 361년), 헌공이 사망하고 그 아들 맏이인 영건이 아니라 둘째인 영
거량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상앙을 등용해 진나라를 부국강병의 길로 이끈 효공이다.
제26대 효공(BC. 381∼BC. 338) 진 헌공의 아들, 혜문왕의 아버지다.
진 효공 원년(BC. 361년), 황하와 효산 동쪽에 여섯 개의 강국이 존재했다. 齊 威王(제
위왕), 楚 宣王(초 선왕), 魏 惠王(위 혜왕), 燕 悼侯(연 도후). 韓 哀侯(한 애후), 趙 成
侯(조 성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淮水(회수)와 泗水(사수) 사이에는 10여 개 소국
이 존재했다. 楚(초)나라와 魏(위)나라는 진나라와 인접해 있었다. 魏(위)나라는 長城(장
성)을 축조했다. 장성은 鄭縣(정현)에서 시작해 洛水(낙수)를 따라 북쪽으로 上郡(상군)
까지 이르렀다. 초나라는 한중에서 시작해 남쪽 巴(파)와 黔中(검중)까지 영토로 삼았다.
진나라는 편벽한 옹주에 위치하고 있어 중원의 제후들이 모이는 회맹에 참여하지 못했
다.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구현령을 내려 부국강병의 의지를 드러냈다. 衛(위)나라 공자
출신 衛鞅(위앙)을 등용하고. 변법을 시행했다. 처음에는 백성이 고통을 느꼈지만 3년
후 백성 모두 그 법을 편하게 여겼다. 그 공으로 左庶長(좌서장)으로 임명됐다. 효공 10
년(기원전 352년), 위앙이 大良造(대량조)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의 수도 安邑(안
읍)을 포위한 뒤 항복을 받았다. 효공 12년(기원전 350년), 咸陽城(함양성)을 조성하여
천도 했다. 효공 19년(기원전 343년), 진 효공은 무성에 성을 쌓았다. 효공 21년(기원전
341년), 위앙이 위나라를 쳐서 위나라 공자 앙을 속여 크게 이기니 진 효공은 상앙에게
상 땅의 15읍을 식읍으로 내려 상군으로 칭했다. 진 효공 24년(기원전 338년), 다시 위
나라를 쳐서 鴈門(안문)에서 위나라를 물리쳐 위장 위착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진 효
공은 연합군을 소집해 위나라의 합양을 공격했다. 이때 진 효공이 병사하자 그 아들인
영사가 즉위하니 그가 혜문왕이다. 혜문왕은 공자 건과 함께 상앙을 함정에 빠트려 잡
은뒤 함양에서 거열형에 처했다.
제27대 혜문왕(BC. 356∼BC. 311) 진 효공의 아들이며진 무왕의 아버지다.
혜문왕이 태자시절에 상앙의 법을 어겨 스승인 큰아버지 嬴虔(영건)과 公孫賈(공손가)가
코가 잘리는 형벌을 받고 그의 시종은 처형되었다. 영건은 코가 베인 것 때문에 집에서
만 은거하게 되었다. 즉위 직후 상앙을 죽였다. 진 혜문군 5년(기원전 333년), 위나라
출신인 公孫衍(공손연)을 등용하여, 대량조에 임명했다. 진 혜문군 7년(기원전 331년),
공손연이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 장수 龍賈(용가)를 사로잡고, 병사 8만 명을 참수
하였다. 진 혜문군 9년(기원전 316년), 사마조가 촉나라를 쳐 멸했다. 혜문군 10년(기원
전 328년), 張儀(장의)를 등용하고, 승상으로 임명하면서 연횡책을 활용하였다. 장의의
등용 이후 그의 언변 덕분에 한 동안 큰 전쟁 없이 땅을 얻게 되었다. 혜문왕 11년(기원
전 327년), 樗里疾(저리질)이 위나라의 초를 쳐서 항복시키고 안문에서 한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1만 명을 참수했다. 혜문왕 원년(기원전 324년), 칭왕을 하면서 연호를 바
꾸어 혜문왕 원년으로 하였다. 진 혜문왕 13년(BC. 312년), 초 회왕이 진나라를 공격했
지만, 진나라는 서장 장을 보내 초나라의 丹水(단수)를 공격, 초나라 장수 屈丐(굴개)를
포로로 잡고, 초군 8만 명을 죽였다. 또 초나라의 한중을 쳐 600리의 땅을 빼앗고, 漢
中郡(한중군)을 두었다. 혜문왕 14년(기원전 311년), 초나라를 공격하여, 召陵(소릉) 땅
을 차지하였다. 촉의 상국 陳壯(진장)이 촉나라의 군주 촉후를 죽이고, 진나라로 투항하
였다. 같은 해에 진 혜문왕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영탕이 즉위하니, 그가 진 무왕이다.
제28대 무왕(BC. 329∼BC. 307) 혜문왕의 아들이자 소양왕의 이복형
기원전 311년, 혜문왕이 사망하자 태자 탕이 즉위하였다. 혜문왕의 신하를 중용하였고
상앙이 받았던 영지를 빼앗아 黔中郡(검중군)을 설치하였다. 무왕은 힘센 장사를 좋아하
여, 임비와 오획을 총애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문사인 장
의는 찬밥 대우를 받게 되었다. 진 무왕 원년, 무왕의 마음을 알아챈 장의가 위나라로
가기를 원했다. 그후 장의는 위나라로 망명한지 1년 만에 죽었다. 그리고 촉의 상국 진
장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주살했다. 승상제도를 도입하여 좌승상에는 저리질을. 우승
상에는 甘茂(감무)를 임명했다. 진 무왕 4년(기원전 307년), 감무가 이끄는 진군이 한나
라의 의양을 함락시키고 6만 명의 수급을 얻으며, 황하를 건너 武遂(무수)에 성을 쌓았
다. 우승상 감무에게 宜陽(의양)을 정벌하고 낙양으로 들어가 주나라 왕실 보물인 九鼎
(구정)을 보고 장사 孟說(맹열)에게 들게하여 맹열이 구정을 들어올리자 호기심이 강한
무왕이 스스로 구정을 들다가 힘이 빠져 깔려서 죽게 되었다.
진 무왕은 위나라 여인을 맞았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연나라에 인질로 간 아우 영
직이 즉위하니 그가 소양왕이다. 맹열은 사지가 찢겨 죽고 삼족이 멸족 당했으며, 무왕
을 뜯어 말린 任鄙(임비)는 한중 태수에 제수되었다.
제29대 소양왕(BC. 325∼BC. 251) 혜문왕의 아들이고, 진 무왕의 이복형
소양왕의 모친은 초나라 여인으로써 성은 羋氏(미씨)이고 宣太后(선태후)라 불리었다.
무왕이 죽을 때 소양왕은 연나라에 볼모로 있었다. 연나라가 즉시 환국시켜 즉위할 수
있었다. 진 소양왕 2년(기원전 305년), 왕의 서형 莊(장)이 대신. 제후. 공자 등과 함께
모반을 일으켰다가 모두 주살되었다. 이 반란의 여파로 혜문왕의 정비, 즉 惠文后(혜문
후)도 여파로 제명에 죽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소양왕의 형수인 무왕의 왕비, 즉 무왕
후도 위나라로 돌려보내졌다. 이로써 선태후를 견제할 수 있는 두 황후가 모두 사라졌
다. 진 소양왕 4년(기원전 303년), 위나라의 땅인 蒲阪(포판)을 빼앗았다. 그리고 하늘에
에 혜성이 나타났다. 진 소양왕 6년(기원전 301년), 蜀侯 煇(촉후 휘)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조가 평정했다. 서장 奐(환)이 초나라를 정벌하고, 수급 2만 명을 베었다. 왕의 이부
동생 涇陽君(경양군) 영회를 제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진 소양왕 7년(기원전 300년), 新
城(신성)을 점령했다. 저리자(저리질. 즉 영질)가 죽었다. 진 소양왕 8년(기원전 299), 왕
의 외숙부인 장군 羋戎(미융)을 보내 초나라를 공격하고 新市(신시)를 빼앗았다. 진 소양
왕 9년(기원전 298년), 孟嘗君(맹상군)이 진나라로 오자 소양왕이 맹상군을 승상으로 임
명했다. 환이 초나라를 공격해 8개 성을 빼앗고, 초나라 장수 景快(경쾌)를 죽였다. 소양
왕 10년(기원전 297년), 楚 懷王(초 회왕)이 진나라로 와서 조회를 했지만, 진나라 조정
은 회왕을 억류했다. 한편 뇌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맹상군 전문을 면직하고 樓緩(루완)
이라는 자를 승상으로 임명했다. 진 소양왕 11년(기원전 296년), 제나라,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 송나라, 중산국 등이 연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며 鹽氏(염지) 땅까지 진격해 왔
으나, 어떤 이유로 인해서 연합군은 철수하였다. 한편 초 회왕이 진나라에서 도망쳐 조
나라로 갔으나, 조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자, 진나라로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망
했다. 진 소양왕 12년(기원전 295년), 루완이 면직되자, 왕의 외숙부인 양후 魏冉(위염)
이 승상이 되었다. 진 소양왕 14년(기원전 293년), 백기가 한, 위 연합군을 낙양 남쪽
이수 협곡에서 공격하여 24만 명의 병사를 죽이고, 5개의 성을 얻었다. 이후 한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력은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진 소양와 15년(기원전 292년), 백기가 위나
라의 垣(원) 땅을 빼앗았다가 다시 위나라에 돌려주고 초나라를 침공하여 宛(완)을 빼앗
았다. 진 소양왕 16년(기원전 291년), 사마조(사마착)가 軹城(지성)과 鄧城(등성)을 빼앗
았다. 진 소양왕 17년(기원전 290년), 성양군이 입조를 했고, 東周(동주)의 군주가 진나
라로 와서 조회하였다. 진 소양왕은 宜陽(의양)에 행차했다. 진 소양왕 19년(기원전 28
8년), 소양왕은 제나라의 湣王(민왕)에게 진왕이 西帝(서제)를 칭하고, 제나라 왕이 東帝
(동제)를 칭하는 것을 제의했지만, 얼마 지나서 칭제를 취소했다. 그리고 위나라로 도망
갔던 여레가 투항하면서 돌아왔고 한중 태수 임비가 죽었다. 진 소양왕 21년(기원전 2
86년), 사마조가 위나라의 河內(하내) 땅을 공격하자 위나라는 안읍을 바쳤다. 안읍에 살
던 위나라 백성들을 내쫓고, 진나라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왕의 동생 경양군 회를 완 땅
의 후로 봉했다. 진 소양왕 22년(기원전 285년), 蒙武(몽무)가 제나라를 정벌했다. 하동
에 9개 현을 설치했다. 소양왕은 초나라의 경양왕과 회맹을 하였고, 중양에서 조나라의
혜문왕과 회맹을 하였다. 진 소양왕 27년(기원전 280년), 사마조가 초나라를 침공하였다.
백기가 조나라를 침공하여 대나라의 光狼城(광랑성)을 빼앗았다. 진 소양왕 28년(기원전
279년), 백기가 초나라의 땅인 鄢(언)과 鄧(등)을 빼앗았다. 진 소양왕 29년(기원전 278
년), 武安君 白起(무안군 백기)가 초나라의 수도 郢(영)을 빼앗고 남군을 만드니 초나라
의 경양왕이 도망갔다. 진 소양왕 31년(기원전 276년), 백기가 위나라를 정벌해 성 2개
를 빼앗았다. 진 소양왕 32년(기원전 275년), 위염이 위나라를 공격하고 大梁(대량)에
이르러 포연을 쳐부수고 4만 명을 죽였다. 포연이 달아나자 위나라는 3개 현을 바치면
서 강화를 요청했다. 진 소양왕 40년(기원전 267년), 위나라에 인질로 있던 悼太(도태
자)가 사망하였다. 시신을 수습하여 芷陽(지양) 땅에 장사지냈다. 진 소양왕 42년(기원
전 265년) 안국군 주가 태자가 되었다. 10월에는 선태후가 사망하여 장례를 치르고 麗
山(여산) 땅에 묻었다. 진 소양왕 42년(기원전 265년), 安國君 株(안국군)가 태자가 되
었다. 진 소양왕 43년(기원전 264년), 백기가 한나라의 9개 성을 공격하여, 한군 5만 명
을 참수했다. 진 소양왕 45년(기원전 262년), 오대부 賁(분)이 한나라를 공격하여 10개
성을 빼앗았다. 진 섭양군 괴가 분봉으로 받은 영지에 가다가 도착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렇듯 부변에 있는 위나라, 한나라, 초나라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당시 진나라에 맞
설 만한 나라는 제나라밖에 없었지만 진 소양왕 23년(기원전 284년), 연나라의 장수
악의가 주도한 5국(진, 한, 위, 조, 연) 연합군이 제나라를 초토화 시키면서 당대에 강국
은 진나라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진 혜문왕 때부터의 친분으로 큰 전쟁없이 지
내던 조나라가 국력을 키워 三晉(삼진) 동맹이 결속되면서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의 전쟁
이 피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것이 장평대전 이었다. 진 소양왕 47년(기원전 260년), 소
양왕은 원교근공 정책에 따라 우선은 장수 백기, 몽오, 왕흘 등에게 명하여 인접한 한나
라 땅인 上黨(상당)을 공격하였고, 한나라의 국토가 말 그대로 반 토막이 나자, 조나라는
고립된 한나라의 상당 땅을 먹어버렸다. 진나라는 이 때문에 조나라로 발길을 돌렸고,
이는 전국시대의 판도를 바꾼 장평대전으로 이어졌다. 장평대전에서 승리한 백기는 조나
라 군사 40만 명을 생매장 하여 조나라를 영원한 2등 국가로 만들어 버렸다. 진 소양왕
50년(기원전 257년), 10월, 백기가 죄를 지어서 사병으로 강등시키고 陰密(음밀)이라는
곳으로 보냈다. 장당이 정을 공격하였다. 12월, 원군을 보내어 분성 부군에 주둔하게 하
였다. 왕흘이 한단을 점령하지 못하자, 분성에 있는 군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백기에게
죄를 물어서 죽였다. 진 소양왕 51년(기원전 256년), 소양왕은 장군 摎(규)에게 한나라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규는 한나라의 陽城(양성)과 負黍(부서) 땅을 빼앗고, 초나라
를 공격하여 20개의 현을 빼앗았다. 한편 西周 文公(서주 문공) 姬咎(희구)가 제후와 합
종하고 주 나라 천자인 赧王(난왕)을 필두로 하여 제후 연합군을 조직하여 진나라를 침
공했다. 진나라가 양성에서 쉽게 군을 움직일 수 없게 했지만, 소양왕은 장군 규를 시켜
서 주나라를 공격했다. 이에 놀란 주 난왕이 진나라에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전하자, 서
주 문공이 진나라로 직접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를 하면서 36개의 성읍을 모두 바
치면서 주나라는 멸망하였다. 서주 문공은 탄호 땅으로 쫓겨났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주 난왕이 사망했다. 진 소양왕 52년(기원전 255년), 주나라 백성들은 東周(동주)로 피
난을 갔고, 주나라 수도인 낙양에 있는 九鼎(구정)을 진나라로 옮겼다. 진 소양왕 53년
(기원전 254년), 주나라를 멸망시킨 것에 대해서 소양왕은 여러 나라에 사신을 보내 복
종시켰다. 위나라의 안희 왕이 가장 늦게 사신을 보내자 소양왕은 장군 규를 시켜서 위
나라를 공격하여 吳城(오성) 땅을 빼앗았고, 그로 인해서 위나라는 진나라에 복종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나라의 환혜왕이 입조하였다. 진 소양왕 56년(기원전 251년), 소양왕
이 사망하자, 모든 나라의 승상들과 장군들이 상복을 입고서 진나라를 방문해 조문을
하였고, 한나라는 환혜왕이 소복을 입고서 진나라로 직접 와서 조문을 하였다.
제30대 효문왕(BC. 302∼BC. 250) 진 소양왕의 아들이며 진 장양왕의 아버지다.
소양왕의 차남이었지만, 장자였던 영탁(탁태자 또는 도태자)이 위나라에 인질로 갔을 때
살해를 당해서 태자가 되었다. 효문왕 원년(기원전 250년), 소양왕이 사망하자 죄인을
사면하고 소양왕 때의 공신을 표창하면서 친척들을 후대하고 소양왕의 상을 마치고 즉
위했다. 3일 만에 사망했다.
제31대 장양왕(BC. 281∼BC. 247) 효문왕의 아들이며 진시황의 아버지다.
장양왕 원년(기원전 249년), 여불위에게 군사를 주어서 東周(동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蒙驁(몽오)에게 명을 내려 한나라를 공격하라 했고, 이에 몽오는 형양 땅을 점령했다. 그
리고 성고. 공 땅을 한나라가 바치자 장양왕은 한나라에 받은 땅으로 삼천군을 설치한다
진 장양왕 2년(기원전 248년), 몽오는 조나라를 공격하여 楡次(유차), 신성, 낭맹 등 37
개의 성을 점령하고, 太原(태원)을 평정하였다. 같은 해 3월 몽오가 위나라를 공격하였고
위나라의 高都(고도), 汲(급) 땅을 함락하였다. 진 장양왕 3년(기원전 247년), 위나라는
신릉군을 장수로 삼아서 반격하였고, 河外(하외)에서 진나라의 군사를 격파하며 몽오를
쫓아냈다. 이 일로 화가 난 장양왕은 인질로 와있던 태자 增(증)를 가두려다가, 진나라의
한 신하가 태자 증을 위해서 장양왕에게 간했는데, 그가 말하기를 위나라가 진나라를 공
나라를 공격하여 왕이 등을 가두게 되는 것은 일찍이 公孫喜(공선희)의 음모이므로, 반
대로 태자 증을 환대하여 위나라와 화의를 맺고, 위나라가 제나라와 한나라 등으로부터
의심 받도록 하자고 설득했다. 이에 장양왕이 태자 증을 가두지 않았다. 같은 해 장양왕
이 사망하여 그의 아들인 정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이후 시황제가 선왕을 태상황으로
추존했다.
제32대 시황제(BC. 259∼BC. 210)
영정은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 수도 한단에서 인질로 잡혀온 진나라 공자 영이인과
그 부인 조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시황제의 아버지 영이인은 진나라의 태자가 된 안국
군 嬴柱(영주)의 아들이지만, 서자라서 보잘것 없는 대접을 받고 장평대전 이전에 조나
라에 인질로 끌러갔다. 그러던 중 당시 사업차 한단에 와 있던 거상 여불위의 주목을
끌어 후원을 받으며 안국군의 정부인인 화양부인을 포섭해 안국군의 후계자가 되기로
약속을 받는다. 얼마 뒤 영이인은 여불위의 집에서 조희를 만나게 되었고, 여불위에게
부탁해 조희를 얻었다. 그리고 영이인과 조희 사이에서 자녀가 생기게 되었고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시황제인 ‘정’이었다. 기원전 257년, 정이 3살 때 증조할아
버지이자 진나라의 명군인 소양왕 영직이 장군 王齮(왕의)를 보내 장평대전 때 함락시
키지 못했던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조나라의 효성왕은 진
나라의 인질인 영이인을 죽이려고 마음먹었으나, 여불위가 600금을 뇌물로 써가며 아
버지 영이인만 간신히 구출했다. 정과 어머니 조희는 한단에서 탈출하지 못했지만, 조
희가 조나라의 조나라의 호족 집안 출신이라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한편 어
린시절 정은 연나라에서 볼모로 온 세자 연단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때 친분을 계기로
연단은 정이 진왕이 된 후 진나라의 볼모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사이가 틀어져서 탈출
하기에 이른다. 기원전 251년 정이 3살 때 증조부 소양왕이 죽고, 할아버지 안국군이
효문왕으로 즉위하자, 아버지 영자초(영이인의 개명이름)도 과거 약조대로 태자가 되었
고, 조나라도 태자에 오른 영자초를 두려워해서 그의 가족인 조희와 정을 진나라로 보
냈다. 그리고 효문왕이 즉위한 지 3일 만에 병사하고, 태자 영자초가 진나라의 장양왕
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정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진나라의 후계자 자리에 오른다. 그리
고 자초의 후원자였던 여불위는 승상이 되어서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그러나
원래 조희는 조나라 수도 한단의 기생으로,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다. 여
불위는 조희를 영 자초에게 바쳤다. 영정은 자초의 아들로 태어나 줄곧 조나라에서 자
라다가 기원전 250년 영정의 증조부인 소양왕이 동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소양왕은
얼마후 사망하였고 그 아들인 효문왕이 즉위하였다. 이에 자초는 처자와 여불위를 데리
고 돌아와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효문왕은 즉위 후 1년 뒤에 사망하고 태자 자초가 즉
위하니 이가 장양왕이다. 영정은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3년 뒤에 아버지 장양왕이 훙서
하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군주에 즉위하였다. 여불위는 승상이 되어 국사를 주물렀다.
심지어 영정의 모친 조태후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한다. 이에 여불위는 嫪毐(노애)라는
자신의 수하를 환관처럼 꾸며 조씨의 처소로 보냈고 조씨는 노애와의 사이에 2명의 아
들을 낳았다. 이에 조씨는 노애와 함께 수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곳으로 거처하였다.
기원전 238년에 영정은 성인식으로 잠시 함양을 비우자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영정은 곧 반란을 평정하고 노애를 능지처참에 처하고 어머니 조씨를 감금하였다. 또한
노애와 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2명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영정은 여불위를 승상의
자리에서 내치고 자결을 강요하였다. 진왕 정 12년 여불위는 자결하였으며 그 후로부
터 친정을 시작하였다. 진왕 정 17년 勝(승)이 韓(한)나라를 멸했고. 진왕 정 19년에는
王翦(왕전)이 趙(조)나라를 멸했다. 진왕 정 23년 王賁(왕분)이 魏(위)나라를 멸하다. 진
왕 정 24년에는 왕전이 楚(초)나라를 멸했다. 진왕 정 25년 왕분이 燕(연)나라를 멸했고.
진왕 정 26년에는 齊(제)나라를 멸하다. 진왕 정 32년에는 몽염장군을 파견하고 무장군
인 30만 명을 보내어 흉노를 토벌하고 臨洮(임조)에서 遼東(요동)까지 장성을 축조했다.
시황제 영정은 승상 이사에 의견을 들어 군현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었다. 또한 분서갱유와 폭정 대토목공사 등을 벌렸다. 또 불로불사를 꿈꾸어 서북
에게 3,000명의 소년 소녀를 보내 불사약을 구하라고 보냈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시황제는 재위기간 동안 무려 다섯 차례나 전국을 순행하였다. 기원전 210년 마지막 순
행중 사구(하남성) 팽대 지방에 이르자 병이 매우 위독하여 유언장을 조고에게 쓰라하였
다. 기원전 210년 진 시황제 영정은 50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이세황제(BC. 229∼BC. 207) 시황제의 차남
亡秦者 胡也, 진을 망하게 하는 것은 호이다
天籙秘訣(천록비결)
진나라의 제 2대 황제이자 중국 역사상 두 번째 황제이며, 중국 역사상 최초로 시해당
한 황제이다. 호해는 시황제의 18번째 아들이기 때문에 제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그에게는 천하의 모사꾼 趙高(조고)가 있었다. 기원전 210년 진 시황이 순행에 나서면서
호해와 조고도 동행했는데 진 시황이 사구에 이르렀을 때 병세가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사기)》에 의하면 진 시황은 장남인 扶蘇(부소)가 제위를 계승하도록 유언했으나 조고가
승상 李斯(이사)와 짜고 진 시황의 유서를 날조해 호해에게 제위를 계승하게 하는 것으
로 조작하고 부소와 蒙恬(몽염)에게는 자결하라는 명을 위조했다고 한다.
어쨌던 호해는 가장 걸림돌이라 할수 있는 형 부소와. 명장 몽념. 우승상 馮去疾(풍거질)
등을 제거했으며 자신의 제위를 위협할만한 형제와 누이 20여 명도 숙청하고 제위에 오
르게 된다. 진 시황의 거대한 능침인 여산릉의 공사를 계속하는 한편, 진 시황 대에도
완공하지 않았던 아방궁과 만리장성의 공사도 이어갔다. 승상 이사가 호해에게 아방궁
건립의 중단과 조세 부담 완화를 주청했으나 조고의 농간으로 호해는 자신에 대한 도전
으로 받아들였고 이에 이사는 숙청되고 만다. 이들이 제거되면서 조고의 권력은 커졌고
호해는 조고에게 모든 국사를 맡겨버리고 자신은 유흥에 빠져들었다.
결국 진나라의 과도한 조세와 부역 및 급속한 중앙 집권 정책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 진
승, 오광의 난이 일어나기에 이른다. 또한 유방 항우 등의 세력이 수도 함양을 향해 진
격해 오면서 모든 정보를 차단한 탓에 호해는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치만 곧
들통날 것 같아 호해는 사위 염악과 함께 모반을 일으켜 호해는 최후를 맞았다.
자영(BC. 242∼BC. 206) 진나라의 마지막 군주.
승상 조고가 쿠데타를 일으켜 이세황제 호해는 조고에게 궁지에 몰려 자살하고 만다. 이
에 조고는 자영을 옹립하려고 했다. 헌대 자영은 즉위식 당일에 병이라 칭하고 참석하지
않고 집에서 버티었다. 이에 조고가 찾아오자 자영은 자신의 아들과 심복부하들을 동원
하여 역적 조고를 살해하고 그 일족도 모두 제거한 후에 왕이 되었다. 그 후 유방에게
항복을 청했고 유방은 자영과 그 일족의 신분을 보장했지만 뒤늦게 함양에 입성한 항우
는 진 시황이 각국을 멸망시킨 점 등을 물어 진왕 자영과 그 일족을 처형시켰다. 자영
의 죽음으로 진나라는 완전히 멸망한다.
수도천도
非子(비자) BC, 7〜BC, 822 秦邑(진읍) 甘肅省 天水縣(감숙성 천수현)
非子(비자) BC, 822〜BC, 776 犬丘(견구) 甘肅省 天水縣(감숙성 천수현)
襄公(양공) BC, 776〜BC, 762 汧(견) 陝西省 寶鷄 隴縣(섬서성 보계 농현)
文公(문공) BC, 762〜BC, 714 汧, 渭(견, 위) 陝西省 寶鷄 眉縣(섬서성 보계 미현)
寧公(영공) BC, 714〜BC, 677 平陽(평양) 陝西省 寶鷄 東南(섬소성 보계 동남)
德公(덕공) BC, 677〜BC, 383 雍(옹) 陝西省 鳳翔 東南(섬서성 봉상 동남)
獻公(헌공) BC, 383〜BC, 350 櫟陽(역양) 陝西省 渭南 富平(섬서성 위남 부평)
孝公(효공) BC, 350〜BC, 206 咸陽(함양) 陝西省 咸陽 東北(섬서성 함양 동북)
사료 출처
司馬遷(사마천)의 史記本己(사기본기)와 曾先之(증선지)의 十八史略(십팔사략), 그리고 馮夢
龍(풍몽룡)의 東周 列國志(동주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