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 포로
왜관 인근 303고지에 역습을 실시한 미 1 기병사단 5기병연대는 미군 병사들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들은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중화기중대 박격포 사수 26명이었다. 이들 시신은 서로 어깨를 맞댄 채 뉘여 있었다. 신발이 벗겨진 맨발에는 사방으로 튄 피가 영겨붙어 있었다. 이들은 등 뒤에서 소련제 기관단총으로 처형당했다.
각 병사의 손은 등 뒤로 돌려져 줄이나 전선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방어선 전방에서는 전투가 격렬하고 처절해지면서 상상을 초월한 잔학행위들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미군 시신들 중에는 처형당하기 전 불에 탄 후 거세를 당한 경우도 있었고, 혀가 뽑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는 가시철조망으로 머리와 입까지 묶여 있었다.
전장의 잔학 행위의 증거가 계속해서 발견되자. 맥아더 원수는 이러한 행위에 대한 형사상의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인민군 최고사령부에 경고 메시지를 여러 차례 발송했다. 미 공군은 인민군 지도부에 보내는 경고가 담긴 전단을 대대적으로 살포했다.
사실 인민군 전선사령부와 총참모부는 전쟁포로에 대한 불필요한 학살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여러 차례 내린 바 있다. 하지만 길고 잔학한 일제 점령의 잔재가 불과 하루 만에 사라질 수는 없는 법이다. 일제 점령기와 공산당 통치를 거치면서 평생 고문과 즉결처형에 익숙해온 이들이 외국 포로를 친절하게 대할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려웠고, 실제로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9월 21일 동이 트기 전에 어둠 속에서 인민군 총좌 한 명이 다부동 남쪽으로 6.5 킬로미터쯤 좁은 흙길을 걸어서 항복해 왔다.
총좌의 이름은 리학구였다. 그가 어떠한 동기로 이런 행동을 했는지는 앞으로도 완전히 밣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참모장을 지내던 인민군 13사단은 완전히 분해되었다. 그는 미군이 인민군 13사단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모든 정보를 제공했다. 사실 전투부대인 13사단이 격멸당했기 때문에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이 없었다. 리학구 총좌는 한국전쟁을 통틀어 유엔군이 사로잡은 최상위 계급의 포로가 된다. 포로가 된 리 총좌는 훗날 유엔군에 많은 피해를 야기하게 된다.
1950년 10월 25일, 한국군 1사단은 운산(평양과 압록강 중간지역)인근에서 특이한 포로를 잡았다. 이 포로는 한국어도 일본어도 할 줄 몰랐다. 그는 중국 북부의 방언으로만 목청 높여 이야기했다. 평양에 있는 미 8군 전방 사령부로 이송된 포로를 고위 정보장교가 신문했다. 며칠 동안 같은 종류의 포로들이 거의 100명이나 붙잡혔다. 그러나 중공이 전쟁에 개입할 리 없다고 믿는 극동군사령부는 이 정보를 무시했다.
포로가 된 슐리처 Charles B. Schlichter 상사는 ...
미 2보병사단 2의무대대의 찰스 B. 슐리처 상사는 그의 생애 대부분을 군인으로 살아왔다. 18세이던 1939년, 키가 크고 깡마르고 녹색눈동자를 가진 슐리처는 해병상륙군의 해안 담당 부대에서 해안경비대와 함께 43개월간 해외에서 복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결혼한 뒤 가구상이 되었다. 그는 군 복무 경험이 신부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우자 복이 있는 사람이 있다. 슐리처의 부인 엘리자베스는 육군 영내에서 자랐다. 시간이 갈수록 엘리자베스는 무엇이 남편을 괴롭히는지를 알았다. 엘리자베스가 석간신문을 보다가 육군의 모집 광고를 보고 "다시 입대해서 복무하는 것은 어때?"라고 슐리처에게 말했다.
"그러고야 싶지. 그렇지만 당신에게 미안해서..."
"난 여행이라면 다 좋아"
그의 기록을 검토한 육군은 슐리처에게 상사 계급을 주었다.
1950년 6월에 슐리처는 메디건 육군 종합병원에서 수술조무사로 일하고 있었다.
슐리처는 7월 16일 미2사단으로 전속되고 한국전쟁이 투입되었다.
떠나기 전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무슨 일이든 내가 떠난 그곳에 그대로 있어. 꼭 돌아올게" 라고 다짐했다.
1950년12월1일 새벽, 슐리처는 청전강 군우리 일대 전투에서 코어스 소령 일행등 15명과 인민군의 포로가 되었다. 인민군은 이렇게 잡은 미군 포로들을 능선 너머로 데리고 갔다. 그러더니 고지에 파인 길고 좁은 참호 앞에서 멈추게 했다. 인민군이 소련제 기관단총의 총구를 포로들에게 돌리자 걷잡을 수 없는 공포 속에서 슐리처는 이들이 자신들을 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관단총을 든 인민군 병사들을 보는 순간, 그는 조국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미국에서 1만 6,000킬로미터 떨어진, 얼어붙고 강한 바람이 몰아치는 고지에서 죽음을 마주한 슐리처에게 미국의 힘과 영광은 멀고 무력했다.
그런데 인민군은 쏘지 않았다. 중공군으로 보이는 장교 한 명이 달려와서는 높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인민군은 총구를 내렸다.중공군 장교는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인민군은 총구를 겨누며 미군 포로들을 몰아갔다. 그들은 북으로 향했다.
그들은 시련에 망연자실한 채 지치고 추위에 떨며 말없이 비틀거리면서 북쪽으로 향해 걸었다. 그러나 자신이 속한 작은 일행 속에서 슐리처는 불현듯 두 번 다시는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들 중에 오직 슐리처만 살아서 미국을 다시 보게 된다.
중공군은 미군 포로들을 몇 시간 동안 북쪽으로 걷게 했다. 결국 이들은 미군 포로들을 어느 농장으로 몰아갔다. 포로들은 이곳에서 어두워질때까지 쉬도록 허락을 받았다. 어둠이 내려 춥고 비참해진 미군 포로들은 바깥으로 내몰렸다. 새벽이 오면 비틀거리며 다른 농장으로 들어갔다. 미군 포로들은 하루에 한 끼만 배급을 받았다. 배급이래 봐야 삶은 옥수수 한 줌이 전부였다. 포로들은 하루치 식량을 수통컵에 받아 먹었다. 식기가 없는 이들은 미치 동물처럼 모자에 또는 사발처럼 손을 오목하게 만들어 식량을 받아 먹었다.
야간 행군의 끔찍한 압박감, 형편없는 식사, 그리고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포기하는 미군 포로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지쳤고 아픈 이들도 많았다. 탈진해 비참한 데다가 희망도 없어지자 몇몇 미군포로는 울기 시작했다. 어린 병사 하나는 완전히 포기했다. 그가 슐리처에게 말했다. "상사님, 저는 더 이상 못 가겠어요."
슐리처는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그를 설득했다. 그러나 어린 병사는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경비병들은 배려심이 많았다. 이들은 총을 쏘거나 총검으로 찌르는 대신 썰매를 가져왔다. 밤새 산 건너편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포로들은 움직이려 하지 않은 어린병사를 번갈아가며 끌었다. 새벽, 썰매에 실려온 어린 병사의 얼굴은 서리로 덮혀 있었다. 밤사이 얼어 죽은 것이다.
다음날, 미군 포로들은 암울해 보이는 버려진 보크사이트 광산에 도착했다. 미군 포로들은 오두막 마다 40명씩 격리 수용되었다.
개 한마리가 포로들이 나오는 오두막에 대고 행복하게 짖으며 대열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슐리처는 친근하게 구는 이 개에게 손을 내밀어 진정시켰다. 그날밤 슐리처 그리고 같은 오두막에 머무는 포로들은 구운 개고기를 먹었다. 포로들은 슐리처에게 경의를 표하며 가장 큰 고기 덩어리를 양보했다.
죽음의 계곡
인간이 다른 인간과 주먹다짐을 한 이후로 많은 전쟁포로들은 힘든 삶을 살았다. 고대인들은 때때로 포로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예외없이 그들을 평생 노예로 삼았다. 적에게 잡혀 포로가 되가보다는 차라리 죽는것이 더 나은 때가 많았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잔인함은 역사가 길다.이 역사에서 그저 한 부분이라도 흠이 없는 나라나 문화는 없다. 독일인은 러시아인를 굶겼고, 러시아인은 독일인을 죽을 때까지 일을 시켰다. 나폴레옹의 해군은 마치 짐승처럼 사슬에 묶인 채 영국의 감옥선 안에서 썩어갔다. 남북전쟁 당시 스위스 출신으로 남군 군복을 입은 군인은 조지아주의 앤더슨빌이라는 마을에서 북군 포로들을 울부짖는 동물로 바꾸어놓았다.
제네바 협정은 전쟁포로가 자국의 죄수와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명시했다.
미국 정부는 자국의 젊은이들에게 전투 준비를 시키지 않았듯이 포로가 되었을 경우에 대한 준비도 전혀 시키지 않았다. 절망적이며 암울한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겪은 좌절은 전장에서이 패배가 연장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영어가 서툰 중공군 장교는 피곤해 덜덜 떨고 겁에 질린 미군 포로들에게 유화정책을 하나 더 추가했다.
"여기 있는 모두는 같다. 장교도, 부사관도 없다. 모두가 평등하다." 포로 수용소에서는 장교를 부사관과 격리시키고 부사관을 병사로부터 떼어놓는 것이 관행이다. 이는 포로들에세서 일어날 수 있는 저항과 단결을 무너뜨리는 데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나 중공군은 새로운 변칙을 시도했다. 병사 하나가 장교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 이봐, 잭! 어때?" 어깨를 두드린 병사는 이것이 매우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포로들 사이에서 도의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군기도 이제는 사라졌다. 살아남을 것이라는 미군 포로의 희망도 함께 사라졌다. 미군들 사이에서는 자신에게는 최고이지만 상대방에게는 지옥인,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상황뿐이었다.
문명이란 기껏해야 깨지기 쉬운 규율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의 계곡에서 문명은 사라졌다.
미군 장교 포로들을 모욕하는 중공군 정책에 따라 군의관이 아닌 슐리처 상사가 수용소 병원의 책임자가 되었다.
미군 포로들이 죽었다.
포로들은 전투에서 입은 부상,감염,폐렴,이질로 죽었다.
사망원인 중 대부분은 영양 부족이었다. 병들고 부상을 입은 포로들이 가장 먼저 죽었다. 그리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아무 이유도 없어 보이는데 죽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가장 젊은 포로들이 먼저 죽었다.
슐리처는 살아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한순간도 버리지 않았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슐리처는 인간의 세계가 뒤집어졌을 때 죽겠다는 의지가 살고자 하는 충동보다 더 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지닌 슐리처는 보잘것없는 음식물 찌꺼기를 먹었지만, 이런 음식을 먹기 거부하는 포로도 있었다. 포로 중에는 터키군과 한국군도 일부 있었다. 슐리처가 기억하기로는 터키군 포로 중에는 죽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미국의 군 county 쯤 되는 크기인 거제도은 부산 남서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대한해협에 있다.
1951년 초, 그때까지 유엔군이 전쟁을 하면서 잡은 8만 명쯤 되는 포로들이 거제도로 보내졌다. 미8군은 후퇴 중이었다. 그리고 유엔군이 한국에서 철수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풍문이 돌았다. 부산 일대에 있던 수천 명의 포로들은 방해가 되었다. 거제도에 있으면 포로들이 안전하면서도 미8군을 방해하지 않을 것 같았다. 1951년 초에 리지웨이 사령관을 필두로 모든 미 8군은 이제껏 잡은 포로들에 대해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미 8군은 포로 문제보다 휠씬 더 긴박한 걱정들이 많았다.
포로들을 어떻게 다루고, 먹이고, 입히고, 경비하고, 기강을 잡을 것인지는 부산에 있는 60종합보급창에 일임했다. 60종합보급창은 나중에 2군수사령부가 된다. 6종합보급창의 임무는 한국 내 전투병력을 공급하는 일이었다. 병참부대의 기술장교 15명은 미군 보급장교들만이 할 수 있는 능숙한 솜씨를 발휘했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보급 업무에 뛰어났다 하더라도 아시아계 전쟁포로들을 어떻게 다루고 먹여야 하는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병참 전문가였지 경찰이 아니었다. 그들을 변호하자면 미 육군에서 그들보다 이 업무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1950년 가을, 패배해 뿔뿔이 흩어진 인민군 징집병들이 떼지어 항복하기 시작하자, 미국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포로 통제는 미국의 동맹국들이 맡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늦게 참전했고 이미 영국이 만들어 놓은 체제를 넘겨받았다. 두차례 세계대전 중 포로는 문화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또한 이들 전쟁은 이념전쟁이 아니었다. 파시즘이나 나치즘은 근본적으로 바깥으로 수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을 빼고는 포로수용소에서 이념이 추악한 머리를 쳐든 적은 없었다.
태평양에서 붙잡힌 일본군 포로들은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적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미국은 호전적인 포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전혀 경험이 없었다. 미국은 실질적인 교리도 발전시키지 않았고, 포로를 다루도록 훈련된 인원도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 육군은 아시아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전쟁포로들이 수천 명씩 쏟아져나오기 시작하자, 미국 정부는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미국은 거의 10만명이나 되는 동양계 포로들을 미국 본토로 데려가 수용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거제도에 만들어진 포로수용소는 편의주의의 산물이었다. 포로들을 어떻게 다룰지는 부산에 있는 병참장교들이 알아서 잘 하면 되는 문제였다.
1950년 크리스마스 당시, 미 육군 공병단의 윌리엄 T.그레고리 소령은 60종합보급창의 공병 보급장교였다. 키가 크고, 머리털이 붉으며,날씬한 그레고리는 오랫동안 예비역으로 지냈다. 노스캐롤라이나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정규 육군의 명령을 받았다.
경력을 고려하여 육군을 그레고리를 거제도로 보냈다. 60종합보급창장은 그레고리를 불러 말했다." 포로들이 거제도로 오네, 자네가 조달장교로 보직되었어. 가서 살 수 있는 대로 먹을 것을 사오게."
60종합보급창장은 수용되는 포로가 얼마나 많은지, 이들이 언제 오는지 전혀 몰랐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레고리 소령과 몇 명을 미리 거제도로 보내는 것뿐이었다.
부산에서 출발한 상륙주정들이 거제도 해변에 포로들을 내려놓았다. 순식간에 거재도 논에서 바다까지 포로 4만 명이 들어차 여기저기 모여 앉았다. 이들을 감사하고 경비할 미군은 2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심지어 포로들을 둘러싸는 철조망 울타리도 없었다.
춥고, 배고프고, 심드렁한 포로들은 벌판에 앉은 채 그냥 기다렸다. 포로들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이들은 동양에서 모든 포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들도 거칠게 다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운이 좋다 한들 근로대대에서 미군들을 위해 숨이 넘어가도록 일하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총살을 당할 것이라는 게 포로들의 예상이었다.
거제도에는 전투부대도, 사령부도, 아무 조직도 없었다. 심지어 군대 시설도 없었다. 운 좋게도 포로들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레고리 소령은 쌀을 사기 위해 섬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레고리는 거제도에 온 첫 번째 큰손이었다. 그는 눈에 들어 오는 것은 모두 사들였다. 포로들은 수 톤의 쌀을 모두 먹어치웠다. 한국인, 중국인은 생선, 채소, 그리고 다른 반찬을 곁들여 정말 밥을 많이 먹었다. 거제도의 물량이 바닥나자 일본에서 구매하기 시작했다. 이제 능력 있는 일본인들이 어마어마한 양의 생선과 쌀을 대한해협 건너로 수송했고,그레고리는 식량 구매에는 한시름을 놓았다.
미군 공병과 함께 그레고리는 철조망을 두른 수용소를 짓기 시작했다. 시간과 노력이 제한되어 수용소는 날림으로 지어졌다. 심지어 철조망도 부족했다. 철조망 안쪽에는 수용시설과 바다로 빠지는 하수관을 만들었다. 포로 4만명이 엄청나게 많은 쌀을 먹어댔으니 배설물을 처리할 곳이 없었다. 부족한 노동력을 거제도 원주민이 메웠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거제도 주민 대부분은 미군에 일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 모두에게 행복한 일어었다. 5주가 지난 뒤부터는 헌병파견대가 거제도에 도착하여 포로 관리는 결국 헌병의 기능이 되었다.
헌병 지휘관 피츠제럴드 대령은 즉각 포로 관리 책임을 맡았다.
"포로들은 우리와 동일하다. 우리의 임무는 포로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것이다. 포로들을 학대하거나 협박하고 괴롭혀서는 안된다" 고 피츠제럴드 대령은 참모회의에서 힘주어 말했다.
병원도 새로 지었고 매일 회진을 했다. 인민군 의사들과 중공군 의사들은 원하는 의약품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식당도 건설되었다.
포로들 중 90퍼센트가 평생 구경도 못 했을 정도의 많은 쌀,생선,야채가 공급되었다. 포로들에게는 병참보급창에서 바로 나온 장교정복이 지급되었다.(잉여물자에서 전용) 각 포로에게는 새로운 군화와 깨끗한 침대보도 주어졌다. 이제 철조망 안에 많은 포로들은 그레고리 소령의 정복보다 더 좋은 정복을 입고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미군 장교는 자기 정복을 돈 주고 사야 했다. 그레고리는 본국에 가족이 있었다.
거제포로수용소 내부사정은...
이미 포로수용소 안에서는 서로 다른 파벌들이 통제권을 잡으려고 마구 다투면서 광적인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 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소요는 미군 간수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았고 전혀 이해도 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과 비공산주의자들은 같은 인간으로 똑같이 대우를 받았다. 뼛속까지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장교와 병사들은 이내 악명을 떨치게 되는 76수용소로 격리되었다. 격리조치는 공산주의자들의 타고난 재능을 집중시겼다.
이제, 76수용소와 거제도 수용소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인민군 총좌가 지휘하게 되었다.
리학구가 할 일은 참모진을 쓰는 것이었다. 서류상으로는 소련에서 훈련받은 이학구가 상급 장교였으나, 실제 권력은 몸집이 작고 악마의 얼굴을 가진 홍철이라는 자의 손에 있었다.
리학구는 항복하면서 이미 약점을 노출했다. 공산당 비밀 간부들은 다시는 리학구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홍철은 리학구를 감시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이 둘은 함께 포로수용소를 조직하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미군이 포로들에게 각 구역마다 대표자를 선출하라고 할 때
리학구와 홍철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선거는 짧고, 폭력적이고, 비밀리에 피를 동반해 치러졌다.
때때로 간수들은 화장실이나 하수구에 처박힌 시신들을 발견했다. 가끔 인원점검에서 수가 모자라면 포로들은 끼리끼리 모여 수군거리며 불안한 듯 보였다. 사라진 포로들은 보통 탈주자 명단에 올랐다.
후보로 나선 리학구와 홍철이 대표자로 선출되었다.
유엔대표들과 만나면서 새로 선출된 포로 대표들은 점점 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새로 뽑힌 우두머리들은 강제로 말을 듣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들은 간수들과 매일 만났고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기쁘게도 요구가 수락되었다.
리학구와 홍철은 도료를 요구해서 얻었다. 예쁘게 돌에 그려진 오성홍기, 인공기, 그리고 성조기가 수용소 뜰을 장식했다. 리학구와 홍철은 녹음기, 종이, 잉크, 등사기와 작업도구를 요구했다.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은 포로들이 일하도록 만드는 좋은 방안이라 생각했다. 리학구와 홍철은 미국의 비용으로 원하는 것은 모두 얻을 수 있었다. 포로들은 자신이 만든 도구들을 수용소 바닥 아래 묻어 보관했다.
북의 포로수용소에서는 ...
1951년 3월 17일, 압록강변 벽동 인근의 5포로수용소에 죽음의 계곡을 출발한 슐리처 상사가 속한 포로들이 수감되었다. 장교들과 부사관들은 병사들과 분리되었고, 모든 계급을 합친 포로의 수는 3,200명에 달했다.
3월부터 10월 사이에 인원은 50퍼센트가 줄어들었다.
미국 군의관들은 진료 소집과 치료를 계속하도록 허락받았지만 치료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약은 거의 없었다.음식은 평균적인 미국인의 정신과 육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열량보다 부족했다. 수용소에서는 매일 옥쌀(말린 옥수수를 부순 것)과 수수 삶은 것 400-600 그램, 그리고 가끔 메주콩과 배추가 배급되었다. 보통 콩은 반만 익혔는데 미군 포로들은 설사로 콩에 손 대는 것을 거부하고 탄수화물만 먹었다. 이렇게 먹은 포로 중에는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기근이 일상이던 한국에서 반은 기아 상태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소농보다 포로를 더 잘 먹이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미국식 방식을 따른 희망적 사고이다. 늦겨울에 포로 사망률이 놀랄만큼 높아졌다. 매일 28씩 사망하자 5호 수용소장인 중국인이 우려의 기색을 보였다. 그는 미국인 의사들에게 당장 포로들이 죽지 않게 하라고 명령을 했다. 더 많은 의약품이 제공되었지만 많은 음식을 달라는 포로들의 요구를 소장은 화를 내며 거부했다. 봄과 여름이 오고서야 중국인 수용소장은 포로들의 식사를 개선했지만 이미 많은 포로들이 죽고 난 뒤였다.
미군 포로 중 50퍼센트가 사망했다.
그러나 한국군 포로, 영국군 포로, 터키군 포로는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고, 터키군 포로는 다 한 명도 죽지 않았다.
화학적인 특성과 문화가 미군 포로들을 죽인 것이다. 미군 포로가 많이 죽은 것은 미군의 군기, 태도, 그리고 조직 때문이다. 지도력이 엄격하고, 정신이 건강하며, 내부적으로 강인한 조직원들이 서로를 걱정해주는 것처럼 응집력이 극도로 높은 집단만이 정신과 육체에 닥친 충격도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영국군 부사관들은 마치 바위처럼 굳건히 잘 대응했다.
제일 잘 버틴 것은 터키인들이었다.
터키군은 완전히 동질 집단이었다. 공통적인 배경과 문화를 가졌고 지휘체계가 결코 무너지는 법이 없었다. 터키군 포로들은 알라신이 주신 것이나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개가 주는 것이나 불평없이 먹었다. 이들은 손 닿는 곳에 있으면 나뭇잎 조각이라도 먹을 수 있었다. 미군 포로들은 터키군 포로들이 잡초를 먹는 것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터키군은 선임 병사가 포로수용소에서 지휘권을 가졌다. 왜냐하면 선임이기 때문이다. 터키군 선임병사는 매일 상세한 근무자 명단을 만들어 운용했다. 누가 나무를 팰지, 물을 나를지, 또는 아픈 사람을 돌볼지를 두고서 어떤 분쟁도 없었다. 선임병사가 고분고분하지 않다며 그 선임병사를 제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심지어 백 번째 선임 병사가 이어받아도 바뀌는 것을 없었다.
슐리처도 병에 걸렸다. 그는 폐렴에 걸려 조악한 중공군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슐리처는 거의 죽을 뻔했다. 1951년 10월 3일, 30번째 생일을 맞은 슐리처가 병원에서 퇴원했다.
1952년 8월 12일, 슐리처는 더 이상 이념 교육에 적합하지 않은 반동분자로 분류되면서 결국 위완에 있는 4호 수용소로 보내졌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 납치되다
거제도의 유엔군 주둔지는 중공군과 인민군 포로들로 채워지면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미8군과 극동사령부는 포로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없이 포로를 상대로 무력을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리지웨이 대장도 거제도 수용소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정전협정이 시작되어 전쟁이 언제라도 끝나면 포로 문제도 자동적으로 끝난다고 고위층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질서를 유지하는 데 신경을 더 많이 썼더라면 이곳에서 닥칠 비극은 분명이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리학구와 홍철은 비록 수용소를 장악해도 더 이상 갈 곳은 없지만 거제도를 탈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이제 갓 소장으로 부임한 프랜시스 도드 준장을 납치하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다고 보았다.
장군이 거제도 수용소장으로 부임하기는 도드 준장이 처음이었다.
1952년 5월 7일 아침, 거제도에 있는 프랜시스 도드 준장의 사령부에 통상적이 경로를 통해 전갈이 도착했다. 공산군 장교들이 수용된 76수용소의 대변인이 도드 준장에 즉각 기꺼이 집회에 참석해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공산주의의 특징도, 인민군 이병 박상형으로 통하는 전문일에게 최근에 내려온 명령이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른는 도드 준장은 은색 별 하나가 박힌 모자를 쓰고 리학구 총좌와 76수용소에 있는 포로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나섰다.
철조망으로 엉성하데 만든 수용소 문에 다다른 도드는 지프에서 내려서 철조망 가까이에 모여 있는 공산군 포로 대표단을 만났다.
문이 열렸다.
거제도와 임무를 따분하게 여기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는 유엔 경비병들은 이를 한가하게 바라보면서 곁에 서 있었다.
갑작스런 신호에 이미 치밀하게 연습을 해두었던 포로들이 북새통을 이루며 도드를 감쌌다.
도드는 포로들에게 납치되어 수용소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대형을 이룬 공산군 포로들이 깜짝 놀란 경비병들을 뒤로 밀어내자 수용소 문이 닫혔다. 경비병들이 소리를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도드는 76수용소 안에 있는 헛간으로 끌려 들어갔다. 쇳조각과 군화 조각을 가지고 직접 만든 흉기들은 경비병들이 도드를 구하려 오기 전에 그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야전 전화기 한 대가 76수용소에 가설되었다.
공산군 포로 주동자들은 이 전화기로 협상을 했다.
공산 포로들은 요구 사항을 내놓았다.
요구사항 중에는 포로에게 범죄를 저절렀다고 고백할 것 , 공산 조직과 포로들이 수용소를 통제하는 것을 인정하겠다고 다짐할 것, 그리고 "반공주의자라고 자백하도록 포로들을 고문하고 학대하는 것을 멈출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별다른 뉴스가 없는 전방 전선을 떠나 떼 지어 거제도로 몰려온 기자들이 공산 포로들이 요구하는 그대로 옮겨 전 세계로 타전했다.
공산권 언론과 대변인은 선전에 열을 올렸다.
미국은 중립국들 앞에서 진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제 중립국들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몰랐다.
미국의 가장 확실한 동맹국들 중 몇몇 나라들이 미국에게 정중히 물어보았다. " 거제도에서 대체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새로 부임한 콜슨 준장은 도드를 구출하기 위해 " 유엔군사령부가 포로들을 더 이상 때리지 않는다" 고 적힌 종이에 서명했다.
이는 선전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거둔 엄청난 승리였다.
1952년 5월 10일, 프랭크 도드 준장이 76수용소에서 걸어 나왔다. 도드는 준장에서 대령으로 강등되어 전역했다.
거제도에는 일종의 무정부 상태가 도래했다. 철조망 안에서 포로들은 고함을 지르고 구호를 외치며 깃발과 현수막을 흔들었다. 그러는 동안 철조망 바깥의 경비병들은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폭동이 이어졌다. 도대체 누가 수용소를 통제하는지 의심스러웠다.
상급 포로들이 음모를 꾸민 76수용소는 상세한 계획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만일 이 계획들이 실행된다면 거제도는 정말 죽음의 섬이 되는 것이다.
리지웨이 대장 후임으로 극동군사령관에 취임한 마크 웨인 클라크 대장은 보트너 Boatner 준장에게 거제도를 지휘하도록 명령했다. 클라크는 보트너에게 자신의 지시를 직접 받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마지막으로 클라크가 물었다. "질문 있나?"
정치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보도 아닌 보트너는 거제도에서 큰 문제가 생긴 것은 수용소장 모두가 손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이라 것을 잘 알았다. 보트너가 말했다. " 네. 사령관님! 거제도 사정이 매우 나쁜 게 걱정입니다. 포로들은 전혀 통제가 안 되고 있습니다.제대로 통제하려면 피를 볼 겁니다." 클라크가 말했다. "전적으로 동의하네. 나도 피를 볼 것이라 생각해. 나는 자네를 지지하네."
그날밤, 보트너는 비행기로 부산에 도착, 거제도를 관할하는 미2군수사령관 윤트 준장의 영접을 받고,다음날 거제도로 향했다.
보트너는 콜슨이 쓰던 책상에 앉아 2시간 안으로 도착할 헌병부대장을 기다렸다. 보트너의 전임자 14명이 거제도를 거쳐가는 내내
이곳에 있었던 헌병 대령이 사무실로 들어와 보트너에게 물었다.
"장군님, 장군님을 위해 칵테일 연회를 열려고 하는데 어떤 복장을 원하십니까?"
보트너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
보트너가 비용을 걱정한다고 생각한 헌병 대령은 장교회관 술 판매 수익금에서 지출된다고 했다.
미국이 당하고 있는 선전전에 모두가 분개하고 있는데 현장 거제도에는 칵테일 연회라니 ..
"대령, 칵테일 연회는 없네."
거제도 근무 미군들은 복장이 제각각이고, 권총 안 차고 있는 병사도 있었다.
"모두 전투복을 입고, 모두 다 무장하도록 해!"
콜슨을 보면서 보트너는 제대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다.
보트너는 편지를 쓰고 전문을 보내기 시작했다. " 내 군 생활을 통틀어 이토록 부실한 병사 집단을 본 적이 없다.최악의 병사 400명을 걸어내고 새 병력으로 교체를 허락해달라" 미 2군수사령부는 화가 났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훌륭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 한국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 당시는 누구도 알지못했다.
보트너는 3단계로 일을 나누었다.
첫째 단계는 지휘권을 세우는 일로, 누가 주도권을 가진 대장인지를 포로들이 알게 하기위해서 더 많은 무장병력을 보강하는 것이고
둘째 단계는 포로들의 수용할 수있는 새로운 수용소를 확실히 건립하는 일
세째 단계는 이렇게 새로 만들어진 수용소로 무사히 포로를 수용하는 일.
시간이 별로 없었다.
76수용소는 전면적인 학살을 일으키기로 이미 날짜를 잡아둔 상태였다.
보트너는 상부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중국말을 할 줄 알았다.
일본에서 미 187공수연대전투단이 거제도로 파견되었다. 공병 건설부대도 더 들어왔다. 자금줄이 풀리면서 보트너는 며칠 안으로 거제도를 안전하게 만드는 데 350만 달러를 쓸 예정이었다.
1단계를 실행하는 데 열흘이 걸렸다. 포로수용소는 행상, 창녀, 공산당 간첩과 같은 군중에 둘러싸여있었다. 수용소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포로와 군중이 쪽지를 주고 받는 것이 일상이었다. 상부에 승인을 받은 보트너는 트럭을 준비하되 폭력을 쓰지 말고 민간인들이 자기 발로 트럭을 타도록 했다. 하루 만에 모든 민간인들이 트럭을 타고 떠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다. 포로수용소 주변의 민간인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새로운 수용소를 짓는 2단계는 거의 30일이 걸렸다.
1952년 6월 10일이 되어서야 3단계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현재 수용소에서 포로들을 분산해 새로운 수용소로 옮기는 것이었다.
보트너는 공산 포로 지도부가 죽음을 각오하고 저항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3단계를 시작하면서 보트너는 골수 공산주의자들부터 무너뜨리기로 결심했다.
76수용수로를 난 도로에 미 187공수연대와 미 38보병연대 예하의 2개대대를 눈에 띄는 곳에 배치했다. 역시 잘 보이는 곳에 보병과 공수부대원들은 포로수용소를 겨냥해 기관총과 박격포를 설치했다. 그런 뒤 보트너는 76수용소 옆 빈 수용소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착검하고 화염방사기와 함께 진입하는 훈련을 시켰다. 공산 포로들은 이 광경을 다 보았다. 초 단위로 계획이 만들어졌고 모든 장교는 자기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 상급자에게 직접 보고했다.
이렇게 한 뒤 보트너는 76수용소에 있는 포로 선임자를 불렀왔다. 76수용소의 포로들을 훨씬 나은 곳으로 옮겨질 것이며, 새 수용소를 선임자와 함께 점검했다. 그리고 수용소 주변에 확성기를 설치해서 영어, 한국어, 중국어로 같은 내용을 방송했다. 포로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질 것이며, 만일 저항하면 무력을 쓸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전달했다.
1952년 6월 9일, 76수용소에 있는 인민군 포로들은 아무도 보트너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는 피켓을 걸었다.
다음날인 6월10일 6시 15분, 공수부대원들이 철조망을 끊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공산 포로들은 구역 안에 미리 계획해둔 방어선까지 물러서더니 작업장에서 만들어둔 긴 창과 날카로운 칼을 갑자기 휘두르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충격용 수류탄을 던져 일부를 해산시켰다. 공산 포로 150명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수용소에 불을 놓고 창과 칼로 저항했다.공산 포로 43명이 사망하고,135명이 부상을 입고서야 저항의 거점은 무너졌다.
이런 혼란을 거치고서 76수용소에 있더 골수 공산 포로 6,500명은 500명 단위로 나뉘어 새로 만들어진 수용소로 옮겨져 수용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 배수로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던 리학구 총좌를 발견했다.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리학구는 그 뒤로 별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76수용소를 수색하던 중 계획서 두 건이 발견되었다. 한 건은 인민군 포로들이 76수요소를 방어할 때 쓴 방어계획이고, 다른 한 건은 1952년 6월 20일을 목표로 수용소에 있는 극렬 인민군 포로들이 대규모로 탈주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8일 늦었다. 1952년 6월 12일 황소라는 별명으로 불린 보트너 준장은 마침내 거제도를 완전히 장악했다.
다시 슐리처 상사...
위완Wewan에 있는 4호 수용소에 있는 찰스 슐리처 상사는 1952년8월부터 포로 1개 중대의 진료을 담당해왔다. 주변에는 터키인, 영국인, 프랑스인, 일본인2세, 그리고 푸에르토리코 출신들이 있었다. 슐리처는 이들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친구가 되었다.
슐리처는 중공군 앞에서 터키군이 보여준 강철 같은 군기와 맹렬하기까지 한 자존심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슐리처는 포로 있는 동안의 공로를 인정 받에 터키 정부와 영국 정부로부터 각각 훈장을 받게 된다.
중공군은 포로들을 점차 살찌웠다. 포로 교환에 대비해서였다.
슐리처는 전투 중 실종자 명단에 2년 동안 올라 있었다. 미국 정부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슐리처 부인에게 전사위로금등을 보상할 의향이 있음을 알렸다. 엘리자베스 슐리처 부인은 눈물을 보이며 제안을 거부했다.
슐리처 부인은 방문한 장교에게 남편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올 것이니 헤어졌던 그 장소에 있으라고 했다고 말했다. 다른 모든것이 없었지만 슐리처 부인은 오직 그 말에 의지하고 있었다. 왜그런지 모르지만 슐리처를 아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슐리처 부인만이 남편이 죽지 않았다고 믿었다.
1953년 4월, 갑자기 포로 중 일부가 송환을 위해 선발되었다. 리틀 스위치였다. 1953년 9월6일 아침, 슈리처와 포로들은 트럭에 타라는 지시를 받았다. 포로 중 한 명이 난데없이 격렬한 불안 증세를 보였다. 소리를 지르더니 뛰어내려 도망쳤다. 그리고는 앞뒤 살피지 않고 전력을 다해 기둥으로 돌진했다.
11시, 슐리처가 탄 트럭이 판문점에 멈춰 섰다. 미군 포로가 대한 마지막 교환이 이루어졌다. 콧수염을 기른 우람한 해병 상사가 트럭 곁으로 걸어와서 크게 말했다. "여러분 성을 부르면 이름, 가운데 이름 머릿글자 그리고 군번을 말합니다."
'슐리처!"
슐리처는 있는 힘을 다해 대답했다. 그리고 트럭에서 내렸다.
해병 상사가 진지하게 말했다."상사!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서 기쁘오."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모를 겁니다." 슐리처의 답이었다.
마크 클라크 대장은 이들을 맞이하러 그곳에 있었다.
미 육군 상사 찰스 B. 슐리처는 자기임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1,010일이 걸렸다.
1953년9월 23일 샌프란시스코 항구 부두에서 슐리처는 엘리자베스 부인을 만났다.
휴 전
1953년 3월5일,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했다.
미국은 1953년에야 구경 280밀리 원자포를 개발, 극동에 배치했다. 원자포는 지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방어 시설도 파괴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파괴 깊이가 20킬로미터나 되었다.
1953년에 공산군은 전술핵무기가 없었다.
280밀리 포가 한국으로 반입되지는 않았지만 한국과 가까운 곳의 무기고에 수용되어 있었다. 포와 탄이 모두 극동에 배치되었다는 말이 더 비밀스럽게 공산권에 흘러 들어갔다.
중공군 정보부가 느끼는 심리적 압박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중공은 서구의 군대와 싸워 그들을 외견상 정지 상태로 몰아 넣었다.
중공은 하루 만에 동양에서 강대국 지위로 뛰어올랐다.
공산군과 유엔군이 모두 동의하는 가운데 대한민국만 휴전에 반대했다.
이승만과 대한민국의 비극은 간단했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도움 없이 싸움을 계속할수 없었지만, 휴전을 받아들이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영구분단을 뜻했다.
1953년 7월 27일 월요일 오전 10시 1분, 유엔군사령부 해리슨 중장과 북한의 남일은 판문점에서 18부의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더 이상 전투는 없었다.
그러나 평화도 없었다.
승리도 없었다.
이것은 정전 cease-fire 으로 불렸다.
요약 끝.
첫댓글 '이런전쟁'을 읽고를 마칩니다. 겁없이 요약해보겠다고 들이댔는데 823페이지 방대한 분량이 녹록치 않군요.
이미 세상에 알려진 인천상륙작전, 서울 수복,장진호, 군우리,지평리,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전투와 휴전협상 과정은
과감히 생략했습니다.
이런전쟁 잘보았습니다. 더구나 열심히 읽으시어 요약문을 올려주시니 쉽게 개요를 알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나도 이런전쟁을 사서 읽어보렵니다.
바우님 격려에 힘이 납니다. 두번의 주말을 책의 잔글씨 그리고 컴 자판기와 씨름했지요.
그래도 읽어주는 벗이 있으니 좋습니다.
거제도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군요. 잘 읽었습니다.
조경복 회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