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호도(金湖島) 전라남도 광양시 금호동에 있었던 섬. 원래의 섬이름은 쇠섬이었는데 쇠자를 한자로 표기하여 금호도가 되었다. 섬 주변의 간석지를 매립하여 우리 나라 제2의 제철소인 광양제철소의 전진기지가 건설됨으로써 육지화 되었다. 1985년 3월에 매립공사가 끝나 원래의 섬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금호도는 전라남도 광양시 금호동에 위치하며 동경 127°44′, 북위 34°57′, 면적은 1.36km2이다. 이주 전 인구는 2,513가구 4,864명이었으며, 1981년 태인도와 금호도 일대를 매립하여 광양제철소를 설립함으로써 천지개벽의 땅으로 변한 곳이다. 제철소가 들어서기 전에는 주로 김 양식과 패류 채취로 주 소득을 올렸으며 간척지 쌀을 생산했다. 현재 금호도 주민들은 주로 광영동에 집단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1861년에 펴낸 명세궁 수세절목에는 ‘금호(金湖)’라고 표기하였는데 당시 섬이라고 하지만 바다를 호수로 보고 섬 이름은 아름답게 쓰려는 의도인 것으로 사료되며 1872년 왕명(王命)으로 제작된 광양현 지도에는 ‘금도(金島)’라 표기하였으며 그 이후 ‘쇠섬’, ‘금도’, ‘금호도’ 등으로도 불러 왔는데 현재 이곳 광활한 바다 위에 제철소가 들어서 철을 생산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옛 선인들이 마을 이름을 지은 선견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한반도 남쪽 백운산 끝자락에 위치한 영·호남의 접경지대. 육지와 섬이 마주하는 남해의 만(灣)을 끼고 있는 전라남도 광양시는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전형적인 어촌과 농촌이 어우러진 한적한 시골이었다. 이곳 일대의 갯벌에서는 완도 김과 바꾸라고 해도 안 바꾼다는 말이 있을 만큼 맛있는 광양 김이 나왔다. 이 김은 불에 슬쩍 구우면 초록빛이 도는데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는 맛이 일품이어서 일찍이 조선 시대에는 궁중에 진상되었다. 광양 김은 동쪽에서 남해도가, 서쪽에서 여수반도가 울타리 노릇을 하고 있는 광양만에서 나오는데, 이 만은 섬진강 물이 흘러들어 맑은 민물과 바닷물이 합치는 곳이다. 이런 자연 조건을 발판으로 삼아 광양만을 끼고 있는 해안 사람들은 일찍부터 굴·백합·소라 같은 조개류와 함께 광양 김을 양식해 왔다. 특히 전남 광양은 한때 전국 최대의 김(해태, 海苔) 생산지로 이름을 날렸다. 광양에서도 금호도(金湖島) 앞 지금의 광양제철소 자리의 450만 평에 달했던 갯벌은 광양제철소 조성 사업이 시작되기 전 1982년까지 김의 주산지로 유명했다. 또한 섬진강과 수어천이 바닷물과 만나는 금호도와 태인도 일대는 조개나 석화 등의 어패류는 물론이고 뱀장어·농어 등 어족 자원도 풍부했다. 그러나 이것 모두 이제는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대규모 간척 사업과 연륙교 공사가 끝난 뒤, 드넓고 이름 높던 김 밭은 사라지고 말았다. 금호도와 태인도라는 섬의 이름도 바뀐 모습처럼 금호동과 태인동으로 변경되었다. 이주 직전의 금호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약 400여 년 전에 현재 주민들의 선조가 들어와 도촌·내동·대동·양도 등 네 개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었다. 또한 이 지역은 금호도 이외 양도·소당도·금당도 등 네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으나 이들을 통틀어 금호도로 통한다. 금호도 주민들은 간척지와 구릉지를 이용한 벼농사·밭농사와 주변 바다에서의 김 양식, 어패류 채취 등 반농반어 형태의 생업으로 생계를 이어 왔다. 풍부한 영양분의 담수가 유입되는 섬진강 하구에 위치한 지리적인 조건으로 제철소가 들어서기 직전까지는 김 양식으로 소득의 대부분을 만들어 냈다. 또한 1970년대까지 주로 김을 비롯한 양식 어업과 농업을 위주로 800가구 5,500명쯤이 살고 있었다. 이 당시 금호도는 1979년 1,905명, 태인도는 1977년 3,645명이 최대 인구였다. 1982년에 나온 '도정백서'에 따르면 금호도는 272가구 중 118가구가 어업에 종사했고 태인도는 530가구 중 274가구가 농업에 종사해 두 섬의 생업 구조가 다소 다름을 일러 주고 있다. 금호도는 양도를 포함 166ha 크기였고. 태인도는 407ha로 인구뿐만 아니라 면적도 금호도의 곱절이나 되었다. 그러나 논 면적에 있어서는 금호도가 73ha, 태인도가 92ha로 큰 차가 없었다. 하지만 1974년 정부는 제2제철 설립을 계획하고 입지 선정에 착수해, 아산만과 광양만을 정밀 조사한 끝에 지역의 균형적인 발전과 안보적 차원에서 광양만(금호도와 태인도 일대)을 제2제철 입지로 1981년 11월 4일 최종 확정했다. 제2제철의 건설은 부족하게 될 내수 및 수출용 철강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작업이었다. 금호도에는 제철 본부와 사원 주택 단지, 태인도에는 관련 업체들이 들어서기로 되었다. 이제 금호도와 사도 같은 몇 개의 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광양제철소가 세워지면서 이 고장은 완전히 달라졌다. 광양 사람들은 이 천지개벽을 목격하면서 농사꾼이나 어부에서 공장 근로자로 바뀌었다. 450만 평 규모의 광양제철소가 들어서고 인근에 연관 공업단지가 조성됐다. 서울 여의도 넓이의 6배가 넘는 광활한 부지를 만들어 우리나라 지도를 바꾸고 그 위에 최첨단의 제철소를 건설한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광양제철소는 단일 공장으로는 신일본제철에 이어 세계 2위를 자랑하는 대규모 제철소가 됐다. 포항제철소와 더불어 우리나라가 세계 6대 철강국이 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2. 금호도(金湖島) 전라남도 진도군 서남부 해역에 위치한 섬이다. 고군면 금계리에 속하며, 신비의 바닷길이 있는 모도와 약 0.7㎞ 떨어져 있다. '대동지지'(진도)의 도서편에 금도(金島)로 표기되어 있다. '호남지도'(진도), '지승', '광여도'(진도)에도 모도와 함께 보이고 금도(金島)로 표기되어 있지만, '조선지형도'(진도)에는 금호도(金湖島)로 명기되어 있다. 금호도는 금(金)섬이라고 불리다가 섬과 섬 사이의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하다고 하여 금호도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섬에 보물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삼별초 항쟁 당시 정4품 벼슬을 한 김시랑이 들어와 살았다고 해서 그의 성(姓)을 따서 '김(金)씨섬'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3. 금호도(錦湖島)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에 속하였던 섬. 산이면 상공리 북서쪽 2㎞, 허사도(許沙島) 남쪽 6㎞ 지점에 있다. 동경 126°22′, 북위 34°41′에 위치한다. 옛 이름은 목화를 생산하여 돈을 묶는다는 뜻의 속금이었으며, 1920년경 금호라 불러야 무한한 발전과 부흥을 이룩할 수 있다 하여 개칭하였다. 금호는 섬 주위를 둘러싼 바다의 경치가 비단자락을 펼쳐놓은 듯 아름다우며 물결이 호수처럼 잔잔함을 의미한다. 지질은 화강암류·편마암류 및 중성화산암류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의 금성산(錦城山, 186m) 동 사면과 북동 사면의 산록부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루고 있어 대부분의 농경지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 해안은 암석해안으로 수로를 끼고 있으나, 북동쪽 해안과 북쪽의 만입지(灣入地)에는 사질해안과 넓은 간석지가 발달하고 있다. 북동쪽의 만(灣)을 막고 있던 섬은 방조제로 연결되어 종래의 만이 농경지와 염전으로 이용되고 있다. 5백 년 전까지 무인도였고 조선 초기까지 무안현 문내방에 속하였다. 1450년(세종 32) 관제 개편에 따라 현이 폐지되고 군이 되면서 해남군 화원방에 속하다가 1906년 산이면에 편입되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고, 마늘·콩·고추 등이 약간 생산되며, 주요 해산물은 김이다. 최근 배추와 고구마 생산이 많다. 취락은 금호·산두의 2개 마을에 집중 분포하며, 섬 중심지는 금호산 동사면의 산록부에 위치한 금호마을이다. 선착장이 섬 동쪽 해안과 서쪽 해안에 있는데, 서쪽의 금호 앞 나루터는 화원면의 신흥나루터와 마주보고 있고, 정기 여객선이 매일 운항한다. 교육 기관은 산이면 전체에 초등학교 2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1989년 12월 착공된 금호방조제가 1996년에 준공되면서부터 육지화가 되어 섬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