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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墨,회화(繪畵) 스크랩 겸재 정선 ㅡ 금강전도
古方 추천 0 조회 347 13.08.24 09: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금강산 1만 2000봉을 담은 「금강전도」 
                                  
 1734년(59세), 종이에 담채, 130.7×59cm,

 

  정선은 1711년 36세에 처음 금강산을 유람한 뒤 틈만 나면 금강산을 보러 갔다.

「금강전도」는 정선이 59세 때인 1734년 겨울에 만폭동을 중심으로 내금강의 전체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정선은 베갯머리에서도 금강산을 실컷 볼 수 있도록

 1만 2000봉우리를 하나의 둥근 원 속에 담아 냈다. 이것이 바로 「금강전도」이다.

.
1984년에 국보 제217호로 지정된 이 그림은 세로 130.7cm, 가로 59cm 크기이며,

먹으로 전체 그림을 그리고 부분부분 연하게 색깔을 입힌 수묵 담채화랍니다.

 

 

 

 

 

 

 

              

                          <금강내산총도>,《신묘년풍악도첩》, 1711년(36세), 비단에 엷은 색, 36.0×37.4cm, 국박

 

 

 

정선은 손과 발로 그림을 그린 화가입니다.

한양의 도성안에서부터 금강산까지 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그는 부지런히돌아다녔습니다. 

다니면서 직접 보고 느끼고 감동받은 것을 붓끝으로 쏟아냈습니다.

그 중에서도 금강산은 정선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신묘년풍악도첩》을 비롯하여 여러 점의 금강산 그림을 남겼습니다.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금강내산총도>처럼 금강산의 전체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두번째는 금강산의 세부를 클로즈업하듯 가까이에서 그린 작품입니다.

 

이런 원칙은 36살 때 그린 이 화첩에서부터 72세 때 그린 《해악전신첩》까지

일관되게 지켜지는 원칙이었습니다. 

 

                             <금강내산>,《해악전신첩》, 1747년, 비단에 엷은 색, 32.6×49.5cm, 간송미술관 

 

 

 

 

                         <단발령망금강>,《신묘년풍악도첩》, 1711년(36세), 비단에 엷은 색, 34.4×39cm, 국박 

 

 

 

단발령은 여행자가 금강산의 전체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첫번째 고개라고 합니다.

단발령에 서서 금강산을 보는 순간 머리를 깎고 수도자가 되기 위해 입산한 사람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처음 본 금강산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이 고개에 서서 금강산을 보자마자 속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단발을 했겠습니까. '여한이 없다'는 말은 이런 경치를 본 후에나 할 수 있는 표현이겠지요? 

정선은 구경꾼들이 서 있는 속세와 부처님과 신선이 산다는 금강산을 구별하기 위해 그 사이에 구름의 강을 흐르게 했군요.

피안의 세계는 저렇게 신기루같을까요? 똑같은 제목을 가진 다른 작품 하나 더 구경해보세요. 

 

 

 

 

  

 

                                     <단발령망금강>, 종이에 엷은 색, 34.4×39cm, 간송미술관 

 

 

 

 

                               <백천교>, 《신묘년풍악도첩》, 1711년(36세), 비단에 엷은 색, 33×37.4cm, 국박

 

 

 

<백천교>는 정선이 금강산을 그리는 두 번째 방법에 속합니다.

금강산 안에 깊숙이 들어가 세부를 그리는 방식입니다.

너럭바위 위에 앉은 선비들이 황홀한 계곡 경치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선비들 보니까 중국식 복장이 아니라 조선의 옷을 입고 조선의 갓을 썼군요.

정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입니다.

정선은 조선 산천을 그린 진경산수화가일 뿐만 아니라 인물을 그리더라도 조선 사람을 그렸습니다. 

그 전까지는 그림 속에 중국 사람을 그리는 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라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지 않다고 깨달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정선입니다.

가장 조선적인 화가인 김홍도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전에 정선같은 선구자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옹천도>,신묘년풍악도첩》, 1711년(36세), 비단에 엷은 색, 26.6×37.7cm, 국박

 

 

'옹천'은 독(항아리)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긴 벼랑이라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른쪽에 출렁거리는 파도를 배경으로 왼쪽에 좁을 길을 따라 여행하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정선은 벼랑 중간 외길에 점을 찍어 길을 표시했는데 

당나귀를 놓친 아이가 바삐 걸어가는 모습을 그려넣었습니다.

만화같은 발상이지만 그림 읽는 재미가 느껴집니다. 

 

 

 

 

 

                                                  <비로봉도>, 종이에 먹, 100×47.7cm, 개인 소장

 

 

정선은 표현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작품을 여러 점 남겼습니다.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을 화면 가득 배치하고 그 앞에는 낮은 바위산들을 들러리처럼 세웠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늠름한 장군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행진하는 것 같습니다.

 

 

 

 

 

 

 

                                         필자미상, <금강산도권>, 19세기, 종이에 담채, 26.7×43.8cm, 국박 

 

 

그림 속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세요. 

스님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선비가 말을 타고 유람을 떠나는 것 같기도 하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바위의 형상이 워낙 기기묘묘하고 절묘하다보니 그런 느낌을 받는 것 같습니다.

큰 바위에 성스러운 이름을 붙이고 절을 하고 소원을 비는 행위는

자연에 대한 이런 경외감 속에서 생겨나지 않았을까요?

이야기가 옆으로 빠졌는데 비로봉 그림 한 점 더 감상하시지요. 

 

 

 

 

 

                               <비로봉>, 종이에 수묵, 25×19.2cm, 개인 

 

 

먹이 가진 매력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날카로운 펜으로 죽죽 내려긋듯 바위의 질감을 표현한 이런 작품을 보면 대책없이 무조건 감동하고 맙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친절하고 자상한 남자가 좋은데

왜 그림은 과묵하고 본질에 바로 육박해 들어가는 작품이 좋은 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세밀하고 지나치게 친절한 그림은 잔소리 많은 남자처럼 거추장스럽고 번잡하다니까요. 

이 작품은 본질의 뼈대가 뭔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금강내산>, 종이에 수묵,  80.5×28.2cm, 간송미술관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한국 회화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화가로

'화성(畵聖)'의 칭호를 올려야 마땅한 인물이다.

그는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가장 알맞은 고유화법을 창안해서

우리 산천을 소재로 그 내재된 아름다움까지 표출해내는 데 성공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성자이기 때문이다.

 

겸재는 화가이기 이전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로 이어지며

완성된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의 학통을 이은 성리학자였다.

율곡으로부터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으로 이어지는 율곡학파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성리학의 근본경전인 사서삼경에 박통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성리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주역(周易)에 정통해서 당대 제일로 꼽힐 정도였다.

 

 

이런 겸재가 그 새 화풍 창안의 실험을 대담하게 시도하여 성공해 내는 것은 금강산 사생을 거치면서이다.

그가 36세 되던 해에 그와 시화(詩畵) 쌍벽으로 일컬어지던 지우(志友)

사천 이병연(?川 李秉淵, 1671-1751)이 금화현감으로 있으면서

스승인 삼연 김창흡과 겸재를 초청하여 금강산 유람을 함께하는데

이때 겸재는 내외해(內外海) 삼금강(三金剛)의 절경을 30폭 그림으로 사생해내고

삼연과 사천은 시로 사생해낸다. 이것을 합쳐놓은 시화첩이《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인데

사천을 통해 이 시화첩이 세상에 알려지자 겸재의 화명(화명)은 한순간에 천하를 진동하게 되었다.

 

여기서 자신을 얻은 겸재는 더욱 진경(眞景) 사생을 통한 화법 창안에 매진하여

60세 전후한 시기에 벌써 확고한 자기화풍을 확립한다.

 

그 사이 겸재는

41세 때인 숙종 42년(1716) 관상감겸 교수로 특채되어 벼슬길에 나가 조지서별제, 사헌부감찰 등을 지내다

45세 때인 숙종 46년(1720) 경상도 하양현감에 제수된다.

하양에서 6년 만기를 채우고 영조 2년(1726) 51세로 상경하는데

그 사이 경상도 일대의 명승고적을 많이 사생하여 《영남첩》을 꾸밀 정도였다고 한다.

 

그 뒤 영조 9년(1733) 58세로 경상도 청하현감이 되어 내려갔다가

60세 때인 영조 11년(1735) 92세의 모친상을 당해 상경하기까지 2년 가까이

경상도 해안에서 강원도 해안으로 이어지는 관동팔경 등 해산(海山) 제일경을 사생하며

진경기법을 연마하였다.

그리고 모친의 3년상을 치르는 동안에 머릿속으로 진경기법을 정리한 다음 영조 13년(1737) 탈상한 후

강산(江山) 경치로 국중 제일이라는 남한강 상류 사군(四郡, 청풍-단양-영춘-영월)산수

즉 단양8경을 찾아 진경사생여행을 떠난다. 그 결과 겸재의 진경화법은 최고도로 무르익게 되었다.

 

그래서 64세 기미년(1739) 봄에 그린《청풍계(淸風溪)》에서는

대담한 농묵쇄찰법(濃墨刷察法)과 임리(淋?)한 수림법(樹林法)을 통해

겸재 특유의 진경산수화풍이 대성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65세 겨울 양천현령으로 나가 그려내기 시작하여 다음해 겨울까지 완성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서는 청록계(靑綠系)의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필치로 일관된 화법을 통해

대경(對境)에 따라 무궁하게 개발해내던 다양한 그의 진경화법을 실감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70세 전후에 겸재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그림솜씨의 황금기를 자랑하는데

바로 그런 황금기인 72세 때(1747)에 겸재는 벼슬도 다 내놓은 한가로운 몸으로

다시 금강산을 유람하게 된다.

36년 전에 무명 사인화가(士人畵家)로 처음 이곳에 와서 30폭 금강 절경을 그려 일거에 화명을 떨치던

옛 추억때문인지 겸재는 그 절정기의 솜씨로《해악전신첩》30폭 중 21폭을 다시 그려낸다.

그러니 이때 그린 《해악전신첩》은 겸재 진경산수화 중의 백미라 할 것이다.

 

이로부터 겸재 그림은 더욱 노력해져서 많은 걸작품들을 남기니

간송미술관 소장의 <삼일포> 등 관동팔경 8폭을 비롯해서

<통천문암> <여산초당> 등 대폭 산수도가 모두 이 시기에 그려진 것이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기사년(己巳年) 산수화첩>도 겸재가 74세 되던 영조 25년(1749)에 그린 것이다.

 

그런데 겸재는 76세 되던 영조 27년(1751) 윤5월 29일에 슬픔을 당한다.

시화쌍벽(詩畵雙璧)으로 평생동안 지기를 나누던 진경시(眞景詩)의 대가 사천 이병연이

81세로 타계한 것이다.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 겸재는

사천과 함께 오르곤 했던 사천댁 뒷동산인 북악산 남쪽 서록(西麓) 즉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 뒤쪽

산등성이에 올라 자신의 집이 있는 인왕곡 일대를 바라보며

비 개이는 정경을 장쾌한 필법으로 휘둘러낸다. 그것이 <인왕제색(仁王霽色)>이다.

 

겸재는 이런 그림을 그려 그 심회를 표출해내는 것이 겸재다운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노련한 필법으로 어느 때는 진경을 극도로 추상화시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더욱 강건한 필력을 구사하기도 하며 진경산수화법을 철저히 마무리 짓는다.

 

그런데 겸재에게는 그 호가 가리키는《주역(周易)》겸괘(謙卦)의 괘사(卦辭)대로

만년에 유종의 미를 거두는 홍복(弘福)이 터져오게 된다.

79세 되던 영조 30년(1754) 영조의 회갑년인데

영조는 겸재에게만 종4품 사도시(司導寺) 첨정(僉正)의 벼슬을 내린다. 그림 스승에 대한 예우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국왕의 과갑(過甲)과 왕대비 인원왕후의 망칠(望七, 69세) 수경(壽慶)으로

70세 이상 조관(朝官)에게 1품을 가자승직(加資陞職)시킴에 따라

겸재에게는 종3품 첨지중추부사가 제수되고,

81세 되는 그 다음해인 영조 32년(1756) 왕대비 칠순으로 다시 70세 이상 조관에게 1품을 가자(加資)하니

겸재는 종2품 동지중추부사로 오른다.

이에 2품 이상은 3대 추증(追贈)하는 법전(法典)에 따라

부친(時翊)은 호조참판, 조부(綸)는 좌승지, 증조부(昌門)는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증직된다.

 

그래서 겸재가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을 때 이를 축하 기념하는 글인

‘정겸재 선(敾)이 수직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된 것을 축하하는 머릿글(鄭謙齋敾壽職同樞序)’이라는 글에서

창암 박사해(蒼岩 朴師海, 1711-1778)는 이렇게 말한다.

 

 

「옹(翁)은 끝없는 명성을 차지하였고 겸해서 80의 수를 누렸으니,

하늘이 옹(翁)에게 주는 것이 너무 풍부하지 아니한가.

대체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초췌하고 마른 선비가 많다.

시(詩)에 궁인(窮人)이 많듯이 그림을 잘 그리고 궁하지 않은 자 또한 드물다.

옹(翁)은 비록 청빈하다 하나 안으로는 부인과 자손이 갖춰있는 즐거움이 있고

밖으로는 녹을 받는 벼슬의 영광이 있어 삼현(三縣)의 인부(印符)를 나누어 가졌었고

품계가 금옥(金玉)을 지냈으니(당상관의미) 하늘의 복이 옹(翁)에게만 어찌 완전한가.

 

 

이런 대복인(大福人) 겸재가 영조 35년(1759) 3월24일 84세의 천수를 누리고 영면(永眠)하니

현재 도봉구 쌍문동인 양주 해등촌면 계성리에 안장한다.

이에 겸재의 10년 후배로 만년에 30여 년을 이웃해 살며

조석상봉으로 겸재와 함께 화도(畵道)에 정진하여 풍속화풍을 대성해낸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 1686-1761)은 다음과 같은 애사(哀辭)를 지어 겸재의 일생을 총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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