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실은 조소앙에게 충격적이었다.
그는 남북협상에 좌절과 실패를 곱씹으며 지금까지의 통일노선을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윤경빈 / 전 광복회장>
"백범선생하고 소항선생하고 조금 다른 면이 뭐냐 하면, 소앙선생이 현실주의자 입니다.
처음에 이북에 갈 때까지도 백범선생하고 같이 단독정부반대를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이북에가서 그 남북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실망을 해 가지고 돌아와서 이제는 안되겠다.
이젠 남쪽에서 현실 정치를 우리가 해서 힘을 키우고 이렇게 해서 북쪽하고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힘을 더 키워가지고..."
조소앙이 남한의 현실정치에 참여함으로써 통일운동을 전개할 뜻을 밝히자 한국독립당내에 단독정부반대세력들은 거세게 반발한다.
그러나 조소앙은 단독정부반대를 고수한다고 해서 통일의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1948년 10월 조소앙은 결국 '한국독립당 탈당을 선언' 한다.
<조소앙 선생 한독당 탈당 성명서 중>
통일의 원칙만 사수하고
단선반대를 외치는 것은
어찌보면 공허한 외침이다.
더구나 민족분단을 해소하기 위한
통일의 구호만을 부르짖으면서
그 길로 가는 길목을
가로 막을 수는 없다.
당원동지들 선택하자.
현실적 내치, 외교, 군사문제를 거쳐서
완전한 통일국가와
독립정부의 완성에까지
노력하는 깃발을 잡자.
<노경채 /수원대 사학과 교수>
"역시 조소앙의 경우는 '이제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 마당에 삼균주의정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는 생각을 가졌구요. 또 하나는 그...이승만 정권의 견제를 위한 옳바른 야당이 필요하다. 이와같은 생각을 했던 거죠."
한국독립당 탈당후 조소앙의 정치행로는 급선회한다.
자신이 창당에 관여했던 한국독립당을 떠나야 하는 아픔을 딛고 남북을 아우를 수 있는 제3의 노선을 추구함으로써 민족의 통일을 앞당기려 한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YMCA 강당
*1948년 12월 1일 사회당 결성
1948년 12월 이곳에서는 대한민국 진보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새로운 정당이 탄생한다.
조소앙의 사회당이 창당된 것이다.
모든 국민에게
균등사회의 이념을 고취하여
나아가 반민족, 반민주주의 분자등
일체 반동분자들을 제외한
각계각층, 각당각파, 무당무파 등
일체 민족진영과 보조를 같이해
현실을 통해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남북통일을 완성하고
정치, 경제, 교육상 완전 평등한
균등사회 건설에 매진할 것을
전민족 앞에 정중히 선언한다.
당시 사회당 당사는 종로 화신백화점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조만제 / 삼균학회회장>
"바로 이 길 건너편에 저기 저 하얀 집이 아마 한청빌딩일 거에요. 거기 한청빌딩3층에 사회당 당사 중앙본부가 있었죠. 그때의 분위기는 굉장히 상기된 분위기 입니다. 상기된 분위기에요."
넉넉하지 못한 재정탓에 당을 운영하기조차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당의 당세는 날이 갈수록 확대된다.
창당6개월만에 당원 총 수는 전국에서 20만명을 넘어섰다.
<사회당 강령 - 조소앙의 사회당>
1. 우리나라의 인민, 주권 영토를 통일하고 민주자주의 독립국가조직을 완성한다.
2. 국비교육과 정민정치와 계획경제를 실시하여 均智, 均權, 均富의 사회를 건설한다.
3. 개인 대 개인, 민족 대 민족, 국가 대 국가의 평등과 호조(互助)를 원칙으로 한 세계일가를 실현한다.
사회당의 성격을 가늠하게 하는 당 강령에는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뚜렷이 드러난다.
정치, 교육, 경제 균등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당 강령은 조소앙이 지난 30여년에 걸쳐 다듬어온 이념이었다.
제3의 노선을 통해 조국의 통일을 앞당기려는 조소앙의 시도는 많은 사람들로 부터 환영받는다.
그러나 극우파는 삼균주의를 공산주의의 사촌쯤으로 몰아붙였다.
<조만제 / 삼균학회 회장>
"삼균주의가 뭐냐 왜 우리 미국이 있고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있는데 유독 무슨 삼균주의냐? 이건 공산주의하고 비슷한 내용 아니냐? 평등이나 균등이나 그게 그거지 별 거 있느냐? 그러니까 이건 사회주의다. 사회주의하고 공산주의하고 틀리지 않느냐 하면 그럼 공산주의 사촌이 사회주의고 사회주의 형제간이 삼균주의 아니냐? 이러한 논리로 뒤짚어 씌우는 데는 구체적인 관계의 장면이 되면 방법이 없어요."
*백범 김구 국민장 <1949년 7월>
그러던 1949년 6월 26일 백범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암살된다.
조국의 해방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친 김구의 죽음은 조소앙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동지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을 수 많은 없었다.
김구와 함께 이루려던 민족통일의 과업이 그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짖눌렀다.
1950년 5월 조소앙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해 사회당에 국회의 발언권을 강화하기로 결심한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처음실시되는 정식선거였기 때문에 나라 안팎에 관심이 뜨거웠다.
남한단독정부의 수립을 반대하며 50제헌의회선거에 불참했던 남북협상파와 중간계열의 정치세력들도 대거 선거에 참여한다.
210석에 금뺏지에 도전한 후보자는 2209명 평균 1/10이 넘는 좁은 문이었다.
<이보철 / 삼균학회이사>
"5.10 제헌국회를 한독당에서 보이콧 하는 바람에 새로 수립된 이승만정권이 대한민국이 마치 미숙아처럼 되었거든요. 그래서 온 국민들이 이제 이북에도 김일성 정부가 서고 그랬으니까 분단이 고착화 되는 건 아닌가? 그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백범은 이미 돌아가셔서 안 계시고, 그러한 것을 볼 적에 단순한 국회의원 선거가 아니라 국가 운명을 새로 개척해야 할 리더를 뽑자."
사회당 간판을 내걸고 입후보한 후보자들은 모두 28명, 조소앙은 서울 성북구에 출마해 미군정 경무부장 출신의 조병옥과 격돌한다.
조소앙은 유세장을 돌아다니며 남북한통일정책과 경제적균등에 입각한 완전고용정책을 국책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선거구뿐 아니라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연설을 들었다.
유권자들 사이에서 조소앙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보철 / 삼균학회이사>
"한번은 정릉천이 흐르는 미아리에 다리있고 한 백사장 거기 냇물까지...거기서 개인연설을 했는데 저녁 7시인가 8시부터 시작해서 했는데 뭐 한 시간 두시간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양반이 올라가서 하는데 청중들이 막 가수한테 노래를 청하면 앙코르지만 선생님 더 한말씀 이런 식으로 하니까 하여튼 11시까지 연설을 4시간 그냥...참 정력도 대단하세요. 대 웅변가시고."
그러나 경찰은 조소앙진영에 온갖 압류를 가한다.
조소앙후보측에 벽보나 현수막은 모조리 찢겨 나갔고 선거운동원들은 거리에서 몽둥이질을 당했다.
<하상영 / 당시삼균주의 청년동맹 조직국장>
"뭐 방해공작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좀 선거가 지날 때는 오전에 지프차에 선거운동원이 탑니다.
대개 학생들이죠.
학생이 나가면 점심때는 빈 차로 옵니다.
운전사가 빈차를 가져와요.
또 사람을 태워 나갑니다.
자꾸 나가거든요.
학생들이 많았어요.
나가면 여전히 그 식입니다.
잡혀갔죠.
다 붙잡혀가서 성북구 경찰서가 유치장이 차서 일부는 서울 경찰국으로 잡아갔습니다."
경찰의 테러와 흑색선전은 날이 갈 수록 심해졌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조소앙은 집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소앙은 선거를 포기할 생각까지 하게된다.
선거하루전날인 1950년 5월 29일 오후 성북구 일대에는 괴벽보와 삐라가 나돌기 시작했다.
조소앙이 공산당의 정치자금을 받아쓴게 탄로나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월북했다는 것이다.
<안종덕 / 조소앙의 며느리>
"폭력도 해, 거짓말도 해, 그냥 말로만 한 게 아니라 보도를 통해서 전 국민에게 그걸 알리는 그런 짓은 그냥 조금 거짓말 하는 것 하고는 근본적인 것이 다르잖아요."
<하상영 / 삼균주의 청년동맹 조직국장>
"소앙 선생이 이대로 있다 안되겠다 해서, 밤중에 지프차를 타고 선거구를 전부 돌았습니다. 조소앙은 여기 있다고 조소앙 건재하다고. 소앙선생이 자신이 발언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