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 중력(gravity)이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지구에는 중력이 있어 인간이 땅에 발을 딛고 산다. 중력 없는 곳에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들이 필요하고 그것의 도움을 받았을 때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게 될까?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선보인 블록버스터 우주오페라(space opera) <그래비티>는 이와 같은 원초적인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이미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있었고 우주인들의 훈련에 관한 뉴스도 전해지고 있어 전혀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니다. 우주복을 입고 둥둥 떠다니는 모습은 누구나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6천km 지구 상공에서 허블 망원경을 수리하는 우주인들이 어떻게 작업을 수행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비티>는 관객도 그 공간에 함께 존재하는 체험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이전 영화들과 차별화된다. 인류를 위협하는 외계인(<에이리언>)도 없고, 거대 자본의 음모(<엘리시움>)도 없다. 인류의 기원을 찾는 숭고한 열정(<프로메테우스>)은 더더욱 없다. 초월적인 암흑물질(<솔라리스>)에 대한 탐구도 <그래비티>의 관심사는 아니다.
놀랍도록 단순한 이 영화의 서사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초보 여성 우주인 한명이 생존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역경을 뚫고 홀로 지구로 귀환한다. 기대와 우려를 안고 전진해 온 3D영화는 이제 자기 자리를 제대로 마련한 것 같다. 한때 판타지 어드벤처물만이 3D영화의 답이라는 견해도 있었고, 복잡한 서사와 관념적인 주제는 3D영화에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도 있었다.
주인공이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동안 <그래비티>는 블록버스터 상업영화의 서사공식, 진짜 볼거리를 제공해야 하는 3D영화의 과제, 알폰소 쿠아론이라는 감독의 명성에 걸맞은 사색적인 주제를 최적의 비율로 조합하기 위해 외로운 투쟁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신기원의 우주오페라가 탄생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무의미하고 기나긴 수다의 의미
줄거리와 별 관련 없는 수다가 등장하는 영화들이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이 대표적이다. 마돈나의 노래에 관한 쓸데없는 해석을 비롯해 지인들에 대한 험담 등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수다는 이후 스토리와 아무 인과관계도 없이 무의미하다. 이 무의미한 수다의 역할은 <저수지의 개들>이라는 허구의 세계, 나아가 쿠엔틴 타란티노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을 지시하는 데 있다. 의미에 연연하지 말고 허구를 즐겨라, 대략 이런 표지를 가리킨다.
<그래비티>의 전반부에도 긴 수다가 등장한다. 그런데 언뜻 무의미해 보이는 이 수다는 영화의 플롯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궁극적으로 영화의 주제를 담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마지막 우주 비행을 하는 베테랑 임무지휘관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는 동료와 수다를 떤다. 소리를 전달하는 매개체도 산소도 없는 우주에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지구에서의 추억이다.
6주 동안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니 아내가 변호사랑 바람이 났더라, 자신의 구형 폰티악이 매력적인 이유 등등이 이들의 대화인데 척 보기에도 이미 서로 아는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아무 소리 없는 우주에서 몇주씩 버티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수다일지도 모르겠다. 우주 비행 경력도 많고 쾌활한 맷에 비해 초보 임무수행원 라이언 스톤 박사(샌드라 불럭)는 말이 없다.
과묵한 라이언과 유머러스한 맷이 나누는 그리 길지 않은 대화는 영화 후반에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라이언은 맷의 부드럽고 집요한 질문에 마지못해 하나씩 답을 하고 관객은 그녀의 상처를 알게 된다. 라이언은 4살짜리 딸아이를 사고로 잃은 뒤 집과 병원만 오가며 살고 있다. 사랑하는 딸이 놀이터에서 미끄럼을 타다 죽었는데 누구의 죄도 아니다. 라이언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너무 고통스럽다. 그녀의 고뇌는 궁극적으로 인간은, 우주는 왜 이렇게 생겨난 것인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시작된다. 알 수 없는 삶을 치열하게 살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단지 주어진 일을 하면서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다. 맷은 라이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어린 시절 추억을 들려준다. 짝사랑했던 소녀를 만나러 유원지에 갔더니 그녀가 웬 다리 짧은 털북숭이와 같이 있었단다. 그런데 더 황당한 건 그 털북숭이가 남자가 아니었단다.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에 라이언은 거의 반응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주왕복선 익스플러로호의 전 대원이 사망하고 라이언 혼자 남아 의식을 잃어갈 때 그녀는 이 이야기를 떠올린다. 라이언은 교신이 끊어진 맷을 애타게 찾으며 그 다음을 이야기해달라고 울부짖는다.
궁극의 질문과 답변
맷과 나누었던 그다지 길지 않은 대화 혹은 수다는 라이언이 사경을 헤맬 때 생명의 동아줄로 작용한다. 딸을 잃고 삶의 의미도 잃어버렸던 라이언은 막상 죽을 지경이 되자 살고 싶어진다. 죽기 직전 그녀는 맷의 환영을 보고 그와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사소한 일상이 바로 삶의 의미라는 것을 깨닫고 지구로 귀환할 의지를 되찾는다. 사지에서 주인공이 불굴의 의지로 살아오는 것은 블록버스터의 흔한 공식이고 여기에 딴죽을 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비티>가 신선하고 놀라운 이유는 인간이 품고 있는 궁극적인 질문에 자신만의 답을 구했다는 점이다. 물리학이 우주를 설명할 궁극적인 답변(answer for everything)을 찾는 여정을 지속했다면, 궁극적인 질문을 던진 것은 인간이다. SF는 이 질문과 답변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밝히는 장르다. SF 내용이 현실 과학 원칙에 맞을 때도 있고 터무니없는 상상에 불과한 경우도 있지만 SF가 품고 있는 문제의식만큼은 현실을 앞서간다.
라이언이 찾은, 사실은 <그래비티>가 찾은 궁극적인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라이언은 지구로 귀환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하면서 자신에게 남은 길은 두 가지뿐임을 스스로 확인한다. 즉, 살아서 지구로 돌아가 모험담을 이야기하거나 여기서 10분 안에 불타 죽는 것, 이 두 가지가 전부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이언이 살아 돌아간다 해도 죽은 딸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은 왜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자, 산다는 것은 살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라는 간단명료한 답이 떠오른 것이다. 죽은 자들(딸과 맷)을 떠나보내고 자신에게 부여된 생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지만 충실한 길이라는 깨달음이다.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 찬 SF코미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도 같은 질문을 한다. 고도의 지능을 갖춘 태초의 인류가 슈퍼컴퓨터에 인생과 우주에 대해 묻자 750만년 뒤에 오라고 대답해준다. 슈퍼컴퓨터는 그 긴 시간을 보내고 다시 찾아온 인류에 ‘42’라는 엉뚱한 답을 해준다. 결국 아직까지 답이 없다는 뜻이다. 종교와 과학이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이미 구했고 또 구하고 있으니 어쩌면 궁극적인 답변을 얻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로선 <솔라리스>에 나오는 대사처럼 “답(answer)은 없고 오직 선택(choice)만이 있다”는 것이 정답 같다. 라이언은 죽음 대신 삶을 선택했고 이러한 태도는 인간적이다. 설령 죽음을 선택했다 해도 비난할 수 없겠지만 라이언의 선택이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사실이다.
우주오페라이긴 하나 <그래비티>는 어떤 면에서 보면 우주 자체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무중력 상태에서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지 탐구하는 것도 중력에 의해 지지되는 일상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일깨워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지구 상공 6천km 위에 떠 있지만 <그래비티>의 시선은 더 넓은 우주가 아니라 지구를 향하고 있다. 인류가 필사의 도전을 멈추지 않는 우주라는 미스터리보다 갠지스 강 위로 해가 뜨는 장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역설한다. 물론 이 역시 우주의 일부다. 우주의 일부로서 지구, 또 그 안에 속한 인간. 이제 SF는 다시 그 문제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것이 진부한 원점 회귀가 아니라 초심을 회복하는 겸허한 자세로 보이는 것이 <그래비티>의 매력이다.
우주를 실감나게 체험하기 위하여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화려한 경력에 비해 이름이 생소한 편이다.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2004)가 감독보다 더 유명하다. 멕시코 태생의 쿠아론은 멕시코와 미국을 오가며 감독으로, 제작자로 꾸준한 경력을 쌓았다. <소공녀>(1995), <위대한 유산>(1998), <이투마마>(2002), <칠드런 오브 맨>(2006)에 이르는 필모그래피를 통해 그의 다양한 관심을 알 수 있다. 쿠아론은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2006), <비우티풀>(2011) 등 여러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이번 <그래비티>는 기존 SF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술적인 성취를 보여주었는데 이를 위한 제작진의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촬영을 위해 여러 장비를 고안했는데,
예를 들어 우주라는 특수한 환경을 표현하기 위해 ‘라이트 박스’라는 조명장치를 만들었다. 수천개의 작은 LED조명이 설치된 이 정육면체 조명장치 덕분에 관객은 우주를 더 가까이 체험할 수 있게 된다. 라이트 박스는 런던 셰퍼턴 스튜디오 플랫폼 위에 높이 6m, 가로 3m 규모로 설치했다. 영화 속 유일한 의상이라 할 수 있는 우주복을 재현하는 일도 고심거리였다. 실제 우주인들이 입는 우주복은 너무 무겁고 흰색이라 조명을 맞추기 어려워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특별 제작된 영화용 우주복은 흰색을 바탕으로 회색을 덧대어 색감을 표현했고 실제보다 가볍지만 볼륨감은 그대로 살렸다. 배우들이 쓰고 있는 헬멧은 CG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조지 클루니와 샌드라 불럭은 거의 같은 형태의 헬멧을 쓰지만 성별에 따라 실루엣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CG와 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와이어 12개도 사용했는데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위해 인형조종사까지 초빙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