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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천행운(天行雲)
무협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개방"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방(幇)"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강호(江湖)에서 생성된 방파(幇派)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최소한 명청시대까지 '개방'이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개방방주(?幇幇主)"라는 이름은 무협소설가의 창작이다. 화자(花子, 거지) 사회에서 크고 작은 화자를 통치하는 두목을 "단두(團頭)"라고 통칭한다. 그들은 화자사회에서 지고무상의 권력을 지니고 있다.
관료, 상인, 문사들이 보기에 "구유십개(九儒十?)"라는 위계순서를 보자면, '단두'는 비록 거지들의 두목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하구류(下九流)"의 말류에 속하고, 누구도 그를 높이 평가해주지 않는다; 다만, 거지사회에서는 그가 황제이다. 그가 정한 규칙은 바로 금과옥조이고, 그가 분부한 말은 바로 금구옥언이다. 누구든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방규가법'에 따라 처리하는데, '국법'보다도 삼푼은 더 혹독하다. 거지들이 일을 범하면, 단두는 관청처럼 사건을 심리하여, 가벼우면 뺨을 때리거나 엉덩이를 때리고, 무거우면 "삼도육개동(三刀六個洞, 칠촌강도를 하나 주고 자기의 몸안에 아무 곳이나 칼로 세번 찌르게 한다. 다만 모두 구멍을 내서 뚫고 지나가야 한다)", 더욱 무거운 경우에는 할비(割鼻, 코를 자름), 철안(?眼), 감수(?手), 타각(?脚)에서 엄사(淹死, 물에 빠트려 죽임), 조사(弔死, 목을 매어 죽임), 돌을 던져 죽이는 것, 방망이로 때려 죽이는 것까지 한다. 이런 '방규가법'은 각 종족의 '족법'과 마찬가지로 역시 '왕법'의 보호를 받았다. 형을 받은 사람은 아문에 고발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문의 관리는 다시 거지가 '단두'를 고발한다는 말을 들으면, '하극상'으로 취급하여 가벼우면 혼쭐을 내서 쫓아보내고, 중하면 곤장을 친 다음 칼을 3일간 목에 채운다. 죽임을 당한 거지는 개방에 들어온 때로부터 부역, 납세의무를 완전히 면제받고, 호적조차도 없다. 시골관리들도 이처럼 아무런 생기는 것없는 일에 괜히 말려들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명나라의 각부주현의 단두는 주원장이 천하를 얻은 후에 각 부주현의 성황(城隍)과 함께 임명했다고 한다. 서로 다른 점이라면: 성황으로 봉해진 것은 모두 이미 죽은 공신들이지만, 단두로 봉해진 것은 전공을 일부 세우기는 했지만, 자잘한 과오를 범한 하급병사들이었다. 주원장은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거지두목'의 세습직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명문의 규정을 두었다: 단두의 아들은 글을 읽어서는 안되고, 딸은 전족을 해서는 안된다. 그 당시 남자가 글을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관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고, 딸이 전족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관료나 대갓집에 시집을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황은호탕'이면서 또한 '군대와 정부에서 축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히 다시는 관직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은혜이기도 하면서 징벌이기도 하다.
단두에도 '급별'이 있었다. 가장 늦은 것은 향급(鄕級)이고, 그 위로는 현급(縣級), 부급(府級)이 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층층히 통할한다. 단두는 상급의 관할을 받는 외에, 현지 지방관리 예를 들어, 지부, 지현, 향관의 통제도 받는다. 주원장은 단두를 임명하면서, 아마도 성급까지만 생각한 것같다. 국가급은 임명하지 않았다. 명나라 가정연간에 이르러, 재상 어뭉은 어사 추응룡등으로부터 탄핵을 받는다. 명세종 주후총은 그의 태자태사, 무영전대학사의 작위를 박탈하고, 그의 집안을 몰수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엄세번을 죽인다. 그러나, 그가 20여년간 공로를 세운 점을 감안하여, 그에게 은완(銀碗) 하나, 금젓가락 한 쌍을 내려, 구걸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그를 "천하도단두(天下都團頭)"로 임명한다. 그리하여 그는 전국 각부주현의 크고 작은 단두들을 총괄하게 된다. 다만 백성들은 그를 뼛속까지 미워해서, 그가 어느 집앞에 나타나면, 그에게 먹을 것을 적선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북경의 은완후통에서 굶어죽는다.
엄숭이 죽은 후, 그는 황제의 임명을 받았던 천하도단두였으므로, 개방에서 그를 받들어, 그를 "조사야(祖師爺)"로 모시고 거지들이 제사를 지내준다. 항일전쟁기간동안, 필자는 절강성 진운현 호진의 '서류소(棲流所)"라는 곳의 대문 안에서 거대한 채색벽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려져 있는 것은 엄숭이 홍포(紅袍)를 입고, 머리에 오사모를 쓰고, 발에는 조화를 신고, 허리에는 옥대를 매고, 왼손으로는 은완을 들고, 오른 손으로는 금젓가락을 쥐고있다. 그러나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하늘을 향하여 소리지르는 모습이다. 엄숭의 후손들이 이 "봉호"를 승계했는지 여부는 고증할 방법이 없다.
황제로부터 임명받은 크고 작은 단두들은 제왕공후와 같이, 대대로 세습할 수 있었다. 황제가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은 전국옥새라면, 단두가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은 바로 거지사회에서 인정된 하나의 신물(信物)이다. 예를 들어 특수한 타구봉(打狗棒)이라든지, 아니면 오래된 대나무뿌리로 만든 한연관(旱煙管)과 같은 것들이다. 필자는 한 단두의 수중에서 권력을 대표하는 한연관을 본 적이 있다. 오래된 대나무뿌리로 만든 것이었는데, 연관은 붉고 투명했으며, 빛이 났다. 언뜻 보기로도 절대 몇대만을 내려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고, 아마도 명나라초기부터 물려온 것일 것이다. 아마도 엄숭보다도 훨씬 오래전부터.
서류소는 현재의 부자가 혼자 혹은 여러 명이 힘을 합쳐서 만든 곳으로 속칭 "토반옥(討飯屋)"이다. 원래의 뜻은 오고가는 떠돌이들이 잠시 몸을 쉬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필자가 본 호진의 서류도의 대문 양쪽에는 돌에 다음과 같은 대련을 새겨 놓았다: "지가로과잠서식; 불가장천작주거(只可路過暫棲息; 不可長川作住居, 잠시 쉬어갈 수는 있어도, 장기거주할 수는 없다)" 이름이 듣기 거북하다고는 하지만, 사실 서류소의 규모는 적지 않다. 최소한 7,8간의 방이 있다. 이처럼 넓다란 집에,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각지의 서류소는 단두들이 공무를 보는 곳이 되었다. 정방에는 단두와 그의 처자식이 살아갈 뿐아니라, 중간의 한칸에는 단두의 공무를 보는 집무실이 있다. 여기서 사건을 심리하고, 형을 행하고, 엉덩이를 때리는 등이 이 곳에서 집행된다. 크고 작은 거지들이 모두 볼 수 있다. 이외에 각종 잡곡을 넣어두는 창고가 있다.
거지들은 남여유별의 원칙에 따라, 각각 양쪽의 상방의 통포(通鋪)에서 산다. 방의 뒤에는 돼지, 양, 닭, 오리등을 기른다. '향급'의 서류소에서 단두가 통할하는 거지는 개략 200여명이다. 그러나, 서류소에 거주하는 것은 겨우 3,40명이다. 그중 일부분은 매일 바깥으로 나가서 구걸을 하고, 저녁에 돌아오면, 반드시 '분례(?例)'를 납부해야 하는데, 3,5문 혹은 몇냥의 쌀이다; 일부분은 '집'에서 닭오리를 기르거나, 양돼지를 기른다. 단수는 매월 분례전(?例錢)을 지급하는데, 마치 고용된 일꾼과 비슷하다. 그리고 일부분은 거지왕국에서 '공무'를 맡는다. 거지들이 가규를 어길 때, 처벌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길에 쓰러진 사람이나 얼어죽은 시신이 발견되면 둘러업고 가서 묻어주고나서, 동네유지에게 돈을 받아내는 것도 그들이다. 당연히 단두의 집안에 일이 있어서 발로 뛰어다니는 사람도 그들이다. 가족은 있으나 먹을 거리가 없어서 거지로 전락한 사람은 자기 집에서 거주해도 된다. 그러나, 매월 '분례'를 납부해야 하고, 절대적으로 단두의 명에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걸을 할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송원(宋元)시대의 단두와 화자는 아마도 지방에서 죽은 자의 염을 처리하였다. 왜냐하면 이런 더러운 직업을 일반인들은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호전에서 무대랑이 반금련에게 독살된 후, 단두인 하구숙(何九叔)이 거지들을 데리고 염을 했다. 수호지에서 쓴 것은 송나라때 일이지만, 작자는 원나라 말기의 사람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최소한 원나라때까지는 이런 습속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방의 내부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가난해서 할 수 없이 구걸하는 지경에 이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하더라도 이 인류사회의 최저층에도 삼교구류등의 빈천의 구분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여전히 존비, 상하의 구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 자기의 몫이 있고, 자기의 구역이 있다. 절대로 섞여서는 안된다.
개략적으로 나누어보면, 거지는 프로 거지와 아마추어 거지로 나눌 수가 있다.
처음에 듣기에는 거지에 무슨 아마추어가 있을까 생각될 것이다. 마치 우스개소리같지만, 개방의 내부에서는 이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소위 "아마추어"는 본래는 다른 직업이 있는데, 긴급한 혹은 특수한 사정이나 곤란이 발생하여, 부둑이 임시로 거지생활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 아래에는 청나라말기의 강남개방을 중심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기로 한다.
첫번째 아마추어 거지는 "선생(先生)"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들은 대부분 태어나면서부터 봉사이다. 어려서부터 스승을 모시고 이야기꾼(說書)이 된다. 강남에서는 이것을 '창고사(唱故事)'라고 한다. <<해공대홍포>>, <<설인귀정동>>, <<대향산>>(관음보살이 세상에 태어나서 득도하기까지의 과정)과 같은 장편소설을 한두달씩 얘기해도 절대 중복되지 않을 정도이다. 다만, 1년 삼백육십오일중 아무도 초빙하지 않는 날이 많다. 배를 곯게 되면, 부득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구걸을 하게 된다. 매 집안에 들어갈 때마다 주인이 좋아하든 말든 고판(鼓板)을 두드리며, 노래를 한바탕 불러제낀다. 주인은 싫더라도 어쩔 수 없이, 약간의 돈이나 약간의 쌀을 내준다. 이들이 바로 "선생"이라고 불리우는 아마추어 거지들이다. 어떤 연구에 의하면 이들을 "토반부대완(討飯不帶碗, 구걸을 하지만 그릇을 들고 다니지 않음)"이라고 부른다. 남은 밥이나 음식을 내놓을 때는 그릇과 젓가락을 함께 내놓는다. 이것은 아마도 민간예술인에 대한 어느 정도 존경의 표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아마추어 거지는 "토청화자(討靑花子)"이다. 청황부접(靑黃不接, 작년에 수확한 곡식은 바닥내고, 햅곡식은 아직 나오지 않음)의 기간동안, 집안에 약간의 옥수수가루와 감자조각이 남게 되면, 농사짓느라고 힘든 남자들을 위하여 남겨두고, 여자들은 손자손녀를 데리고 대갓집이나 여유있는 집을 찾아가서 구걸한다. 남은 탕이나 밥으로 이 시기를 넘기는 것이다.
세번째 아마추어 거지는 "간묘회화자(?廟會花子)"이다. '묘회'때면 적선하는 사람들은 향을 피우는 외에, 일반적으로 약간의 동전을 거지들에게 뿌린다. 이것을 "적덕적복(積德積福)"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묘회에는 진짜 거지들 외에도, 많은 가짜 거지들이 몰려든다. 대부분은 아마추어이다. 향객의 가련과 동정을 얻어내기 위하여, 그들은 봉사인 척하거나, 절름발이인척 한다. 어떤 사람은 수육을 찧어서 다리에 발라서 발이 썩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묘회기간이 지나면, 봉사든 절름발이든 다리가 썩은 사람이건 모두 멀쩡해진다.
네번째 아마추어 거지는 "간신춘화자(?新春花子)"이다. 이들은 모두가 가난하여 집안에 솥을 걸 수조차 없는 경우가 아니다. 그저 정월 신춘의 십여일 이십여일의 기간동안 '시간을 내서' 구걸하는 경우이다. 정월에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일을 하지 않으므로, 놀 사람은 노는 것이고, 나가서 구걸이라도 함으로써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은 그 시간에도 돈을 버는 것이다. 정월 신춘에 나가서 구걸을 하면, 몇 마디 듣기좋은 신년인사를 잘 하면 여유있는 집이라면 집집마다 조금씩 나누어주는 것이다. 쌀 이외에, 떡, 만두, 종자등등을 받아온다. 얼굴을 조금 두껍게 하거나, 조금 먼 동네까지 가서 혼자서 정월에 구걸한 소득이라면, 한 식구가 한달을 먹고살만할 정도이다.
이외에, 임시적인 아마추어 거지들도 있다.
예를 들어, 마을을 돌아다니는 극단이 연일 날씨가 좋지 않으면, 아예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어, 반주가 음식을 제대로 준비할 수 없게된다. 그러면 두 세명씩 짝을 지어 길거리로 나가서 호금, 피리를 분다. 이들도 아마추어 거지에 포함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큰 줄기로 말하자면 위에서 말한 네 가지이다.
각양각색의 '아마추어 거지'에 대하여 단두는 조상때부터 내려온 불문율에 따라, '행업세'를 거둔다. '창고사선생'이나 '간청화자'는 그저 뜻만 전하고 찾아와서 몇 마디 인사를 건네고 하면 단두를 존중하는 예의를 다 한 것이 된다; 그러나, 거의 사기에 가까운 '간묘회화사'나 '간신춘화자'는 반드시 일정한 '공품'을 바치도록 한다. 그래여 그들이 구걸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준다. 그렇지 않으면, 단두가 명령만 내리면, 그의 '아이들'은 바로 둘러싸서 가짜 거지의 옷을 찢어발겨 버린고,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게 해버리고, 더이상은 감히 가짜 거지노릇을 못하게 만든다.
'아마추어 거지'는 명의상으로는 단두의 단속을 받고, 필요한 때에는 단두의 명령을 듣고, 구걸할 때 개방의 규칙을 준수하면 그만이다. 평소에 그들은 각각의 집에서 각자의 본업에 충실하면 된다. 그저 서류소에 머무는 그 '아이들'이 비로소 거지왕국의 충실한 백성이고, 개방에서 명실상부한 '프로 거지'인 것이다.
가난뱅이라고 하여, 누구나 '거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지가 되려면, 먼저 거지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가업을 모두 잃고, 친척친구가 받아들이지 않아 살 곳이 없어 먹고살 방법이 없고; 둘째, 늙어서 부양할 사람이 없거나, 어려서 도와줄 사람이 없거나, 병이 들어도 치료할 방법이 없거나, 장애자가 되어 일할 수가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들처럼 돌아갈 곳이 없는 노약병잔의 사람들만이 서류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고, 비로소 단두의 휘하에 들어갈 수 있으며, 바깥에 나가서 구걸을 하거나, 서류소에 남아서 일을 하거나, 더 이상은 걱정거리가 없는 생활을 살아갈 수 있다.
거지가 되면, 옷이 형편없이 낡은 것을 입어야 하고, 항상 배고파야 하며, 겨울에는 죽기 일보직전에서 몸부림치고, 겨우겨우 연명한다고 생각하지는 말라. 사실, 얼굴만 좀 두껍게 하여, 개방에만 들어가서, 거지의 행렬에 끼게 되면, 그들의 생활은 여유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빈곤한 농가보다는 훨씬 나은 생활을 누린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편안한 것은 일하지 않고도 먹는다는 것이다. 당시에 '거지생활 삼년이면 관직을 준대도 바꾸지 않는다'는 속담이 나온 것이 이해가 된다.
당시의 강남지역은 대갓집의 혼상희경, 각양각색의 묘회와 정월신춘에 사람들이 보시를 베푸는 외에, 매월 초이틀, 십육일의 이틀간은 불문율로 거지들에게 베푸는 날이다. 이 두 날이 되면, 여유있는 집에서는 모두 한, 두되의 쌀을 문앞에 놓아두고, 거지가 오면 한줌씩 집어준다. 이렇게 하여 덕과 복을 쌓는 것이다. 노래를 불러주거나, 묘기를 보여주거나 아이를 안고오는 거지에게는 한줌씩 더 집어준다. 이렇게 한두 집에서 한두 줌씩 집어준 것만 하더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서 집집마다 찾아다니기만 하면 적지 않게 모을 수가 있다. 하루동안 모으면 그 양이 만만치가 않다. 어떤 거지는 이 한줌의 쌀을 더 받기 위하여, 매번 고아원으로 가서 버린 아이를 안고 찾아다닌다. 열한두살이 되면 다시 대갓집에 종으로 팔아버리거나 기원에 기녀로 팔아버린다. 그렇게 사면 수십전을 벌어서 이불과 요를 장만할 수 있다.
개방의 규칙에 따르면, 거지들의 모든 수입은 반드시 먼저 단두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 후에 일정힌 비율로 '공고(公庫, 공동창고)'에 집어넣는다. 속이고 내지 않을 담량이 있는자에게 내리는 처분은 가혹하다. 죽지는 않을지라도 대체로 곤장을 맞고, 삼도육개동과 같은 혹형을 피할 수가 없다. 거지들은 '방규가법'을 무서워해서 감히 이를 몸소 시험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물며 비바람불고 눈이 내려 바깥을 나갈 수 없거나 병들어 쓰러지게 되면 어쨌든 단두가 주는 죽에 의지해서 살아야 하지 않은가.
서류소안의 '프로 거지'는 다시 바깥에 나가서 구걸하는 거지와 집안일을 하는 거지의 두 종류로 나뉜다. 절대다수의 거지는, 큰 비나 큰 눈이 내려서 집밖나들이를 할 수 없는 경우만 아니면, 매일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온다. 얻은 동전, 쌀은 반드시 공동창고에 내놓아야 하는 외에 가지고 돌아온 남은 밥과 요리도 내놓거나 돼지를 먹이는데 쓴다. 비교적 젊고 능력있는 여자거지는 단두가 뽑아서, 전문적으로 닭오리, 양돼지를 기르도록 시킨다. 그리고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거지들에게 죽을 끓여주도록 하는 임무를 준다. 그리고 아주 게으른 여자거지는 억지로 일을 시키지 않고, 쌀죽을 먹이고, 낮에는 낮잠을 자게 하고 밤이 되면 개기(?妓)로 삼는다. 거지들이 조금씩 모은 돈으는 그대로 단두의 금고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바깥에 나가서 구걸하는 거지는 비록 같은 거지이지만, 각자 구걸의 능력에 따라 상하의 구분도 있고, 수입에서도 많고 적고의 구별이 있다.
거지세계에서, 팔선과해이다 각자 자기의 재주가 있다. 개략 나누어 보자면, 구걸하는 프로 거지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다섯 종류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는 "강규화(强叫花)"이다. 이런 거지들은 몸이 장작개비처럼 말랐다. 아편을 충분히 피워서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아주 말짱하다. 봄여름가을겨울을 가릴 것없이, 이들은 항상 손에는 벽돌 하나를 들고 길거리를 다닌다. 부자집이나 상인들의 집앞에 가면 쉰 목소릴, "어르신, 마님..좀 나눠주십시오"라고 하면서 벽돌을 들어서 자기의 가슴을 내려친다.
이런 류의 거지를 쫓아내려면, 자잘한 돈만으로는 돼지 않는다. 최소한 1백(청나라말기의 시세로 개략 쌀 5근)은 주어야 한다. 만일 그만큼 보시를 해주지 않으면, 손에 있는 벽돌로 자기의 머리를 내려찍는다. 졸지에 붉은 피가 땅바닥에 확 튄다. 이어서 '아야'라는 소리를 내면서 뒤로 쓰러지고, 입에서는 게거품을 물고, 인사불성이 된다. 이때, 그의 동료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와서, 큰 소리로 소리치면서, '목숨을 물어내라'고 소리친다. 그리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하게 된다. 집에 사는 사람들도 드나들 수가 없다. 점포라면 영업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이 이 정도로 커지면 상인이나 부자는 할 수 없이 돈을 내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떠나질 않는다. 계산해보면 돈을 더 많이 써야 한다; 이들 거지들에게 밉보이면, 그들은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다. 한 밤중에 공동묘지에서 시신을 매고 그 집앞에 옮겨놓는다. 다음 날 문을 열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고, 시신처리하는 비용까지 다시 주어야 한다. 그래서 부자집이나 상인들은 이들 거지들이 오면 대부분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바로 동전을 내놓고 그들을 보내버린다. 그들이 그 돈을 가지고 아편을 사 피우든, 아니면 개기를 찾아가든 그것은 그들이 알 바가 아닌 것이다.
둘째는 "예규화(藝叫花)"이다. 그 아래에는 다시 "창(唱)"과 "주(做)"의 두 가지로 세분된다. "창"에는 봉사나 어린 여자가 많다. 죽판을 두드리며 연화락을 부르기도 하고, 고판을 두드리며 이야기를 해주기도 한다. 호금을 켜면서 소극을 보여주기도 하고, 금전판이나 삼방고를 두드리며 소조아을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노래를 하면서 개가 박자를 맞추어 반주를 하게 하기도 한다; "주"는 대나무방망이로 판이나 그릇을 돌린다. 구련환은 9개의 직경 1척인 철환에 각양각색의 도안을 만들고 어떤 경우는 소도구로 극을 하기도 한다.
이들 거지는 문을 들어서면 듣건 말건 보건 말건 관계하지 않고, 공연이 끝나면 돈이나 쌀을 내놓지 않으면 안된다. 정말 잘 모르는 주인이 약간의 돈을 아껴서 그들의 공연이 끝나도 돈을 주지 않으면, 바로 듣기 거북하고, 불길한 내용의 노래를 연이어 불러제끼는 것이다.
셋째는 "신규화(神叫花)"이다. 이들 거지는 신이나 점술로 돈을 울궈낸다. 가장 자주보는 것은 "용선(龍船)"인데, 어깨에 용선을 메고(나무로 만들고 네 다리가 달렸으며, 반등보다 약간 크다. 배 안에는 인형정도 크기의 용선낭낭이 모셔져 있다), 문을 들어서자 마자, 용선을 내려놓고, 징을 두드린다. 목소리를 끌면서, "용선이 한번 굽어가면, 감기 기침을 모두 용선만으로 데리고 가고, 용선이 한번 흔들리면, 천연두, 곰보병을 모두 용선교로 데려간다."는 것과 같은 말을 한다. 집안에 아이가 있는 집안이면, 주부가 바로 나와서 향불을 하나 피우고 돈을 얼마간 내놓게 된다. 그리고 용선낭낭이 아이를 도와서 무병장수하도록 비는 것이다. 이미 감기, 기침으로 고생하는 사람이라면 향을 사른 재를 영약처름 받아간다. 혹은 돈을 얼마간 써서 용선난낭을 양어머니로 삼게 하는 등의 일을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은 신상을 집안입구까지 데려가서 향불을 피우게 하는 것이다. 집안일로 바빠서 절에도 갈 시간이 없는 주부들에게는 편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방식은 "질문두괘(跌門頭卦)"이다. 오래된 대나무를 반으로 자르고, 다시 새끼줄로 양끝을 묶으면, 특수한 점술도구가 된다. 이것을 땅바닥에 던지면, 전음(全陰), 전양(全陽), 일음일양(一陰一陽)의 세 가지 경우가 나타난다. 연속으로 세번을 던지면 하나의 괘(卦)가 형성된다. 괘상을 가지고 '육효(六爻)"를 만든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길흉화복등을 점치는 것이다. 주인이 만일 물건을 잃었으면, 그들은 찾는 방향을 말해준다. 이 거지들은 신이 파견하여 은혜를 베푸는 사자들이다. 일반적으로 돈이나 쌀만 받지, 남긴 밥이나 남긴 요리른 먹지 않는다.
넷째는 "고규화(苦叫花)"이다. 가장 자주보는 것은 "곤지룡(滾地龍)"과 "개두충(?頭蟲)"이다. "곤지룡'이라는 것은 손발이 무픞 혹은 팔꿈치에서부터 잘려나갔다. 걸을 수도, 길 수도 없어서, 그저 땅바닥을 굴러다닌다. 한편으로 구르면서, 다른 한편으로, "전세에 수행을 하지 않아, 현세에 보응을 받았다"는 것과 같은 류의 사람들에게 보시를 하도록 하는 노래를 부른다. 동시에 작은 광주리를 반만 남은 팔로 잡고 앞으로 밀고 나간다. 길가는 사람들이 보시를 하려면 돈을 그 광주리에 넣으면 된다. "개두충"은 비록 손발은 있지만, 팔이나 다리가 짧거나 가늘다. 5,6살짜리 어린아이와 같다. 그래서 길을 걸을 수도 없고, 일을 할 수도 없다. 그저 엉덩이로 바닥에 놓은 자리에 두 다리를 묶고는 두 손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한걸음 나갈 때마다 절을 한번씩 한다. 그리고 앞에 있는 광주리를 앞으로 민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노래를 부른다. 애처롭게 부르는 노래 이외에 더욱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한걸음 나갈 때마다 절을 하면서 땅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내는 소리이다. 앞이 흙이든, 아니면 돌판이건, 벽돌이건 머리는 항상 '퉁퉁' 소리를 낸다. 그리하여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프게 한다. 주머니를 뒤져서 약간의 돈이라도 보시하지 않고서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곤지룡"과 "개두충"에게 왜 손발이 없거나 손발이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냐고 물으면, 그들의 답은 항상 "전세에 수행을 하지 않아서, 현세에 보응을 받은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렇다"고 답변한다. 다만, 내부사정을 아는 사람들에 의하면, 이들은 개방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말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유괴해서, 손발을 잘라버리거나 약을 먹여서, 큰 이후에 팔다리가 짧고 가늘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구걸하는 이외에 할 일이 없어진다.
사실상, 이런 "고규화"의 곁에는 항상 덩치가 좋은 사내가 돌봐주고 있다. 일단 마을이나 거리를 벗어나면 등에 업고 가며, 훈둔이나 샤오빙같은 것을 사서 한 입씩 먹여준다. 아주 세심하게 보살펴분다. 당연하다. 이 튼튼한 사내는 바로 사지가 부실하여 가련한 자가 있어서 스스로 먹고 입을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는 "뢰규화(賴叫花)" 혹은 "라규화(懶叫花)"이다. 이들은 무뢰한 짓을 할 줄도 모르고, 공연을 하거나 노래를 부를 줄도 모르며, 점을 칠 줄도 모르고, 손발을 자르기에는 너무 늦거나 할 수 없게 된 경우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저 놀고 먹는 것이다. 그들은 나이가 들어서 힘이 없거나, 약해서 힘이 없거나, 병이 뼛속까지 퍼졌거나, 장애로 사지가 멀쩡하지 못한 경우이다. 진짜이든 가짜이든, 이들은 자신의 가련한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도록 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동정을 산다. 초이틀, 십육일의 두 날에 당당하게 집집마다 다니면서 한줌의 쌀들을 수거하는 외에, 평소에는 그저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서 이 재주만으로 구걸하여 남은 밥이나 요리를 얻어먹으므로, "뢰규화" 혹은 "라규화"라는 명칭을 얻었다.
거지들에게도 좋은 시절과 나쁜 시절이 있다. 나쁜 시절은 당연히 비바람이 불거나 큰 눈이 내려서 나갈 수 없는 한겨울이다. 가서 구걸할 데가 없는 것이다. 그때에 배고픔과 추위가 몰려올 때, 단두가 주는 멀건 죽을 먹는 것이외에 할 수 없이 평소에 저축해놓은 것을 써야 한다. 좋은 시절은 그 마을의 어느 부잣집에 혼상희경이 있는 날이다. 결혼식이 있거나 환갑잔치가 있으면, 단두는 돈을 내서 고기를 사거나, 닭을 한 마리 잡아서 반쯤 익힌 다음 붉은 칠을 한 접시에 담고, 붉은 종이봉투에 은원 2개를 넣는다. 그리고 단두가 이끌고, 줄을 서서, 경사가 난 집으로 축하하러 간다. 이때, 이들 거지들이 집으로 가서 예를 바치는 것을 "하객(賀客)"이라고 하며, 당연히 주인으로부터 "예우"를 받는다.
일반적인 상황하에서는 주인이 그 지방의 유지를 불러서 단두와 협상을 한다. 가격이 정해지면 거지들은 후문으로 가고, 1인당 동전 스무개, 만두 두개, 돼지고기 두 조각등등을 준다. 이때, 단두는 그의 권력을 대표하는 한연관을 후문의 입구에 걸어둔다. 그렇게 한 후에 앞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 이 한연관이 걸려있으면, 어떤 거지들도 이 곳에서 소란을 피울 수가 없다. 어떤 단두는 자신의 신분을 알기 때문에 자리에 가서 앉지 않고, 바로 집으로 되돌아간다. 이렇게 한 경우에는 그 집에서 경사가 끝난 후에 한연관을 단두의 집으로 되돌려보내는데, 당연히 좋은 술을 한통 보내주어야 한다.
상갓집의 경우에는 당시의 풍속으로 조문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천막을 치고, 수십탁의 자리(豆腐席)를 마련해 놓고, 조문객을 맞이한다. 그러나, 죽은 사람과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종이한장, 촛 두자루, 향 몇 자루를 가지고 가면 상갓집에서 3일간은 먹을 수 있었다. 두부석이라고 하는 이유는 강남에서 두부가 주된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상갓집에 가서 음식을 먹는 것은 '두부를 먹는다', '죽은 사람의 두부를 먹는다'고 얘기한다. 이때, 조문객의 신분으로 거지들을 데리고 가서 조문을 하면, '두부석'에 앉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답례는 돌아온다. 이외에 줄줄이 거지들을 데리고 상여가 나가는 것을 뒤따르기도 하고, 깃발을 들어주기도 한다. 혹은 임시로 죽은 사람의 '친우'역할을 맡아주기도 한다. 그 때는 당연히 거지들도 두부석에 앉아서 식사를 받는다. 그리고 적지 않은 수고비를 받는다.
이상에서 말한 것은 청나라말기 이전의 강남개방의 대체적인 상황이다. 지금 도시안의 거지들은 개방의 통치를 받지도 않고, 단두의 관할도 받지 않으므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힘들다. 많은 대도시에서 구걸하는 거지는 '퇴근'한 후에는 양복으로 갈아입고,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한다. 집은 커다랗고, 마누라도 있다. 이것은 또 다른 거지세계이다. 본문에서 개괄할 수는 없는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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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즘 세상하고 비슷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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