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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의 팽창과 소멸
에고의 해체
에고를 버리고 참나의 빛비춤, 광휘를 드러내라
앞을 가로막는 장애들이 제거될 때
실상(reality)이 드러난다.
장애들은
그 기반이 되는 것들이 사라지면
절로 사라진다.
그런 기반의 하나가
'원인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을 깨닫는 것이 왜 중요한지는
'원인에 대한 믿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아나 에고라는 망상의 주요한 버팀목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제대로 포착할 수 있다.
원인은
'거짓의 원인이 되는 이것이 있다'는
이원적인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런 행동들의 원인이자
설명이 되어 주는 나라는 존재'가
논리적으로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생각의 배후에는 가공적인 생각하는 자가
행위의 배후에는 행위하는 자가
느낌의 배후에는 느끼는 자가
창안의 배후에는 창안자가 따라붙게 된다.
자신을 활동이나 행위, 역할,
명칭들따위와 동일시하는 혼동 역시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혼동은
자아를 별도로 분리된 행위자로
잘못 동일시 함으로써 일어날뿐 아니라
자기의 행위와 느낌과 생각이 바로 자기라고하는 이미지 속에서
자아를 계속 녹아들어가게 한다.
자신의 선하거나 악한 어떤 특성들
혹은 직업이 바로 자기라고 하는 신념은
행위의 배후에 존재하는 별도의 행위자라는
환상에 무수히 많은 서술 형용사들을 수놓는 경향이 있다.
나는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자기 규정의 늪'속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그런 규정들이 좋은 규정들이라면
행복해한다.
나쁜 규정들이라면
우울해하거나 죄의식을 느낀다.
실상에서
그런 모든 자기규정들은
잘못되고 그릇된 것이다.
독립된 자아나 실체의 환상이
거짓된 정체성을 이끌어 낸다고 하는 것과
그런 거짓된 정체성에 대한 집착은
여러 이유들로 인해서
극복하기 아주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 좋다.
우리는
'소중한 자아에 매혹'되므로
그것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망상같은 것이 되고
말과 생각의 주관적인 중심점이 된다.
자아는
자신의 인생역정,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나 여자주인공으로 윤색된다.
여기서
나라고 하는 자아는
가해자나 피해자, 원인,
온갖형태의 칭찬과 비난을 받아 마땅한 자가 되고
삶의 멜로드라마의 주연배우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 자아를 지켜줘야 할 필요성이 생기고
생존이 더없이 중요한 일이 되어버린다.
무슨일이 있어도 자아는
옳아야만 한다.
자아가 실체라고 하는 믿음은
존재 그 자체의 생존 및 지속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 된다.
그러므로
자아와의 동일시를 넘어서려면
앞서 말한 모든 정신적인 성향들을 놓아버려야 한다.
이것은
그러한 모든 특성들과 정신적인 습관들을
신에게 "기쁘게 바치고자 하는 희사' 즉
사랑과 겸손에서 비롯된 자발성을 요구한다.
생각이나 의견들을
정당성과 타당성을 분명히 입증할 수 있는 것들로
한정할때라야만
철저하게 겸손한 자세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은
생각이 빚어낸
모든 가정과 추정들을 버리고자 하는
자발성을 가졌음을 뜻한다.
지속적으로 그렇게 할 때
진실이라 여겼던 망상들이 사라지고
그것들이야말로 오류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빛나는 최후의 몰락과정에서
마음은 사실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음이
무엇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에 관해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참으로 안다는 것은
'아는 것이 된다는 것'을 뜻하므로
마음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즉
중국에 관해 모든 것을 안다고 해서
중국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그것이 실증적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한정짓는 것은
마음의 크기와 영향력을 축소시켜
'마음을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 되게 한다.
마음이 실제로 다루고 있는 것은
마음이 실상으로 오인하는
가정, 외양, 지각된 사건, 증명할 수 없는 결론,
그리고 정신작동 등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마음이 그려낸 그와같은 실체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넓게 확장해 나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마음은
자신이 '가치있는 생각이나 의견들을 갖고 있다'고 믿곤한다.
하지만 주의깊게 조사해보면
모든 의견이란
무가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의견들은 모두가 헛된 것이며
중요하지도 고유한 가치를 갖고 있지도 않다.
모든 이들의 마음은
무수히 많은 의견들로 가득차 있으며,
의견이란 본질적으로 그저 정신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견이 어떤 위치성들에서 비롯되며
그후에 그러한 위치성들을 다시 강화시켜준다는 점
이다.
수많은 고통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런 위치성이다.
위치성을 놓아버린다는 것은
곧 의견을 침묵시키는 일이며,
의견을 침묵시킨다는 것은
곧 위치성을 놓아버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마음이
현재에서만 잘못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습관적으로 그렇게 해 왔으며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환상들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기억의 가치 역시 축소된다.
과거의 모든 행위는
자신이 당시 이렇게 저렇게했다고 생각한 것들로 이루어진
환상에 근거하고 있다.
'음, 그건 그 당시에는 좋은 생각인 것 같았는데'라고
후회하는 말에는
심오한 지혜가 깃들어 있다.
가공적인 나를 참된 자아로 믿는 태도는,
관상과 명상을 통해
모든 현상들이 의지를 지닌 내적인 나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저절로 일어나는 것임을 깨달을 때
약화된다.
삶의 현장들은
그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사건들이
자연과 우주의 모든 유효한 조건들의
비인격적이고 자율적인 상호작용
(불가에서는 이를 '인연화합'이라고 함)이라는 것을 깨닫기가
처음에는 다소 혼란스럽다.
그런 사건들의 범주에는
몸의 기능, 정신작용, 마음이
생각과 사건들에 부여하는
가치와 의미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런 자동적인 반응들은
그 전의 프로그래밍의
비인격적인 결과들이다.
자신의 생각들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자신이 그런 모든 프로그래밍을
들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의식의 그런 흐름을 일으키는 내적인 나라는 것은
진정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음으로 하여금
생각하는 것을 멈추도록 요구하는
간단한 연습을 통해
그런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때 마음이
자신의 바람을 완전히 무시하고
이제까지 해 온 대로 계속한다는 것이 분명해지는데,
이는 마음이 의지적인 선택에 의해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마음은
자신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아주 많다.
에고의 존속과
지배할수 있는 능력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에고가 모든 주관적인 체험의
작자라고 하는 주장이다.
'내가 생각했다'라는 생각은
그것이 그 사람의 삶에서 볼수있는
모든 측면들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실로 번개같이 마음속에 끼어든다.
이것은
명상을 하는 동안
생각의 흐름의 출처를 깊이 주시하지 않고서는
간파해내기 어렵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내적으로 감지하는 것과
에고가 그 작자라고 주장하는 것
사이의 시간 간격은 만분의 1초가량 된다.
일단
이 간격이 발견되고 나면
에고는 지배권을 상실하고 만다.
자신은
현상의 목격자지
현상의 원인이나 현상을 일으킨 주체가 아니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이때 자아는
스스로를 목격자나 경험자와 동일시 하지 않고
그저 목격되고 있는 것이 된다.
마음에 자취를 남길 수 있는
에고능력과 기능은
흥미롭다.
에고는
실상과 마음사이에 끼어든다.
그 기능은
하이파이세트의 테이프 모니터의 기능과 흡사하다.
테이프 모니터는
한 찰나 전에 녹화된 프로그램을 재생한다.
따라서
그 사람이 평소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은
에고가 바로 직전에 녹화해 놓은
재생 화면들이다.
찰나의 순간에 갓 들어온 자료는
이전의 프로그래밍에 따라서
에고에 의해 즉각적으로 편집된다.
그렇게 해서 자동적으로 왜곡이 이루어진다.
이와같은
가리개는
실상을 흐리게 하고
앎으로부터 차단시킨다.
에고가 초월되었을 때
맨 먼저 인식되는 것들 중 하나는
모든 생명이 더없이 생생하게 변형된다는 점이다.
에고를 초월한 사람은
추정에 의해 왜곡되고 흐려지고 편집되기 전의
실상을 체험한다.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생명을
생전 처음 체험할때의 충격은 매우 압도적이다.
거짓된 자아의 환상이 사라지기 직전
그 자아는 자신에게 남은 몇 초 동안
그때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실상이 드러나는 것을
얼핏 목도한다.
에고의 지각장치가 소멸되는 순간
찬연한 빛이
드러난다.
그 찰나의 순간,
에고의 구조의 남은 자취들이
오로지 에고만이 진짜라는 신념과 함께 소멸될 때
'진정한 죽음'이 느껴진다.
요컨대
'에고는
자만심과 두려움에 의해 지탱되는
위치성들이 모여 엮인 것'
이라 말할수 있다.
에고는
에고의 증식을 가로막는
'철저한 겸손'에 의해서 소멸된다.
에고의 또 다른 토대는
에고가
우리의 이해 능력과
생존의 근원이라는 신념이며,
우리는 에고를
텔레비전 화면처럼
우리에게 세상과 그 의미를 전해주는
우리와 세상상의 접점으로 본다.
그리고
우리는 에고가 없으면
길을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사람의 일생에서
에고 즉 자아는
그 사람의 모든 노력과 시도들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정서적인(정신적인) 투자는
실로 엄청나다.
에고는
노력의 원천이자 대상이요,
실패와 이득, 상실, 승리와 비극 등과 같은
온갖형태의 감정들과
정서들로 짙게 착색되어 있다.
우리는
에고라는 실체의 그것의 역할,
그것의 부침에 사로잡히고 열중한다.
그것에 너무나 많은 것을 투자한 탓에
버리기는 몹시 아까운 것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모든 희망과 기대와 꿈을 포함하고 있는 에고의 덧없은
친밀함으로 인해
우리는 에고에게 단단히 붙들려있다.
우리는
삶 그자체의 체험에서 중심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나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자아라 믿는 것에 대한
평생에 걸친 엄청난 투자외에도
미래의 지평선에는 죽음의 망령이 나타난다.
이런 나가
정말로 종말에 이를 운명이라고 하는
무서운 정보는 좀처럼 믿기 힘든 얘기처럼 들린다.
나의 종말인 죽음이 닥쳐온다는 것은
부당하고 황당하며
비현실적이고 비극적인 일처럼 여겨진다.
그 사실은 사람을 화나게 하고 두렵게 한다.
살아있음으로 인해서
이제까지 겪은 전체 감정들이
이번에는 죽음 그 자체에 의해 재생되어야 한다.
자신의 중심점으로서의 에고이자 자아를 버리려면
겹겹이 쌓인 이런 모든 집착과 망상들을 놓아야 하며,
그럴 때 우리는 결국 지속성과 생존을 확보하려는
에고의 으뜸가는 제어기능과 정면으로 맞딱뜨린다.
에고는
자체의 모든 기능에 집착하는데,
이는 이익과 획득, 학습, 연합,
소유물의 축적, 정보,
기술에 대한 에고의 강박적인 집착의 배후에
자체의 생존을 확보하자는
기본적인 목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에고는
생존가능성을 높이고자 하는
아주 노골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나는 계획들이나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교묘한 계획들에 이르는
무수히 많은 계획들을 갖고 있다.
평균적인 사람들에게는
앞서 말한 모든 내용이
두렵고 고약한 소식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성숙한 형태의 영적인 노력에 참여하는 이들에게는
명백히 좋은 소식이다.
사실상 에고,
즉 자아는 죽을 필요가 전혀없다.
삶은 종말에 이르지 않으며
존재는 끝나지 않는다.
삶을 끝장내려는
무섭고 비극적인 운명같은 것이
기다리고 있지도 않다.
모든 이야기는
에고 그 자체처럼 허구다.
우리는 에고를 부술 필요도 없고 설득하거나
그것에 영향을 미치려고 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해야 할
단 한가지 일은
"에고를
자신의 참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을
놓아버리는 것뿐이다!"
이러한 동일시를 버린다해도
에고는 사실상 전과 다름없이
걷고 말하고 먹고 웃는다.
단 한가지 차이점은
그것이 몸과 마찬가지로
"나"나 "이것"이 된다는 것뿐이다.
그러고 나서 필요한 것은
소유권자나 지은이라는 관념,
혹은 자신이 자아를 창안했다거나 창조했다는 망상을 놓아버리고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아는 것뿐이다.
그러한 잘못된 생각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오류라는 점은
분명하다.
모든 사람이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데,
소수만이 그것이 잘못임을 깨닫고
바로 잡으려 하거나 실
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잘못된 동일시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은
하나의 크나큰 전환이며
이러한 전환은 신의 도움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자기 존재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것을
놓아버리려면 엄청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셈이다.
처음에는 에고를 잃는다는 것이
무서운 일로 여겨지며
상실의 두려움을 동반한다.
"내가 나일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인다.
안전하고 친숙한 것을 잃는다는
두려움이 자리한다.
친숙함은 편안함을 뜻하며,
저변에는
이 "나"가 사실상 내가 가진것의 전부다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친숙한 '나"를 버리려 할 경우
텅 빈 상태와 비존재 혹은
무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난다.
동일시의 대상을
자아에서 참나로 바꾸다 보면
작은 것이 보다 큰 것에 의해서 대치되므로
그 어떤 상실도 경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 과정을 용이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작은 자아와의 동일시에 집착하는 태도를 통해 얻은 소득인
편안하고 안전한 기분은
참나의 발견에 비하면
지극히 하찮은 것이다.
참나 쪽이
"나"의 느낌에 훨씬 가깝다.
참나는
단순한 "작은 나"가 아니라 "큰 나"와 같다.
작은 나는
온갖 종류의 실패와 두려움, 고통을 겪었지만
참된 큰나는
그런 모든 가능성을 넘어서 있다.
작은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부담을 짊어져야 했던 반면
참된 큰 나는
영원하며 시공을 넘어서 있다.
그런 전환에 따르는 만족감과 희열은
완전하고 체계적이다.
자신이 평생 두려워해왔던 모든 것이
근거없고 허구적인 것들에 불과했음을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안도감은 대단히 커서
한동안 세상에서 생활하기 조차 어려울 정도다.
사형선고에서 벗어날 때의
생명이라는 그 놀라운 선물은 이제
근심 걱정과 시간의 압력에 의해 가려지지 않은
찬연한 빛을 발한다.
시간의 흐름이 멈추면서
영원한 기쁨의 문이 활짝 열리고
신의 사랑이 현존의 실상이 된다.
모든 생명과 존재의 진실에 대한 앎이
놀라운 계시처럼
저절로 드러난다.
신의 경이로운 속성은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하고
너무나 엄청나 모든 상상을 초월한다.
드디어
참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제 집에 돌아왔다는 것이
완전한 전체성 속에서 매우 깊게 체감된다.
그러고 나면
인간이 신을 두려워한다는 생각은
비극적인 광기를 방불케 할 만큼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인다.
실로 사랑의 본질인 신은
모든 두려움을
영원히 용해시킨다.
인류가 무지가 지닌 부조리함에는 신성한 코미디 Divine comedy (단테가 쓴 신곡)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그 맹목적인 몸부림과 고통들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해 보인다.
신성의 사랑은
무한한 연민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족한 점들때문에 기분 나빠하고
성을 내는 신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에고의 맹목적인 세계는
끝없는 악몽이다.
에고가 제공해주는
그럴싸한 선물조차도
덧없고 공허하기만 하다.
인간의 참된 소명은
자신의 근원이자
창조자인 신성의 진실을 깨닫는데 있다.
그 신성은 창조된 것이자
창조자인 참나의 내면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
에고의 한계에 갇혀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은
에고가 자기에게 굴종하고
아첨한 데에 대해 보답해 주는
하찮은 빵부스러기를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서글픈 대가다.
그 이득과 즐거움들은
참으로 보잘것 없으며,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에 불과하다.
에고가 완강하고 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신에 대한 두려움때문이다.
신의 본질에 대해
널리 알려진 잘못된 정보가
이런 두려움을 부추기거나 더하고 있다.
신이 신격화되는 과정에서
온갖 종류의 인간적인 결함들이 신에게 투영되고
그것은 신성 그자체의 본질에 관한
인간의 상상력을 왜곡시키고 있다.
프로이트가 정확하게 지적한대로
인간들이 신에 품고 있는 환상들은
마치 거대한 로르샤흐 카드와 같이
모든 인간의 두려움과 망상들의 최종적인 저장고다.
그런 거짓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점에서
그는 옳았다.
반면
그는 참된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고,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프로이트의 의식수준이 499로 측정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프로이트 당대의 정신분석학자들 중 한사람이었던 칼 융은
프로이트를 넘어
인간의 영혼에 대한 진실과
영적가치들의 정당성을 공표했다.
(따라서 융은 540으로 측정된다).
이러한 관찰들을 통해
우리는 이성과 지성, 합리성의 경계와
한계를 분명히 본다.
신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사랑 그 자체의 본질을 알기만 하면 된다.
진정으로 사랑을 아는 것은
신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되며,
신을 아는 것은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
신의 현존속에서의 궁극적인 지각과 앎은 평화다.
평화는
무한한 안전과 무한한 보호를
보장해준다.
거기서는
그 어떤 고통도 일어날 수가 없다.
후회할 과거도 두려워할 미래도 없다.
모든 것이 다 알려져 있고 항시 존재하므로
불확실성이나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들은 영원히 용해된다.
생존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지평선에는 어떤 구름도 걸려 있지 않으며
곧 다가올 불행을 기다리며 숨어있는
미래나 다음 순간같은 것도 없다.
삶은
영원한 오늘이다.
그런 실상은
그 어떤 원인도 배제하며,
그런 실상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도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거기에는 명사도 대명사도 형용사도 동사도 없고,
"다른 것"도 없다.
실상에서는 관계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얻고 잃는 일도 일어날 수 없다.
참나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불완전한 것은 없다.
알려질 필요가 있는 것도 없고
의문도 남아있지 않다.
모든 목적은 완전히 성취되었고,
모든 갈망 역시 충족되었다.
참나는 바라는 바가 없고
결핍과 갈망으로부터 자유롭다.
참나는
그것이 모든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모든 것을 이미 갖추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일 때
어떤 결핍도 가능하지 않으며
어떤 할일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생각할 만한 생각도 없다.
써야할 마음도 없다.
그 참나, 신, 아트만은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뻐하지도 않고 실망하지도 않는다.
느낌도 정서도 갖고 있지 않다.
그 어떤 신념이나 태도도 갖고 있지 않다.
참나는
수고롭지 않게 존재한다.
존재의 근원인 그것은
영원히 자유롭고 한량하다.
신의 무한한 힘은 몸
과 물성과 형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의식 그 자체의 빛속에서
스스로 찬연하게 빛난다.
형상없는 것이 바로
그 형상의 토대다.
참나는 비판적이지 않으며
편파적이지 않고
항시 존재하고 작용하며 수용적이다.
자아를
참나에게 내맡긴다 해도 전혀 탈이 없다.
자아에 대한
참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자비의 보증이다.
참나의 빛이
자아에 흐르는 것은
성령의 영역에 속하며
성령은 영혼과 에고의 연결 고리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청하고 받아들이며
자유의지를 통해서
성령을 우리의 안내자로 받아들이는 편을 선택한다.
신의 은총에 의해
깨달음으로의 변형이 가능해진다.
에고의 해소는
저항하면 어려워진다고 한다.
고통과 두려움, 비탄에도 불구하고
에고는 변화하는 것을 원치 않고
변화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에고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자신이 옳다'라는 것에 집착하고
자신의 소중한 신념들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애쓴다.
사실상 에고는
무찔러야 할 적이 아니라
치유해야할 환자다.
에고는
확실히 병들어 있고
구조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망상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정상상태로 돌아가려면
오로지 겸손해지려는 자발성만 가지면 된다.
진실은
저절로 드러난다.
진실은 얻거나 획득할 대상이 아니므로
저절로 빛을 발한다.
신의 평화는
심원하고 절대적이다.
그 평화는 더없이 부드럽고 완전하다.
버림받거나 치유되지 않은 채
방치된 건 하나도 없다.
그런 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이요 속성이다.
참나는
존재 그 자체인 창조주가
그 드러냄을 완전히 성취한 상태다.
신의 사랑밖에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실에 관한 이야기는
오랜 세월을 두고 거듭 되풀이 되어 왔지만
다시 되풀이해도 좋은 이야기다.
사실상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에고의 깨달음에 의해 생겨난,
마치 공과 같은 빈 공간으로
댐이 열리듯이 신의 사랑이 갑자기 흘러들어간다.
그것은 마치 신성이
바로 그 마지막 순간을 위해
몇 천년을 기다려왔던 것과도 같다.
고요한 황홀경이 한순간에
마침내 제집에 이른다.
그 실상은
너무나 생생하고 완벽하게 존재해서
실상에 대한 다른 그 어떤 종류의 신념이 가능하다는 것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실상에 대한 다른 신념을 갖는 것은
마치 스스로 소가 되기를 원했다가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것을 까맣게 잃어버린 뒤
다른 신에 의해 구원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던 힌두신의 이야기처럼
기묘한 망각상태와 흡사하다.
에고는
가끔 스스로를 좀더 구체적으로
어떤 개성으로 잘못 알곤한다.
그것은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래 그것이 바로 나야"라고
말한다.
이러한 망상으로부터
에고를 버릴 경우
자신의 개성을 상실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일어난다.
이런 두려움은
바로 '나라고 하는 정체성'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다름 아니다.
내적인 성찰을 통해
우리는 개성이라는 것이
학습된 반응들의 체계요,
그런 인물은 참다운 "나"가 아니라는 것을
식별할 수있다.
참다운 "나"는
그러한 인격체의 배후,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한다.
자신은 그 개성에 대한 목격자이므로
자신을 그것과 동일시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진정한 나로서의 참나가 드러나면서
그 인격체는 조정과정을 거치느라
얼마간 지체한 후 전과 다름없이
세상과의 상호작용을 계속하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은 그가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듯하다.
그 인격체는
유쾌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의 모습을 유지하고
가끔 익살스러운 모습도 보이며,
몸과 마찬가지로 새롭고 신기한 것이 된다.
그 인물은 말하자면
"나"가 아니라
자체의 발전기에 의해 작동하는
하나의 '그것'이 된다.
그것은
자체의 습관과 스타일, 좋고 싫은 것들을 갖고 있으나
그런 것들은 더이상 참다운 의미에서의
중요성이나 가치를 가진 것들이 아니며
행복하거나 불행한 결과들을 낳지 못한다.
보통의 인간적인 감정들과 비슷한 것들도 역시 오가는 듯하나
그것들을 더이상 나와 동일시하지 않고
그것에 "내것"이라는 식의 소유권을 주장하지도 않으므로
그 어떤 영향력이나 힘도 갖지 못한다.
세상사람들은 특정반응을 기대하고
그런 반응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불편해하는 듯하므로
사랑의 발로로 인해
그런 것들이 일어나는 듯이 보이게끔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반응들은 사실 아주 하찮으며
그 어떤 참된 중요성이나
의미도 없다.
참나를 에고와 동일시하는 태도를 버리면
선형적인 처리방식들을 요구하는
세상사에 빠져들기 어렵고
자연스럽지도 않다.
이제는
적절히 처리하고 다루기 위해
별도의 에너지를 동원해야 할 필요가 있는
세세한 형식이 아니라
본질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하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앞선 의식상태나 깨달음에 동반되는
뇌의 EEG 주파수가 느린 세타파(초당 4-7 헤르쯔)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세타파는 명상할 때 일어나는
알파파(초당 8-13 헤르쯔)보다
더 느리다.
반면에
에고의 체험에 해당되는 평상적인 마음은
베타파(초당 13 헤르쯔 이상)가
주를 이룬다.
세상은
무의미한 일들에 끝없이 마음을 쏟는 듯 보이며,
그런 일들을 중요하고 의미있고
때로 목숨을 걸 정도로 여긴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사람들의 감정을 존중하려는 뜻에서
통상적인 사회적 반응들과 비슷한 반응들을 보이면
사람들은 마음 편해하며
그렇지 않으면 거부당하거나
사랑받지 못한 것처럼 느낀다.
예컨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얻고 잃은 것으로 지각한 것들에 대해
행복감이나 슬픔으로 반응한다.
실은
어떤 잃음이나 얻음도 일어나고 있지 않지만
각 개인은 분명 그런 것들을
실제로 일어난 일들로 체험한다.
한편
가벼운 동정심을
감정적인 일치가 아닌
깊은 연민과 앎에 의해 대치된다.
세상사람들이 진실로 원하는 것은
가장 높은 수준에서의 그들의 참모습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동일한 참나가
모든 이의 내면에서 빛나고
있음을 알아주는 것은
사람들의 분리된 느낌을 치유해주고
평화로운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안겨주는 것은
현존의 자비로운 선물이다.
첫댓글 인과율은 460으로 측정된다. 원인-결과는 진리에서 한참 멀다.
그럼 어떻게?
비선형적 비이원성의 진리는 어떻게?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내적으로 감지하는 것과 에고가 그 작자라고 주장하는 것 사이의 시간 간격은 만분의 1초가량 된다. 일단 이 간격이 발견되고 나면 에고는 지배권을 상실하고 만다. 자신은 현상의 목격자지 현상의 원인이나 현상을 일으킨 주체가 아니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이때 자아는 스스로를 목격자나 경험자와 동일시 하지 않고 그저 목격되고 있는 것이 된다.
<마음은>.....강연 중에서
마음은
그 자체의 본성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마음은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할 일을 한다.
마치 육체가 그러하듯이.
마음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당신이 하는 것은,
당신은
'이 목격하고 있음은 무엇인가?'와
'그 생각을 알아차리는 것은 무엇인가"를 관찰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나는 육체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 다음 할 일은
'나는 생각들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이 아님을 알며,
당신은
당신이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만약 당신이 마음이라면,
당신이 마음에게 생각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얘기하면,
마음은 생각하기를 멈추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의 마음에게
'생각하기를 중지해.'라고 얘기해보라.
(그래봤자 마음은)
당신이 말하는 것에 신경쓰지 않고
생각하기를 계속 할 것이다. 하하하
만약 당신이 마음이었다면,
마음은
당신에게 복종할 것이며,
생각하기를 멈출 것이다.
마음이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은
당신이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은
세상에 속한 것이다.
육체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당신은
육체에게 산소없이 있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육체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육체는
세상의 드러남이며
마음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그것의 내용은
사회에 의해서 프로그램되며,
당신은 그 어느것에도 어떠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마음에는)
'기층(substrate)이 있다.
'신께서 프로그램한 그것은 무엇인가?'
그래서,
마음의 본질적인 본성은 하드웨어이며,
생각들은 소프트웨어이다.
그래서
당신이 명상을 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은
당신의 하드웨어가
당신의 소프트웨어를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본질적인 순수함,
그 어떤 내용도 없는,
알아차림을 위한 능력이
여전히 당신 안에 존재한다.
당신이
'마음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생각한다는 것이
생각없음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당신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소리가
고요함을 배경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진리의 가치에 대하여>
400대에서는
진리를 숭배하기 시작하며
다른 이익 때문이 아니라
진리자체가 좋아서
그것을 추구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진리를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_()_
매일 매일 내려놓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라!
요컨대 에고는 자만심과 두려움에 의해 지탱되는 위치성들이 모여 엮인 것이라 말할수 있다.
에고는 에고의 증식을 가로막는 철저한 겸손에 의해서 소멸된다
에고의 증식을 가로막는 철저한 겸손!!
동일한 참나가 모든 이의 내면에서 빛나고 있음을 알아주는 것은 사람들의 분리된 느낌을 치유해주고 평화로운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와 기쁨을안겨주는 것은 현존의 자비로운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