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 맛을 보다
하희경
김양미 에세이『매운 생에서 웃음만 골라먹었다』를 내려놓았다. 얼마나 매운 생이었으면 이런 이름표를 달았을까. 소제목「발길이 닿는 곳 어디에도 인연은 있다」,「독버섯 할머니」,「사카린 할아버지」 등을 읽으며 이름 짓는 것에 서툰 나를 돌아보면서 부러운 마음으로 읽었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문장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건져 올린 팔딱거리는 이야기들이 은근 중독성 있다. 이야기 하나만 읽으려고 펼쳤다가, 대여섯 가지를 더 읽고서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책을 덮기 전 마지막으로 읽은 건「‘변호사 우영우’가 남긴 화두」라는 이야기다. 작가는 ‘자폐스펙트럼증후군’에 대한 이해 부족과 드라마나 영화에서 부풀려지는 일부 장애인에 대한 오해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이야기했다. 난 그 드라마를 볼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돌아보았다.
나는 어쩌다보니 ‘자폐’와 ‘자폐스펙트럼증후군’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첫 번째는 중증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장애인 공동체에서 봉사 활동할 때였다. 서울 인사동에 기본적으로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 신체가 불편하거나 자폐를 함께 가진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 보통 중복장애인이라고 하는데, 혼자서는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이 봉사자들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곳이다. 난 그곳에서 난생 처음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 작은 만남으로 인해, 삶의 궤도가 달라지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두 번째는 큰아들과 동갑인 조카다. 시누이가 나보다 삼 개월 늦게 큰조카를 출산했다. 처음에는 두 아이가 같은 해 태어나고 사촌인데다, 남자라는 공통점이 있어 평생 좋은 친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카의 성장과정이 뭔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주위에서는 늦되는 아이도 있으니 괜찮다고 했지만, 우리 부부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시누이에게 조용히, 병원에서 검사 한 번 받아보라고 권했다. 결국 자폐라는 판정을 받고 한동안 힘들어 하는 시누이 가족을 지켜봐야 했다.
세 번째는 내 아이들이다. 첫아이가 여섯 살 될 무렵 우연찮게 딸아이를 입양했다. 2년 후 막내아들까지 입양하면서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갓난아이도 아닌 네 살이나 된 아이를 둘이나 입양하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두 아이에게 장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자폐아처럼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못 가리는 아이들을 본 순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자폐는 선천적이거나 유전적으로 뇌기능에 이상이 생긴 것으로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산다. 반면 자폐와 비슷해 보이는 반응성애착장애라고도 하는 유사자폐는 정상적으로 태어났으나, 발달과정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유사자폐의 경우 자폐와 달리 지능이 정상일 경우 치유가 가능하기도 하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내 아이들을 처음 본 순간 유사자폐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도와주면 정상인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우리 부부는 일반 가정에 입양되거나, 말이 통하지 않는 해외로 입양되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으로 입양을 결정했다.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된다는 안이한 결정이 오래도록 나를 허둥거리게 했으니 말이다. 아이들은 우리 부부가 전문가가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끊임없이 문제를 던져주었다. 시험문제를 풀 듯 하나 끝나면 다른 하나가 턱 받치고 기다렸다. 음식 씹어 먹는 것부터 시작해 대소변 가리기. 걷지 못할 정도로 굽은 다리 펴기. 원하는 게 있으면 무작정 움켜쥐고, 말리면 난리라도 난 것처럼 우는 습관 고치기 등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부터 친구 사귀기, 영아기 트라우마까지 드러내며 유난했던 사춘기, 진로문제 등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어려서는 어린 만큼, 나이 들면서는 꼭 나이든 만큼의 문제를 들고 눈앞에 서 있는 아이들. 겨우 한 아이 낳고 키우는 걸 배워가는 초보엄마인 나는 뒤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해결하지 못할 일들이 줄을 이었다. 태어나서 만 두 살까지 거듭된 입양과 파양으로 여기저기 떠돌던 아이들은, 자신들이 받은 상처와 풀지 못한 문제의 답을 내게 요구했다. 조금만 도와주면 될 줄 알고 시작했던 일이, 도서관으로, 대학 부설 사회교육원으로 달려가 심리학 공부까지 하게 했다. 아동심리학, 정신분석학, 집단상담, 청소년발달심리학…. 육년 동안 가게일하면서, 저녁마다 한남대로, 충남대로, 새벽이면 성당으로 달려갔다. 몸도 마음도 숨 돌릴 틈 없이 오직 아이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만 생각하며 삼십대와 사십대를 지나온 것이다. 쉽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다시 하라면 죽어도 못한다고 손사래 칠 정도로 힘들었다. 순간순간 다 갈아엎고 없던 일로 하고 싶었다.
묘한 것은 그런 순간마다 아이들이 내게 희망을 주었다는 것이다. 두 손 번쩍 들고 항복하려는 순간, 무슨 문제 있어? 하며, 변화된 아이들이 눈앞에 나타나곤 했다. 하루는 맘에 쏙 드는 예쁜 아이가 다음날은 미운 오리새끼가 되고, 도저히 같이 못살겠다싶은 아이가 한순간 천사가 되는 요지경 같은 세상을 널뛰기하며 건너왔다. 자폐와 유사자폐,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영아기 양육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이들은 온몸으로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김양미 작가는 ‘매운 생에서 웃음만 골라먹었다’고 한다. 현명한 작가와 달리 우둔한 나는 마치 웃음을 먹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눈물만 골라먹고 살았다. 내 상처가 덧나서 울고, 내 아이들의 상처가 안타까워서 울었다. 매운 생을 건너는 동안 눈물꽃이 피었다. 눈물꽃이라도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태어나는 순간부터 매운 맛을 봐야 했던 내 아이들. 그 아이들의 남아 있는 날들은 웃음꽃만 피어나는 날들이길 가만히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