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는 멀리 있지 않다.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지옥
의 묵시록 리덕스는 그렇게 공포를 향해 길을
떠난다.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길을 돌아서
다다른 곳이 바로 내 안의 더 깊은 공포였다는 무
서움. 파랑새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를 수 밖에 없
는 인간 실존의 한 모습인 것이다.
파랑새는 없었다.
오프닝 씬에서 볼 수 있는 윌라드 대위의 엑스터
시는 무엇인가? 그는 맨손으로 거울을 부순다. 투
영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떠날 수 없
을 것 같은 공포를 본 것이다. 거울은 깨질 수 있
으나 자신을 어떻게 제거한단 말인가. 그곳에 영
화의 모든 것이 있다. 결말을 알고 떠나는 여행.
인간 밑바닥에 있는 해결할 수 없는 심연같은 공
포가 있다는 것 아닌가?
커츠 대령을 찾아 암살하기 위한 윌라드의 여정
은 한편으로는 커츠를 알아가는 여정이다. 커츠는
알 수 없는 사람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그의 면모
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한하고 있지만 그는 충분
히 노출된 사람이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군인관
료가 몇번의 실패 끝에 공수부대를 지원하고 캄보
디아 오지에서 원주민 부대를 구성, 자신의 왕국
을 이룬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이야기지만 또 한편
으로는 충분히 상식적이다.
그곳에서 그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는가? 커츠에
게 공포는 존재 전체이다. 공포를 먹고 사는 사람
이다. 진정한 무서움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전쟁을
이탈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왕국에서 자신이 통제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간다. 공포를 자기 손
안에서 통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불안해 한다. 전쟁은 사람을
신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신이 될 수 도 있고 짐승이 될 수도 있다.
그의 손에 주어진 힘이 그것을 창조할 수 있다.
신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면 사람은 자기 손
에 있는 죽음의 공포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영화는 그것이 지옥이라고 말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점이 묵시록의 시점이라는 것이다.
윌라드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는
강은 지옥의 한가운데를 지나간다. 베트남의 아름
다운 풍광은 그곳에서 싸우는 사람들로 인해 역설
적으로 더 지옥같다. 예전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
의 새로운 버전일까?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새
로운 천로역정을 쓰고 싶었던 것일까? 이게 세상
이라면 너무 비참하다. 이곳에서는 정의라는 이름
의 폭력도, 민주주의와 인류애의 보편적인 가치도
박살이 난다.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 것인가?
전쟁이라는 사실 앞에 모든 뜬구름 잡는 언어들은
혐오스럽기만 하다. 여기가 피비린내나는 사실이
야! 여기가 사실이라구! 이게 본질이라니까!
정의와 선함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는 대의명
분은 사실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아직도
본질에서 벗어난 말들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데
내모는 세상이 공포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정말
그짓을 할 수 있는 내가 공포스러운 것이다. 명료
한 사실을 외면한 체 포장하고 거짓으로 꾸미는
온갖 사기성 언어들이 이곳 지옥에서는 징그럽기
까지 하다.
커츠는 윌라드의 칼에 죽어가면서 깊은 한숨을
쏟아놓는다. 오랜 갈등에서 벗어난 홀가분함이 그
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일까? 그는 죽어
가면서 공포를 속삭인다. 공포!
그가 죽어가면 속삭이는 말 '공포'는 우리 안에
이미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래 정말 무서운 세상
아닌가? 이걸 해결할 수 있냐구!
예전 쥐스킨트의 좀머씨의 죽음을 보며 가슴 서
늘했던 그 느낌, 죽음이 그를 공포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그 서늘한 느낌. 그것을 다시 느낀다. 그것
은 지옥의 묵시록이 개봉되었던 70년대나 30년이
지난 21세기나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공포, 손대면 댈수록 더 비참해지는 세상 말
이다. 30년전 영화가 30년이 지난 오늘도 유효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30년 후에도 다시 재개봉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 이것이 오늘 나를 힘들
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