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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이야기>
1회, 선풍기의 횡포
나의 어머님은 90세를 한달 남기고서 89세에 가셨다.
그 연세까지
허리 굽지 않으셨고,
틀니 하지 않고
눈이 좋으셔서 안경 없이도
우리를 비롯하여 사물을 똑똑히 보셨다.
귀가 밝으셨다.
옆에서 우리가 소근거리는 소리도 다 들으셨다.
목소리는 기운찼다.
그런데 왜 가셨을까?
그건 단 한번의 실수였다.
선풍기를 틀어 놓고 주무시다가
너무 바람이 세어서
그냥 누운 자세로 팔을 뻗쳐
손으로 선풍기를 옆으로 조금 밀려다가
돌아가는 선풍기가
어머님의 엉댕이 위에
넘어져서는
막 돌아가버린 것이다.
같이 자는 아들이 너무 곤히 자는 것 같아
차마 깨우지 못하고 그냥 혼자서 돌아가는 선풍기 머리를
옆으로 치우려고 한참을
안간힘을 쓰고써야 겨우 옆으로 치우고서
일어나려 하니 몸을 꼼짝도 할 수가 없고
엉댕이는 무척 아프셨단다.
그 때서야 큰일이구나 싶어 아들을 깨우고서
움직일 수가 없다고 말하더란다.
우리는 그 날도 어머님께 안부 전화 하였던히
그 지경이 되어 계셨다.
막내 여동생 내외가 즉시 내려가
엎고서 병원으로 달려가 입원을 시키고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 보니
엉댕이 뼈가 다 부숴져 버린 상태였다.
의사왈:
그대로 두면 욕창이 생겨서 돌아가시고
인공뼈 수술을 하시면
연세가 높아서
수술 중에 돌아가실 수도 있고
살아 날 수도 있는데
살아 나시면
걸을 수 있단다.
나는 친구에게 어머님의 현 상태를 말하니
그 친구 하는 말:
수술을 시키지 말란다.
노인네 수술을 하면 회복이 어렵단다.
자기의 시어머님도 우리 어머님처럼
엉덩이뼈가 부러졌는데
병원에서 우리네와 똑 같은 말을 했지만
수술을 하지 않았단다.
그랬던히
20일만에 기저귀를 떼고
한달이 지나니 앉아서 걷드란다.
앉자서만 걸을 뿐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시고서
5년을 더 살으셨단다.
그런데
우리 어머님은 넘어져서 엉덩이뼈가 부러진게 아니고
엉덩이뼈 위에서 무거운 선풍기 머리가
쿵쾅 하고 떨어져 한참을 돌아간 것이다.
그러니 그 힘이 얼마나 크게 미쳤겠는가....
어머님은
앉은 생활을 하면서 살지는 않겠다고 하셨고
막내동생은 그냥 수술을 시키기로 하고
수술 날짜를 받아 우리들에게 연락을 해서
나는 검은 옷을 준비해 갖고 고향으로 갔다.
어머님의 입원실에 우린 다 모였고
나는 동생들에게 노인에게는 수술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어머님은 겁이 났는지 나더러
"수술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단다" 라고 말씀 하셨다.
나는 어머님의 그 높은 자존심을 안다.
동생들의 주장도 강해서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수술 시간이 가까이 오자
목사님과 교인들이 오셔서
예배를 보았다.
그리고는
우리들은 수술할 의사에게 불러가
어머님의 엉덩이 엑스레이 사진을 앞에 놓고
부러진 뼈조각들을 보았고
앞으로 어떻게 인공뼈를 이식할 것인가를
설명들었다.
의사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전신마취를 피하고 척추마취를 해야 하는데
만약에 골다공증이 심하면 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럴 때는 다른 방법을 쓰겠다고 하였는데
그 방법이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머님의 척추 마취는 성공되었고
3시간에 걸친 수술이 시작되었다.
우리들은 복도에서 두손을 모으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데 애간장을
다 녹이고 있었다.
드디어 어머님이 회복실로 옮겨지고
우리는 담당의사한테 불러가 수술된
엉덩이와 허벅지의 엑스레이 사진을 놓고
설명을 들었다.
나는 그 때까지도
내가 잘 못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노인은 대 수술을 해서는 안된다는 작은 사실 하나를..
수술은 성공적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회복실에서 어머님이 나왔는데
첫마디가"아이구 이제 내가 앉은뱅이가 안되겠다.
앉은뱅이 될 줄 알고 얼마나 속을 태웠는데..."하신다.
그 놈의 자존심이 당신의 명을 재촉한 것을 모르고서..
그리고는 춥다고 하시기에 담요를 더 덮어드리고
침대차를 밀어 입원실로 왔다.
추워하는 이유는 차가운 혈액을 수혈했기 때문이란다.
수혈도 무척 많이 하고 거의 주사로 살으셨고
약도 많이 드셨다.
그런데 입원해서 치료를 받으면서부터는
계속 설사를 하였다.
나는 왜 설사를 하는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20일이 지나서 실을 뽑고
퇴원을 해도 된다고 의사는 말한다.
식사만 잘 하시면 괜찮다고 말한다.
식사만 잘하면...
어머님은 집에서 살림을 하는 막내동생
즉 가장 젊은 딸에게 가서 간호를 받았다.
병원에서는 주시기를 꽂고 살았지만
집으로 와서는 식사로 영양보충을 하여야 했다.
병원에서부터 하던 설사는 여전해서 받아냈다.
보행기 같은 걸 잡고서 일어나서서
복도로 나가시기도 하고
화장실에 가시어 변기에도 앉아 용변도 하셨다.
그런데 설사가 더 심해지면
기운이 없어 하였고 재활운동을 하지 않으려 하시었다.
내가 갔을 때 어머님은 가만히 나에게
"병원에서 사람들이 나이가 많으면 수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드라...."
"엄마 내 친구 시어머니도 병원에서 그렇게 말했는데
그냥 퇴원시키고 집에서 간호해서 한달만에 기저귀 떼고
앉아서 돌아다녔데.."
"앉아서라도 걸어 다닌다면 얼마나 좋겟니?"
"엄마가 수술실에서 나와서 처음으로 한 말이
앉은뱅이 안되서 다행이다 그랬어.."
"내가 언제 그랬어? 너도 수술에 나중에 동의했지 않아?"
"그래 처음에는 반대했다가..."
한참 후에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으련다"
"..."
"나는 살만큼 살았다."
2회. 간호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어머님은 죽음을 미리 예감하셨는지 다치시기 얼마 전 부터 쓰시던 그릇을 가져가라고 전화를 하셨다. 가지고 있는 그릇도 버린다고 하였던히
"내가 쓰던 그릇을 쓰면서 내 생각을 하거라" 하면
"나중에"
라고 대답하곤 하였든히 항아리며 살림살이 중에서 쓸만 한 것을 많이 사람들에게 주셨다. 장례를 치루고 고향집에 들려 장독대를 보니 항아리가 많이 비었다. 앞으로 나는 항아리가 많이 필요한데...
내가 고향집을 남동생에게서 샀고 서울집이 팔리면 바로 고창으로 내려갈거니 어쩧던 어머님 소원대로 나는 어머님께서 쓰시던 그릇을 물러 받아 사용하게 되었다.
점점 회복되어 가든 어머님은 아욱된장국을 드시고는 계속 설사를 하시었다.하루 밤에도 스므번을 더 설사를 하셨단다.병원에서는 가시려고 그러니 힌죽만 들게 하란다. 아욱은 찬 성질이 있어 설사를 하는 사람에게는 금기식품이다. 그걸 동생은 모른 것이다. 맛이 있었기에 그것도 많이 드시고서 갑자기 탈이 나신 것이다.
우리네 속담에는
가을 아욱국은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다고 하지만 가을 아욱국은 배가 찬 사람이나 변이 무른 사람에게는 좋지 않다. 그래서 나는 아욱을 심지 않는다. 그 대신 근대를 심는다. 아욱씨를 동규자라고 하고, 동규자차가 바로 변비치료약이다. 그걸 설사만 하는 분에게 드시게 하였으니 탈 날 수 밖에....그 후로 어머님은 먹기만 하면 설사를 하시다가 흰죽에 소금을 넣어 드시니 설사가 잡혀서 길죽하고 둥근 형태가 뚜렷한 대변을 누게 되셔서 기운을 차리고 아주 좋아하셨다.
나는 동치미를 담가 잘 익어서그걸 가지고 가서 어머님께 드시게 하였든히 맛있다고 좋아 하셨다. 나는 된똥을 싸시니까 이제 괜찮을 줄 알았다.그런데 그날 저녁 다시 설사를 하시고 말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니 무우도 찬성질이 있고 동치미 속에는 삭힌고추가 들어가 있지 않은가. 매운 삭힌 고추는 자극성이 크다. 아풀싸! 왜 내가 그걸 생각을 못 했을까? 나는 후회 막급이었다. 어머님의 소화관벽은 아주 여러진 것 같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극성이 있는 것이 닿으면 설사를 하였던거다.
그 후 어머님은 식사를 하려 하지 않았다. 밤에 막내 딸 잠 못자고 계속 20번 이상씩을 대변을 받아 내야 하니까.그러다가 다시 말씀 하시기를
"내가 어떻게 소금에 힌죽을 먹고 살아 날 수 있겠어"
"알벤굴비를 구워라"
막내동생은 그냥 드시고 싶다는 대로 모두 사다 해 드리기로 했다. 설사를 계속 하다가는 탈수현상이 일어 나 탈진되어 가신단다.
이제 생각난다.
어머님은 고혈압약을 드시고 계셨는데 설사 후에는혈압이 떨어졌을테니 혈압약을 드시지 않아야 하는데 나는 동생에게 그걸 이야기 해 주지 못했다.
어머님은 전복죽을 참 많이 드셨다. 막내동생 남편인 막내 사위가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서 가장 싱싱하고 좋은 것을 직접 사오면 막내동생은 전복죽을 만들어 드시게 했다. 그래서일까 많이 회복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같은 음식을 계속 먹을 수는 없었던 거다. 자꾸 다른 것을 먹기를 원했으니.. 해산물은 속을 차게 하는 성질이 있고 속이 차면 설사를 한다.
어머님은 입이 짧아서 계속 다른 반찬을 해 드셔야 한다. 그건 나도 그렇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님은 설사를 하셨으니 장을 따듯하게 하는 음식을 드셨어야 하는데 장을 차게 하는 음식을 주로 드시게 했다.
기운이 없어지면 병원에 가서 영양주사를 맞히려고 하면 절대 병원에는 가지 않겠다고 버티셨다. 이제는 병원에서 또 입원하고 수술하라고 할까 보아서 싫은 것이다.
어머님도 우리들도 어머님의 설사를 잠재울 수 있는 음식을 해 드렸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에서 열까지 후회스럽다.
예전의 고창집에는 문간채가 있고 거기에 대문이 있었다.
그 대문은 솟을대문이었는데 열고 닫을 때 소리가 났다.
늦은밤 어머니는 그 대문을 닫아 잠그고 오면
옛날 이야기 하나씩을 해 주셨다.
어머님은 시집 오기 전 많은 책을 읽으셨다.
남자들에게 사랑방이 있듯이 여자들에게도 골방이 있었다.
추운 겨울 특히 설 명절에는 동네 여자들도 골방에 모였다고 한다.
어머님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옛날 책을 읽어주셨단다.
그래서 찬송가도 옛날 이야기책을 읽는 음률로 해서 언제나 박자가 맞지 않았다.
나는 여고시절 고문(古文:옛글) 시험은 언제나 만점이었다.
옛글 책에서 모르는 것은 어머님 더러 읽어주고 해석해 달라고 하면 끝내주게 잘해 주셨다. 그래서 고문 선생님이 어떻게 옛글을 잘 아느냐고 하면 어머님이 어려서 옛글을 많이 읽으셔서 가르쳐 주셨다고 말씀 드리곤 하였다. 어머님이 어렸을 적에 외할아버지께서 독 선생을 드릴터니 주산과 암산과 한문과 언문을 배우라고 하셨는데 학교 보내 달라고 하면서 독선생님을 거절 하고 언문만 배우고는 학교 보내 달라고 배우지 않았단다. 학교 다니는 사람이 너무도 부러웠단다.
참 어머님은 암산 실력이 뛰어나서 아버지의 주산 보다 더 정확하고 빨랐다. 어머님이 어렸을 적 외갓집은 상머슴이 둘에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야말로 어머님은 손에 물한방울 안 묻치고 호미자루 한번 안 들고 책만 보다가 시집을 가셨단다.
외할아버지가 어릴 적에 어떤 사람이 와서 쌀밥에 고깃국을 먹여 주겠다고 해서 따라 갔는데 전주에 있는 소학교였단다. 학생수도 얼마 되지 않고 숙식을 다 제공하고 학생들은 신식공부만 하면 되었단다. 그런데 상투를 자르라는 말에 도망쳐 나왔단다. 그 이야기를 외할아버님이 나에게 하시면서 그 때 도망쳐 나오지 않았다면 아주 높은 사람이 되었을거란다.
그 때 함께 공부한 사람들 다들 아주 높은 벼슬자리에 올랏단다.
외할아버님은 그 이야기를 들려 주시면서 많이 후회하시었다.
그런분이셨으니 가장 아끼는 딸을 학교에 보내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어머님을 학교에 보내시지 않으신 것도 훗날 아주 늙으셔서는 후회하셨다. 어머님을 가르쳐서 학교 선생님을 만들었으면 좋았을거라고 하시면서....
내가 전화로 어릴 적에 나에게 들려 주셨던 숙영낭자전, 별주부전, 허생전, 유충열전 심청전,춘향전 한씨전,사명당 등등을 다시 들려 달라고 하였든히 처음에는 다 잊어 버렸다고 하든히 하나씩 생각해 내시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이야기들을 요점만 들려 주셨다.
어머님의 이야기 목소리를 녹음한다고 하였든히 동생들이 반대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 때 마다 울게 될것이라고.....
3회. 엄마! 수술 시켜서 죄송해요.
어머님께 왜 병원에 가시지 않느냐고 말씀 드리니
"또 창자가 잘못 되었다고 수술 하자고 하면 어떻게 해"
"그냥 무슨 원인인가만 알면 되지 뭐"
"아니야 가지 않을란다. 이제 병원이라면 겁 나"
어머님은 그 때 까지도 엉덩이 뼈가 조금 다친 줄로 알고 계셨다.
엉덩이가 심하게 다쳐서 그대로 두면 욕창이 생긴다는데
그걸 왜 모르고 계실까.
그래서 나는 그냥 어머님께 빌고 싶었다.
"엄마. 수술 시켜서 미안해..정말 미안해..."
"아무도 원망 아니 하련다. 나는 살만큼 살았다"
아마도 어머님께 수술을 시켜 드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누워서만 살게 되었다면,돈이 아까워 수술 시키지 않았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셨을 거다.
그러다가
중풍으로 쓰러지신 이모님을 자녀들이 부축하여
찾아 오셨다.
두 분은 하루 밤을 보내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나 보다.
그 이모님 말씀이 어머님이 무척 살고 싶어 하셨단다.
이종들이 해 온 부침개와 시금자죽 등 을 해 와서
그 음식들을 드셨다.
그리고는 나는 어차피 죽어야 이렇게 설사를 하고
어떻게 살아 하시며
"부침개를 해라 먹고 싶다"
"안 좋을텐데...".
"이러나 저러나 죽을 걸 먹고 싶은 거나 먹을란다"
막내가 부침개를 해서 드리자
" 하나 더 해라". 그러시더니 그냥 조각을 드시더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은 양이지만 어머님께는 많은 양이셨다.
그날 저녁에는 된똥을 아주 많이 누었단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막내 동생이 어머님께 죽을 먹이려 하니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단다.
놀란 동생은 두째 형부를 불렀고
쫓아온 오서방은 곧 바로 동네 응급실로 어머님을 모셨다.
혈압이 40으로 떨어지셨단다.
수혈을 하고 주사를 무지하게 여러 대를 맞으시고는
그전처럼 말짱하게 살아나시더란다.
두째 동생이 어머니께 달려가니
"야야 나 오서방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큰일 나기는 죽기 밖에 더해" 라고 막내 동생이 말하자.
"그런 소리 말아라 나는 내 명대로 살다 죽을란다." 하시더란다.
두째가 "일요일에 엄마 보러 갈게" 말하자
"나는 오서방이 참 좋다. 꼭 내 아들 같다" 말씀 하시었다고 한다.
오서방은 두째의 남편이다.
" 두째야! 나 이번에 주사를 이십대나 맞았다.
내 생전에 이렇게 주사를 많이 맞기는 처음이다"
라고 두째에게 어머님은 말하였다고 한다.
어머님의 이런 말씀은 바로 정신을 잃어도 들으신다는 거다.
그러니 정신을 잃었다고 못 듣는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우리들은 어머님을 고향으로 모셔 가기로 했다.
그래서 구급차를 대절 시켰다.
어머님은 구급차에 올라 고향 가는 길에서
"야야! 꼭 비행기를 탄 기분이다" 라고 하셔서 우리는
이제 다시 회복 되시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향의 병원에 입원을 시키었다.
남동생이 달려와 내내 어머님 손을 잡고 있었다.
저녁 때 였다.
갑자기 막내한테서 울먹이며 전화가 왔다.
"엄마가 오늘 밤 넘기가 힘들 대". 라고 말하고는 그냥 운다.
나는 곧 바로 시골행 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셨다.
고소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빨리가기 위해서 택시를 잡아 탔다.
병원으로 달려가 안내에서 어머님 이름을 대고 병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아하 그런데 대답은 "아흔 살 먹은 할머니 돌아가셨어요. 조금 전에.."
"그럼 지금 어디 있어요?"
"장례식 장으로 가셨는데.. 조금 전에..."
"몇 시에 돌아가셨는데요?"
"8시 40분이요"
나는 10 30분에 도착을 하였다. 조금만 더 살아 계시지...
나는 다시 택시를 잡아 타고 장례식 장으로 달렸다.
거기서 제부와 남동생 그리고 소식을 듣고 달려 온 사촌 오빠들을 만났다.
그들 이야기로는
어머님은 고속 도로를 달리면서도 계속 이야기를 하셨고
병원에 와서도 이야기를 하셨는데
혈압이 갑자기 떨어져 간호사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대화를 하였다고 한다.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똑똑하게 대답을 하시다가
갑자기 팔뚝에 꽂은 주사기를 빼려고 하셨단다.
간호사가 할머니 왜 그래요 왜 그래요. 하는데 대답을 아니 하셨단다.
그 때 두째 제부가 잡고 있던 쪽 팔을 침대 아래로 뚝 떨어뜨렸단다.
간호사는 계속 어머님께 말을 붙이고
어머님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어머님을 처다 보니
눈을 감고 평화로운 얼굴로 그냥 누워 계셨단다.
그래서 심전도를 보니 그냥 일 획으로 쭉~.....
심장이 멈춘 것이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한 행동 심장이 멎어 가는데
주사를 놓으니 답답하셨을 게다 그래서 주사기를 뽑으려 하셨을 거다.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그러나 금새 마지막 이라는 생각을 하시고 눈을 감고
마지막 순간을 맞이 하셨다.
그렇게도 기억력이 뛰어 나셨던 어머님은 그렇게 가시었다.
나는 생각한다.
심장은 멎었어도 아마도 어머님의 뇌는 계속 생각하고 있었을 거라고....
우리들에게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고 있으셨을 거라고....
심장이 멎고, 호흡이 멈추고 손을 늘어뜨렸지만 죽었을지라도 듣기는 한단다.
그래서 죽은 사람 앞에서 함부로 이야기 해서는 안 된단다.
듣는 기능은 살았으니까.
나는 어리석게도 이런 사실을 어머님 가시고 뒤에야 알게 되었다.
먼저 알았더라면 막 냉동실로 들어 간 어머님을 꺼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드릴 것을....지금은 후회가 된다.
아직 들을 수도 있는데 그냥 냉동실로 넣었으니 얼마나 추웠을까...
엄마! 정말 미안 해.......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이~~~~~~~
4회. 입관(入棺) 이야기
장례식 장에는 도우미가 오고 음식이 속속 배달 되었다.
홍어회며 한약을 넣어 삶았다는 돼지고기 수육이며 과일과 배추김치 육개장 떡 등이 상 위에 차려지면서 도착하는 문상객들에게 대접을 해 드렸다.
홍어회는 생전에 어머님이 좋아하신 음식이고 쑥 절편도 어머님이 좋아하시고 야들야들한 고소한 콩고물에 묻힌 인절미도 맛이 서울에서 먹던 것과는 아주 다르게 맛있었다. 육개장도 아주 맛 있어서 먹어 본 문상객들이 음식 맛이 좋다고 칭찬들을 하였다. 전도 맛있고 어느 것 하나 음식에서는 어머님께 누가 되지 않게 문상객들에게 드릴 수 있어서 아주 좋았다.
시골에서 형님들이 도와 주시겠다고 오셨는데 젊은 사람은 모두 도시로 나가고 허리가 굽고 다리가 휘고 치아가 빠진 노인이 된 사촌 형님들이 오셨는데 너무 가엾어 보였다. 나는 형님들이 모인 곳에 음식상을 차려 들이고 이번에는 푹 쉬시라고 하였다. 작은어머님을 생각하며 음식을 드시고 따끈한 온돌에서 지친 삭신들을 눕히고 쉬라고 하니 음식 맛이 좋다고 하셔서 여러 번 상을 차려 드렸다.
나의 아버지는 7남 1여 중에서 다섯번째 아들이어서 나 보다 나이가 많은 조카가 많고 사촌 오빠들이 많다. 집에 큰일이 있을 적 마다, 마다 않고 몰려 와서 일을 도와 주신 형님들이다. 이제는 늙고 병들어 계셨다. 그 몸으로라도 돕겠다고 밤에 오신 것이다.
바닥이 찜질방처럼 뜨거워서 나는 잠도 못자고 그냥 앉은 체로 밤을 지새는데 형님들은 아주 좋단다. 다음날 아침 사무실에 연락하여 실내 온도를 낮추어 달라고 하니 시골 노인들이 싫어한단다. 그래서 바닥을 따끈따끈하게 한단다.
입관 시간인 4시가 되었다
우리들은 입관실로 들어가 널 속에 평화롭게 누워 계신 어머님의 모습을 보았다. 그 곳에서 목사님과 교인들 그리고 우리는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는 몇 사람만 남고는 모두 쫓겨 났다. 입관실 밖에는 유리 벽이 있어서 안을 보게 되어 있었다. 널 속에 계신 어머님을 꺼내 철 침대에 반듯하게 올리고서 소독 솜으로 닦았다. 항문을 닥았다. 사람이 죽으면 항문이 벌어져 대변이 조금 나올 수도 있단다.
그런데 어머님은 항문을 닦은 약솜을 보니 깨끗하였다. 살결이 뽀얗다. 수술 할 때 담당 의사도 노인 같이 않고 살결이 좋았다고 하였다. 심장도 신장도 다른 기관들도 다 나이 보다 건강하였다고 하였다. 정말 어머니의 살결은 나이 답지 않게 좋았다.
살은 주름도 없고 탄력도 있고 쳐지지도 않았다.
생전에 어머님은 나에게
“나는 발뒤꿈치도 예쁘다”며 보여 주시곤 했다.
작은 발이 예뻤다. 그렇게 설사만 하였으니 살이 빠질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얼굴이며 가슴,등을 그리고 팔과 손과 다리와 발을 소독 솜으로 닦았다.
소독 솜으로 깨끗이 닦은 후에 천으로 손과 발을 따로 싸서 묶었다.
배와 등에 천을 대고 옷을 입혔다.
지금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서 수의를 입혔다.
그리고는 매듭을 지며 묶기 시작하였다.
얼굴을 감싸기 전에는 우리들 더러 마지막이니 잘 보라고 잠시 묶는 것을 멈추었다.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노트 가지고 가서 적어 올걸…다 생각 날 줄 알았는데…
어머님은 돌아가시기 몇일 전에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상복을 한복 집에 맞추어 주셨다. 서울에서 고향의 한복 집으로 상복을 전화로 맞추니 한복 집에서는 사서 입게 하라고 자기 집에서 맞추면 비싸다고 아무리 말려도 어머님은 막무가내셨단다.
장례식에서 딸들이 뽀얗고 예쁘게 보여야 한다고 하였단다.
그리고는 사는 것 보다 몇 배나 비싸게 아주 뽀얗고 하얀 상복을 만들게 하였고
우리들은 그걸 어머님 돌아가신 후에 입관을 하는 중에 받았다.
나는 그 때 실수를 하였다.
어머님께 마지막 옷을 입히는 과정을 상복을 입어 보느라 잠시 보지 못했다.
어머님은 꽃 버선 같은 걸 신의셨다
삼 배로 손을 다시 싸고 발도 싸고 버선을 신기었다.
사람들은 매듭을 위로 만들고 아래로 만들었다.
일곱 매듭이라고 하였으나 위로 일곱 매듭이고
아래로도 매듭을 계속 만들었다.
매듭으로 어머님은 아주 꽁꽁 묶였다.
손도 발도 싸고 몸에 매듭을 만드는 것은 살이 삭았을 적에 뼈들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그리고는 다시 널 속에 넣었다.
어머님은 살아 생전에 가묘 속에 석관을 만들어 놓으셔서 널에 못질을 살짝 해 두었다. 다시 열어야 하니까..
참 얼굴을 감싸기 전에 우리들에게 들어와서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라고 하였다.
나는 그냥 어머님을 보면서 잘 가시라고 말하며 어머니 몸에 손을 대지 않았으나
큰 여동생은 어머니 얼굴을 두 손으로 만지며 “엄마 왜 이렇게 차”라고 말하였다.
그 다음 여동생은 어머니 입술에 키스를 진하게 하였다. 나는 말렸다.
어머님은 차기는 했어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전혀 경직되지 않았다.
남동생과 나는 그냥 어머니를 바라만 보고서 어머니의 둘레를 돌았다..
목사님과 함께 예배를 들였다.
요단 강 건너가 만나리…….
다시 밖으로 나가 유리 벽으로 보니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이 감싸졌다.
입관을 다 마치고 우리는 어머님이 마지막 해 주신 상복을 입고
다시 입관실에 들어가 목사님과 함께 기도와 찬송과 또 무언가를 외웠다. 왜 생각이 이렇게 안 나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다시 냉동실로 들어갔다.
지금도 이상한 것은 죽으면 빳빳해진다는데 어머니는 살아 계실 때처럼 부드러웠던 것 같다. 아주 평화로운 모습이었고…..어쩜 그렇게도 편안하게 보이셨는지….
마지막회. 어머님은 선산에 집을 짓고 문을 닫았다.
다음날 아침 7시 30분에 우리들은 식사를 하고
사무실에 가서 장례식 장 비용을 정산을 하는데
처음 이야기 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이 나왔다.
그래서 영수증을 살펴 보니 다 알 수는 없는데
소모품에서 단가가 시중과는 많이 차이가 났다.
그걸 지적하였더니 슈퍼 가격이란다.
그러니까 소모품 가지고도 돈 벌이를 하는 거다.
나는 가만히 생각하니 화가 났다.
그래서 조용히 말했다.
“이 단가표를 고창 사람들 카페에 올려야겠네..”
그랬더니 그 사람 얼굴이 확 변하더니
영수증들을 내놓고는 이것 이것은 자기 재량으로
빼 줄 수 있다며 다시 계산을 하니 몇 십만원이 빠졌다.
나는 예상한 금액에서 약간 모자라게 돈을 가지고 가서
내놓고 있다가 “부조 들어온 것이 이것 밖에 없다"고 해서
다시 끝자리를 잘라 버렸다.
9시30분 장례식 장의 예배실에서 장례 예배를 보았다.
그리고 밖에 나가니 장례식 장에 속하지 않는 외상 값을
받으려고 몇 사람이 와 있다. 그걸 또 해결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급히 서둘러 영구차에 오르다 보니 어머님과 친했던
분들과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읍내 시가지를 장례 행 열이 돌았다.
우리집 골목을 지날 때 나는 어머님과 이야기 했다
“엄마 눈으로는 못 보아도 영혼으로 봐 두세요.
집 앞 골목이에요.”
“엄마가 잘 가던 수퍼를 지나고 있어요”
“아버지가 다니셨던 군청을 지났어요.”
“남동생이 다니던 남학교를 지나네요”
나는 어머님이 생전에 잘 다니셨던 곳을 지날 때 마다
어머님께 보고를 하였다.
교회에 도착하였다.
목사님이 영구차로 오셔서 어떻게 할거냐고 하시기에
그냥 교회만 돌고 가자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내려 장례 예배를 보지 않고
날씨도 추워서 그냥 교회만 돌고 장지로 출발하였다.
실은 즉
장로가 돌아가시면 교회당 속에서 장례식을 하지만
여자인 권사가 돌아가시면 교회 밖에서 장례식을 한단다.
그런 걸 가지고 남녀 차별을 하다니 기분이 나빴다.
어머님은 당신의 영정을 손자가 안고 가라고 유언을 하셨는데
둘째 사위가 영정은 사위가 드는 거라며 자기가 들고
가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교인들이 차 두 대에 타고서 영구차를 뒤 따랐다.
선산에 도착하니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공기가
솔 향에 젖어 아주 좋았다.
사촌 오빠들과 형님들 그리고 인부들이 와서
가묘의 봉분을 열고 석관을 열어 놓고 있었다.
차가 산소 까지 올라 갈 수가 없고 약간의 숲으로 난 길을 헤치고
걸어가야 하기에 교인들은 몇 분만 산소로 오셨고 나머지는
그냥 차 속에 계셨다.
어머님의 널은 장정들에 의해서 운구 되어 무덤 앞에 내려졌고
석관에 약간의 흙을 넣고 그 속에 반듯하게 넣었다.
그리고는 가장자리에 흙을 넣으며 반듯하게 다시 자리를
잡느라 살살 가장자리를 밟는데 셋째 동생이
“밟지마! 엄마 아파요!” 하고 울부 짓는다.
어머니 속을 가장 많이 썩힌 딸이라서 더욱 더 슬픈가 보다.
나는 “뒤로 가 !” 라고 소리를 꽥 질렀다.
널 속에 들어가서 일하는 이종 동생은 하고 싶어서 하였겠는가.
일하는 사람에게 부담이 될 소리는 안 해야지….
어머니 위에 붉은 천이 덮어지고
뚜껑을 덮고 그 위에 국화꽃 잎으로 십자가를 그렸다.
다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를 드리고서 삽으로 흙을 떠 넣었다.
그리고는 우리는 물러났고 몇 사람이 나서서 널 위에 흙을
퍼 넣기 시작하여 평지와 같아지자 도착 된 뗏장을 가장자리에
차곡차곡 놓으면서 봉분을 만들었다.
가장 위에 뗏장을 올리자 상주들이 돈을 올리면 그 위에
뗏장을 올려 갔다.. 뗏장은 잔디를 뿌리까지 한 삽 뜬 것이다.
뗏장 속의 돈은 인부들의 술값이란다.
날씨가 추워서 우리가 도착 했을 때는 모닥불이 훨훨 타고 있어서
따뜻하였는데 일을 끝내고 점심을 먹으려 하니 모닥불이
죽어 가느라 추워진다. 다시 모닥불을 살려 돼지고기 수육을
꼬챙이에 꽂아서 모닥불에 굽는 사람도 있다.
바베큐를 만들려고…
스티로 풀 박스 속에 넣어 온 육개장과 밥은 펄펄 끓듯이
뜨거웠다. 정말 세상은 좋아졌다. 음식을 뜨거운 채로
운반하고 하루 종일 뜨겁게 가지고 다닐 수 있다니..
식사를 하면서 일가 친척들은 이구동성으로
어머님은 시집을 잘 가셨다고 말 하였다.
아버지의 재산을 팔아서 편하게 먹고 살다 가셨다고
말들을 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 놓으셨던
논과 밭과 산 까지 다 팔아서 생활비로 사용하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수 십년을 더 살았다.
오직 하나 남은 아버지의 재산인 집을 아들에게 물러
주었다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팔도록 하였다.
목사님과 교인들은 결혼식이 오후에 둘이나 있다면서
식사도 아니하고 가셨다.
남아 있는 일가 친척, 남자들은 술 마시고 식사하고 …….
어머님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 옆에 안장되었다.
뒤로는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앞으로는 탁 트여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이다.
우리들은 어머니의 무덤을 보면서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냥 사시는 장소만 바꾸어서
자고 계신다는 생각만 들뿐이다.
우리들의 마음을 끝까지 편안하게 해 주었다.
다시 영구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두 사위가 너무도 수고해서 사람들이 효자 아들인
줄 알았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 우리 남매들은 사위들 앞으로 들어온
부의금을 되돌려 주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사위들이
우리도 자식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면서 안 받겠다고
거절 하였다.
우린 설득 하였다 직업을 버리고 며칠을 장모님 곁에서
병간호 하느라 고생이 많았으니 받아야 어머님이
좋아 하실 거라고 설득을 하였다. 그래서 제부들은
자기 몫으로 들어 온 돈을 받았다.
나중에는 고맙다고 하였다. 요즘 경제가 나쁘니
잘 사용하겠다고 말하면서…..
그래서 어머님의 장례는 무사히 마쳤다.
어머님은 살아생전에 남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자식들에게도....
그 높은 자존심을 지키며 편하고 건강하게 사시다가
마지막에는 자식들의 효도 받으며 사셨다.
죽을 때 까지 허리 굽지 않고
눈이 잘 보이고
귀가 잘 들렸으며
우리들에게는 때때로 게그맨이었다.
기억력이 뛰어나서 어릴 적 읽은 책이나
늙어서 읽은 책을 이야기로 술술 풀어 내셨다.
기억력이 좋은 것은 우리가 때때로 감탄 할 정도였다.
우리들이 잊어버린 것도 어머님은 기억하고 계셨다.
그리고 당신이 죽은 후에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을
미리 다 준비해 놓으셨다.
우리들이 허둥대고 실수 할까 봐서다.
그것도 어머님의 자존심이 그렇게 한 것이다.
나는 어머님이 건강하게 살아 주신 것이 가장
감사하다.
주위 사람들은 어머님의 죽음을
호상(好喪)이라고 말한다.
나는 상복을 태우지 않았다.
어머니가 나에게 해 주신 마지막 옷이기에..
동생들이랑 사람들은 태워야 한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생전에 말씀하셨다.
윤달에 성을 도는 것은 나라에서 만들어 낸 미신이라고
왜냐하면 성을 적어도 삼년 마다 밟아 주어야 튼튼해지고
그 걸 돈으로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윤달에 성을 돌면
몸이 아프지 않고 극락왕생한다고 퍼뜨렸다고....
정월 대보름날 논두렁에 불을 지르는 것은 해충의
알을 죽이기 위해서라고...
나는 상복을 태우지 않고 다른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며
어머님을 생각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님은 병이 들어
돌아가신 것이 아니기에 나의 상복은 깨끗하다.
상복을 태우는 것은
아마도 병으로 돌아 기산 분들의 병균이 상복을 거쳐
옮길까 봐서 생겨 난 미신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님은 2004년 11월 11일 하늘나라에 가셨다.
선산에 어머님의 집을 지어 드리고 아무도 들어 갈 수 없게 문을 잠그고
집에 오니 그냥 어머님이 보고 싶고 목소리가 듣고 싶었지만
이제 전화를 할 수 없어 어머님의 마지막을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