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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글씨 속의 인장 이야기 1회 ~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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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고재식/ 서화사가
1. 이상적, 길이 서로 잊지 말자 <長毋相忘(장무상망)>
추사의《세한도》속에 담아놓은 제자 이상적의 뜻
『長毋相忘(장무상망)』은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 유배시절인 1844년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 1804-1865)에게 그려준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80호)』에 찍혀 있는 인장이다.
《세한도》는 추사 연구의 대가였던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鄰)가 일본에 가져간 것을 근대 최고의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1903-1981)이 1944년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일본에 건너가 그를 설득해 가져온 작품이다.
그 후 후지츠카의 집은 미군 폭격에 잿더미가 되었다. 그가 소장했던 많은 추사 관련작품도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존추사실(尊秋史室)이란 당호(堂號)를 썼던 손재형의 열정 덕분에 《세한도》는 비극적 그 운명을 모면한 것이다.
《세한도》에는 뿐만 아니라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전해지는 아름다운 마음을 담겨 있어 시대를 초월한 향기를 지금도 전하고 있다.
《세한도》에는 오른쪽위 제목옆에 찍힌 백문인(白文印) , 《세한도》와 서문 형식의 글을 이어진 자리에 찍힌 주문인(朱文印) , 글 끝부분에 찍힌 주문인 그리고 오른쪽아래 귀퉁이에 찍힌 주문인 등 4과의 인장이 찍혀 있다.
《세한도》는 바다 건너 외딴섬에 나락처럼 떨어져 있는 자신을 위해 머나먼 청나라에서 귀한 책을 구해 보내준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추사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것이다.
추사는 《세한도》에서 ‘권세와 이익을 위해 모인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성글어진다’는 사마천의 말과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말씀을 들어 ‘성인께서 특별히 소나무와 잣나무를 칭찬한 것은 단지 시들지 않는 곧고 굳센 정절 때문만이 아니다.
겨울이라 마음속에 느낀 바가 있어 그런 것이다’라는 말로 이상적이 시속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리를 갖고 있음을 칭찬하였다.
“고맙네! 우선, 이 《세한도》를 보게나(藕船是賞)”
이상적은 이 작품을 받아들고 눈물을 흘리며 추사에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나 이익을 좇지 않고 스스로 초연히 세상의 풍조에서 벗어났겠습니까? 다만 보잘것없는 제 마음을 스스로 그칠 수 없어 그런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올렸다. 그리고 작품 오른쪽 귀퉁이에 ‘길이 스승님의 가르침과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 <장무상망> 인장을 찍어 스승을 향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남겼다.
또한 그는 세한도를 청나라에 가지고 가 그곳 문인 16인의 글을 받아 스승의 뜻을 기렸다.
이 인장에 쓰인 <長毋相忘>은 한나라때 동경(銅鏡)에 보이는
「장무상망」「장상사 무상망(長相思 毋相忘, 오랫동안 서로 그리워하고 서로 잊지 않다)」
「불구상견 장무상망(久不相見 長毋相忘, 오랫동안 서로 보지 않아도 길이 잊지 않다)」
「견일지광 장무상망(見日之光 長毋相忘, 떠오르는 햇빛처럼 길이 서로 잊지 않다)」
등의 글귀와 감천궁(甘泉宮)에서 출토된 「장무상망」이 새겨진 기와에서 빌어온 것으로 인장의 형태를 네모나게 하고 자법(字法)을 반듯하게 바꾼 것이다. 여기서 毋(무)자는 ‘없다’ ‘말다’라는 뜻으로 無자와 통하는 글자이다.
이 인장은 추사는 물론이며 추사의 스승인 담계 옹방강(覃谿 翁方綱, 1733-1818)과 추사와 동갑네기인 아들 성원 옹수곤(星原 翁樹崑, 1786-1815)에게도 같은 글귀의 인장이 있다.
또 추사의 평생지기인 이재 권돈인(彛齋 權敦仁, 1783-1859)과 추사 학예파의 형당 유재소(蘅堂 劉在韶, 1829-1911), 역매 오경석(亦梅 吳慶錫, 1831-1879) 등도 이 글귀의 인장을 즐겨 사용했다.
헌종이 소장한 인장을 모은『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에도 비슷한 인장이 많이 실려 있다. 이상적이 청나라 문인들이 《세한도》에 남긴 글을 낱장으로 베껴 놓은 둘째 장과 셋째 장 그리고 송나라 신기질(辛棄疾, 1140-1207)의 사(詞) 「축영대근(祝英臺近)」을 낱장으로 쓴 둘째 장과 셋째 장을 잇는 부분에도 같은 인장을 찍었다.
《세한도》속 한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이 <장무상망>의 붉은 색 네 글자는 스승에 대한 제자의 도리는 무엇이며 또 세속 권력이나 이익과는 무관하게 몸과 마음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듯한 인장이다.
“우선! 이런 일은 세상에 언제나 있는 일이 아닐세” (《세한도》의 추사글)
“아닙니다. 스승님! 이 모든 것은 정치판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으므로 저절로 맑고 깨끗한 곳에 계신 분에게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이 그림과 글을 본 사람들이 제가 정말로 속된 세계에서 벗어나 권세와 이익의 밖에서 초연하다고 생각할까 두려울 뿐입니다.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치 않은 일일 뿐입니다.” (이상적이 추사에게 올린 편지글에서)
‘장무상망’은 이처럼 스승 추사 김정희와 우선 이상적의 변치 않는 의리와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인장이다
*주문인(朱文印) : 인장에 인주를 묻혀 종이에 찍었을 때 글자가 붉게 나오도록 새긴 인장
*백문인(白文印) : 인장에 인주를 묻혀 종이에 찍었을 때 글짜가 희게 나오도록 새긴 인장
2. 김정희, 즐겨 세상의 선비들과 벗하다 <樂交天下士(낙교천하사)>
《불이선란도》에 찍은 추사 김정희의 마음
‘낙교천하사(樂交天下士)’는 예전에 흔히 쓰던 말로 ‘즐겨 세상의 견문 높은 선비들과 벗한다’ 는 뜻이다. 이 <樂交天下士>인장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와 북청 유배를 끝으로 과천에 머물고 있을 때인 1853년에서 1856년 사이에 가르침을 받던 달준(達俊)에게 그려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에 찍혀 있다.
현종이 소장한 인장을 모은『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에 실려있는 <우천하사(友天下士)>의 인장과 뜻이 같다. 추사가 동암 심희순(桐庵 沈熙淳, 1819-?)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심희순이 중국에서 받은 ‘낙교인(樂交印)’ 원석을 추사에게 보낸 일이 있는데 이것이 같은 인장을 가리키는지는 아직 확인할 수 없다.
이 그림에는 많은 제발과 인장이 남아 있는데 추사가 남긴 제발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안은 인장)
난 꽃을 그리지 않은 지 어언 20년,
우연히 본성의 참모습을 그렸네.
문 닫고 찾고 또 찾은 곳,
이것이 바로 유마힐의 불이선일세
(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만일 사람들이 억지로 요구하는 핑계로 삼는다면,
또한 마땅히 비야(*유마거사)의 무언으로 사양하리라. 만향 <秋史>
(若有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無言謝之, 曼香)
초서와 예서의 기이한 자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으며, 어찌 좋아하겠는가?
구경이 또 제하다. <古硯齋>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漚竟, 又題)
<墨莊>
애초 달준을 위해 아무렇게나 그렸으니
다만 한 번이나 가능하지, 두 번은 불가능하다.
선객노인<金正喜印>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소산 오규일이 보고 억지로 빼앗으니 우습구나
<樂交天下士>
(吳小山見而豪奪, 可笑)
이처럼 그림의 화제가 여럿인 까닭에 그 순서를 헤아려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인데 대략 이런 순서인 듯하다. 우선 이 그림의 경지를 유마힐의 불이선으로 표현한 부분이 가장 먼저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그려 달라 하면 유마거사의 무언(無言)으로 사양하겠다는 내용이 아마 다음에 올 것이다. 그 나머지는 초서와 예서의 기자법으로 그렸고 달준을 위해 방필했으며 그리고 그것을 오규일이 달준에게서 억지로 빼앗아갔다는 순으로 이어졌을 것이 일반적으로 보인다.
여기에 찍혀있는 많은 인장 가운데 추사의 인장은 <秋史(추사)> <古硯齋(고연재)> <墨莊(묵장)> <金正喜印(김정희인)> <樂交天下士(낙교천하사)> 등 모두 5과(顆)다.
이 가운데 <낙교천하사> 인장은 소산 오규일(小山 吳圭一)과 관련된 부분에, <김정희인> 은 달준을 위해서 그렸다는 부분에 찍은 인장으로 생각된다. 특히 앞서 3과의 인장은 다른 작품에도 보이지만 <낙교천하사(樂交天下士)> 인장은 유례가 드물다.
있다면 1856년 추사가 치원 황상(梔園 黃裳, 1788-?)의 유고에 쓴 「제치원고후(題梔園稿後」에 찍은 사례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또 <묵장(墨莊)> 역시 「묵법변(墨法辨」을 쓴 작품에서만 현재 그 사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오규일이 달준에게서 실제로 이 작품을 빼앗아갔는지 어쨌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찍힌 인장을 살펴보면 그후에 명작 『불이선란도』가 세상에 어떻게 전해졌는가 하는 내력을 알 수 있다.
오른쪽 아래에 배접에 맞물려 찍혀 있는 2과의 인장 <奭準私印(석준사인)>과 <小棠(소당)> 은 추사에게 시와 글씨를 인정받은 소당 김석준(小棠 金奭準, 1831-1915)의 것이다.
그리고 그 위쪽으로 보이는
<不二禪室(불이선실)>
<茶航書屋書畵金石珍賞(다항서옥서화금석진상, 다항서옥 주인이 서화 금석의 진귀함을 즐김)>
<勿落俗眼(물락속안, 속된 사람의 눈에 보이지 마라)>
<硏經齋(연경재, 경전을 연구하는 집이란 당호)>를 비롯해 왼쪽 중간에 보이는 <神品(신품)> 인장 등은 모두 당대의 정치가이자 대수장가였던 창랑 장택상(滄浪 張澤相, 1893-1969)이 사용했던 인장이다.
호리병 모양의 <신품> 인장은 논산 갑부로 많은 서화를 수장했던 희당 윤희중(希堂 尹希重) 도 한때 사용했다.
<小桃源僊館主人印(소도원선관주인인, 소도원 신선관의 주인 인장)>은 송우 김재수(松友 金在洙, 1905?-?)가 사용하던 인장이다.
그는 본관이 울산으로 소도원(小桃源)이란 당호를 썼고 소치 작품 등 많은 서화를 수장했으며 무호 이한복(無號 李漢福, 1897-1940)과도 교유했다.
창랑 인장과 소당 인장 사이에 있는 <蓬萊第一僊館(봉래제일선관, 봉래의 제일가는 신선이 사는 집)>과 <素筌鑑藏書畵(소전감장서화)>는 근대 최고로 손꼽히는 서예가이자 감식안이 뛰어났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1903-1981)의 인장이다.
추사의 명작 『불이선란도』는 이런 소장가를 거처 개성 갑부였던 손세기(孫世基)의 손에 들어갔다. 현재는 그의 아들 손창근(孫昌根)씨가 소장하고 있다.
이 인장을 볼 때 마다 ‘많이 보고,듣고 읽은 벗과 가까이 사귀며 서로 묻고 배우는 것이 진정한 천하의 선비들과 벗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라는 뜻으로 새기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불이선란도》, 종이에 먹, 54.9 X 30.6cm, 개인소장
《불이선란도》의 인장 : 표시는 김정희 인장.
*과(顆) : 인장을 새긴 돌, 나무, 상아, 수정 등 인재 한 덩이 한 덩이를 말한다.
*선(僊) : 신선 선(仙)과 같은 글자로 쓰인다.
*古硯齋(고연재): 당호로 옛 벼루가 있는 집이란 뜻이다.
*墨莊(묵장): 별호(別號)이거나 또는 책이 많다는 뜻이다.
3. 조희룡, 글로 맺은 인연 <翰墨緣(한묵연)>
조희룡은 글씨와 그림에서 추사와 빼쐈을 정도로 흡사해 어느 것이 추사이고 어느 것이 우봉(조희룡의 호)인지를 판단하기 힘들게 한다. 실제로 두 사람의 작품은 혼동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한묵연> 인장은 그런 점에서 추사의 작품과 조희룡의 작품을 구별하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그림이 바로 그렇다.
<한묵연> 인장이 찍힌 우봉의《묵죽도》를 살펴보자. 왼쪽 아래에 담묵으로 대나무 줄기와 잎을 촘촘하게 그리고, 가운데 한 줄기를 높게 끌어내 오른쪽 공간을 비웠다.
그리고 그곳에 화제를 적으며 첫머리에 이 <한묵연> 인장을 찍고 화제가 끝나는 쪽에 <到虛極守靜篤(도허극수정독)> 도장을 찍었다. <도허극수정독>은 『노자』에 나오는 글귀로 ‘완전히 비우는데 이르고, 고요함을 굳건히 지킨다’는 뜻이다. 화제를 살펴보자.
《묵죽도》 28X33㎝, 개인소장
금년 봄에 다계와 더불어 금수오에서 술잔을 주고 받았는데
빽빽한 대숲 사이로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잎들이 나부꼈다.
문득 그 자리에서 대나무 몇 가지를 그렸더니 마치 신취가 얻은 듯하다.
정원의 온 대나무들이 다 나의 스승이다.
홍란음방에서 봄날 그리다
<翰墨緣>
今年春 與茶溪對酌於錦繡塢中
竹樹蒙密 微風時至 萬葉紛披
輒寫數枝於席上 如有神會
園中千竿 皆吾師也
紅蘭唫房 春日寫
<到虛極守靜篤>
<한묵연>
금년춘 여다계대작어금수오중
죽수몽밀 미풍시지 만엽분피
첩사수기어석상 여유신회
원중천간 개오사야
홍란금방 춘일사
<도허극수정독>
화제에 보이는 다계는 사람 이름인 듯한데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또 금수오는 비단에 수를 놓은 듯이 아름다운 마을이라 뜻인데 이것 역시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홍란음방이란 조희룡이 쓴 글에 보이는데 그가 꿈속에 붉은 난초가 뜰에 가득한 것을 보고 아들을 얻게 되어 자신의 거처를 「홍란음방」이라고 했다 한다.(조희룡『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畵雜存)』)
이렇게 보면 화제의 내용은 다계란 사람과 함께 금수오에서 술잔을 나누다 대나무를 그린 기억을 떠올리고 자신의 거처인 홍란음방에서 이 대나무를 쳤다는 의미가 된다.
이 그림을 염두에 두고 지금까지 추사의 작품으로 알려져온 《미가산수도》를 다시 보자. 이 그림은 송나라때 미불, 미우인 부자가 창안한 물기짙은 미가 화법(米家畵法)으로 그린 것으로 언덕 위에 서있는 나무와 물가 띠집 그리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먼 산으로 이어지는 한적한 풍경이 담담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화제를 살펴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미가산수도》 23X34㎝, 개인소장
미가 화법은 새로운 뜻을 전하여,
짙푸른 나무 검은 구름에 마을과 산이 두드러지네.
끝내 붓 끝에 서권기가 있으니,
문인은 으레 형호(荊浩)와 관동(關同)을 꼽지 않는다.
<翰墨緣>
米家畵法傳新意
濃樹黑雲辣闒山
畢竟毫端有書卷
文人例不數荊關
<吟詩入畵中>
<한묵연>
미가화법전신의
농수흑운랄탑산
필경호단유서권
문인예불수형관
<음시입화중>
이 그림의 화제 머리부분에 <한묵연>이란 인장이 찍혀 있다. 그리고 ‘향설관의 겨울날 한 번 그려보다(香雪館冬日試腕)’이라고 쓴 뒤에 <음시입화중> 인장이 찍혀 있다.
<음시입화중>은 ‘시를 통해 그림으로 들어가는 경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한묵연> 인장은 앞의 대나무 그림에 찍혀 있는 그것과 동일하다.
또 <음시입화중> 도장 역시 조희룡의 다른 그림인《산수죽석도(山水竹石圖)》에도 등장한다. 또한 '향설관(향설관)은 조희룡이 《홍매도(紅梅圖)》 등에서 자주 사용한 당호(堂號)이다.
그렇다고 보면 추사의《미가산수도》로 알려져온 이 그림은 조희룡의 또 다른 작품으로 보아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작품을 감상하거나 진위를 판별할 때 그림과 글씨의 필치, 내용 뿐 아니라 인장도 매우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이 <한묵연> 인장이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묵연 | 한묵연 | 한묵연 | 한묵연 | 한묵연 |
옹방강 | 김정희 | 신위 | 권돈인 |
한묵연 | 한묵연 | 한묵연 | 한묵연 |
조희롱 | 허련 | 전기 | 『보소당인존』 |
인장 하나가 두 작가의 작품을 구별해 내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은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9세기 추사를 중심으로 한 학연 속에서 ‘나라가 다르고 말이 다르며 멀리 떨어져 있어 마주할 수도 없지만, 서로 마음을 나누고 학문을 논하며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 이 <한묵연>의 참 뜻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런 인연으로 맺어진 인연만큼 값지고 더 귀한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한묵연>이나 <묵연> 인장은 전각과 인장 문화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서 조차 이렇게 다양하게 사용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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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계 옹방강(覃谿 翁方綱, 1733-1818)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5)
이재 권돈인(彛齋 權敦仁, 1783-1859)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우봉 조희룡(又峰 趙熙龍, 1789-1866)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8-1893)
고람 전기(古藍 田琦, 1825-1854)
4. 김유근, 아름답고 좋은 일이 뜻한 대로, <吉祥如意(길상여의)>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사람들은 살면서 복을 기원한다. 예전엔 그것을 오복이라고 했다. 오래 사는 것(수, 壽), 살 만큼의 재물이 있는 것(부, 富), 마음과 몸이 편안한 것(강녕, 康寧), 덕을 좋아하고 베푸는 것(유호덕, 攸好德), 하늘이 준 수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고종명, 考終命)이다.
또는 유호덕과 고종명 대신에 존귀하게 되는 것(귀,貴)과 자손이 번창하는 것(중다, 衆多)를 꼽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 가족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이 오복을 누릴 뿐아니라 언제나 '아름답고 좋은 일이 뜻과 같이 이루어지기(길상여의, 吉祥如意)'를 바랐다.
그래서 생활용품 속에 길상의 뜻이 담긴 무늬와 문자를 넣어 사용하면서 이를 기원했다. <길상여의> 인장도 마찬가지이다.
김유근이 사용한 <길상여의> 인장은 추사 김정희가 황산 김유근에게 해서로 써준《묵소거사자찬(墨笑居士自讚)》에 찍혀 있다. 김유근은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의 아들로 세도 정치로 보자면 추사와는 다른 정파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추사는 물론 추사의 벗 권돈인과 더불어 마음을 나누는 단짝 친구였다. 황산은 스스로 세 사람 사이를 세속의 시비를 벗어나 고금의 역사를 논하고 서화를 품평하는 석교(石交)로 비유했다.
석교란 돌처럼 굳게 사귀는 것을 가리킨다. 추사도 김유근을 각별히 생각했는데 추사는 자신의 시에서 ‘십년 동안 지팡이와 나막신으로 함께 했다’ 고 해 둘 사이의 오랜 우정을 표현했다.(추사의 시《증흥사에서 황산 시를 차운함(中興寺次黃山)》) 또 김유근이 벼루에 새길 글을 써주기 위해 여러 예서체로 연습한 작품이 남아 있다.
《묵소거사자찬(예서)》종이에 먹, 29.2X132.3㎝, 고 조재진 국립중앙박물관
《묵소거사자찬》은 『황산유고(黃山遺藁)』에 실려 있는 글로 묵소거사란 그가 죽기 4년 전에 중풍으로 실어증에 걸리면서 사용한 호이다. 이 작품은 중풍 때문에 목소리를 잃은 벗을 위로하기 위해 추사가 써준 것이다.
추사가 쓴 《묵소거사자찬》은 현재 두 점이 전하고 있다. 하나는 해서체로 쓴 것으로 거기에 이 <길상여의> 인장이 찍혀 있다. 다른 한 점은 예서로 쓴 작품이다. 두 작품은 서체만 다를 뿐 한 줄에 네 자씩 글자를 배치한 점 등이 모두 같다.
《미가산수도》 23X34㎝, 개인소장
해서 작품에는 <길상여의> 인장 외에도 <默笑居士(묵소거사)> <金逌根印(김유근인)> <불구형사(不求形似)> <흉중성죽(胸中成竹)> <취와일편운(醉臥一片雲)> 등 김유근의 인장 21과가 표구 및 표구와 작품이 잇다는 부분에 빽빽이 찍혀 있다.
예서로 쓴 작품에는 <金正喜印(김정희인)> <阮堂隸古(완당예고)>라는 추사 인장과 <김유근인> <묵소거사> 의 김유근 인장이 찍혀 있다.
추사가 이 작품을 쓴 시기는 황산이 병을 앓기 시작해 세상을 뜰 때까지인 1836에서 1840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래서 이 두 작품은 각각 추사 50대 초반에서 중반에 쓴 해서와 예서의 기준작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여기서 김유근이 지은 글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말하지 말아야 할 때 말하지 않으면 시의(時宜)에 가깝고,
웃어야 할 때 웃으면 중용(中庸)에 가깝다.
옳고 그름의 가운데에서 일을 처리하거나
굽히고 펴고 사라지고 자라나는 상황을 맞이할 때.
몸을 움직여서는 하늘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조용히 있으면서는 사람의 정에 거스르지 않는다.
침묵하고 미소를 짓는다는 뜻은 큰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뜻이 전해지는데 어찌 침묵을 상하게 하겠는가!
중용 속에서 나오는 미소인데 어찌 웃음을 걱정하겠는가!
힘써야 한다.
내 정황을 돌아보니 묵소(默笑)로 화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알겠다.
묵소 거사가 스스로 찬미하다.
當默而默, 近乎時, 當笑而笑, 近乎中.
周旋可否之間, 屈伸消長之際.
動而不悖於天理, 靜而不拂乎人情.
默笑之義, 大矣哉.
不言而喩, 何傷乎默.
得中而發, 何患乎笑.
勉之哉.
吾惟自況, 而知其免夫矣.
默笑居士 自讚
추사의 <길상여의> 인장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테두리를 친 가운데 ‘길상여의관(吉祥如意館)’이라는 글귀를 새긴 것이다.
추사 주변에는 길상여의 글귀를 인장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조희룡, 허련,신헌,한응기, 지운영, 민병석 등이 사용한 것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특히 이들이 사용한 인장은 중국 은주시대 금문(金文)의 테두리처럼 ‘아(亞)’ 자형 안에 글자를 넣고 있어 이 시대 인장의 한 양식을 이루고 있다.
인장의 글자를 새기는 법인 자법(字法)을 살펴보면, 모두 김정희의 <길상여의관> 인장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통해서도 다시 한 번 인장을 통한 추사 학연과 학맥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吉祥如意館 | 吉祥如意 | 吉祥如意 | 吉祥如意 | 吉祥如意 | 吉祥如意 |
김정희 | 명 문팽(?) 『조선왕실의 인장』 | 김유근 | 조희룡 | 허 련 |
吉祥如意 | 吉祥如意 | 吉祥如意 | 吉祥如意 | 吉祥如意 |
신 헌 | 한응기 | 『보소당인존』 | 지운영 | 민병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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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고 김조순(楓皐 金祖淳, 1765-1832)
황산 김유근(黃山 金逌根, 1785-1840)
이재 권돈인(彛齋 權敦仁, 1783-1859)
우봉 조희룡(又峰 趙熙龍, 1789-1866)
순조(純祖, 1790-1834)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3-1893)
위당 신헌(威堂 申櫶, 1810-1884)
소정 한응기(小貞 韓應耆, 1821-?)
백련 지운영(白蓮 池運永, 1852-1935)
시남 민병석(詩南 閔丙奭, 1858-1940)
5. 허련, 푸른 이끼에 꽃다운 봄빛 <亂山喬木 碧苔芳暉(난산교목 벽태방휘)>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8~1893))의 초기 그림에 쓸쓸하고 고요한 풍경을 그린 산수화 한 점이 있다. 그림 속을 자세히 살펴보면, 물가의 작은 다리를 지나 성근 나무들이 있는 둔덕 너머로 띠집 한 채가 있다. 안개어린 앞 산, 아득히 먼 산이 그 뒤에 둘러 서 있다. 이 그림은 짙은 먹과 까슬한 붓질, 성근 구성과 맑은 채색으로 그렸다.
《산수도》종이에 수묵담채ㅣ 30.0X42.8㎝ㅣ 개인소장
이런 화풍의 그림은 원나라 황공망과 예찬의 그림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에도 전해져 문인 아취를 중시하는 남종 문인화(南宗 文人畵)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추사를 이어 19세기 남종화를 꽃피운 허련이 그린 《산수도》는 시와 글씨와 그림이 하나가 되는 문인 아취를 산수로 표현한 그림이다.
또한 허련에서 꽃피운 이런 그림은 그의 아들인 미산 허형과 제자인 의재 허백련, 손자 남농 허건등이 그 맥을 이어 오늘까지도 현대 한국화단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이 그림 윗쪽에는 오른쪽에서 왼쪽까지 단정한 필치의 추사체 행서로 쓴 화제가 적혀 있다. 그리고 화제 첫머리에 <亂山喬木碧苔芳暉(난산교목 벽태방휘)>란 인장과 마지막에 옆으로 긴 직사각형의 <許維(허유)> 인장이 찍혀 있다.
허련의 첫 이름은 ‘허련만(許鍊萬)’이며, ‘허유(許維)’를 거쳐 주로 ‘허련(許鍊)’을 사용하였다. ‘허유’는 32세때인 1839년 봄 스승인 추사 김정희로부터 남종 문인화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당나라의 왕유(자는 마힐)를 본받으라는 뜻으로 자(字)인 ‘마힐(摩詰)’과 함께 받은 이름이다
우선 화제를 읽어보자
방법의 기괴함을 논한다면 그림은 산수만 못하고,
필묵의 정묘함을 논한다면 산수는 결코 그림만 못하다.
소식은 시에서 ‘그림을 논할 때 모양을 본떠야 한다고 하면 소견이 어린 아이와 같고,
시를 짓는 것은 꼭 이래야 한다고 하면 진정 시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以徑之奇怪論 則畵不如山水 以筆墨之精妙論 則山水決不如畵
(이경지기괴론 즉화불여산수 이필묵지정묘론 즉산수결불여화)
東坡有詩曰 論畵以形似 見與童兒隣 作詩必此詩 定非知詩人
(동파유시왈 논화이형사 견여동아린 작시필차시 정비지시인)
말하자면 그림은 자연을 그대로 닮게 그리는 것보다 작가의 마음 속에 그린 세계를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허유
이 그림에는 그림을 그린 연대가 적혀 있지 않다. 화제 끝에 찍힌, 옆으로 긴 <허유> 인장은 이 그림을 그린 시기를 추정케 해준다.
그는 추사에게 조선의 왕유가 되라는 의미에서 ‘유(維)’라는 이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치 황공망이 되라는 뜻에서 소치(小癡)라는 호를 받았으며, 조선의 운림 예찬이라는 의미로 운림각(雲林閣)이란 당호를 사용하였다.
이런 사실을 통해 소치의 그림 전체를 통털어 보면, <허유>와 <난산교목벽태방휘> 인장 그리고 이 그림에는 보이지 않지만 <許維私印(허유사인)>, <摩詰(마힐)> 등의 인장이 찍힌 그림은 대략 추사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1839년부터 1850년 전반기, 즉 40 초반 정도까지의 초기 작품에 사용한 인장이다.
허유사인 | 마힐 | 소치 |
인장 <난산교목 벽태방휘>의 뜻을 풀이하면 이렇다. 난산은 산의 높낮이가 한결같지 않고 여기저기 솟은 모습을 말하며, 교목은 키가 큰 나무를 가리킨다. 벽태는 푸를 벽자가 뜻하는 대로 푸른 이끼이며, 방휘는 꽃다운 봄빛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당나라 시인 사공도가 시의 품격을 시로써 나타낸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가운데 「초예(超詣)」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즉 멀리 어지러이 널려 있는 산과 높이 솟은 나무는 시상(詩想)을 일으키고, 발밑의 푸른 이끼와 꽃다운 봄빛은 시인의 마음을 이끄는 경관(景觀)을 가리킨다.
이를 그림 이미지와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이런 풀이도 가능하다
삐죽하거나 둥근 봉우리가 이룬 겹겹의 산 속,
비탈과 바위틈을 비집고 우뚝 솟은 나무들.
생명을 싹을 틔우는 파릇한 이끼,
그 위로 내려앉는 금빛 햇살.
추사는 시와 글씨 그리고 그림을 하나로 인식하는 시서화(詩書畵) 일치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시의 바탕이 되는 마음, 즉 성령(性靈)은 어느 한 가지로 정해진 것이 아니며 시인 각자의 마음에 따라야 한다는 문학관을 갖고 있었다.
허련은, 사공도의『시품』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여러 글귀를 작품으로 남긴, 추사의 영향을 받아 이 인장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인장이 찍힌 소치 허련의 초기 《산수도》에는 이 글귀만큼이나 고요하고 쓸쓸한 가운데 맑은 기운과 그윽한 격조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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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王維, 호는 마힐(摩詰), 699?-759)
사공도(司空圖, 자는 표성(表聖), 837~908)
소식(蘇軾, 호는 동파(東坡), 1037~1110)
황공망(黃公望, 호는 대치(大痴) 자는 자구(子久), 1269~1354)
예찬(倪瓚, 호는 운림(雲林), 1301~1374)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초의 의순(草衣 意恂, 1786~1866)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8~1893)
미산 허형(米山 許瀅, 1862-1938)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1891-1977)
남농 허건(南農 許楗, 1908-1987)